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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종교개혁: 교회 갱신과 지속 가능성
왜 바르트인가?
칼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교회론은 그의 교의학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을 하나님의 말씀론으로 시작하고 삼위일체론을 거처 예정론과 신론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창조론과 윤리를 다루면서 그는 교의학 4권에서 화해론을 다루고 마지막 세례론으로 끝을 맺는다. 교회론이 없다! 왜 바르트는 교회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론에서 삼위일체 그리고 예정과 신론으로 자신의 신학의 방법을 추구 하는가? 바르트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교회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론의 구조: 칭의, 성화, 그리고 소명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전적타자이며 동시에 안식을 통해 창조의 세계안에서 동행하시며 또한 세상을 전적으로 다르게 변혁시키는 분이다. 고백교회 논쟁에서 루터란들은 교회가 쓰러지고 일어서는 신앙의 항목을 칭의론으로 주장했지만 바르트는 이에 냉담했다. 칭의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와야한다. 이것은 바르트의 유명한 “기독론적 집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칭의)과 부활(성화)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언자적인 투쟁에 제자직의 참여 (해방의 소명)의 틀에서 바르트는 비로소 교회를 말한다.
바르트는 칭의론을 해명한 후 성령과 교회 공동체의 설립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믿음과 칭의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CD IV.1: § 62).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의 죽음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갈 3:13). 예례미아의 새언약의 복음에서 우리는 칭의를 통해 저주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아것은 출애굽기 34장 5-7절에서 나타나는 야훼 이름의 자기선포 (viva vox evagelii)에 관련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안에서 죄의 저주는 걷힌다.
교회는 성령의 각성에 의해 살아가는 광야의 교회로 정의된다 (ibid., 660). 루터는 그의 칭의론에서 예례미아 (31:33-34)와 오순절 성령사건에서 요엘의 예언이 죄사함의 은총으로 온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루터-볼트만의 실존적인 칭의론을 넘어선다.
특히 바르트의 칭의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욥에 대한 바르트의 주석에 있다. 욥은 에돔에 거주했으며 야훼의 계약의 외부에서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참되게 증거하는 은혜의 사건을 말한다 (CD IV/3.1: 384). 욥의 이야기는 단순히 신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를 의롭게 하심으로써 욥을 의롭게 하는 칭의론적 차원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낯선 자와 공포로 나타나지만,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증언자로서 예례미아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전통에 서 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지적한다. 욥은 그의 친구들 보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을 말했으며 하나님은 욥을 의롭게 여겼다. 욥은 항상 죄인 그리고 항상 의로운 자를 드러낸다 (CD IV/ 3.1: 404).
욥은 사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관점을 취한다. 하나님은 욥을 버리지 않는다. 세계와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동고난에 연결되고 비교될 수 있다 (ibid., 414). 옵은 자신의 고엘 (변호자이자 구원자; 욥 19:25-27)이 살아계심을 알고 있고 육체 밖에서 그를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희망의 대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을 갖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를 보는 것이며 현재의 영적고투를 견디고 들어올리면서 야훼 자신 즉 고엘 (대속자)를 신뢰하고 보는 것이다 (Gollwitzer, Krummes Holz-aufrechter Gang, 238).
칭의론에 관련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된다. 희망은 미래적인 형식의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이러한 봄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일치하며, 희망 안에서 선취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루터-불트만과는 달리 바르트에게서 칭의의 은혜는 실존적인 차원을 넘어 친구들의 위선과 무시간적인 추상적인 진리를 폭로하며, 세상의 잘못된 허위증언을 넘어 하나님을 참되게 증언한다.
욥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유에 연관 된다면, 친구들의 위증은 진리의 옷을 걸친 체 제도화된 진리와 자유롭지 못한 하나님을 말한다. 이러한 부자유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욥의 하나님과 다르다. 칭의론에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진리가 드러나는 곳에서 인간의 위증 또한 필연적으로 드러난다 (CD IV.3.1: 460-1).
