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베드포드-스트롬과 공공 신학:
시민 사회와 해방
정승훈
이 논문은 하인리히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과 해방에 대한 필자 정승훈의 리뷰를 담고 있다. 2026년 서울 인터내셔널 컨퍼런스는 종교, 과학, 사회 생물학적 담론을 다룰 때 공공 신학과 해방의 공동 비전을 통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초록
다음 에세이에서 나는 하인리히 베드포드-스트롬의 해방의 공공 신학을 소개하고, 검토 하면서 설명할 할 것이다. 나는 그의 공공 신학을 강화하기 위한 건설적인 평가와 보완을 제시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에큐메니컬 공공신학을 통해 해방, 연대,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촉진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칼 바르트는 베드포드-스트롬이 루터의 두 왕국 교리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베드포드-스트롬은 비판 이론적 틀 안에서 생활세계와 지평 그리고 다원적 현실의 스펙트럼에 대응하는 해석학적 아치(arch)를 그리기도 한다. 그의 담론은 상황, 상호 맥락성, 보편성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명확 해진다. 이것은 공공 신학의 인식론을 설명하며, 담론적 해명과 세계 형성을 통해 추구될 수 있다.
시작하는 글
하인리히 베드포드-스트롬은 정치 철학, 사회 과학 이론, 생명 과학 및 생태학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의 진실성과 예언자적 소리는 바이에른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주교, 독일 개신교 의장, 현재 세계교회협의회 의장의 교회 리더십에서 드러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공공 신학을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 그는 공공 신학을 교회 일치운동의 틀 안에서 정치 윤리와의 관계를 통해 가장 잘 이해된다고 본다. 그의 신학적 기여를 통해 공공 신학은 오늘날 세계 교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의 보편적인 공공 신학을 분석하기 위해, 나는 진정한 민주주의 토대가 되는 정치 윤리와 함께 공공 신학을 논의 하겠다. 그리고 베드포드-스트롬이 어떻게 유비론적 담론을 통해 칼 바르트를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공공 신학자로 묘사 하는 지 살펴 보겠다. 그는 놀랍게도 루터의 두 왕국과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접근에서 신학적 유사성에 주목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의 혁신적인 입장은 그가 예언자적인 증언(파레시아)과 지혜를 다국어 능숙함의 형태로 종합하면서 전개하는데 있다. 그는 정치 신학과 종말론적 희망 사이의 연속선에서 공공신학을 제시하며 공공 신학에서 새로운 발전을 보여준다. 막스 스택하우스가 미국의 공공 신학을 대표하는 것하는 보수적 방식힉는 대조적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개혁과 변화 간의 변증법적 관계 측면에서 사회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둘째, 베드포드-스트롬의 생명공학 및 자연과학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베드포드-스트롬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신학자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본회퍼의 정치 체제에 대한 삼중적 접근(문제틀, 희생자의 연대, 저항)은 그의 화해윤리를 지적한다. 이러한 종합은 베드포드-스트롬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해에서 규범적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한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은 유전공학, 생물학적 결정론, 의학 윤리에 관련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셋째, 나는 상황성, 상호 맥락성, 보편성 간의 상호작용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베드포드-스트롬의 인식론을 해석학적 아치 (또는 스펙트럼) 아래에서 평가하고, 공공 신학의 담론을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한다. 공공 인식론은 대화를 명확히 하는 수단 으로서 다원적 현실에서 삼위일체 포괄주의 개념을 지지한다. 종교 간의 대화는 십자가와 화해의 입장을 기초로 다루어진다. 나는 세계 기독교의 탈식민지적 맥락에서 에큐메니컬 공공 신학을 위한 몇 가지 긍정적인 발전을 언급하며 결론을 맺고, 본회퍼의 통찰을 보충하려고 한다.
