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비판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범주를 관계의 범주에 비해 우위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질이 아니라 관계를 우위에 놓고 아리스토텔레스ㅡ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전통을 뒤집는다 (Process and Reality, xiii).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론을 비판하고, 과정 철학을 유기체와 개별적인 계기들의 상호관계에서 발전시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내지 본질 범주는 존재와 연관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우위성은 하이트헤드에 의해 원자론적인 과정으로 오해되었다. 화이트헤드의 평가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와 실체는 데카르트의 원자론적인 코기토에 토대가 된다.
과연 그런가? 어떻게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존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그리고 4 원인에 의해 진행되는 변증법적 변화의 과정과 현실태의 완성과 덕의 목적론과 공공선을 토대로 가질 수 있는가?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변증법적 진행과정을 간과했다. 이러한 과정 인식론에서 힘과 에네르기아 그리고 변증법적 사유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실종된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의 형이상학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인식론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윤리와 정치학으로 발전시켰다.
더우기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형이상학>에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성장하며 접촉하며 순응하거나 부착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실체는 자연으로 불리며, 실체는 자체상 변화의 기원을 소유한다 (Metaphyiscs, Bk. V). 이런 측면에서 .<범주론>은 실체가 술어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콘텍스트와 상대적 관계와 대립 그리고 변화의 범주를 설명한다. 예를들면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의 여섯가지를 말한다: 생성, 파괴, 증대, 축소, 정소의 변화를 언급한다 (Categories, ch.14).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식론의 문제는 자연의 세계에서 보톰 업 방식을 취하고 진리의 상응관계를 우시아(본질)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의 관계를 보편적으로 그리고 유비론적으로 표현한다. 형상(건강)과 결여(질병)와 질료 (몸)과 같은 세 가지 원리는 역사적 영향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자연적인 관계와 동떨어진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존재의 지름길 내지 동일성과는 다르다. 질료의 잠재태의 능력 (potency)과 현실태의 관계는 유비론적으로 표현되며, 질료와 형상과 결여 그리고 움직이는 원인은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다. 코기토(잠재태)에 앞서 현실태가 존재한다. 제일 원인자는 생산한다 (Metaphysics, Bk. XII. Ch.5. 7).
아리스토텔레에게서 실제적이라는 것 (ὄν)은 많은 의미를 가지며, 해석에서 애매하거나 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유비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동일한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는 것과는 다르다 (강아지의 울음소리, 나무의 울음소리). 그런가하면 일반적인 용어가 모든 종에 적용되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소와 인간은 동물이다). 오히려 실제적이라는 단어 (ὄν)는 하나의 본성이나 원리를 지적하면서 의미의 다양성을 갖는다. 이것은 속성의 유비로 언급할 수 있다 (Metaphysics IX 1, 1045b27).
속성의 유비는 신을 언급할 때 신의 특질과 성품을 반성하고 기술하는데 적용될 수 있으며, 관계의 풍부함을 표현한다. 더우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에 대한 관조적인 참여와 신의 알레테이아/진리로 드러남을 탑 다운 방식으로 개념화했다. 지성이 인간의 삶에서 신적인 것이라면, 지성의 삶과 관조는 신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최상인 지성의 관조에 일치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신들에게 흡족하며 신들은 이러한 지성의 인간을 돌보며 이들에게 사랑과 존중으로 보상한다. 지성을 훈련하고 양육하는 자는 신들에게 가장 흡족하며 행복하다(Nichomachean Ethics, Bk. X.ch.7.8).
지성의 인간을 돌보는 신들은 일차 원인이자 부동의 동자인 신에 관련된다. 하나님의 활동은 모든 다른 지복을 넘어서서 관조적이며 인간의 가장 행복한 활동 또한 관조적이다. 지성의 관조에서 신으로 스스로 진리로 드러나며 인간은 여기에 참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항상 선한 상태 즉 보다 좋은 상태에 존재하며, 이것은 우리를 경이롭게 한다. 생은 하나님에게 속하며, 사유의 현실태는 생이며, 하나님은 현실태이다."하나님의 본질적 현실태는 지극히 선하고 영원한 생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존재이며 영원하며 지극히 선하시며, 생과 지속성과 영원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Metaphysics, Bk. XII. ch. 7).
