폴킹혼과 슈뢰딩거 방정식
존 폴킹혼은 유서깊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0여 년간 이론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성공회 신부로 소명을 바꾼 사람이다. 그는 토마스 토랜스처럼 신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과학신학자이다.
폴킹혼에 의하면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에서 입자의 파동함수(프사이)는 비상대성으로 파악된다. 양자가 입자와 파동으로 존재하더라도, 입자의 위치와 움직임 그리고 에너지는 뉴톤의 운동법칙과 에너지 보존법칙에 파동함수를 곱하면 수학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폴킹혼은 닐스 보어보다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선호한 아인슈타인 입장에 서 있다. 양자의 원리 수를 n이라고 한다면, n=1이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에너지 상태가 존재한다. 원자가 이러한 그라운드 상태에 있을 때 상당한 정도의 안정상태를 갖는다.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정수(n)에 따라 전자의 입자를 다양한 파동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N=1인 경우 파동 조건은 안정적이며 전자의 위치확인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수가 높을수록 에너지는 높아지며, 입자의 파동함수 (프사이)는 높은 곳에서 밀도있게 나타난다.
슈뢰딩거에게서 파동기능(프사이)은 일정한 장소에 있는 하나의 입자를 발견하는 개연성을 포함한다. 이것은 국소화(Locality)가 되며, 파동 파켓 또는 파동확률은 파동의 길이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다. 파동확률이 내려갈 수록 입자의 위치는 더 구체화가 된다. 위치와 운동량의 결정성을 산출하는 것은 프랑크 상수(h)의 크기와 질서에 달려있다.
슈뢰딩거의 국소성 원리는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에 서 있다. 고전 역학에서 f (힘)=ma (질량/가속도)는 세계를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파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면 파장의 속도를 알 수 없고, 파장(속도)를 정확히 알면 위치를 알 수 없다. 파동은 높을 때 낮을 때 보다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확률밀도가 높다. 그런가하면 높고 낮은 파동은 상태가 중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폴킹혼과 코펜하겐 해석
폴킹혼에 의하면 1926년 슈뢰딩거는 닐스 보어와의 대화에서 양자도약을 비난하고 자신의 방정식이 양자이론에 관계된 것을 후회 한다고 말을 했다. 이후 양자역학을 불확정성이 아니라 결정론적인 입장에서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Quantum Word, 53).
하이젠베르크는 <Physics and Philosophy>에서 슈뢰딩거와 데이비드 봄의 결정론적 입장를 날카롭게 거절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론이 아니라 자연의 세계에서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을 고려하는 개연성의 입장이다.
양자의 세계에서 입자는 파동으로서 원자핵 주위의 특정궤도에 불연속적으로 띄엄 띄엄 존재한다. 파동에서 마치 서 있는 자세와 앉아있는 자세가 확률적으로 중첩된다. 이러한 중첩된 상태는 확인 힐 수 없지만 관측하는 순간 두 상태는 하나로 붕괴된다.
슈뢰딩거는 이러한 양자역학의 중첩상태를 비판하기 위해 고양이 사고실험을 행했다. 외부 관측이 불가능한 상자안에 고양이 한 마리를 넣고 방사능과 계수기와 독극물과 망치를 설치한다. 방사능이 1시간 이후 방출될 확률은 50%이다.
방출 된다면 계수기가 감지하고 계수기 끝에 달아놓은 망치는 독극물 병을 깨뜨리면 고양이는 죽는다. 그러나 방사능이 방출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산다. 고양이가 죽어있는 상태와 살이있는 상태는 확률적으로 50%이며 두 상태가 중첩될 수 없다.
그러나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에서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오히려 양자의 현상을 지지하는 것으로 수용된다. 양자는 중첩의 상태로 얽혀있다.
폴킹혼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측정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식론적인 발견이다. 이것은 양자이론의 인식론적인 귀결을 말한다. 양자를 측정하기 전에 양자의 위치와 운동 (속도)은 알 수 없다. 관측에서만 파동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입자로 붕괴된다. 이것은 양자의 비결정성에 대해 관찰자가 갖는 존재론적인 입장을 포함한다.
