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에코 시스템의 문제틀
인류세 (Anthropcene)는 인류가 지구 지질이나 생태계애 미친 영향을 언급하는 지질시대로 제안된다. 이것은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화란의 파울 크뤼천에 의해 제안되었다. 인류세는 글로벌 기후 변화 리서치에서 폭넓게 사용되지만, 공식적으로 새로운 지질학 시기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다음을 시사한다: (i) 지구가 현재의 지질 시대인 홀로세(11, 700년에서부터 현재시기)를 벗어나고 있다 (ii) 인류의 활동이 홀로세를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류가 스스로 글로벌 지질학적 힘이 되었다 (The Anthropocene: conceptu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Will Steffen et al. Phil. Trans. R. Soc. A (2011) 369, 842–867).
학자들에 따라 인류세의 시기를 설정하는 데 의견이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1700년대 산업혁명의 도래에서부터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세의 논리적 출발로 본다. 인류의 기술진보와 경제발전을 통해 환경과 지구의 서식처애서 유기체들의 삶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을 고려할 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은 변하게 된다.
역사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나는 콜룸부스 발견이후 스페인의 히스파니올라의 식민지배와 대량학살에서부터 인류세의 병리현상을 본다. 이것은 유럽의 자본주의 혁명을 위한 서막을 열어주었고 본원적 자본축적의 시기를 말한다. 자본주의 혁명을 거쳐 출현한 산업혁명은 인류세의 심각한 병폐를 테크놀로지를 통해 글로벌화했다.
생태학의 문제는 생물의 다양성의 보전을 넘어 인류세의 문명이 가져온 식민주의와 문명선교 그리고 전쟁으로 부터 대전환의 시도를 요구한다. 이것은 심비오시스 문명을 향한 가치와 교육 그리고 문화 전반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사고의 변혁에서 공공선에 기초한 경제체계의 재편이 중요하며, 국가정책은 환경과 시장의 복잡한 연관성을 검토해야 한다. 이것은 위기 사회의 성격 (울리히 벡)과 대안적 성찰 근대성을 모색하며, 나라 살림을 거덜내는 무능한 포풀리즘 선동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 구성원은 큐피디타스(탐욕)으로 부터 해방되고 생명권에 공명하는 생활세계를 창출하는 시민사회 국가를 지향한다.
인류세에서 환경파괴는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배와 노예노동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과 인도 식민지배와 아편전쟁에서 병리현상이 등장했다. 식민지 경제 착취에서 예속민들과 자연의 생태계는 같이 죽어 나갔다. 콩고 자유국가 (1885-1908)에서 고무와 상아 그리고 팜유를 위해 유럽과의 자유무역을 열었다. 강제노역에서 천만명 정도의 콩고인들이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신체절단과 대학살을 당했다. 경제적 탐욕으로 인해 극단적인 고무채집은 숲과 나무들을 파괴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핵무장 경쟁과 기술과학 파라다임과 세계 경제 시스템의 자연착취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예견한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환경파괴와 중국의 공장 자본주의는 악명이 높다. 바다는 플라스틱병들로 넘쳐난다. 1,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와 정치적 파시즘에서 출현하고, 인명살상과 생의 다양성의 멸절에 결정적이었다. 체르노빌과 푸쿠시마 원전사고가 있었다. 최근 우쿠라이나 전쟁에서 생태학의 파괴는 매우 심각하다.
미국이 독점한 자원 소비는 파폄치한 정도이다. 1992년 브라질의 리우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생물 다양성 보존 협약에 서명을 거절했다. 그것은 유전자적인 자원들의 사용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과 혜택을 책임적으로 공평하게 나누는 조항 때문이었다. 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산업국가들의 탄소배출 규제는 뒷전으로 밀려 나갔다.
UN의 지속 가능한 발전 어젠다는 경제성장과 사회적 웰빙 그리고 환경보호를 통합한다. 지속가능성의 발전은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 퇴치와 기아 그리고 위생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부유한 나라들의 경제적 심비오시스가 요구된다.