특히 자연과학의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본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의 원리에 의해 수용되고, 벨의 공리에서 확정된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이나 뉴톤의 인과율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제했지만 영자역학과 진화에 대한 시스템적 접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새롭게 주목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탑다운 방식은 프로렙시스 즉 미래의 차원과 만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화이트헤드의 비판적 만남은 현상학적으로 프로렙시스적 해명을 요구한다.
프로렙시스 총체성과 탑-다운 방식
프로렙시스 원리는 탈근대적 총체성 (holism) 개념과 관련되며, 창조의 앙상블은 부분적인 것들의 총계보다 더 크다. 이것은 미래로부터 하나님의 창조를 지적하며 과정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행동을 탑 다운 방식에서 파악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진화의 과정과 동일시 되지 않으며,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미래를 기획하지 못한다.
후설에게서 프로렙시스는 미래를 예견하는 의식이며 과거와 현재의 의식과 반성에 의미론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프로렙시스는 생활세계와 더불어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확대해가는 미래 지향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생활세계 이론은 과거의 불명료함과 편견을 비판하고 전통과 문화 침전도에서 나타나는 독단주의와 습속 그리고 억압구조를 책임적인 비판과 해방의 기획으로 나간다.
또한 생활세계 이론은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와 전통에서 토대를 이루는 일반구조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공선과 협력을 지향한다. 이러한 차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회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또한 과정철학에서 간과해버린 문화 사회학적 환경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하나님이 스스로 나의 관조의 행위로 드러나고 내가 하나님의 영원성과 생에 참여한다면, 나는 현상학적으로 영원성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미래는 나의 예견하는 의식에 유비론적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아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으로 독해할 때 이것은 하이데거 처럼 인간 존재론에 국한 되지 않는다. 자연의 세계와 종교적 삶에서 진리의 드러남은 생의 출현과 연관되며, 신은 4원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지성의 관조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며 인간은 여기에 참여한다. 자연적인 삶에서 새로운 생의 출현은 일리아 프리고진의 소산구조에 비견될 수 있다. 비평형의 열역학 법칙에서 새로운 생은 앤트로피가 증가하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출현한다.
과정철학: 원인론과 한계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미학과 윤리와 종교적 관심을 자연 과학적 세계개념에 통섭시키는 이념체계를 구축했다. 과정은 시간적 변화와 상호연관된 활동을 의미한다. 관계와 참여가 부각되며 이행과 활동은 상호간의 역동적 사건과 진화의 역사에 묶여진다. 이러한 개념틀은 본질과 영구성에 비해 보다 근본적이다.
모든 사건은 콘텍스트에서 일어나며 사회적 콘텍스트는 개별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는 열려있고 비결정적이며, 실재는 우연과 창조성과 발생을 드러낸다. 잠재성은 시간 안에서 현실화되거나 그렇치 않을 수도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유기체의 철학이며 세계와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 견해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화이트헤드는 작용원인과 목적원인을 사용하고 현실적인 계기들에서 작용원인이 관여한다. 목적원인은 현실계기를 본질완성을 위해 이끌어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경험은 모든 계기들에 관여된다. 과거계기 (작용원인)에 대한 현재의 반응 (자기원인)은 목적원인에서 잠재성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을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 수용한다. 원인성은 과정의 복잡성을 의미하며 모든 새로운 계기는 작용원인의 산물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에서 나타나는 개별 계기의 자기창조 즉 자기원인을 말하며, 새로운 종합에 기여한다. 화이트헤드는 주관적 경험을 자기창조와 주관적 목적의 빛에서 심지어 동물이나 세포에게도 적용한다 (Process and Reality, 220).