공공 신학과 정치 윤리
‘정치’라는 용어는 도시 국가나 공동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polis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폴리테이아)와 로마 공화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공공 사회(res publica)를 지칭한다. 이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시민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공공선은 현대의 자유 방임 자본주의, 식민주의, 또는 국가 사회주의로의 퇴보라는 부산물로 볼 수 없다. 사실, 정치 신학은 칼 슈미트의 정치 신학,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전체주의적 해석, 그리고 종교의 사유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공 신학의 중심 원리는 시민사회, 현대성, 민주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관점을 초월한다. 시민사회는 단순히 영국의 산업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소외된 사람들과 난민들과 연대하여 해방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다양한 현실을 확장하는 데 헌신한다. 그는 정치, 인권, 세계 평화, 이민, 난민 위기, 종교 간 대화, 생태학, 의학 윤리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정치 신학의 범위를 넓혀간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이러한 주제를 교회의 예언적 소명에서 공공 신학이 중요한 요소 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그는 공공 신학이 교회의 제자직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학문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윤리적 조언을 제공하고, 사회 정의를 옹호 함으로써 정치적 결과를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은 특정 정당의 프로그램이나 목표에 따르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식민지 이후,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적 포퓰리즘에 더 취약하다. 정치 포풀리즘은 시민사회에서 이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나가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정치적 포퓰리즘과 선동주의보다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위한 거버넌스의 맥락에서 분배정의와 회복의 정의에 기반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 공공선을 위한 민주주의와 정의를 이해하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적 입장: 에큐메니컬 의미론적 구성
베드포드-스트롬에 의하면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 개념은 하나님이 영적(복음)과 세속(국가)의 두 가지 뚜렷한 정부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해석한다. 그는 루터와 바르트를 통합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 대한 에큐메니컬 입장을 강화한다. 국가의 책임은 평화를 유지하고 약자를 방어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것이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국가의 목표는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과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다. 국가와 교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너님의 두 정부는 평화, 정의, 그리고 공공 안전을 증진하기 위해 함께 일한다.
루터는 16세기 자본주의, 특히 고리대금에 대해 공격을 했다. 그의 입장은 대교리 문답에서 제 칠 계명의 설명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맘몬을 섬길 것인가? 베드포드-스트롬에 따르면, “‘신학’—하나님에 대한 담론—은 인류의 역사적 경험인 노예제도와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그러한 억압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Bedford-Strohm, “Poverty and Public Theology: Advocacy of the Church in Pluralistic Society,” Liberation Theology for a Democratic Society, 153).
베드포드-스트롬은 루터의 경제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주장하며, 1524년에 발표된 루터의 경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저서인 “무역과 고리대금”을 분석한다. 루터의 예언자적 경제 윤리와 그의 세계 무역과 상업적 교류를 둘러싼 경제정의에 대한 평가를 베드포드-스트롬은 루터의 두 정부와 기독교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평가한다. 루터는 자유를 항상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루터는 두 가지 체제(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배치하고, 국가가 교회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와 경제의 유착을 비판했다(Politische Studien, 2013년 2호. 30-42).
빈곤에 대한 성서적 선택은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의 중심 기반이 되며, 이는 빈곤, 분배 정의, 난민 옹호와 같은 문제에 관련된다. 지중해를 건너기 위해 사력을 다 하는 난민들을 돕는 그의 개인적인 헌신은 그의 공적 증언의 두드러진 예이기도 하다 (“Solidarity after death threats against Bishop Bedford-Strohm.” LWF 2020년 1월 17일).
베드포드-스트롬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토라/정의(레위기 25:35–38)와 얽혀 있으며 (마태 19:21–22), 이는 연민과 연대를 위한 윤리적 요소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상호 인정에 관한 황금률 (마태복음 7:12)은 공공 신학을 위한 상호성의 기준을 정의한다. 따라서 공공 신학은 황금률의 윤리적 지침, 조언, 그리고 상호성과 인정을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예수의 제자에게서 믿음은 사랑 안에서 활성화한다 (갈 5:6).
베드포드-스트롬과 학제 간 소통능력
진정한 민주주의 의미와 종교의 공적 역할을 다룰 때, 베드포드-스트롬은 정치 이론가 및 사회학자들과의 공적 담론에 참여하며 그의 학제 간 능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종교에 대한 전환을 고려하며, 하버마스는 종교의 공적 역할과 삶의 의미를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베드포드-스트롬은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자인 호세 카사노바의 연구를 인용하며, 세속화 이론에서 종교의 부활과 현대 민주 사회에서의 공적 역할의 전환에 주목한다 (“Nurturing Reason: The Public Role of Religion in the Liberal State”).
그러나 베드포드-스트롬은 성서의 자료가 ‘대화를 중단시키는 요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리처드 로티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 성서의 이념은 지적 신뢰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 공적 담론에 끼어들어 독단적으로 강요될 수 없다. 로티의 관점을 바탕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이 공적 소통의 규칙을 인식하고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주장을 평가한다: “‘공적 이성의 개념’은, 신성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지간에, 공적 담론에 대한 기여를 검토해야 하며, 이는 계몽된 이성과의 일치 여부로 측정된다." "이러한 합리성은 민주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Rawls, The Idea of Public Reason Revisited, 573-615).