후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기후변화와 생태파괴로부터 지구가 생존 하려면 인류세로부터 급진적으로 돌아서는 가치혁명과 생활세계를 파시즘으로 부터 방어해야 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악어들의 암수결정을 하는 알이 변형될 때 멸종위기에 처하게된다. 이산화 탄소 배출량은 지구 표면에 에너지 밸런스에 영향을 미치며, 에코 시스템은 손상을 입는다.
생명권의 위기는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다른 생화학 사이클 예를들어 짏소와 인 그리고 황 등을 변형시키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지구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해수와 표면의 낮아지는 변화를 통해 지구의 물의 사이클은 상당한 정도로 변형이 된다. 이것은 지구의 역사애서 여섯번째 대멸절로 이어질 수가 있다.
지구의 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연결된 물질적 이해관계와 환경 지배방식 그리고 과학기술 담론이다. 후기 인류세는 생물 다양성의 감소와 침입종으로 인해 동식물화의 균질화를 이루는 호모제노센(Homogenoscene)과 세계를 과학 기술화는 자본세(Capitaloscene)로 특징된다.
성서의 창조는 이러한 대전환을 인류가 취해야할 메타노이아로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인간은 땅으로 부터 왔으며 땅의 티끌로 돌아가는 심비오틱 존재이다. 나는 공공신학의 에코 인식론을 위 한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을 검토한다.
한스 요나스: 철학적 생물학
한스 요나스는 <생의 현상>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나는 영지주의 세계관과 허무주의 그리고 창조의 선함에 대한 거절을 문제 삼는다. 현존재의 결단주의는 무엇을 찬성하거나 거절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자기해소를 하는 것이다. 허무주의 뿌리는 자연에 대한 하이데거의 무비판적인 수용에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창조의 거룩한 질서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창조의 선함은 실종되며, 현존재는 여기에 무관심하며 인간성 전반에 대한 신뢰나 지속가능한 지구의 운명에도 관심이 없다. 윤리적 공허함이 출현하며, 창조의 선함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발견이 없다. 존재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에 무관심하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영지주의와 파시즘과는 달리, 진정한 개인실존은 도덕성의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생물학적 사실들에 대한 실존적 해석은 자연의 생안에 도덕이 있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존재의 생의 지향성은 자연의 세계안에서 현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탈각해버린 생물학적 사실들과 유기체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복권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뿐 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차이애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염려한다. 가치는 생 자체에 본질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애 필요한 자유의 몫을 나눈다. 자신의 생안에서 초월의 내적지평을 열망하고 개별적인 유기체는 살아있기 위해 환경의 서식처를 만든다.
자연의 생에서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출현은 다른 우기체들의 생으로부터 엄청난 분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세계를 통해 미리 특징되어인 것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식을 통해 존재를 반성하는 능력애서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의해 불려진 것을 이해하고 자연을 지키는 자가 된다. 자기초월의 폭넓은 지평은 인간존재에 독특한 불안이나 죄책이나 좌절의 느낌을 가져온다.
요나스가 모든 유기체들에게 존재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를 뒤집는다. 윤리의 원리는 자아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윤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합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환경사회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자연성(Socionature)에 근접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자연성 개념은 인간의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사회는 자연적이며. 환경 또한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러한 변종의 접합개념은 문화로서의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의 세계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들은 주관적으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피하고 자연안에 내재하는 선함과 생을 추구하는 가치를 말한다. 선함자체가 가치의 객관적 실재로 설정되며 여기서부터 존재를 방어하는 책임적 구속성이 돌출된다. 생의 선함은 이미 존재하는 목적에 상대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을 갖는 그 능력은 선 자체을 말한다. 생을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 긍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격률이며, 인간만이 존재론적 진리를 인식한다. 존재안에 있는 생의 현전은 그 부재보다 절대적이며 무한한다. 존재는 삶을 통해 자신에게 긍정을 한다--이러한 존재론적인 공리를 통해 우리는 생활세계의 온전성 (생명세계를 포함한)을 방어하는 의무를 갖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선함자체안에서 책임성의 일차적 목적 즉 정언병법은 인간에게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도덕적인 책임의 존재로 고양되었고 자연적인 환경을 보호한다. 우리가 자연을 가치의 근원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술조작을 위해 투사하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기술 지배화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가치의 근원이며, 생활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요나스는 후설의 세계의 수학화 테제를 세계의 기술화로 변형시킨다.