이어, 성화를 다루면서 바르트는 진정한 교회와 공동체의 성장과 질서를 논의한다. 여기서 성령과 사랑이 다루어진다 (CD IV.2: § 67-68). 진정한 교회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각성의 능력이 역사하는 장소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새 예루살렘 (계 21:2)은 지상에서 하늘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것은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교회가 소망하는 궁극적 목표이며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도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보증을 우리 마음에 주시며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갈망하게 한다 (고전 1:22; CD IV/2: 628). 교회의 성장은 유기체적이며 신비하다. 유기적 성장은 내부로부터 말씀과 성령 그리고 칭의와 사랑을 통해 씨앗처럼 확장된다 (CD IV/2: 644).
하나님은 날마다 교회에 구원받은 사람을 더 해주었다 (행전 2:47). 하나님의 말씀이 증대될 때 제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은 자기영광을 과시하는 외적 이라기보다는 내적인 것이며 높이와 깊이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영적관계에 기초하며 이후 외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장하며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ibid., 648-50).
바르트는 인간의 소명을 다룬 후 성령과 교회의 파송을 논의한다 (CD IV.3.2: §72). 세상을 향한 파송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역에 참여하며, 교회는 세상과 연대 가운데 있다. 여기서 교회의 공공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모든 교회원들은 교회의 선교와 공공성에 참여한다. 주요 과제는 케리그마와 복음 증언과 성령의 사역 그리고 디아코니아이며, 이것은 기쁨을 가져온다. 이것은 또한 정치와 사회적 영역에서 토라의 정의와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권고를 실현한다.
교회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며,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시는 회복하시는 그리스도 (행전 3:21)에 의존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쉬게하는 기쁨이 존재한다 (마태11:28) (CD IV.3.2: 810). 하나님은 말씀과 계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교회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목적을 위해 복음을 길들이거나 훼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선교
바르트는 교회의 선교를 다룰 때 예정론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선교는 60년 대 이후부터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친 신학의 담론이었다. 그러나 정작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의 내용은 화해론에서 교회의 선교에서 다루어진다 (CD 4/3.2, § 72; 성령과 교회의 보내심).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의 영원한 주제이다. 복음의 역동성은 권력자들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적 세계관을 통해 길들여질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은 은혜의 혁명으로 나타나며 시류와 부화뇌동하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간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는 탄생한다. 이것은 바울의 화해의 사역에 기초한다. 화해의 사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 불려지며, 그리스도는 교회에 모든 인류의 성화를 잠정적으로 대변하도록 부여한다. 인간의 성화가 아니라 부활의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화의 교리에 핵심이되며 교회를 세워 나간다. 바르트는 칼빈의 교회론 즉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를 중요하게 다룬다 (CD IV/2; 614-15).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는 바르트의 화해의 차원과 어머니로서 교회의 상징을 고려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Una, Sancta, Catholica, Apostolica
바르트는 니케야 신조에 따라 교회의 고전적 정의를 una, sancta, catholica, apostolica로 표현할 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성령으로 말한다. 성령의 각성하는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을 세워나가시고 끊임없이 갱신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의 지상의 역사적 존재형식이다. 종교개혁의 테제—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그리스도 자신이 지상의 역사적 존재형식이란 틀에서 수용된다.
Una는 그리스도 한분만이 교회의 주님임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님이신 교회는 교회 일치운동 안에서 한분 주님을 고백한다. Sancta는 성도의 공동체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분임을 강조한다. 성도는 자체상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의 용서와 성만찬에서 부활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여겨 주신다. 유월절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 안에서 부활을 축하하는 기쁨의 음식으로 바뀌며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 축제가 된다 (고전 11: 20; CD III/2: 502).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입은 존재로 나의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불림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자신에게 100일 정도의 품삯에 해당하는 100데나리온을 빗진 사람에게 가혹할 정도로 대하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미태 18; 21-30).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토라의 정의와 용서는 복음의 필수적인 형식으로 말하며 은총은 살려지길 원한다고 말한다.
