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과 스피노자
헤겔은 기독교 신학에 매우 중요한 철학자에 속한다. 그의 <정신 현상학>은 언어 현상학으로 볼 수가 있다. 찰스 테일러가 그의 주저 <헤겔>에서 말한 것 처럼 절대 정신에서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은 서로 다른 삶의 형식을 가지며 언어의 사용과 규칙이 서로 다르다. 각각의 영역이 침해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다름이 다른 삶의 자리에서 언어적으로 파악된다. 예술 작품 자체가 의미있는 언어를 산출하기보다는 의미나 진리를 모방한다. 진리내용은 시에서 표현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다양한 생활세계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의 절대지는 다름을 인정하는 화해의 세계지평을 향해 열려있다. 물론 철학은 개념적으로 진리의 문제를 파악한다. 절대지는 칸트의 물자체나 본질과 현상의 이분화를 극복하는 인식론이지만, 이것은 무시간적이거나 닫혀진 체계가 아니라, 화해의 세계지평차원에서 다른 영역에 대한 인정을 담고 있다.
데카르트 이후 주객도식이나 인식의 이분화는 언어에서 극복된다. 이것은 변증법적 담론이론이며 의미와 개념의 되어가는 과정에 관여한다. 이것은 예나 시대의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볼 수 있고, 하버마스는 자신의 소통이론을 헤겔의 상호작용을 기초로 발전시켰다.
헤겔과 비판적 담론
헤겔의 현상학은 역사적으로 언어적으로 후설처럼 “사태자체로 돌아가는” 의미순환적 지평과 생활세계와 연관 될 수 있다. 헤겔에게 개념과 의미는 언어적으로 표현되며, 인간의 언어는 로고스이며, 존재에 대한 반성과 개념과 의미를 매개한다. 정신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며 언어는 정신의 현존재이며, 인간의 의식은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변증법에서 언어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에게서 절대지는 언어로 매개된 지식을 말하지 위대한 진리앞에서 침묵을 요구하는 신비나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초월적인 하나님이 언어로 매개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과 상관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헤겔은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을 그의 인정원리를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아남네스적인 반성은 인정원리로 기초되며, 그의 사회 철학의 모델은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서 자리매김된다. 회상과 기억은 언어를 통해 내면화 되고 더 나아가 비판적 담론으로 외재화되어 나타난다. 언어는 사고의 집이다. 기억과 회상은 서사시의 본래적인 언어이다 (Hyppolite, Logic and Existence, 30).
더 나아가 언어는 상호주관적 소통을 통해 사회적 담론으로 나타난다. 의미는 언어에서 표현되며 소통과 담론에서 개념화가 된다. 기호와 의미는 언어에서 연합된다. 우리가 사자란 이름을 말할 때, 이것은 사자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름의 부여는 사자를 단어로 대변하고 우리는 이름안에서 생각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언어는 대상을 대변하고 사고와 의식으로 이어진다. 언어는 아담처럼 이름의 부여를 통해 그 본질을 드러낸다. 언어는 정신을 매개하면서 의미와 진리를 드러낸다.
헤겔과 <라모의 조카>
<정신 현상학> 에서 이러한 언어의 비판과 저항은 디드로의 풍자극 <라모의 조카>에서 예속된 자들의 권리를 위해 나타난다. 이것은 당대 괴테에 의해 번역된 것인데 헤겔은 이 작품에 주목하고 프랑스 혁명을 귀족의식과 비천한 의식을 기초로 분석한다.
이전의 노동을 기초로 한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귀족과 비천한 자들의 대립을 통해 확장된다. 여기서 비천한 의식을 대변하는 <라모의 조카>에서 헤겔은 디디로로 상징되는 계몽철학을 넘어서는 당대 유명한 음악가 라모의 조카의 바가본드와 같은 삶에서 소외된 문화의 차원을 본다.
권력과 부에 연계된 귀족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헤겔은 <라모의 조카>와 같은 예속된 자들의 의식의 편에서 나타나는 혁명의 과정을 변증법적 담론으로 전개한다. 부유한 자들은 비천한 자들의 고통스러운 절규와 반란의 언어로 인해 이제 구덩이 없는 심연에 직면하고, 헤겔의 언어철학은 집시적인 이성의 권리를 옹호한다.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나는 반란의 의식과 고통의 언어는 이제 새로운 문화를 위한 정신의 매개로 본다 (Hyppolite, Hegel’s Phanomenology of Spirit, 403, 412).
이러한 헤겔의 해방의 담론은 아첨의 언어에 저항하고, 진리에 대한 정직한 태도를 의미하는 데,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키는 정신이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 신학에 기초한 파레시아를 의미한다. 파레시아는 아첨보다는 비판을, 자기이익보다는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다. 헤겔은 온전한 인정을 위해 시민과 하위 계급의 언어를 저항의 담론으로 사용 한다. 언어의 문화적 측면은 사회나 종교 또는 문학과 예술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며,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해방으로 드러난다.
헤겔과 앎의 의지
인간은 이념의 담지자이지만 지식과 자유 그리고 진리의 이념에 대해 충분한 실현을 하지 못했다. 절대이념은 지식 (진리)과 삶 (내적인 목적의 장소), 그리고 도덕적 노력 (선함)을 통합한다. 헤겔의 앎의 의지는 권력의지를 넘어서서 인정과 개념의 원리에 기초한 삶의 이성적 실현을 도덕적으로 수행한다.
