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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토템종교와 사회학적 비판

by 파레시아 2025. 2. 9.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반성

 
성서의 유대교를 다룰 때 종교와 제의는 분리되지 않으며, 토라의 제의는 진화론적 발전을 통해 (벨하우젠) 후대의 성립으로 볼 필요가 없다. 토라의 윤리와 제의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처음부터 사회학적으로 규정한다 (뒤르캠).

종교는 사회의 모든 본질적인 것들을 창출하며 사회의 이념은 종교의 영혼이 된다. 사회의 분업과 합리화 과정과 윤리의 토대는 종교로부터 온다. 종교는 사회적 현상이며 기능적인 체계를 갖는다. 종교는 믿음과 실천의 통합적인 시스템이며, 거룩한 것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거룩한 것들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구분되어 금지된 것으로 설정되며, 믿음 공동체 안에서 제의와 도덕적 실천이 구체화되며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거룩한 것 (토라와 언약궤), 신앙고백, 계약사상, 제의 수행, 그리고 믿음 공동체는 성서의 유대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회학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성의 이념과 계약과 제의수행에서 참가자들 사이에서 집단적인 종교 체험의 순간이 나타난다. 이러한 탁월한 아우라는 참가자들에게 감정적인 전율과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느끼게하며, 이들을 다른 세계의 실제와 접촉하게 한다.

 

시내산과 계약 사상

 

성서 비평학에서 전승연구는 초기전승을 기초로 발생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초기 전승이 향후 성서 전통에서 다양하게 발전하는 시내산 전승이 다양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이후 수 많은 전승들이 다각도로 증언하는 시내산 전승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야훼와 이스라엘의 계약사상은 두텁게 기술되어야한다. 

 

예를들면 출애굽기 19: 3b-8에서 우리는 시내산 계약의 전체 도입부를 본다. 여기서 나타나는 계약공식은 고대 근동의 조약 특히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00-1200) 히타이트 제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종주권 조약은  자위가 높은 왕은 종주 (suzerain)와 약소 군주인 봉신 (vassal) 사이에 이루어진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6). 

 

야훼는 계약준수의 보장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적 신분을 보장하며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계약으 조건을 엄숙히 지킬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라."

 

엄숙한 선언을 통해 계약이 성사된다. 출애굽기 19: 3b-8은 이스라엘이 오래 전 부터 시내산 경험을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종주로서 이스라엘에 소개되며, 이러한 시내산의 원 계약은 여호수아 24장 2-13절에서 역사적인 스팩트럼이 확장된다. 그것은 아브라함 시대로 부터 시작하여 족장 시대와 출애굽 시대 그리고 정복시대를 포함한다. 여호수아는 새로운 계약을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옛 계약을 새롭게한다. 

 

여호수아의 세겜의 상수리 나무에서 계약은 오경의 자료보다 앞서있다. 여호수아가 일반적으로 신명기 사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명기는 기원전 7세기 후반으로 잡히며 원 신명기는 요시아 왕 당시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의 책 (언약의 책, 왕하 22-23)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호수아 세켐의 계약과는 달리 신명기에서 동등한 신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생각은 가능하지가 않다. 그리곳 신명기 전통은 예루살렘 중앙성소의 외부에서 예배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며, 성스러운 나무에 대헤서도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신 12:2, 여호수아 24: 26). 세곔의 계약갱신은 전해내려오는 초기 시내산 전승을 편집했을 볼 수 있다.

 

지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고 구원을 배풀어주신 야훼의 지칠줄 모르는 사랑과 끊없는 은혜가 고백된다. 계약사상안에서 무자격한 이스라엘이 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고백된다. 고대근동의 계약은 시내산 전승을 이해하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 (존 레벤슨, <시내산과 시온>, 54-5).      

 

계약의 스펙트럼에서 거룩한 제의의 아우라의 체험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종교이념과 상징은 이들의 삶에서 권위와 힘을 행사하면서 사회화가 된다. 사회적 제도와 관계 그리고 세력들은 종교적인 집단이념으로부터 의미와 정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학적 입장은 프로이드의 종교이해와는 정 반대에 서 있다.

프로이드와의 비판적 대화

프로이드에게 종교는 방어기재이며, 종교에서 죄책감은 강박과 병리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죄책이나 정결예전의 수행은 노이로제 현상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종교의 일상성에 사로 잡히고 노이로제와 같은 죄책으로 구속된다. "강박 노이로제는 종교의 커리커쳐이며, 파라노이적 망상은 철학적 체계의 커리커쳐이다." (Kung, Does God Exist?, 279).  
 