이것은 범의식론 (판사이키즘) 또는 범경험주의로 불리는데, 그러나 세포의 오토포이에스에서 과연 의식과 경험이 인간의 관찰에서 확인되는 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일 경험이 인식과 관련된다면 세포의 경험은 환경과의 작용에서 볼 수 있지만 세포를 의식적 경험존재로 볼 수는 없다. 구조와 패턴과 과정은 살아있는 시스템과 오토포에이시스 패턴조직 그리고 물리적인 소산구조에서 드러나지만 경험과 의식은 뇌와 신경조직 그리고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세포의 "주관적 경험"과 목표는 환경세계와의 작용과 응답 즉 활동의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세포구조 안에서 자기세계를 산출하는 정보전달과 촉매 활동일 수 있다. 만일 자기세계를 산출하는 행동에 경험과 의식을 보편적으로 적용한다면 박테리아도 자기 조직과 구조를 산출한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자기 경험적이거나 의식적 존재가 아니다. 사실 인간의 경험은 언어와 의식과 사유에 연결된다. 판사이키즘이나 판경험주의에는 분노와 기쁨같은 감정이 포함 되는데, 무차별하게 세포나 박테리아에 인간적 관점과 감정을 부여하기 어렵다.
판사이키즘은 신을 세계를 산출하는 작용원인으로 파악된다. 신은 잠재태로서 원초적(primordial) 질서의 근거이며, 잠재적 관계들을 현실태가 되기 이전에 미리 구조화한다. 또한 신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며 새로움의 근거가 된다. 신은 모든 개별적인 실체들의 자기창조에 관여하며 새로움과 구조를 허락한다 (consequential). 생성은 현재의 합성으로 나타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신은 원초적-결과적 본성을 갖는다. 원초성은 세계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여전히 현실성을 결여한다. 결과적 본성은 소멸하는 개체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완성이다. 목적원인으로서 현재의 계기를 잠재성을 통해 목표로 이끌어가지만, 그 영향은 강요적이거나 결정적이지가 않다.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원초성과 잠재성에서 플라톤적인 신의 형상개념이 배여있다.
화이트헤드의 신에 대한 개념은 잠재태로서 원초적 질서의 근거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은 잠재태가 아니라 순수 현실태이다. 신은 영원하고 살아있는 존재리며 첫 번째 원인자로서 세계를 움직이고 생산하게 한다. 신은 세계를 산출하는 제일 원인으로서 작용원인이지만 인격적인 창조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는 달리 세계가 신을 창조하는 자연주의적 범재신론과 다르다. 신은 여전히 세계에 앞서있다.
<종교와 과학>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처럼 요약한다: 하나님이 영원하고 세계가 유동적이라면, 세계가 영원하고 하나님이 유동적이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한분이고 세계가 다수라면, 마찬가지로 세계가 하나이고 하나님이 다수라는 것과 같다. 세계가 하나님안에 내재한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세계안에 내재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한다면 마찬가지로 세계도 하나님을 초월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마찬가지로 세계도 하나님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자이며 다수로 생각된다면, 역으로 세계도 다수이며 일자로 생각될 수 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원초적-결과적인 본성은 세계의 원초적-결과적인 본성과 접합된다. 하나님은 위대한 동행자이며, 세게를 이해하는 동료 고난자이다. 신의 창조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창조적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세계는 신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는 세계와 인간의 불멸성이며, 인간의 진정한 운명과 위대함은 우주 안에서 신과의 공동 창조자에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자연주의적 범재신론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과 인간은 공동 창조자가 아니다. 신은 제일 원인으로서 세계와 인간에 앞서 존재하지만 인간의 이성(Nous)은 불멸하고 신성에 참여한다. 인간은 자연의 생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개념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며, 내적인 관계를 역동적으로 가지며 움직인다. 부동의 동자 신은 잠재태가 아니라 순수 현실태이며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은 살아있으며 선하고 영원하며 스스로 진리로 출현하며 (알레테이아), 인간은 여기에 참여한다.