개념적 입장은 인정의 원리에 공명하며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비폭력 즉 무해의 태도로 추구한다. 이것은 헤겔적인 의미에서 정언명법일 수가 있다. “개인과 사회를 인정과 창조성과 자유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무해의 토대에서 세워 나가라.”—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감히 알려고 하라”는 계몽의 전통에 기초한 헤겔에게 앎의 의지는 삶의 이성적 실현을 사회 안에서 추구한다.
헤겔: 개신교의 아퀴나스
이제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 (지성의 근원)을 기독교의 하나님 (화해)과 융합하려고 한다. 그러한 융합은 부동의 일자와 십자가 신학을 거쳐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 역사화된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철학적 신학의 길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칼 바르트는 헤겔을 “개신교의 아퀴나스”로 불렀다. 신학과 철학은 그리스도의 화해와 십자가 신학을 파악하는 데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대논리학>에서 전개하는 헤겔의 개념적 성찰은 단순한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신적인 논리 즉 창조이전의 내재적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삶으로 치고 들어간다. 역사의 과정에서 헤겔은 하나님의 화해의 길을 추적하고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려고했다.
아퀴나스처럼 헤겔은 신학과 철학의 접합을 추구하고 당대 쉴라 에르마허와의 논전은 그의 신학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와 더불어 스피노자의 중요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는 쉴라이에르마허와의 절대의존감정이나 성령의 경험주의와는 달리 화해의 변증법의 길을 간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연민을 갖는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비변증법적인 입장 즉 신과 자연의 동일성(deus sive natura)에 수긍하지 않았다. 헤겔은 스피노자를 쉘링과 유사하게 파악하는 데, 쉘링은 지성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다른 형태 안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신적실제를 표현했다. 이러한 동일성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스피 노자를 무신론이나 범신론으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무우주론(acosmism)으로 이해했다 (Hegel’s,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phy, ch.1 Spinoza).
이러한 스피노자의 무우주론은 막스 베버에게 심정윤리로 개념화되고 책임윤리와 함께 그의 종교사회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산상수훈, 유교의 정명사상, 불교의 대자대비, 힌두교의 아힘사 그리고 이슬람의 자선행위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합리성이 가져온 기술진보와 삶의 의미와 자유의 상실을 극복하려고 했다. 이것은 관료제로 지배되는 후기 자본주의 쇠창살 우리를 상징하는데 이것을 넘어서는 것을 베버는 세계종교의 심정윤리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베버는 헤겔이 스피노자에 대한 무우주적 사랑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헤겔이나 스피노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의 양태존재론과 데카르트
스피노자는 <윤리>에서 신을 절대적인 무한성으로, 무한한 속성들을 가진 실체로 정의한다. 실체는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통해 사유되며, 이것은 다른 개념을 요구하거나 또는 관련 되지 않는다. 움직임과 정지와 같은 속성은 인간의 지성이 신의 실체에 대해 파악한 것을 의미한다 ( “The Ethics,” A Spinoza Reader, 85).
스피노자는 신(능산적 자연)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동의 일자로 파악하고, 소산적 자연은 신의 속성(사고, 움직임, 연장)으로 채워진다. 자연은 모든 존재의 양태 (모드)를 포함한다. 스피노자의 양태 존재론에서, 인간은 신의 속성인 사고(res cogitans)와 연장의 사물(몸: res extensa)의 틀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제한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양태 존재론에서 지성은 의지와 욕망, 사랑처럼 자연의 영역에 속하지만, 지성의 모드는 의지나 욕망 그리고 사랑의 모드와는 다르며, 보다 우위에 있다. 몸과 같은 개별존재 (모드)는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서로에게 효과를 산출한다. 스피노자의 속성 (사고와 연장)의 보편적인 틀에서 물체의 양태들의 상호 연관성은 헤겔의 대자적인 계기처럼 타자와의 경험과 관계의 차원을 포함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결별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res cogitans)는 자연의 세계에서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의 연장(res extensa)과는 급진적으로 분리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되지만 몸과는 분리된 영혼이다. 영혼(의식)은 몸의 지각 (지각은 미혹할뿐이다)과 공유하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의 분열이 설정된다.
하나님(무한실체)은 인간의 의식안에 하나님 이념을 심어 놓았다. 인간의 본유관념(수의 개념, 이데아, 또는 신)은 객관적 대상을 인식할 때 감각에 의존되지 않으며 (경험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데카르트는 <제 3성찰>에서 하나님은 완전하며, 선하시며, 상위범주의 원인자로서 성찰한다. 신은 인간의 코키토를 확증해주며, 감각이나 지각을 통해 인간을 미혹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안에 신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며 이러한 개념은 신을 원인자로 요구한다. 신은 물체의 연장에서 모든 동작의 원인이 된다. 신은 인간의 관념을 통해 객관적 즉 실제적 존재로 성찰된다. 데카르트에게서 실체는 신과 인간과 몸으로 각각 사유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하나님 또는 자연”은 데카르트의 의식과 몸의 이분법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하나님만이 실체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의 속성(사고와 연장)안에 있으며, 아무 것도 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양태들은 자연의 세계안에 있으며 마음과 몸은 다른 방식으로 파악 된다 고 해도 분리되지 않는다.
설령 인간의 지성이 신과의 직접적인 연합을 통해 존재하고 무한한 이념을 생산 한다고 해도, 몸의 경험을 통한 감정은 여전히 마음에 영향을 미치며, 삶의 보존을 위한 의지와 확장의 활동(코나투스)은 여전히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과 더불어 있고, 모든 양태들은 신의 속성들 (사고와 연장)아래 상호 연관성에 있다 (A Spinoza Reader, x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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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스피노자: 기독교와 히브리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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