그러나 폴킹혼에 의하면 불확정성 원리는 프랑크 상수로 인해 곤경에 처한다. 빛은 적어도 하나의 광자를 포함한다. 광자의 주파수(v)는 에너지 (hv)를 갖는다. 이미 에너지는 양자화가 되어있고, 에너지는 주파수에 비례한다 (h=E/f). 입자의 위치를 관측하려면 파장을 줄여야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는 관찰자의 주관주의에 의존되고 객관적 세계의 질서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코펜하겐해석에서 플랑크 상수는 입자의 불연속성에서 양자화된 기본 에너지여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양자의 세계가 객관적으로 관측자에게 드러난다고 해도 주관적인 관측의 제한성이 존재한다. 양자의 세계의 실재성은 언어와 관점에 의존하지만 폴킹혼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관주의로 환원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의 양자 물리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재미있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내가 달을 관측하지 않을 때 달은 파동처럼 존재해서 알수 없는 것이요? 물론 양자역학은 거시세계가 아니라 미시세계의 현상을 다룬다. 아인슈타인은 괴팅겐 대학의 막스 보른 교수에게도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폴킹혼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인식론이 주관적인 존재론을 모델로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양자역학의 비결정적인 보편해석으로 특징짖는다.
이런점에서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폴킹혼에게 불확정성의 원리보다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전자의 위치와 에너지의 값을 미적분을 통해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며 비상대성이다.
입자가 있을 범위가 확률적이지만 운동 에너지와 퍼턴셀 (위치) 에너지와 함께 총 에너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파장역학이나, 입자에 기초한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결론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전적 카오스 이론
폴킹혼은 고전적 카오스 이론을 수용하고 환경의 미묘한 요동에 대한 민감성을 고려한다. 부분들의 상호작용은 패턴을 구성하는 전체원리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여기서 활동적인 정보개념이 돌출된다. "활동적으로" 총체원리는 실제적으로 미래의 행동을 산출한다. 이러한 행동은 정보차원에서 구조에 관련된다.
그런데 과연 총체원리가 미래의 행동을 산출하는가? 고전적인 이론에서 카오스의 행동은 닫힌 공간에서 결정된다. 뉴턴의 운동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카오스 행동은 규칙에 의해 산출되며 미래는 과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비평형 열역학 이론에서 총제원리는 결정론적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새로운 존재의 질서와 구조로 출현한다. 이것은 열린 환경과 복잡성의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비결정성이다. 여기서 카오스 시스템은 탑 다운 방식으로 나타나며 구성분들을 분석하고 짜맞추는 (보텀 업)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폴킹혼은 고전적인 카오스 이론의 결정론적인 입장이 진정한 물리적인 실재에 대해 밑으로 내려가는 발생적 접근을 갖는다고 말한다. 구성분들은 환경과 유리된 채로 다루어질 수 있지만 여전히 의존되기 때문에 폴킹혼은 이것을 상황주의로 부른다. 폴킹혼에 의하면 탑 다운 방식에 의한 활동적 정보는 구성분들 간의 상호작용의 보톰 업 방식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그러나 폴킹혼과는 달리, 분자 생물학의 복잡성의 과학에서 보면 "활동적인 정보"는 유기체에 의해 부분들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부분들은 유기체를 위해 그리고 유기체에 의해 존재한다. 유기체는 열린 환경과 더불어 새로운 생의 질서를 창조해 나가지, 구성분의 보텀 업 방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어째튼 폴킹혼은 양자이론의 비결정성과 존재론적 개방성을 고전적 카오스 이론에 의해 변형시켰다. 그리고 슈뢰딩거 방정식과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이론을 통해 포킹혼은 비상대성으로 그리고 국소성의 원리에 기초해 양자역학에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불확정성 원리와 비판적 실재론
아인슈타인은 죽는 날 까지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거절했지만 데이브드 봄의 양자이론을 옹호했다. 봄은 아인슈타인의 결정론과 실재론을 보다 낮은 단계의 숨은 변수(hidden varables)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원자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인간은 갖지 못한다. 보어에게서 이것은 칸트의 물자체로 인정된다. 하이젠베르크에게서 비결정성은 자연의 객관적 특징이며 단순히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결정성은 원자의 잠재성으로 볼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의 실체 개념(우시아)에 비교된다.