Catholica 는 하나인 거룩한 교회의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실제를 의미한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교회의 형식은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catholica는 일치성과 보편성 즉 진정한 의미에서 에큐메니컬 성격을 갖는다. 교회는 카톨릭이며 에큐메니칼하며,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지속적인 자기 갱신에 참여한다.
Apostolica는 신앙안에서만 알려지는 구체적인 영적 표지를 말한다.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에 따라 선교와 제자직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성서에서 증언되는 사도들의 권위를 침해하고 우리와 동일시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차 증언자들로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을 존중하고 경청해야한다.
바르트에게서 사도전승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의 베드로의 수장권을 중심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신다. 역사적인 예수가 사도들을 선택하고 임명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세상으로 파송했다. 사도들의 증언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분의 권위와 능력과 선교를 입증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전승의 의미가 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새언약의 은헤를 증거하고 공론장에서 토라 정의와 용서의 은혜 그리고 화해를 실천한다면 교회는 사도전승의 전통에 서 있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공공신학과 목회를 의미한다. 사도전승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즉 성육신 하신 말씀을 봉사하는 데 있다 (ministerium Verbi incarnati).
바르트: 공공 신학자
바르트의 1946년 텍스트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볼프강 후버에 의해 공공신학의 중심 텍스트로 부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교회 협의회의장으로서 공공 신학을 주도하는 하인리히 베드포드-스토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텍스트에서 바르트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세상의 주님으로서 이들을 다스린다. 교회는 국가와 더불어 공동 책임성을 갖는다.
로마서 13장1 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은 굴복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공동 책임성을 말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빛을 유비론적으로 드러낼 때, 즉 정의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할 때 교회는 언제든지 합력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시민국가를 루소의 전통과 사회주의 이론과 접합하고, 교회는 공론장과 시민 사회 안에서 정의를 극대화하는 국가를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바르멘 선언을 정치이론화하고 그의 제자 핼무트 골비처의 정치신학의 기본 토대가 된다. 공공 신학에서 정의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분배정의,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의 정의, 그리고 가해자를 용서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회복하게하는 정의이다 (넬슨 만델라).
바르트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의 역사적인 존재형식인 보이는 교회로 들어간다.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 (credo ecclesiam)의 진정한 의미는 교회의 참여와 선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교회를 다스리시며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에 연관되며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갈 4:26). 보이지 않는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를 양육해간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은 출애굽한 광야의 교회 즉 순례하는 교회를 지적한다.
바르트는 니케야 신조를 독특한 방식으로 다시말해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해 나간다.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각성되고 성장하며 여기에 성령의 임재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서 사건으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교회 지상주의나 승리주의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잠정적이며 단편적이며 그리스도를 향해 나간다. 이것은 광야의 교회를 말한다. 종말에 오는 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바르트에게서 프로렙시스는 승천이며, 승천은 미래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프로렙시스의 사인이 된다 (CD III/ 2:454). 성서의 내러티브 안에서 승천의 그리스도는 오순절의 성령의 부어주심에서 교회로 오셨고 교회는 두번째 형식의 재림의 공동체가 된다. 교회는 이미 재림의 시간을 살고 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서 즉 영원성의 관점에서 프로렙시스적으로 편집되었다. 특히 바르트는 수난전승에서 프로렙시스가 에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일어난 일반부활의 사건으로 파악한다.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를 흔들고 무덤이 열린다 (마태 27:51), 십자가에서 마지막때 사건이 선취되며, 우주는 이러한 낯설은 사건에 기입된다 (CD IV/1, 239). 예수의 부활과 (40일 지상의 사역) 승천에서 성령의 오시오심이 선취되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부활의 그리스도의 두번째 재림의 형식이 된다. 이러한 재림의 형식에서 미래의 하나님에 대한 Angeld가 주어진다.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의 각성과 성령의 체험에서 시작된다. 예배와 일상의 삶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성이 교회를 율법과 세례와 성만찬과 기도와 성도교제에 신실하게 만든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4권으로 된 화해론의 틀에서 비로소 바르트의 교회론의 진수가 드러난다. 바르트에 의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성도의 교제 (communion sanctorum)안에서 살아간다. 개인적인 유목민 신앙은 불가능하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를 말한다. 하나님은 모두가 진리의 지식에 들어오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 2:4). 선교와 화해의 종말론은 교회의 성격을 공공목회로 특징 짓는다.