존 롤스는 종교의 공적 역할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은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는 19세기 기독교의 반 노예제 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시민권 운동이 미친 중요한 영향을 인식하고 있다. 종교적 신념은 정치적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합리적 개념과 비교할 때 기본적인 헌법의 원칙을 지지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공공 신학의 참여
베드포드-스트롬은 공공 신학을 민주적 참여로 정의하며, 성서 신학의 원칙과 이중 언어 능력, 그리고 학제 간 특성을 결합한다. 이중 언어 능력은 비신학적 분야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고 참여하는 지적 노력을 말한다. 이 접근 방식은 그가 예언자적인 측면과 공공 신학의 맥락 간 상호작용을 인정하면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뒷받침한다 (“Engagement Für Die Demokratie.” Position Beziehen, 111–22).
베드포드-스트롬이 민주적 참여를 위한 공공 신학을 구성하는 데 디트리히 본회퍼의 영향이 드러난다. 본회퍼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타인을 위한 이익과 그들과의 연대 속에서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형성함으로써 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이며 세상의 주님이다.
따라서 교회는 정치적 문제를 다룰 책임이 있다. 이는 복음의 해방의 메시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화해시켰다는 바울의 주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현실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베드포드-스트롬에게서 정치란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 중요한 측면으로 반성되며, 이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탐구한다.
화해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공공 신학은 엘리트 특권과 사회적 기반의 약화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계층들과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를 새롭게 하려고 한다. ‘화해와 민주주의’ 입장은 불평등 완화를 위한 노력을 지지하며, 포용적인 연대를 구축하고, 시민들이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인정 정치를 특징지으며 진정한 민주주의 개념의 기초가 되며, 민주주의의 퇴보에 반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사회의 공적 종교는 세속화와 사적화에서 탈사적화와 사회 변혁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는 공적 및 초국가적 글로벌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실제로, 베드포드-스트롬은 정치 신학에서 시민 사회와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초기 발전 과정에서 정치 신학은 토마스 홉스의 국가 이론 (리바이어던)과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히틀러의 파시즘적 법적 토대를 놓은 법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 신학의 전체주의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몰트만의 공적 신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의 후반에 나타나며, 공공 신학의 의미에 대해 논의한다. 특히 몰트만은 식민지 이후의 공공 신학의 의미와 탈식민지 형성에서 나타나는 세계 기독교에 대해 반성한다 (Moltmann, God for a Secular City, 6-17).
에큐메니컬 유산: 마르틴 루터와 칼 바르트
베드포드-스트롬은 루터, 바르트, 본회퍼를 언급하며 그의 공공 신학을 발전시킨다. 나는 이 신학자들을 활용하여 베드포드-스트롬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를 미국의 청중과 동 아시아와 연결 지으려고 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칼 바르트를 에큐메니컬 환경에서 공공 신학의 가장 저명한 실천가 중 한 명으로 본다. 공공 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에서 베드포드-스트롬은 루터의 두 왕국 교리를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모델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두 모델의 공통점이 교회와 교단의 장벽을 초월하여 교회의 일치성을 촉진한다고 말한다.
이는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 교의학>이 교회일치 운동을 목표로 한다는 말에 공명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회 및 정치적 상황과 연결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볼프강 후버는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주권 개념과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을 심도있게 분석했다.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국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두 왕국의 시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의 시민이다. 그리스도의 주권 교리는 그리스도가 국가 자체의 기초가 되는 것보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르트가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후버는 바르트가 루터의 두 왕국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Huber, Kirche und Öffentlichkeit, 458).
필자는 칼 바르트 전공자로서 볼프강 후버와 동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집중은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며, 국가는 하나님의 특정한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주권 패러다임은 교회와 국가의 공동 책임을 강조하며, 이는 교회와 국가 간의 공동 책임을 부각시킨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의 테제 14). 루터의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통치 개념은 두 왕국에 기초하고 있으며 (창조의 중요성에 중점을 두고), 초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혼란의 주범인 고리대금업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 루터의 이성 및 자연법에 대한 강조와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 모델 (화해론에 기초한)은 자본주의의 과도하고 탐욕스러운 질서와 국가 사회주의의 전체주의에 대한 예언적 비판을 수행한다.
칼 바르트와 공공 신학
베드포드-스트롬에 따르면,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정치 윤리는 특정 역사적 경험과 상황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변증법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전환점에서,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 (totaliter aliter)과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 은 바르트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의 신학의 스승들이 독일의 전쟁정책에서 보였던 순진한 열광에 깊은 실망을 표현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독일 민족주의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경향에 맞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길들여진 신들을 우상과 민족주의적 종교의 투영으로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은 강력한 그리스도 중심의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아리안 영웅주의와 나치즘에서의 독일 우월성에 도전했다.
