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담론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하나님이 사유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실이 되는가? (불트만/ 판넨베르크). 아니면 세계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가?
바르트는 하나님과 성서의 네러티브와 더불어 인간의 이해 지평과 관점 의존성을 고려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신비와 장소로서 살아있는 말씀 사건과 성령으로 오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규정하는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 이것은 삶의 장처럼 작동하며 파라다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신학의 이해는 한계에 머문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와 세계 개방성에 의해 신학의 언어는 세계와 대화를 하며, 신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의 확대와 통섭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행동(divine action)은 세계와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며 이들의 삶에 안식으로 (세계 내재성) 관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비로서 새 하늘과 새땅을 새로운 은총의 장으로 창조하신다.
바르트 신학에는 매우 중요하지만 쉽게 다루기 어려운 복잡성이 있다. 그의 사유는 비판적 해명을 필요로 하며 그의 <교회 교의학>의 전체의 틀에서 재해석을 요구한다. 바르트의 사유는 어느 지점에 고정되거나 결정되지 않는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계신 분이고 성령을 통해 여전히 세계와 관계하고 동행하는 분이다. 이러한 비판적 배움은 바르트를 자연과학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구성신학의 지평을 여는 예비작업일 수가 있다.
바르트의 관계의 유비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신 분 (안셀름) 또는 전적타자로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초월성이 아니라 세계와의 다름을 말하며 또한 세계와 연대하고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을 지적한다.
바르트는 성서적인 의미에서 창조를 단순히 우주나 자연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창조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서 현실화되는 역사적 영역과 하나님의 해방사건으로 해석된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토후 와 보후(Tohuwa bohu)는 바빌론의 마르둑 신화의 세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악(무성)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지적한다. 하나님은 바빌론적인 유폐로부터 해방의 빛을 자연의 빛에 앞서 창조했다 (Marquardt, Eia warn wir da, 310).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말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창조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해방사건 (바빌론 유폐)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관계의 유비에 서 있고 자연이나 우주는 이러한 유비론적 차원에서 파악된다.
판넨베르크는 창조의 기사에서 바벨론의 유폐의 역사적 경험을 제거한다. 단지 바빌론의 티아마트에 대한 비신화론으로 언급하고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힘을 부각시킨다. 바빌론 유폐의 경험을 카오스/티아마트에서 독해하는 것을 이원론으로 비판한다. 판넨베르크에게서 악과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찾아 볼 수 없다 (ST II: 14).
그러나 바르트의 창조기사의 주석은 이원론이 아니라 선함의 부재에서 악의 현실을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폐의 경험에서 본다. 이어 <교의학 3: 3> 무성에 대한 반성과 교의학 14권으로 알려진 <기독교인의 삶: 화해의 윤리>에서 주인없는 폭력에 대한 정치 사회적 비신화론으로 이어진다.
바르트: 존재의 유비
바르트에게서 유비는 하나님의 활동(operari)과 하나님의 존재 (esse)를. 표현한다. 바르트의 인식원리는 Esse sequitur operari ㅡ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지식에 예속된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에서 알려진다.
이것은 교의학 전체를 이끌어가는 인식론이며 중세 카톨릭의 인식론(Operari sequitur esse)를 전도한다: 인간의 활동은 인간의 존재에 예속된다. 존재가 없이 활동은 없다. 이것은 존재의 질서와 유비에 타당하다.
그러나 바르트는 카톨릭 신학자 고트립프 죙엔에게서 그리스도를 통한 존재의 참여를 확인하고 존재의 유비를 거절하지 않았다. 관계의 유비를 통해 존재의 유비를 수용한다 (CD II/1: 82-3).
바르트는 근대의 데카르주의나 간접적인 데카르주의를 거절했다. 하나님은 유비의 주체 (아날로간스)이며 세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유비(아날로가타)가 되지만 이것은 비슷하게 그러나 동시에 다름을 유지한다.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화육과 성령과 더불어 역사에 개입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피조물들의 삶에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은 생의 창조성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의 생에는 지진이나 쓰나미 처럼 그림자가 있고 또한 창조의 은총이 공존한다.
바르트는 창조에서 판넨베르크의 성령과 장이론의 결합이나 또는 몰트만의 유대 카발라의 침줌 (하나님 자신의 급진적 자기제한)의 유출설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창조는 신플라톤주의 유출설도 아니며 성령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장 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의 유비를 통해 자연과 세계에 관계한다.
하나님의 프로렙시스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영원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영원성은 현재화가 된다. 미래는 현재로 들어와 있으며 현실화 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 땅의 미래의 차원을 갖는다.