화해와 종말론
화해론에서서 바르트의 독특한 종말론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과거 이스라엘에게 오셨고 부활을 통해 성령의 임재에서 교회로 오신다. 그러나 교회는 그분의 최종의 재림을 기디리는 희망의 공동체이다(CD IV.3.1: 294). 미래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안에 통합된다.
여기서 바르트는 몰트만과 극명하게 갈라선다. 하나님이 만유안에 임재하는 것(고전 15:28)은 몰트만처럼 만유재신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유재신론은 영지주의의 형식이다. 오히려 바울의 이 본문은 피조물들이 최종의 계시에서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삶에서 긍극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CD III/3; 86).
만유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만유재신론이나 범신론과 상관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보존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메누하 (최종의 안식, 고전 15: 28)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사람 (히 4: 10)의 종말론적 소망과 연관되며, 새로운 창조의 정점이 된다.
전천년 그리고 후천년?
전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는 주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주장되는 내용이다. 천천년은 그리스도가 재림후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다스릴 것이다. 미국의 시한부 종말론 비즈니스는 천 천년왕국론에 기초한다. 후천년 왕국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인간의 노력에 의해 지상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미국의 리버럴 교단에서 주장된다. 무천년은 천년왕국을 거절하는 루터란이나 칼빈주의 교회의 입장을 말한다.
유대교의 천년왕국론은 에스겔 37장 24절에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약속된다. 천년은 에스겔 38장 8절에서 “여러날 후 곧 말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있기전 메시아가 재림해서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몰트만은 전 천년왕국론이 초대교회의 종말론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왕국론을 유대인의 사변내지 몽상으로 거절했다고 비판한다. 몰트만의 종말론적 천년왕국론은 이스라엘의 희망을 위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유대적 천년왕국을 계시록의 최종의 메누하와 통합한다 (에스겔 37:27; 계 21:3) (Moltmann, The Coming of God, 155, 197).
그러나 몰트만과는 달리 바르트에게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40일간 지상의 사역은 첫 번째 재림을 말한다. 바울은 부활의 그리스도의 40일 간의 현현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을 언급한다 (고전 15:8).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과 새언약의 성취가 (예레미아-요엘) 이루어진다. 이것은 두번째 형식의 재림이다. 교회가 새하늘과 새땅을 준비하는 위임을 가지고 있고 부활의 그리스도는 교회와 세상에 임재한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예언자의 투쟁의 사역을 오늘 교회와 세상에서 이어가며 교회는 여기에 참여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의 장소라면 시한부 종말론은 철저히 봉쇄된다.
예수가 천년왕국 이전에 와서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이룰 거라는 주장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오역이다. 저명한 유대 종교학자 게하르트 숄렘에 의하면 유대적 메시아주의는 다윗왕가를 회복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와 전쟁과 대 재난에 기초해있는 역사적 단계를 말한다. 메시야 해산의 고통과 지상에서의 역사적 지배는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퇴락을 이미하며,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메시아의 개입을 통해 파국적으로 나타난다. 메시아의 역사적이며 대재난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야훼의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적인 영원한 세계와 구분된다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iasm, 6, 8).