요냐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존재론적인 해명을 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개인의 진정한 실존은 열린 미래를 향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선한 것이며 자연의 유기체의 존재들은 죽음을 회파하고 생명을 취하는 가치가 내재한다. 유기체의 존재들의 삶에서 요나스는 자율성과 원초적인 자유의 형식을 본다. 이러한 삶을 파괴하는 기술남용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기술지배의 시대에 윤리는 인간과 더불어 환경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더 나아가 요나스의 신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 물론 초월적인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호소하지 않고도 자연 안에서 윤리적인 차원을 돌출할 수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요나스는 자연의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로 심화 시킨다. 신앙와 이성은 양립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창조로부터 스스로 물러났고, 세계는 위기에 둘러 싸인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인간은 자유의 능력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손상된 세계를 고친다.
인간은 지식과 자유를 통해 유례없는 기술의 시대에 힘을 가지며 지구의 생과 종들을 멸절시키벼리는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도덕적 책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피조된 존재임을 각인한다.
요나스의 유대 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아유슈비츠의 악에 직면해서 반성한다. 그리고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우주과학은 빅뱅을 말하며 인간의 삶은 진화의 끝자락의 과정에서 출현했다. 유대교의 삶의 선함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은 요나스의 환경윤리에 토대가 된다, 여기애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자연의 생을 창조의 의미로 파악하고 공동으로 환경과 자연의 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헌신할 수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요나스는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기독교적 만유재신론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님은 악안에 존재하고 악을 방기하거나, 어니면 악이 하나님안에 있어 하나님을 악의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를 위해 자신을 지워버리고 악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요나스에게 창조는 기독교 민유 재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신플라톤적인 유출과는 다르다. 성서적 창조는 해방주의자들이 부각시키는 우주적 신비주의나, 심층 생태주의 또는 가이아 여신과는 거리가 있다 (Boff, Ecology and Liberation, 41, 50).
다윈의 진화론이 점진적인 진보에 기초해 생존투쟁과 적자생존을 부각시킨다면, 요나스는 창조의 선함을 기초로 살아있는 생의 가치에 주목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인류는 멸절당할 수 있고, 이것은 인류세를 위한 한경의 책임윤리로 설정될 수 있다. 진화는 창조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류세의 문제틀은 현대문명과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를 결단내버리는 위협을 가지고 있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은 생물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인 해석을 시도하며, 자연의 생을 위한 윤리적 책임에 대한 존재론적인 토대를 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 쇼아의 상황애서 유대신학을 반영한다. 그의 철학적 생물학은 환경 사회학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Jonas, The Phenomenon of Life, Foreword).
창조와 에코 휴머니즘
나는 요나스의 기술시대의 책임윤리를 공공신학과 생태학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한다. 요나스는 쉐키나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성에 연관시키며,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쉐키나를 통해 피조물들의 고난에 참여하며, 창조안에 내재한다. 요나스는 쉐키나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세계와 생을 위해 돌보는 청지기로서 창조에 내재한 하나님을 위한 중대한 책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반성에서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과 악의 문제 그리고 빅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연의 생에 개입을 배재하는 데 수긍하지 않는다. 아유슈비츠 앞에서 하나님의 참쿡 또는 무력감을 대산해서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 (티쿤 올람)이 강조 된다고 해서 인간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나님의 주권성과 고난받는 하나님은 성서의 네러티브에서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역사와 자연에서 이스라엘과 피조물들을 여전히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의 권능을 역사적 상황과 삶의 자리를 도외시한 체 절대적이며 무시간적인 전능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에서 하나님의 다른 차원의 성품들( 심판, 정의, 긍휼, 아픔, 자기 제한성, 용서, 새롭게 하심 등)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을 인간은 유비로적으로 알고 표현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언전히 알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 하나님의 절대권능과 절대선함은 인간의 이해능력과 믿음 안에서 파악되지 하나님의 자기제한 (카발라의 침춤)의 신비로 분리되어 파악하기가 어럽다.