바르트의 영원성은 페리코레시스의 순서와 관계들의 기원에 기초하며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은 시간의 존재이다. 바르트는 어거스틴의 무시간적 영원성을 비판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세계의 시간성의 이분화는 하나님이 세계로부터의 경험을 차단해버린다.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은 시간 안에서 세계를 창조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과거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할과 종말론의 새로운 창조를 목적으로 갖는다. 바르트의 시간론은 프로렙시스를 부활의 현재화로 파악하며 신약성서는 이러한 프로렙시스적 지평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증언한다.
프로렙시스 총체성 또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시스템적인 인식은 칼 바르트의 전체와 부분의 시스템에 대한 통찰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판넨베르크의 프로렙시스 의식 개념이나 몰트만의 침줌 유출설 또는 화이트헤드의 자연주의적 범재신론과 다르다.
판넨베르크에게서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예기적 기대를 갖는다. 그에게 영원성은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현재이다. 미래는 시간의 외부에 있지 않다. 프로렙시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과 미래의 새로움과는 다르다. 판넨베르크는 베르그송과 샤르댕의 진화론을 추종한다. 삶의 진화는 복잡성과 다양성으로 나가는 과정이며 피조물의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ST II: 34).
그러나 바르트에게서 프로렙시스는 부활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입장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의 시간은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성을 의미하며 진화의 시간을 허락한다. 자연과 역사 또는 창조와 진화는 대립이 아니라 관계성안에 설정된다. 바르트는 땅의 지배(창 1:26)를 땅에 대한 인간의 무제한적 기술지배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의 문화의 프로그램을 지적하며 모든 자연의 파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칼 바르트와 구성신학
구성신학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행동에 주목한다. 대화의 중요한 파트너는 자연과학이다. 일차적으로 바르트를 구성신학의 틀에서 전개하기 위해 나는 그의 하나님이해로부터 시작한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사랑과 자유 가운데 계시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혁명적 변혁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동행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를 완성하지 않는다.
인간은 계약의 파트너이며,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그리고 창조는 계약의 외적근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협력자로서 자연/창조ㅡ하나님의 영광의 무대ㅡ와 그리스도의 화해의 계약 안에서 살아간다. 창조와 계약에는 관계의 유비가 작동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화해론의 빛들의 교리에서 바르트는 우주의 피조된 빛들을 해명하면서 우주의 지성은 세계에 내재한 평화와 자체의 진리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우주는 독해되고 이해될 수 있는 텍스트이며 또한 그 자신이 독자이고 해명자이다.
바르트의 창조론은 하나님의 자유의 사건에 기초하며 예정론과 삼위일체 안에서 개념화된다. 창조 안에서 세계의 진화를 파악하는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동행과 피조물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종들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생존투쟁과 종의 소멸 등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일치 될 수 있는가?
구성신학: 창조와 자연과학
창조론 (교의학 3/3: 298-9)에서 바르트는 리스본의 대지진 (1756 -1791)에서 창조의 그림자와 결여를 보았지만 모짜르트의 음악 (17 88 년 G-마이너 심포니)에서 창조의 조화로움과 하나님의 평화를 들었다. 그림자와 결여 그리고 슬픔은 어두움과 절망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주의 생에는 지성과 우연성이 있으며, 자연의 세계에는 창조의 은총과 진화가 공존한다.
바르트는 <교의학 3/1>의 창조론의 서문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자연과학은 신학이 창조주의 일을 기술하고 고백하는 것에 대해 구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학은 자유로운 영역을 갖는다. 기독교 신학의 창조론은 자연과학에 대해 질문이나 이의제기나 도움을 줄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바르트는 창조과학이나 지성적 설계론에 관심이 없다.
바르트의 방법론적 구분은 자연과학에 자유로운 연구의 영역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험적 내용을 지지한다. 모든 학문들은 정점에서 신학이 될 수 있다 (KD 1/1: 3.5).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물리학의 중력법칙과는 다르다. 자연과학적 인식을 통해 하나님을 기술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스러우며 이 점에서 바르트는 칸트의 인식론에 공명한다. 세계자체의 궁극적 실재에 대해 과학은 알 수가 없다.
성서적 창조론을 자연과학적 인식론의 빛에서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통적인 자연신학 (윌리암 페일리의 <시계공>으로서 하나님)이나 또는 오늘날 생물학적 무신론을 대변하는 리차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와는 다르다.
이안 바버에 의하면 기독교의 창조론이 진화론이나 천문학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구성 된다면 이것은 의미가 있다. 모든 기독교의 교리들은 역사적으로 조건되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Barbour, Religion and Science, 92).