대재난의 혁명적인 사건을 통해 메시야 시대의 파국적인 성격은 미래로 진입하며 메시아의 날에 토라는 보다 더 잘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날(사 11)은 이사야의 야훼의 날 (2: 2-4, 4: 2-6)에서 드러나는 유토피아 에온과 다르다. 이미 이러한 메시아 재림의 파국적 성격은 마태와 마가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이어진다. 그렇다면 몰트만이 유대적 메시아주의와 계시록의 최종의 안식과 통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미 바울에게서 메시아의 날과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안식은 유대적인 측면에서 구분된다. 재림의 그리스도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받칠 때, 아들 자신도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계시게 된다 (고전 15:24-28). 바르트에게서 이것은 아들의 종속주의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appropriationis 에 속한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그리스도, 성화의 성령).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는 계시록 19장 11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공명한다.
숄렘에 의하면 후천년설은 유대적 배경과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지상에 천년왕국을 세운 후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 또한 계시록 20장 4절의 오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때 에스겔의 삼차성전을 인간의 손으로 짓는 이스라엘 극우파 민족주의 행위 거절된다 (겔 37:26).
여기서 예언되는 다윗의 왕가는 에스겔 시대에 이미 역사적으로 사라졌다. 장차 유다와 이스라엘이 고국으로 돌아와 한 나라가 될 때 영원히 다스리는 다윗의 왕가는 메시아의 날을 의미한다. 야훼는 이들과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한다 (겔 37: 26-28). 삼차 성전은 메시아가 세우지 사람의 손에 의해 세워질 수가 없다.
바르트의 계시록 주석에서 중요한 것은 재림의 그리스도가 흰말을 타고 말씀으로 투쟁하는 것이다(CD III/3: 448). 여기에 바르트의 계시록 주석의 독특함이 있다. 계시록 19장 11절 이하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에서 일어나는 대재난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후 몰트만 처럼 천년 왕국은 없다.
이 본문은 20장 7-10절의 사탄의 패망과 연결되어있다. 이것은 메시아 재림에서 나타나는 파국적인 성격을 말한다! 이것은 앞서본 것처럼 이미 바울의 고전 15장 24절 이후의 종말론의 이중구조에 상응한다. 메시아의 다스림이 있고 이후 야훼의 날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거하심: 최종의 메누하)에 이어지며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 받는다. 바르트는 이런 주석을 통해 오히려 계시록 20장 4절에 대한 토마스 뮌처의 혁명적 해석을 거절하기보다는 이중적으로 발전시킨다: 몸의 부활과 하늘의 천년왕국 그리고 지상에서 교회와 성령의 능력과 제자직을 통해 이루어지는 쳔년왕국!.
그러나 계시록의 구조에서 다른 점은 20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십가와 부활의 사역을 통해 사탄은 천년동안 갇힌다. 천년기간은 교회의 시간 다시 말해 부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재림의 두번째 형식인 화해와 종말과 선교의 시간으로 특징된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후 사탄은 마지막 때 잠시 풀려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사탄은 패망을 당한다.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투쟁에 교회는 새하늘과 새땅의 수립을 위해 참여하며, 궁극적적 종말의 완성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기독록적 집중에 기초한 종말론의 이중구조와 영원성을 의미한다.
4절에서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베인 순교자들의 영혼이 나온다. 이들은 계시록 6장 9장과 10절에서 하나님의 재단 아래서 (에스겔의 merkabah 비전) 하나님께 호소하는 희생자들을 말한다. 유대적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항상 대재난과 이스라엘 민족주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의 희생에서 나타나는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유대 민족주의와 대재난 이론 즉 지상에서 메시아가 세우는 천년왕국 (메시아의 날)과는 다르다.
오히려 순교자들은 하늘나라에서 부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린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평화의 다스림을 말한다. 이것은 첫 번째 몸의 부활이다. 그러나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한다 (일반부활).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천년왕국이 무저갱에 갇힌 사탄 위에 세워진 성도와 순교자들의 왕국이며, 기독교의 희망은 이러한 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해나가는데 있다고 본다. 사랑안에서 자유와 그리고 자유 안에서 사랑이 사회적인 삶의 순수하고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야한다. 계급의 차별과 민족의 경계, 전쟁과 폭력들이 제거되어야한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천년왕국은 사회주의를 향한 윤리로 통합된다 (Barth, “The Problem of Ethics Today”).