하나님이 창조에 허락하신 자율성과 생의 리듬과 순환 그리고 종의 소멸등을 하나님의 자기제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립하여 보충될 수 있을 까? 예를들어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절대권능과 절대선함은 의심이 주어진다. 희생자들은 하나님의 재단앞에서 자신의 희생을 위해 항변을 한다 (계 6장).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성의 관점에서 (부활, 새하늘과 새땅) 답변된다. 하나님의 영원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성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성은 악 앞에서 움츠러드는 무력함과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창조는 하나님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해방된 자연의 생에 내재성을 의미하며, 피조물과 더불어 이들에게 자유와 창조성을 허락하는 동행의 은혜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동행은 진화의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 종의 소멸에 같이하고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소멸하는 피조물들의 종을 향해 영원성의 관점에서 빛을 비추신다.
만일 쉐키나가 하니님의 빛의 성광들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관계의 갭을 매우는 유대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임재하고 이들의 유폐와 고난에 동행하고 참여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성의 관점 즉 하나님이 창조이전에 있던 토라를 연구한다는 초월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초월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토라의 지혜와 연관되며 유배당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드러난다 (Rosenzweig, The Star of Redemption, 410).
남은 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쉐키나의 연합을 위해 두려움과 사랑으로 윤리적인 책임과 토라의 정의를 실현 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통해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껴앉는 구원의 과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토라를 주시고 쉐키나가 남은 자들의 영혼에 섬광처럼 부어졌다면, 예례미아의 새언약이 여기서 성취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기위해 즉 쉐키나와 하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영광과 예레미아의 새언약의 용서를 인간의 책임성을 통해 스스로 의롭게 하지 않으시는가? 성령의 부어주심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의로움이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두려움과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들어온다.
성서의 내러티브는 창조를 영원성의 관점에서 해방으로 파악하며, 안식의 내재성은 돌봄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청지기적 위임은 하나님과 피조물들을 위한 에코 인간성의 토대가 된다. 영원성의 관점과 사회 자연성에 대한 공공 신학적 반성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자유를 허락하는 동행의 은혜로, 그리고 자유를 책임있게 해방적으로 실현하는 환경윤리를 위한 토대를 부각한다.
창조의 해방과 생명망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은 첫날의 빛을 통해 시간이 창조되고 생명망이 펼쳐진다. 토후 와 보후 (Tohu wa-bohu,창 1:2, 예례 4:23)는 형체가 없고 공허한 상태의 어두움을 의미하며, 창조는 이러한 바벨론의 신화적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를 통해 어두움이 나누어졌다. 낮과 밤을 통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망(web)이 쳐진다. 생명망에서 심비오시스는 유기체적인 생의 네트워크와 복잡성을 통해 촉매과정과 오토포이에시스에서 지속적 창조로 전개된다. 이것은 양자 물리학에서 빅뱅이후 양자동요 (Quantum fluctuation)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된 인간(창 1:26)은 물의 생물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과 가축 이후에 온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시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다 (1: 22). 생물 다양성 (bio-diversity)과 풍성함이 언급된다. 각기 종류대로 채소와 나무를, 또한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는 히브리어의 min 즉 식물과 동물의 디양한 종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생물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것은 토라에서 금지된다 (레 19:19).