이것은 전통적인 자연신학이나 오늘날 지적 설계론과는 다르다. 오늘날 자연의 신학 또는 자연과학의 새로운 연구성과와 더불어 대화하고 발전하는 구성신학을 말한다. 구성신학에서 자연과학과 종교의 문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바르트에게서 자연과학은 한편에서 경험적 관찰과 연구 다른 한편 수학의 논리로 세워진다. 그것은 법칙에 의해 구성된다. 인간의 기술은 좁은 의미에서 법칙의 적용이다. 우리는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살아간다 (CD IV/3.1: 147-66).
그러나 자연과학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파악하기엔 우주와 자연의 삶은 복합성과 다양성 그리고 우연성에 의해 작동된다. 지성적 설계자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리스본 대자진이나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종들의 대소멸 앞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그러나 과학적 이신론 (뉴톤)은 세계를 기계로 파악하고 수학과 인과법칙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말하지만,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은 이를 거절한다.
구성신학의 방향
구성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의 창조론과 화해론은 풍부한 대화의 내용을 담고있다. 자연의 세계에서 피조물들은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언어와 진리들과 빛들을 가지고 있다.
우주 안에는 빛나는 전자기파의 에너지가 있으며 우주의 이성은 수학이나 법칙으로 환원되기 보다는 다차적 형식들과 특수성과 변화화 다양성으로 특징된다. 대립과 갈등 안에서도 세계에 내재하는 평화가 있다.
우주의 존재는 상호 연관적이며 역동적인 현실을 보여주며 지속적인 반복과 만남과 시작과 끝과 다시 시작이 있다. 사라짐이 없이 새로운 시작이 없으며 새로운 시작이 없이 사라짐도 없다 (CD IV/3.1: 144). 하나님은 진화론적이며 생태학적인 생에서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분자 생물학이나 진화론 또는 물리학의 장 이론은 하나님의 활동을 기술하는데 사용된다.
예를들어 아더 픽코크는 성육신에서 진화론의 발전과 자연 과학적 창발성 이론을 통합시켰다. 성육신은 하나님을 알리는 자기 표현적 말씀이다. 세포 생물학의 오토포이에시스와 자기 조직화는 샤르댕의 우주적 진화와 연결된다 (Peacocke, The Incarnation of the Informing Self-Expressive Word of God).
존 폴킹혼은 하나님을 인간의 정신의 합리성과 자연의 근거로서 세계의 법칙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활동적인 정보를 세계안에 제공한다. 이것은 지적 설계론을 옹호한다 (Polkinghorne, Chaos Theory and Divine Action).
판넨베르크는 물리적인 장 이론을 성령의 활동영역으로 해석한다. 물리학에서 운동과 움직이는 힘은 물체에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로 파악된다. 뉴톤의 운동법칙에서 힘은 물체와 독립적으로 작용하며, 물체의 운동에 비례한다 (f=ma).
뉴턴은 중력을 하나님에 의해 우주를 움직이는 표현으로 간주했다. 힘과 장은 여기서 접합되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힘과 장의 개념은 시공간의 연속체에서 파악된다.
판넨베르크는 힘의 장의 개념을 스토아 철학의 푸뉴마에서 우주의 삶을 침투하는 차원을 본다. 이것을 판넨베르크는 성령의 우주적 활동에 관련 시킨다. 창조에서 성령의 활동은 장과 힘을 종합하는 근대의 물리학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장의 개념은 하나님이 역사와 관계하는 공간에서 파악되며, 창조와 성육신이 장 이론에 관련된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힘과 에너지 즉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결정된다. 판넨베르크는 근대 물리학의 장개념을 성령의 드러나는 장소로 이해하며 역동적인 장의 활동으로 파악했다 (Pannenberg, ST II: 99-105).
폴킹혼은 판넨배르크의 장이론을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와 물질의 방정식에 연결짖고 근대 물리학에서 장은 단지 영적인 것만 아니라 희미한 가스로 비판한다. 그러나 폴킹혼이 신학을 형이상학 (또는 철학적 신학)으로 규정하고 신학을 과학이론에 공명시키는 한 성령의 우주적 활동이 장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폴킹혼은 양자의 상호 보충성 (입장/파장)을 통해 (보텀 업 원자주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신성에 적응시키기 때문이다. 신성/인성이 입자와 파장처럼 수학적 모델의 설명방식에 공명하거나 순응될 수 있는 가?(Polkinghorne, Scientists as Theologians, 8,20-1). 여기서 공명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구성신학의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칼 바르트는 자연과학으로 부터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성서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단지 자연의 세계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뢀의 사건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