바르트에 의하면 죽고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부활로 간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숨결이 몸의 혼(네페쉬)을 구성한다 (CD III/2: 598). 보다 더 급진적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두 번째 재림의 사역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이미 그의 속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입고 날로 새롭게 살아간다 (고후 4:16). 하나님은 아담의 창조에서 숨결을 통해 영을 창조하셨다 (이사야 5716: ...the spirit (ruach) of man ...-- the breath of man (nishama) that I have created; NIV).
계시록은 천년이 끝날 때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며 곡과 마곡에서 민족들을 미혹하고 성도들과 예루살렘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들을 삼켜버린다. 아마겟돈 전쟁은 역사적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에스겔 38-9장의 전쟁 예언을 변형시킨다. 그리고 19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나타나는 전쟁과 대재난이 나타난다.
마지막에 재림의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하나님께 받친다.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나중에 멸망받을 원수인 사망—다윗의 후손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종말론—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장소(갱신된 새 하늘과 새땅)—과 구분된다. 시간과 장소는 성서적 종말론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Marquardt, Eine Eschatologie, 2: 29).
바르트의 계시록 주석에서 흰말을 탄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오신다. 그리고 말씀과 십자가의 복음으로 투쟁을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말은 없다. 그리고 흰 보좌에서 최후의 심판이 나타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새 예루살렘과 더불어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프리델 마르크바르트가 지적하듯이 마지막 때 이스라엘에게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것이며 (스가랴 12:10), 이들에게 천년왕국의 삶이 주어질 수 있다. 바르트는 이 부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지만 바울의 이스라엘의 구원(롬 11)을 긍정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저 세상의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종교를 말한다. 계시록 21장 3절에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메누하 즉 하나님의 안식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십자가에서 예수의 말씀이 인용된다; "다 이루었다." 복음과 예언의 시간은 묵시문학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이다! 이런 점에서 메시아 예수의 종말론적 성격을 계시록은 구약과 달리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천년왕국적 모티브를 갖는다.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영원성은 살아계심을 의미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원이다.
22장 3절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예루살렘 도성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이들에게 생명의 나무를 먹는 것이 허락이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1장 22절이다: 나는 그안에서 성전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아도나이) 하나님(야훼)과 어린 양이 예루살렘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오늘의 상황에서 갱신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지를 묻는다. 대답은 다른데서 찾을 수가 없다. 야훼 아도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우리의 교회가 되어주실 때 교회는 갱신되고 성장하며 지속 가능해진다. 이것을 버릴 때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에서부터 시작한다.
영원성의 동시성: 몸의 부활
교회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상의 역사적 존재형식이다. 그리고 재림의 두번째 형식인 부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안에서 교회는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재림은 이미 우리의 교회 안에 들어와있고 하나님의 안식의 복이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전능하신 아도나이와 어린앙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교회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 살아가고 구원의 상속자로 인쳐지고 기름부음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마지막 때 재림의 사건이 중첩되어 있음을 바울에게서 간파한다. 덷전 4장 16절 이하에서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난다 (일반부활). 그 다음에 살아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성령의 쉐키나)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 성령의 쉐키나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변형된다. 우리는 주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지상에 내려와서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언급은 없다. 바르트는 독특하게 고전 15장의 죽은 자들의 부활로 연결한다. 바르트는 휴거가 아니라 변화의 교리로 이해한다 (CD IV/3.2: 924-5).
이것은 바르트의 내러티브 (미드라쉬) 성서해석 방법인데 내러티브를 통해 연결되고 변형되고 새로운 의미지평을 열어 놓는다. 고전 15장 45절에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영 (네페쉬—고전 15:45)이 되었지만 생명을 주는 영은 아니다. 우리는 죽을 때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가 없다. 이단들이 죽지않고 영생 불사한다는 말은 성서와는 다르다.