땅의 정복과 피조물들에 대한 다스림과 더불어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새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도 먹을 거리를 주신다 (1: 30). 인간의 정복과 다스림은 하나님의 생태학적 복을 손상시킬 수 없다. 욥기에서 창조는 욥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욥이 지배할 수도 없다 (욥 39).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의 생태학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예수의 산상수훈 (마 6:25-34)은 살아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시편적인 해석을 의도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이며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 19:1-3, 계 5:13), 창조는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 신중심적인 생태학적 은혜의 신학을 말한다.
창조의 선함에서 나는 한스 요나스의 생태 책임성을 수용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피하고 생을 향한 열망과 가치로 드러난다. 선함과 삶을 향한 열망과 가치는 오토포이에시스의 자기 생산성에서 촉매와 공생그리고 새로운 생의 출현이라는 심비오시스의 가치로 나타난다. 인간은 에코 인간성 즉 청지기의 삶으로 불림을 받는다.
본회퍼는 창세기 1-3장 주석에서 에코 인간성을 땅에 구속되며 땅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파악한다. 심지어 이것은 다윈이나 포이앨바하도 성서의 땅에 대한 이해보다 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왔으며
인간의 땅과의 결합은 본질적이다. 땅은 인간의 어머니이며, 인간은 땅의 자궁에서 나왔다 (Creation and ㄹall, DBWE, 76).
에코 인간성과 사회 자연성은 성서의 땅 이해에 연관되며, 성인이 된 인간과 세계는 기술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땅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지배와 다스림은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을 황폐하게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생태학적인 연회의 초대에 불림을 받았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창2:15)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인간은 자연의 친구다. 하나님은 정원사로 묘사되며 예수의 부활에서 표현되는 동산지기 (정원사)와 병행을 이룬다 (요한 20: 15). 겨자씨 비유 (누 13:18-19)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동산과 연관된다.
노아의 계약에서 (창 9:9-10)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포함한 계약을 맺었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엄성과 생명의 권리를 갖는다. 노아계약은 기본적인 인권과 미래의 세대들의 인권 더 나아가 자연의 생명권리를 말한다. 에코 인간성은 자연의 생의 권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성서의 창조기사는 해방적이며 동행의 은혜와 종말론적인 회복에서 생태학적 온전함의 특징을 갖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생의 세계안에서 안식을 하고, 이들에게 자율성과 창조성을 주신다. 생태학적인 진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류와 실패와 종의 멸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안식의 은혜로 임재한다. 독수리는 시체가 있는 곳에 있으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빤다 (욥 39: 30). 자연의 생에서 약육강식의 현실이 있지만, 이것은 생태학의 먹이사슬을 의미하지 일방적인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을 옹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폭력에 의해 생의 닫혀져버린 존재들에게 빛을 비추며 동행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창조나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새로움이 선포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종말의 완성과 최종의 안식으로 드러난다. 최종의 안식 (메누하)에서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해방이 나타난다.
공공 신학은 창조를 해방의 사건으로 파악하며, 생명망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안식과 동행 그리고 지속적 창조를 성서적 생태학으로 부각시킨다. 이것은 인간을 청지기적 책임과 더불어, 걸어다니는 생태 시스템 즉 심비오시스적 존재로 파악한다. 에코 휴머니즘은 하나님의 창조의 틀에서 자연적인 유기체의 생에서 촉매와 공생의 선한 가치를 본다. 자연의 생의 가치는 창조의 선함에 기초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성령을 통한 선한 삶을 향한 열망 (코나투스)이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된 인간의 에코 책임성으로 연결된다. 영원성의 관점은 선한 삶을 향한 열망의 인간성안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회자연성과 에코 휴머니즘에 신학적안 생의 열망 즉 성령의 차원을 보충한다. 공공신학은 사회 생태학적 틀을 견지하며 땅의 안식에 주목하며, 일곱째 날은 창조의 축제를 의미한다. 모든 것들은 이러한 안식의 축제를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은 손상당한 삶을 치유하고 다른 피조믈의 삶을 배려하고 땅에 안식의 권리를 보존한다 (레 26: 33).