바르트의 작업을 바탕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바르트의 저서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1946)를 해방과 이중 언어를 위한 공공 신학의 고전적인 예로 분석한다. 바르트의 유비론적 방법은 교회가 공적 영역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성서의 윤리적 이념을 세속의 세계에 적용 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는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논의를 세속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 텍스트는 바르트를 전위적인 공공 신학자로 특징 짓는다.
베드포드-스트롬은 바르트의 정치 윤리를 언급하면서,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 지배의 원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시민 사회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시민 사회와 교회의 중심점이며, 이는 하나님의 세상과의 화해라는 현실을 증언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추며 정치적 책임을 공유한다.
나는 이것이 화해와 종말론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유비론적 담론이며 예언자적 내러티브 (예기적 비유 또는 네러티브)로 본다. 따라서 바르트가 예수의 세속적인 비유와 함께 유비를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속의 언어로 사용되는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의 미래의 사건을 예기하는 담론으로 정의된다. 나는 이것이 화해와 종말론 간의 상호작용에서 비유적 담론을 구성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유비론과 세속의 언어의 비유는 베드포드-스트롬이 그가 "이중 언어성"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나간다. 이것은 성서의 언어와 세속 담론의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세속적 담론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언어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다 언어적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바르트의 유비론은 자연 과학, 기술, 비교 종교, 생태학과 같은 주제를 다룰 때 하나님의 통치의 보편적 지평을 열어준다. 이 영역들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소통을 위한 특별한 방법이자 독특한 길들로 작용할 수 있다.
바르트의 공공 신학은 기독교 복음이 사회적 기능과 영향력, 특히 자유와 혁신과 관련하여 다양한 소통 채널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번역되고 활용될 수 있는지를 분별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신학 담론에 의미 구성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재해석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미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정치적 영역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평가는 정치적 분야에서 기독교의 판단, 목표 및 이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유비의 정치적 해석학은 차이가 있음애도 불구하고 복음의 정체성의 기본적인 측면으로서 유사성을 포함할 수 있음을 제안한다.
특정한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가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독립성과 임의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본다. 국가는 교회에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 상응, 또는 비유로 특징된다.
바르트의 유비론적 사고는 그리스도의 화해에 따라 교회와 세상을 통해 하나님이 보편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의 신적 소통의 세계 역사에서 화해 모델은 루터의 하나님 보편적 통치 교리와 일치하며, 이는 두 가지 독특한 전략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치적 유비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롭고 신성한 본질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헬무트 골비처는 바르트의 제자로서 정치적 유비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치 사회적 입장을 표현했다. 그는 연대, 시민 사회의 주도권, 민주적 사회주의를 통해 해방을 이루기 위한 예언자적인 공공 신학을 옹호했다 (Gollwitzer, “Kingdom of God and Socialism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이러한 바르트의 관점은 루터와 본회퍼의 전통에서 바르트를 재해석하는 베드포드-스트롬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바르트의 정치적 유비와 이중 언어 능력은 교회의 주요 초점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중심은 항상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취약한 개인들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예수의 태도가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를 선호하는 바울의 논리에서 기준이 된다는 점에 착안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낮은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 그리고 없는 것들을 선택하신다” (1 Cor 1:28). 예수 그리스도는 억압받고 잃어버린 무리에게 연민을 보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드는 분이다 (Parteigänger der Armen, KD, IV/2:180).
예언자적 증언, 반성적 성찰, 그리고 민주주의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에 대한 기여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예언자적 증언을 파레시아와 숙고(지혜)의 융합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그의 교회일치 공공 신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베드포드-스트롬의 예언자적 증언은 바르트와 본회퍼에게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예언자적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에 참여한다. 인간의 언어는 파레시아를 통해 강화가 되고, 말씀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된다. 대담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담론은 진정한 설교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구별 지우며, 이념적으로 왜곡된 자기 의로움, 잔인함, 착취의 형태에 반대한다 (CD 2/1:231-32; CD 4/2: 442).