사실,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개념을 근대과학의 뮬질론적 관점으로 오해하고 반실체론적 또는 반본질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근대의 과학에서 질료는 정적이며 수동적이며 다른 질료와 내적관계를 가질 수 없다.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을 보았고, <과정과 실재, 49, 78)에서 다음처럼 쓴다:
모든 근대철학은 세계를 주어와 술어, 실체와 질, 또는 개별자와 보편자를 통해 기술하는데서 곤경에 처한다. 개별자는 다른 개별자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파악되며, 이것은 데카르트의 주객도식에서 연장실체에 적용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오며, "일차적인 실체는 주어로 표명되거나 주어 안에 현재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하여 화이트헤드는 유기체 철학을 제시하고 존재가 다른계기에 현재하는 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평가는 전혀 맞지 없다. 심지어 하르트손은 화이트헤드를 변호하면서 이상한 말을 한다. 화이트헤드는 근대철학의 이기주의에 윤리적 저항을 하며, 모든 근대의 비도덕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에 의해 만들어졌다 (RFP 72)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윤리학과 공공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 (본체/본질)와 분리되지 않는다. 심지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일차실체는 명제에서 주체와 술어형식을 형이상학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오류가 형이상학적인 습관과 악을 만들어냈다고 비난당한다 (Process and Reality, 30/45).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은 자기 충족적인 현실태의 단위이며, 다른 실체와 내적인 관계가 없다. 실체는 우발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체상 변화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개념은 역동적이며 상호연관적이며 <범주론>과 <해석이론>에서 언어철학적 차원을 갖는다. 그의 에피스테메와 알레테이아 개념은 화이트헤드에게서 실종된다.
우시아는 존재하는 것 (einai)로부터 오며, 이것은 라틴어의 substatia와 더불어 본질(essentia)을 포함하며 화이트헤드의 계기 (entity)로 번역되기 어렵다. 다시말해 우시아는 현존재와 본질을 포함하며 우발성들이나 속성들에 대해 술어적으로 표현되지만 존재론적인 우위성을 갖는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범주와 속성을 통해서 선함으로 드러난다. 술어적으로 표현되는 속성은 우시아와 일치하고 상응할 때 비로소 진리가 된다. 우시아는 술어적 표현에 포로가 되거나 현재하지 않는다.
<형이상학 V, 1017a23-25>에서 본질적인 존재는 범주들을 통해 술어적으로 표현되며, 존재의 의미는 디양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인간" 본질은 개별인간 소크라테스에대해 술어적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주어안에 현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행동과 알레테이아
아리스토탤레스에게서 존재는 진리와 연결되며 영원한 동자는 진리로 스스로 드러나며 인간은 여기에 상응하고 참여한다. 이러한 탑 다운 방식의 진리와 존재론은 자연철학에서 특히 세포의 오토포에이시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세포의 기능과 목적은 협력하는 공생에 있으며, 세포의 본질은 활동과 역할에서 표현된다. 자연은 본질상 경리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져있다. 세포의 공생에서 이것을 본다. 세포 유기체는 공동진화하며 공생을 위해 합력하는 네트워크이다.
탑 다운 원인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오토포이에시스에 열려있으며, 세포와 같은 생물학적 시스템은 피드백과 순환적인 매개역할에서 스스로 자신의 유기체의 세계를 산출하는 생산성을 드러낸다. 세포의 세계는 효소의 촉매 작용과 세포의 순환적인 피드백과 재생산 과정을 통해 공생의 패턴으로 나타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로렙시스의 탑 다운 인식론은 오토포이에시스를 하나님의 미래로 부터 지속적인 창조의 과정으로 개념화할 수 있고, 과정철학과는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잠재성으로 하나님은 현실태의 결핍을 가지며 미래는 알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영원히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들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가능성과 미래를 완성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준다면 인간은 하나님에게 현실태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