보다 심층적으로 볼 때, 종교의 방어기재와 죄책감은 그리스 신화에서 근친상간을 범한 오이디푸스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유대-기독교 종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해 해석된다. 결국 종교는 인간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제의를 수행하며 거룩한 대상에 투사를 하는 자기 방어기제이며, 환상에 불과하다.

과연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기독교가 아버지 하나님을 살해하고 아들의 종교로 변형 시켰나? 예수와 바울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지 않는가?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드의 접근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근친상간의 금지로 특징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고고학이며, 그리스의 신화는 일체의 다른 문화의 신화론적 세계관들을 범성욕의 기제로 환원시킨다. 토템이 발견되는 곳에서 같은 토템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는 결혼하지않는 족외혼 제도가 문화의 문법과 규칙으로 나타난다. 근친상간은 타부가 되며. 이에 대한 처벌은 교수형이다. 프로이드는 리비도 안에 고착된  근친상간적인 욕망이 무의식안에서 영원히 반복하고 회귀한다고 본다.
 
Robertson Smith의  <셈족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토템 향연에서 남성 씨족인들은 한해에 한번씩 성스럽게 여겨지는 토템동물을 죽이고 이를먹고 난 후 애도하고 축제를벌인다. 토템 향연은 토템(원초적 아버지)를 살해한 범죄행위를 기념하는 축제이며, 사회조직, 도덕적 제약, 사회계약, 심지어 종교의 출발이 된다.

이런 문화현상을 기초로 프로이드는 토템을 죽이지 말고, 같은 토템 족의 여성과 성관계를 금기시하는 타부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일치시킨다. 토테미즘은 유아기로 귀환하며 토템동물은 아버지와 동일시된다. 원초적 부친살해가 토테미즘의 핵심이며, 종교 형성의 출발점이 된다. 문화적 유산의 기원은 인간의 모든 감정에 거슬리는 끔직한 폭력과 부친살해 행위에서 도출된다 ( <토템과 타부>, 228)

그러나 프로이드의 입장 ㅡ족외혼 규칙과 토템동물에 대한 살해 금지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ㅡ에서 모든 종교에 대해 토테미즘이 그 토대라는 것은 구약의 계약사상에서 볼 때 근거가 없다. 유대교에서 토템을 찾기는 연목구어이다. 더우기 프로이드의 주장은 드뤼캠의 토템연구에서 전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프로이드의 고고학은 기원의 억측으로서 모든 문화와 종교와 예술의 기원을 교조주의적으로  왜곡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연구는 다른 신화와의 비교와 관계 속에서 독해되어야 하지 않나? 오이디푸스는 디오니소스와 관련하여 차이와 유사점에서 연구될 수는 없는가?

 

기원전 429년경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역병의 원인으로 자기고발을 한 오이디푸스 왕은  당대 역병으로 죽어간 아테네 영웅 페리클레스와 수 많은 군인들과 시민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통과 각성의 시간으로 인도하지 않았나?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수문광장에서 토라를 듣고 각성의 시간과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서 자책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어째튼, 드뤼캠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성의 이념과 이에 대한 제의적인 체험이며, 종교적 상징은 사회의 이념과 구조 그리고 문화적 실천의 토대가 된다. 거룩한 상징은 제의에 참가한 자들에게 전율적인 체험을 일으키며 이들에게 유기적인 도덕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토템의 사람을 치유경험과 보다 높은 새로운 존재로 고양시키며, 토템의 사회를 오히려 도덕적인 삶으로 특징 짖는다.
 
토템동물은 오이디푸스 신화가 아니라 제의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힘 (마나)의 상징적인 표상이며, 이러한 상징체계가 사회의 이념과 문화적인 삶의 형식에서 드러난다. 성의 이념과 제의적 체험이 종교의 출발점이며 상징체계는 삶을 충만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회학적 전망은 인간의 심리 또한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종교적인 집단표상의 영향권 안에 있음을 말한다. 신화연구에 대한 인류학과 정신 분석학의 차원은 오히려 사회학적인 종교해석에서 비판적으로 갱신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는 종교를 인간의 환상과 유아기적 보호본능을 위한 투사로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는 도덕과 사랑을 통해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세계관을 제공하며 종교의 원수로남는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며 환상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외부에 존재하는 과학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 심리학적 교조주의는 과학의 비판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더우기 모세의 집단 살해를 토템에서 돌출하는 것은 야훼와 이스라앨 백성의 계약과 사랑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서전승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프리카의 토템주의를 히브리적 사유에 외삽법으로 갖다 부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종교적 담론 형성과 삶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신에 대한 체험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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