마찬가지로, 본회퍼는 그의 미완성 작품인 <윤리학>의 보충 부분에서 담대하고 사려 깊은 예언자적 발언인 파레시아에 대해 성찰을 한다. 이는 대담한 비판과 숙고를 포함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러한 질문에서 본회퍼는 진실을 말하는 개념을 탐구한다. 예언자적인 담론은 두려움 없는 비판과 저항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본회퍼의 독재에 대한 저항과 박해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베드포드-스트롬은 포괄적인 예언자적 증언이 파레시아의 정신으로 수행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권력에 대한 순수한 비판적 태도를 초월하라는 코넬 웨스트의 호소에 공명하며, 일방적인 비판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자기 의로움이나 위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독일교회는 세계의 변화를 저소득층의 일상적인 경험에 통합시키고 이들을 위해 연대한다. 따라서, 공적 표현인 파레시아를 이중 언어 능력과 사회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의식적인 이해와 통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베드포드-스트롬은 에바 하라스타에게 동의하며, 바르트의 논문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가 교회와 시민 사회 사이를 탐색하는 데 있어 이중 언어 사용과 공적 증언에 영향을 미칠 잠재력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라스타에 따르면, 바르트는 그의 논문 결론 부분에서 기독교의 언어를 세속적 언어로 변환하는 방법의 예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공공 신학 프로그램처럼 읽히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모든 예들에서 “바르트는 성서에 드러난 기독교 공동체의 한 측면을 언급하여 시민 영역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선포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Harasta, “Karl Barth: A Public Theologian? The One Word and Theological Bilinguality,” 188-203).
하라스타가 바르트를 이중 언어 능력과 번역을 가진 신학자로 소개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기독교적이고 영적이며 예언적인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테제 27.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하라스타에 의하면, 시민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나라와 그의 화해를 공동 책임으로 증언하는 두 가지 유사성을 갖는다. 이 점에서, 나는 바르트가 이중 언어 능력과 번역 사이의 연결을 확립하여 의사소통을 향상시키고, 장자크 루소의 정치 철학을 고려하는 것을 본다. 바르트는 루소에 대한 깊은 연구를 했으며, 그의 자유로운 국가 개념(논문 28)과 시민 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인정의 정치에 대한 지지를 보인다.
이 관점은 베드포드-스트롬이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한 자신의 공공신학의 입장을 지지 해준다. 바르트는 루소의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에 대한 이중 언어 담론을 통해 법이 정치적 목적과 시민의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핀다. 바르트는 정치가 하나님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수단이라고 본다. 교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 사회는 진정으로 정의를 분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방향과 지침을 구현하는 데 헌신 해야한다.
문제틀: 미국의 글로벌 공공 신학
미국의 공공 신학자인 막스 스택하우스와는 달리, 베드포드-스트롬의 입장은 독일 고백교회의 예언자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드포드-스트롬과는 달리, 스택하우스는 죄의 깊이 때문에 도덕적 지침을 통해 조그만 개선에 만족한다. 스택하우스는 경제 글로벌 질서의 현상 유지를 수용한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은총이라는 미명 아래 신자유주의적 경제적 세계 질서를 정당화한다. 그의 관점에서 글로벌 공공 신학은 예언자적인 비전을 통해 급진적인 갱신을 촉구하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스택하우스에게 경제적 세계화의 메타 담론의 서구의 진보의 역사는 심지어 성서의 섭리적 은총 개념과 동일시된다 (Chung, Hermeneutical Theology and the Imperative of Public Ethics, 264).
베드포드-스트롬은 그의 글 "공공 신학과 정치 윤리"에서 스택하우스의 관점을 인정하며, 단기적인 도덕적 유효성에 대해 우려한다. 작은 단계들의 개선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날 더 근본적인 변화의 필수적인 전주곡으로 볼 수 있다. 스택하우스의 정치 경제 영역에 대한 최소한 접근 방식과틑 대조적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세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베드포드-스트롬은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사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의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해방의 공공 신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공 신학자 존 드 그루치의 관점에 일치한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저항의 정치 신학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공공 신학으로의 전환을 설명한다. 게다가, 베드포드-스트롬은 보편적인 에큐메니컬 전체성을 위해 상황-상호맥락 상호작용의 지평에서 해석학적으로 움직인다. 해석학적 아치 또는 스팩트럼에서 그는 다양한 맥락과 상황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하나님께서 각자의 특정한 정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상호맥락의 구분은 포괄적인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접합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공공신학의 인식론은 창의적인 기여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상황의 소통에 주목하고 상서적인 화해의 삶의 세계에서 보편적 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해방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통전적인 관점을 이끌어낸다 (“Nurturing Reason: The Public Role of Religion in the Liberal State.” in Liberation Theology).