개연성은 자연의 경향성을 말하며 가능성의 범위를 포함한다. 미래는 결정되지 않는다. 예측될 수 없는 새로움의 기회가 존재한다. 잠재성 안에서 다른 사건은 현실화 될 수 있다. 잠재성과 우연성은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개념을 양자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진공상태의 양자 요동의 potentia로 본다. 모든 입자들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빈 공간에서 양자는 요동을 하며 가상입자가 출현한다. 양자의 장에서 불확정의 원리는 이러한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이것은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물리학자 폴 디랙에 의해 양자 장이론으로 전개되었고 1933년 디랙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폴킹혼은 하이젠베르크ㅡ디랙의 양자역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이젠베르크의 원리에서 폴킹혼은 원자의 사건은 사물과 사실에 관련되며, 기본입자들이 잠재성 또는 가능성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자주의를 통해 폴킹혼은 하이젠베르크가 잠재성의 세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potentia 개념을 복구시켰다고 말한다 (Quantum World, 81).
폴킹혼은 파동기능을 양자세계의 이해를 여는 열쇠으로 파악했고 (슈뢰딩거의 파장 방정식), 자신의 비판적 실재론을 인식과 진리에 상응하는 결정론으로 개념화했다. 폴킹혼의 비판적 실재론은 칼 포퍼의 과학적 반증주의나 진리에 가까운 타당성 (verisimilitudinous)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에 동조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는 우주와 세계의 지성에 기초한다. 우주와 세계의 객관성은 자체의 지성에 있으며 인간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이해될 수 있음과 지성이 실재의 진리에 도달하는 단서가 된다.
폴킹혼은 비판적 실재론을 이안 바버의 과정철학이 아니라 어난 맥멀린(Ernan McMullin)의 과학철학에서 수용했다. 비판적 실재론은 진리에 가깝고 타당한 지식을 얻어내는 과학의 능력에 있다. 이와 더불어 포퍼의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과 비판적 실증주의가 우위를 차지한다 (Faith, Science, & Understanding, 35).
그렇다면 과학이 우주와 세계에 대한 진리를 실재적으로 파악하는 자체의 능력을 갖는가? 과학은 문화적 담론으로서 역사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권력관계에 의해 언제든지 파라다임이 변한다. 과학에 대한 정치적 영역은 핵무기 개발과 군사력 확장 그리고 전쟁에서 나타난다.
하이젠베르크는 언어 의존적 또는 현실 제한적인 의미에서 양자의 객관적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일대일로 상응하거나 공명하는 실증주의적 실재론은 여전히 결정되지 않는 차원과 개연성을 사전 봉쇄하고 만다고 거절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형상의 실체론에서 양자 세계의 진공동요와 빈 공간에서 나타나는 (에너지화된)장의 중요성을 본 사람은 아니다. E=mc 2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속한다.
하이젠베르크는 특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종합을 시도했다. 디랙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최초로 양자의 장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그의 특이한 사고 실험을 통해 우주의 장에서 입자와 양전자(반입자: 포지트론)의 소멸과 생성이론을 개념화했다.
캐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데이비드 통은 양자 자이론의 전문가이며, 그의 최근 공개 강연에서 양자의 세계는 개별화된 실체나 입자가 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파동에서 양자화가 되는 것이 입자로 불린다. 입자를 산출하는 것은 양자의 장이다. 이것은 장 이론의 네트워크 성격과 탑 다운 방식을 말한다.
개연성의 파동은 전체 시스템의 역동성에 의해 결정된다. 개별적인 부분들을 탑 다운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전체이다. 고전역학에서 개별적인 특질과 행동이 빌딩 블록으로서 전체를 결정한다면 (보텀 업), 양자역학에서 이것은 뒤집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안 바버가 말하는 것처럼 비판적 실재론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네트워크를 유기제적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적 사고에 공명한다.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 <Der Teil und das Ganze>은 어이없게도 영어번역에서 <Physcis and Beyond, 1971>로 번역되었다.
입자와 파동의 중첩상태에서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존재하며, 미래의 결과는 결정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다양한 영역들의 장에서 창조성과 우연성을 통해 보도록 도움을 준다.