죽음 이후에 몸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받는다. 우리는 죽고 다 잠드는 것이 아니다. 다 변화한다. 이것은 바울과 바르트의 변화의 교리인데, (천사장)의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눈깜짝 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된다.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난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말하지 영혼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이후 변화한다 (고전 15: 52).
이 점에서 바르트는 벧전 1: 9—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을 재해석한다. 여기서 영혼은 창 2:7절의 네페쉬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푸쉬케로 번역되었다 (CD III/2: 378). 정확한 의미는 전인구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몸과 물질의 차원을 고려한다. 인간은 몸의 혼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하나님이 불어놓어주신 영은 죽지 않는다. 네풰쉬(몸과 혼)는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게하신 영을 시기할 정도로 그리워하시며 나의 영에 성령으로 임재 하길 원한다 (야고보 4:5).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며 (고후 5:10).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할 것이다 (고후 3:18) (CD III/2: 623).
하늘의 예배: 교회의 원형
다시 교회론으로 돌아가보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잇대어있는 보이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존재양식이다. 교회의 예배는 하늘의 예배 (계 5)에 잇대어 있고 하늘의 예배는 지상의 교회의 원형을 의미한다 (CD III/3: 449).
그리스도의 두번째 재림에서 성령의 사역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를 회개하고 하고 아라봉(Angeld)를 통해 장차되어질 것을 보증한다. 신앙은 희망의 기초가 되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모든 것을 범 종말론적으로 미루고 하나님의 미래를 강조하는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를 꿈꾸는 사람으로 비판한다.
희망은 하나님의 미래에 기초한 범종말론적 꿈이 아니다. 이미 부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안에서 화해의 사건과 하나님의 미래는 접합되며, 교회는 하나님이 열어가는 미래를 보고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역에 참여하는 곳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며 화해의 사건은 종말론에 접해있으며 성령의 Angeld를 통해 우리는 계시록에 약속된 미래의 은혜를 오늘 여기서 누리며 살아간다.
구원은 큐피디타스로부터 해방
구원은 칭의/성화/소명으로 이루어진다. 칭의에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하시고 예배 안에서 이러한 죄사함의 은혜를 이어가신다. 성화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만찬(새언악)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가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칭의와 성화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역에 참여하며 구원의 상속자로서 해방의 존재로서 살아간다. 소명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희망의 존재가 된다 (엡 1:18; 4:4) 하나님의 부르심은 혁명적이며 모든 믿음의 사람은 카리즘과 디아코니아로 인쳐진다.
시간이 찰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에게—하늘과 땅에서—알게 하신다 (엡 1:9). 이 본문은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마그나 카르타이다. 성령은 모든 인류에게 부어지는 것이 약속되었다 (행전 2:17). 그리고 교회의 삶은 그리스도의 화해와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완성 사이에서 성령과 말씀의 사역에 의해 영적 각성과 회개와 소명과 제자직에서 이어진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교회는 본질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화해와 성령의 사역에 기초한 선교하는 교회를 말하며 복음의 그물을 깊은 곳으로 던져 생명의 열매를 맺는 소명의 공동체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탐욕과 권력욕에 빠져있는 큐피디타스 (homo incurvatus in se)에서 디아니코니아와 진정한 자유를 향해 계약의 파트너로 불러내신다. 성서해석은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 사회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을 가지고 성서 본문으로 들어가 대화를 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성서 해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와 공론장과 분리되지 않는다. 성서안에 이미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상호 작용하며 우리의 콘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안으로 초대한다. 하나님의 내러티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우리의 질문이 변형되며 새로운 대답의 지평이 출현한다. 불트만 처럼 질문이 대답을 결코 결정짓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질문을 변혁시킨다.