인간 존엄성: 자연 과학과 기술
베드포드-스트롬은 공공 신학의 관점에서 기술, 자연 과학, 생명 의학이 탐구의 영역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에 대해 검토한다. 복제, 유전 공학, 안락사, 배아 줄기세포 연구,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를 고려할 때,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생명의학 윤리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인류세(Anthrpocene)는 공공 신학이 윤리적 고려를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질문이나 문제틀의 체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옹호이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인간 존엄성은 단순히 이성과 합리적 사고의 능력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 기초는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에 있다. 신약 성서는 죄의 용서에 큰 중점을 두며,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수용을 재확인한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생명의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피조물의 경험적 가치나 도덕적 추론을 넘어선다. 생명의 하나님은 자비로 인간을 그 자체로서의 목표로 창조하고, 생명 자체에 존엄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자연에 대한 신학(Ian Barbour와 Ted Peters)을 공공 신학 내에서의 인식론과 실천적 지혜와 결합하며 생태학적인 책임을 가진 과학의 공공 신학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인간이 지구를 경작하고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구가 다른 생명체들과 자연을 나누는 대가로 그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생명공학은 공공 신학에서 인간 존엄성의 질문, 문제화, 담론적 명료함 및 갱신 측면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베드포드-스트롬은 본회퍼와 공공 신학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을 시도하며, 그를 생명공학과 대화하게 한다 (“Biotechnology and Public Theology: A Dialogue with Dietrich Bonhoeffer,” Liberation Theology).
베드포드-스트롬은 미국의 대통령 빌 클린턴의 말을 인용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한 언어를 배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물학적 언어이다—이것은 인간 유전체를 해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포드-스트롬에 의하면 성서의 언어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것이 우리의 유전자나 DNA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염색체, DNA, 또는 핵 세포 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DNA 결정론의 중심 교리와는 대조적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포괄적인 비전을 주장한다. 그것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긍정"의 깊은 의미를 포함한다. 그는 대중의 삶에 관련된 기본적인 윤리 문제를 다루는 중요성을 말한다. 그는 다문화 사회의 도덕적 생태계에서 종교 전통의 중요성을 설명함으로써 다국어 소통을 위한 자원을 육성하기도 한다.
게다가, 베드포드-스트롬은 기독교 신앙의 전통이 다른 학문 분야와의 학제간 협력을 통해 현대 문제에 대한 지침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를 언급한다. 특히, 그는 교회, 사회, 그리고 과학 공동체와의 비판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말한다. 따라서 베드포드-스트롬의 공공 신학의 정의는 본회퍼가 제안하는 용어로 표현된다 (“Dietrich Bonhoeffer als ȍffentlicher Theologe,” Evangelische Theologie, 329-341).
만일 공공 신학이 세상에 대한 순수한 적응으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성경 전통에서의 예언자적 증언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근본적으로 세상에 반대만 한다면, 그것은 또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즉 모든 미덕과 한계, 결점을 위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삶의 의미에 통합되며 구체화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성서의 언어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것이 우리의 유전자나 DNA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염색체, DNA, 또는 핵 세포 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DNA 결정론의 중심 교리와 대조적으로, 베드포드-스트롬은 인간 삶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포괄적인 비전을 주장하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예"의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공공 신학이 세상에 대한 순수한 적응에 거절하며 또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영지주의 태도를 갖지도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모든 미덕, 한계, 결점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지, 인간의 기술적 능력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역할을 하지 마시요!
디트리히 본회퍼와 공공 지침
생명공학의 약속은 상업화를 통해 소비자 지향성과 사회적 위계로 전환되고 있다. 베드포드-스트롬은 인간의 존엄성과 공공 윤리 지침에 대해 논의할 때 본회퍼의 논문 "교회와 유대인 문제"(1933)를 전면에 내세운다. 본회퍼는 교회가 국가와 대처하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제안한다. 첫 번째는 국가의 활동이 도덕적으로 의문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조사/문제 제기). 두 번째는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회의 피해자들을 섬기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원리). 셋째는 실질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국가의 바퀴 아래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붕대를 감고 저항을 위해 바퀴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Bonhoeffer, Berlin 1932-1933, 355-6).
삼중적인 접근법에서는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를 고려하며, 파레시아의 예언자적 담론을 성찰적인 숙고에 통합한다. 확실히, 기술의 세계를 신이 없는 세계라고 언급할 수는 없으며, 과학자들을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으로 비난할 수도 없다. 교회는 과학자들을 신앙의 적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과학의 수용은 사실에 대한 '비굴한 태도'로서의 수용이나 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공공 신학적 인식론을 통해 안내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질문, 비판적 거리, 연대, 그리고 신학적-윤리적 갱신을 포함한다. 교회는 다른 존재의 책임이 있으며, 국가 사회주의, 홀로코스트, 볼셰비즘, 아파르트헤이트, 기독교 민족주의, 후기 자본주의의 생태학적인 황폐화,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과 같은 비인격적 힘들이 드러내는 악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해야한다.