활동적 정보이론의 한계
활동 정보이론은 폴킹혼의 변종이론이다. 폴킹혼은 고전적 카오스 이론을 슈뢰딩거 비상대성의 파동 방정식을 통해 착상했다 (Scientists as Theologians, 81). 폴킹혼의 한계는 카오스 이론을 비평형 열역학 법칙에서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소산구조는 탑 다운 방식으로 새로운 존재로 출현한다. 비평형 상태에서 즉 무질서의 상태에서 새로운 생이 출현하며, 이것은 이전의 구성분들과는 다른 복잡성으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복잡성의 시스템에서 세포의 유기체에서 개별 기관들은 집단적으로 분자의 자가 촉매 과정을 통해 유기체를 위해 작용하고 존재한다. 생명권에서 분자들의 집단적 자가 촉매 과정은 새로운 생의 창조성을 드러낸다. 자기 조직화에서 부분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지만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유기체와 환경과의 공동 진화에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입장은 하버드 대학의 스테판 굴드나 르온틴에 의해 부각되었고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과 통섭이론에 날카로운 각을 이룬다. 유전자로 유기체가 결정되는 것은 허구이며 거꾸로 유기체의 발전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며 진화의 문화의 배경이 된다.
비평형 열역학 이론이나 고생물학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 나타나는 버기스 셰일의 화석기록에서 수 백만년에 걸친 중지와 평형 상태가 입증된다. 그리고 새로운 종의 갑작스런 출현과 다양성의 확장은 폴킹혼의 변종이론의 한계를 드러낸다. 비평형 열역학이나 복잡성 이론 또는 집단적 세포의 자가 촉매작용은 우주의 본질이 창조성임을 말한다.
신 토미즘과 케노시스 신학의 변종
폴킹혼은 자신의 활동적 정보이론을 양자의 파장과 입자에 작용시키고 파장은 입자의 운동에 영향을 주는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에너지와 정보의 상호작용을 보기도 한다. 에너지-질량-정보 연결을 통해 폴킹혼은 하나님을 순수 정보원인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성령의 보편적 사역의 틀에서 하나님의 케노시스를 진화의 과정에 적용한다. 폴킹혼에게서 하나님은 순수한 활동적 정보의 형식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더우기 폴킹혼은 활동적인 정보 이론을 성공회 신학자 신 토마스주의자 오스틴 파러의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의 틀에서 개념화했다. 파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에이전트의 활동은 전능한 방식으로 피조물의 에이전트 활동 "위에,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피조물과 경쟁하지도 않고 강요 하지도 않은 체 작용한다. 신 토미스트의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의 연관성은 폴킹혼에게 이중적 측면의 일원론 (dual-aspect monism)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안 바버는 신 토미스트 입장이 자연과 역사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역할을 고려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일차원인으로서 이차원인인 세계와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Religion and Science, 181).
폴킹혼은 바버의 비판울 피해가기 위해 신의 행동에서 상호작용을 부각하며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를 했지만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적인 케노시스의 활동이며,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창조의 고난에 참여한다 (Polkimghorn ibid., 56). 폴킹혼은 몰트만의 케노시스 신학을 통해 신 토미즘의 한계를 보충한다. 하나님은 순수 정보원인으로서 성령을 통해 자연의 삶에 관여하지만 피조물의 고통을 나눈다.
비판적 반성: 포킹혼의 과학신학
폴킹혼의 과학신학에는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과 봄의 숨은 변수이론 그리고 고전적 카오스 이론이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착상되어있다. 신토미즘의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의 관계를 이중적 일원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하나님을 순수활동의 원인자로 본다. 그리고 세계의 경험으로부터 받는 하나님의 경험을 몰트만의 케노시스 신학을 자신의 과학신학으로 통합시킨다.
폴킹혼의 절충주의적 변종이론은 하나님이 순수 정보원인자로서 앤트로피 생의 원리나 세포의 환원될 수 없는 복잡성(마이클 베헤)에서 지적 설계론을 인정한다.
이런 점에서 폴킹혼은 신학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서 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의 신에 수긍했고 하나님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포킹혼 역시 코펜하겐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주사위 놀음을 거절하며 신학과 과학의 공명을 지적 설계론에서 찾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흔적론이나 자연신학의 재발일 수 있다.
그러나 불확정성의 원리는 지적 설계론을 거절한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자체가 아니다. 자연이 우리의 질문의 방법에 스스로 드러난다" (Capra, The Web of Life, 49). 그렇다면 자연 신학으로 하나님을 입증하는 방법은 거절된다.
자연은 네트워크와 관계의 웹에서 작동한다. 일차원인은 이차원인의 자연에서 심지어 잠재성과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알레테이아로 드러난다.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로 남으며, 신은 여전히 신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esse sequitur operari). 이것은 하이젠베르크가 말하는 세계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러한 점에서 양자의 장이론은 칼 바르트의 화해론의 빛들의 교리와 만날 수 있고 새로운 과학신학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