이스라엘의 바빌론의 유폐는 땅을 위한 하나님의 생태학의 빛에서 볼 수 있고, 이것은 바빌론 유폐에 대한 사회 생태학적이며 해방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례 9:12-13). 그리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 (롬 8: 21). 바울은 인간과 자연의 구원을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포현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바빌론의 음녀에 대한 비판은 (17:1-6) 로마의 착취적 상업무역과 경제적 지배를 지적한다. 식민지역에서 로마의 토벌공사는 벌거벗은 황무지를 상징한다 (17:16), 하나님의 장막은 사람들과 함께있으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지구중심의 미래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하는 비전으로 표현된다 (21: 1-5). 정원과 도시와 나라는 사회학적으로 연결되며, 도시 유토피아는 사망이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으며 곡하거나 아픈 것이 없다 (21:4) (Marquardt, Eia, warn wir da, 238).
성서는 창조와 그리스도의 화해의 틀에서 에코 인간성과 사회자연성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애콜로지 차원을 개방한다. 이것은 환경에 대한 첵임과 연대윤리를 강화하며, 새로운 환경구성을 위한 정치 경제학의 변화를 생활세계의 온전함과 공공선 거버넌스을 위한 정치 사회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심비오시스의 틀에서 환경의 생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으로 재해석한다. 성서의 창조와 해방 그리고 화해는 기독교인의 윤리적 소명에 속한다.
인류세에서 생태 인간성과 심비오시스 문명으로
생물학적 현상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과 종교에 가교를 놓는다. 생물학적 가교는 통섭이 아니라 다른 인접 학문들과의 네트워크에서 생명권과 생활세계를 현상학적으로 방어한다. 시민사회와 생명권은 정치 경제적 영역의 침해로 부터 자율적 기능과 심비오시스를 목표로 한다. 성서적 창조의 생태학 차원은 진화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한계를 지적한다.
생의 출현과 구조의 이론은 중지-평형-혁신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성서의 창조 내러티브를 약화시키기 보다 인간의 계보학을 에코의 인간성과 네트워크에 설정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의 단일한 창조 행위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창조자에 의해 심어진 법칙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그분의 신성한 권능과 지혜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다 (The Plasibility of Life, 265).
이러한 에코 창조적 관점은 촉진된 변이가 새로움의 생성에 대한 설명으로, 즉 생의 새로운 질서의 혁신적 출현에 공명할 수 있다. 성서적 에코 인간성은 생물학적 생과 인간의 문화를 접합시키며, 사회자연성을 에코포이에시스로 파악한다.
인간은 에코 시스템이며 내트워크안에서 활동하며, 확산구조에 의해 새로운 생의 창조성으로 열린 존재다. 세포는 자유로운 확산구조로서 뇌 세포막들은 전자 장으로 부터 영향을 받으며 엘렉트로닉 효과를 나타낸다. 시냅스 이전 단계(전자 이온화)와 이후의 단계 (신진대사)에서 변화와 조율이 나타난다.
세포의 신진대사는 복잡한 화학의 네트워크, 다시말해 수 천개의 효소의 규제와 시그널 활동이 있다. 세포의 많은 구성원들은 다양한 작용의 경로들에 관여하며, 다차적인 상호관계에서 움직인다. 세포의 웹은 자율성과 복잡성 그리고 생산성에 의해 특징되며, 자기 조직화와 자기복구는 오토포이에시스의 특징을 보여준다. 뉴런 시스템에서 인과율적인 결정론이나 유전자 규칙은 없다.
유기체의 삶과 환경문화의 네트워크는 애코포이에시스로 출현하며, 인간의 기술 합리성은 애코 거버넌스를 위해 사용된다. 유기체와 환경문화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은 인접 가능성의 배경으로 상호영향을 미치며, 오이코스 구성을 만들어간다, 이러한 오이코스 구성은 생활세계와 생명권을 권력의 지배방식과 경제구조 그리고사회적 지배담론으로 부터 방어한다.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를 실현하는 자유의 과정에 있다. 인간은 고차적인 질서의 심비오틱 삶을 향한 코나투스에 의해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