교회가 이러한 비판적 검토에 참여한다면, 교회는 국가의 과도한 법과 질서 개입에 맞서는 본회퍼의 고백적 저항 개념을 구현하게 된다. 본회퍼의 저항의 정치학은 고통받고 희생된 이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들의 삶의 조건을 유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의무를 일깨운다. 놀랍게도 본회퍼는 그의 미완성 저서인 《윤리학》의 "유산과 부패"라는 장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상을 파괴로부터 지키는 억제자의 현실 (덷후 2:7)을 고려한다. 억제자는 악의 세력에 경계를 두며 개인이 심연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다.
내가 보기에 제약자또는 억제자의 현실은 율법의 제 1 기능 또는 자연법의 틀에서 파악될 수 있다. 본회퍼는 율법의 첫 번째 사용이 복음에 봉사하는 것으로 말한다. 본회퍼의 저항의 정치학은 피해자의 계보학적 관점에서 이해되며, 이는 아래로부터 즉 미미한 존재와 억압받는 자의 시각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을 떠날 때 본회퍼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약탈과 착취, 그리고 강한 자들의 부와 부패에 대해 침묵했다” 말한다 (Bonhoeffer, Ethics, 115)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는 공공 신학이 기독교 신앙의 성서적이고 고백적인 전통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 태도에 뿌리를 두도록 장려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회상적 이성을 암시하며 역사와 사회에서 묻혀버린 희생자들의 대량 고통을 기억하는 데 있어 회상적인 근거를 내포한다.
이는 미국의 복음주의자 에리히 메타삭스가 본회퍼를 이용하여 미국 복음주의 민족주의를 지지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메타삭스는 극우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어 있다 (Metaxas, Bonhoeffer: Pastor, Martyr, Prophet, Spy). 메타삭스는 더 큰 선을 위해 폭력과 심지어 기만을 사용하는 것을 확언하며, 본회퍼가 히틀러에 대한 반대에서 폭력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는 본회퍼의 유산을 왜곡하며 극우 정치와 기독교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교회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Metaxas, Letter to the American Church). 메타삭스의 조작은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한 기만의 공리주의적 정당화에서 관찰된다. 이는 분명히 전체주의 권력 아래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과 연대하는 본회퍼의 예언적 태도와는 정 반대의 방향을 보인다.
담론적 명료성: 상황-보편-상호맥락
남아프리카, 브라질, 심지어 르완다와 같은 나라들에서 시민 사회는 서구 부르주아식의 자유방임 자본주의 (존 스튜어트 밀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다윈주의)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스펜서의 사회적 다윈주의는 자연 선택, 치열한 경쟁, 백인 인종차별, 문명선교, 성차별, 우생학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신 자유주의 글로벌 경제와 심지어 전투적인 무신론적 입장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유전적 결정론적 관점에서 다시 재발한다.
이에 대해, 공공 신학은 그 본래의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해방으로서 오래된 식민지적 개념인 자유 방임 자본주의와 형식적인 자유 민주주의에 저항한다. 공공 신학은 시민 사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해방적인 프로젝트로서, 스킬라의 반 근대성의 극점과 카리브디스의 자유방임의 극 사이를 항해한다. 이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이 해방과 연대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장소가 되도록 하는 사회 윤리적 방향을 제시한다 (“Braucht Die Zivilgesellschaft Die Kirche?,” Position Beziehen, 34-35).
에큐메니컬 공공 신학은 두 가지 특징으로 설명된다. 하나는 지역적 상황에 대한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인정 정치에 대한 강조이다. 상황의 측면은 보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대신, 이는 상호 연결된 다양한 맥락, 즉 상호 맥락성을 매개로 한다.
상호 맥락성에서 다양한 상황들이 서로 매개되고 작용하며 각자의 경험과 세계 형성을 나누기도 한다. 각 상황은 고유한 의미, 도덕, 그리고 정체성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맥락은 침전, 편견, 그리고 모호성에 영향을 받기가 쉽다. 따라서 다양한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재적 비판과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모든 장애물과 불명확성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담론의 명료화는 보편적인 성격이나 보편적인 전체를 고려하여 공유된 목표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
필자가 볼 때 인식론적 표현이 상황적-상호맥락적 틀에 자리 잡는다면, 교회의 보편성은 실현될 수 있다. 에큐메니컬 공공 신학을 강화하기 위해, 나는 역사적 궤적을 (상호) 맥락과 보편성의 인식론에 기반한 담론 명료화 방법의 발전으로 특징짓는다. 이러한 담론적 방식과 해명은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과는 달리 공공 신학의 정체성, 중요성 그리고목적을 결정짓는 매력적인 특징일 수가 있다. 공공신학은 해방이나 정치적 책임을 독점하지 않는다. 하나의 해방신학이나 하나의 정치신학은 상황 맥락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볼 때 불가능하다 . 공공신학의 인식론적 접근은 화해의 성서적 생활의 세계와 세계 해석의 관련성과 일치할 수 있다 (Contextuality and Intercontextuality in Public Theology, edited by Heinrich Bedford-Strohm, et al. 5–9).