바르트에게 계시는 Dei loquentis persona(칼빈; 인격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또는 viva vox evangelli (루터: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인간의 인격적 경험을 열어놓고 수용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토라는 복음의 필요한 형식이며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은 이들을 거룩하게 여겨주신다. 복음이 전해질 때 타 종교와 문화들은 이들의 언어를 통해 복음의 이해와 해석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바르트는 일체의 서구 중심적 복음선교와 식민주의적 문명선교를 거절했다. 타종교와 문화는 화해의 빛에서 인정된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을 개종시킨다. 교회는 도구로서 역할을 한다. 복음은 사자 (유대지파와 다윗의 후손—부활의 그리스도)와 같이 표효하며 인간의 문명과 세계관에 의해 길들여질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곳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부활하신 유다 지파의 사자이다 (CD III/3: 47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복이다.
복음은 자본주의가 일으킨 공허한 허무주의 혁명과 소비에트가 일으킨 국가 사회주의 허무주의를 둘 다 거절한다. 하나님은 은혜의 혁명을 통해 세상을 전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켜 나간다. 교회는 여기에 순종하고 쫒아가는 소명의 공동체이다.
바르트의 화해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사람은 헝가리의 게오르그 루카치였다. 60년대 프라하 대학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대화에 참가했다가 바르트의 동료 한스 요하킨 이반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바르트 선생을 만나면 나의 인사를 전해주시오. 나는 하이데거를 읽었지만 거의 실망이요. 그러나 바르트의 교의학에는 해방과 혁명이 담겨져있소. 바르트가 무신론자의 인사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나의 인사를 전해주시오”
바르트의 전통은 비판이론에서 호르크하이머를 통해 이어진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수장인 호르크하이머에게서 종교란 희망 가운데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망으로 표현된다. 프리델 마르크바르트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향한 유토피아적인 열망으로 말한다. Eia waren wir da! 종말론은 하나님의 세계혁명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며 유토피안적이며 현실에 연관된 사회적 실천을 향한 갈망을 일깨운다 (마틴부버: “유토피아의 길목”).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록의 야훼 아도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것을 성령으로 체험하면서 우리는 전진하며 일체의 세계 파시즘 현상에 아니오라고 저항한다.
우리의 공론장은 주인없는 폭력에 의해 물들여져 있으며 정치 절대주의(리바이어던), 맘몬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환경의 파괴 등 탐욕의 지배로 물들어져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여기에 아니오라고 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의 샬롬과 나의 영적 죽음과 가난 그리고 소명의 해방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클로스와 함하레츠 그리고 massa perditionis와 연대하며 식탁 공동체를 나눈다 (CD 4/3. 2: 620). 지극히 적은 소자들 (마태 25; 45)은 지상에서 복음으로 인해 멸시 당하고 박해받는 제자들이며 (마태 10 :42),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있다 (CD III/3: 435). 지극히 적은 소자와의 연대는 예수=민중/오클로스의 동일화를 말하지 않는다. 동일화 담론은 다름을 배제해버리는 서구 헤게모니 담론에서 시작한다.
예수와 오클로스와의 식탁 공동체는 이후 바울의 차별없는 공동체에서 아게네스와의 연대 (고전 1: 28)로 전개되며 예수의 부활에 기초한 파루시아에 대한 기독교적인 휴머니즘과 교회의 윤리와 정치의 마그나 카르타를 의미한다 (CD III/2:508). 예수 그리스도는 마가의 십자가의 절규와는 달리 누가에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에게 위탁하는 예언자의 순교의 기도가 더 역사적인 내용에 부합한다 (누가 23:46). 이것은 예루살램 대학의 저명한 성서학자 데이비드 플루서의 <예수>의 입장에 공명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절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인간의 소리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버림으로써 인간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계시한다 (IV 4/3.1: 415).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드는 분이며 하나님의 혁명을 완수하신다 (CD IV /2: 180).
우리 또한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고뇌에 찬 절규가 아니라 아버지 나의 영을 당신의 손에 위탁합니다로 끝나지만, 동시에 나의 영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소망하는 존재들이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과 성령의 역동성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교회를 갱신하고 지속가능하며 전진 시켜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