에필로그: 의미 구성적 반성
공공 신학의 해석학, 또는 담론적 해명은 시간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파레시아의 담론 윤리에 대한 본회퍼의 성찰을 통합함으로써 향상될 수 있다. 진실한 말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삶의 연결이라는 살아있는 맥락 속에 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기독교의 탈식민지 콘텍스트에서 니타나는 성서언어의 번역과 해석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것은 서로 갈등하는 종교로 가득한 세상에서 취약하고, 배제되며, 방어할 수 없는 이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평가를 포함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화해의 관점에서 상황의 맥락은 보편적인 관점에 대해 반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고유한 삶의 세계의 일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 존엄성과 같은 보편적인 원리에 기반하여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보편적인 것은 사회 해석학적 아치나 스팩트럼 아래서 의미와 도덕성을 뒷받침하며, 동시에 문화적 습관이나 퇴적물에 뿌리내린 불투명성과 편견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원천 역할을 한다. 상황성의 개념은 다양한 맥락에 열려 있다. 이는 평화, 공동선을 위한 정의,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에서 상호 인정을 위한 정치라는 보편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이 맥락성과 보편성에 대한 관점은 교회의 보편성 아래에 서 있다. 그것은 유럽 중심 담론의 스킬라 (“기독교적 서양문화” 또는 시민 종교)와 그런가하면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해체주의에서 문화 도덕적 상대주의의 카리브디스 사이를 항해한다.
나는 공공 신학의 인식론을 ‘십자가-화해’라는 이중 구조를 강화하는 사회학적-해석학적 아치로 정의한다. 이것은 대안적 근대성의 틀 안에서 시민 사회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탐구한다. 근대성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다차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대안 근대성을 위한 사회학적 논쟁은 글로벌 교류와 네트워크 형성에서 공공 신학을 재활성화 해줄 수가 있다.
베드포드-스트롬에 따르면, 종교 간 대화는 공공 신학의 필수적인 장이 된다. 이것은 예수의 삶의 중심에 있는 인식, 평화, 환대, 겸손을 통해 공동선을 향한 윤리적 태도와 상호 학습을 강화해준다. 종교 간 대화는 문화적 갈등과 종교적 불관용으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Position Beziehen, 81).
본회퍼는 이미 1928년 2월에 작성된 편지에서 간디와 부처의 세계에 대한 그의 종교 간 관심을 말한다. 다른 편지(1934년 5월 22일)에서 본회퍼는 "이방"의 영역이 독일의 공식 국가 교회 전체보다 더 많은 기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베드포드-스트롬은 화해와 비교 종교에 대한 의식적인 성찰에서 순수한 상대주의와 교조적 절대주의를 피하는 삼위일체적 포괄주의 모델을 옹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종교 간의 대화에서 진정한 교회 참여의 기초이다. 우선, 교회는 종교 간의 차이를 상호 학습과 존중을 통해 인식하며, 단순히 상대주의적 총체화를 통해 그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 (“Public Theology and Interreligious Dialogue,” Liberation Theology for a Democratic Society, 224-27).
둘째로, 삼위일체 포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세상을 향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입장은 볼프강 후버가 설명한 대로 몰트만의 희망 신학과 공공 신학의 종합에 공명한다. 몰트만에게 해방적인 형태의 공공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공적이고 비판적이며 예언적인 희망에 기초한다 (Moltmann, God for a Secular Society, 5).
결론적으로, 공공 신학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예언적이며 성찰적인 참여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적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희망의 신학이나 정치 신학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오히려 공공 신학은 희망의 정치 신학을 지속하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에 대한 독특한 인식론, 담론 해명, 그리고 세계구성을 위해 진일보 시킨다. 변화하는 글로벌 공공 상황 속에서, 다국어 능력과 다학제적 소통은 기독교의 증언과 교회의 소명을 위한 종교의 공적 역할을 재활성화 한다. 우리는 본회퍼와 함께 기도한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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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F News
Solidarity after death threats against Bishop Bedford-Stro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