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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양운덕 발제 (3): 메시아의 문과 카테콘

by 파레시아 2023. 4. 22.

프란츠 카프카와 메시아의 문 

 

* 어떻게 법의 문을 닫을 수 있는가?

이런 과제 앞에서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의 문을 닫기 위한 시도를 카프카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벤야민이 메시아적인 과제를 카프카의 알레고리와 연결시키는 시도의 하나로서,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를 메시아적인 법과 관련해서 독해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벤야민의 카프카 읽기를 아감벤의 틀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PP 267-270/172-174)


「법 앞에」는 “법의 문 앞에 문지기가 서있고 시골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는지 묻고 허락을 기다리면서 수년간 기다리다가 결국 쓰러지는데, 그때에서야 문지기는 그 문이 ‘그만을 위한 문’이었다고 일러주는”(PP 267/172) 내용이다. 이 우화는 매시아적 시기, 곧 의미 없이 효력을 행사함이라는 법의 상태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들어갈 수 없는 채 열려있는 문은 이런 법 상태의 조건에 대한 암호이다.

아감벤은 데리다를 비롯한 해석자들이 이 이야기를 법과 관련된 불가능한 임무 앞에서 시골 남자가 패배하거나 실패하는 우화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야기를 매듭짓는 구절에 주목해서 시골 남자의 의도가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HS 64) “이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아감벤은 법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점이 바로 법의 침해할 수 없는 권력이자 법에 특유한 힘이라면, 시골 남자의 모든 행동이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 결국 문을 닫도록 하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으로 보고자 한다. (HS 65) 

그리고 시골 남자는 결국 이런 시도에서 성공했다. 왜냐하면 비록 목숨을 대가로 바치긴 했지만, 오직 그를 위해서 열려있던 “법의 문을 영원히 닫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HS 65)

아감벤은 바인베르크가 이 수줍어하면서도 집요한 시골 남자에게서 “저지당한 기독교적 메시아”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 점을 실마리로 삼는다. (Weinberg, 1963, 130-1)

아감벤은 이런 해석을 일신교들이 메시아의 형상을 통해서 율법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과 연결시킨다. 
메시아의 도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법의 완성과 완전한 해소를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메시아--그는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 앞에 시골사람처럼 서있다--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감벤은 그가 이미 불확정적으로 유예된 법을 완성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다른 법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아포리아 앞에 있다고 본다. (HS 65)

아감벤은 이와 관련해서 (도래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Haggadah를 담고 있는) 15세기의 히브리 문서 가운데 한 세밀화에 그려진 장면,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도래하는 장면에 주목한다.

“메시아는 말(전통적으로는 말처럼 그려진 당나귀)을 타고서 성스러운 도시의 활짝 열린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문 뒤쪽의 창문에 비친 실루엣의 주인공은 문지기로 보인다. 메시아를 마주 보고 열려진 문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청년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이 인물의 정체가 무엇이든(아마도 예언자 엘리야 일 것이다) 그는 카프카의 우화에 등장하는 시골 남자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임무는 메시아가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준비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인 임무인데, 이는 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잠재성이 이 현실성으로 전환되도록 강제하는 전략을 교사provocazione라고 부른다면 그런 전략은 매우 역설적인 형태의 교사로서,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에 그리고 너무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누구의 입장도 허용하지 않는 문에 적절한 유일한 형태이다. 따라서 시골 남자(그리고 세밀화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청년)의 메시아적 임무는 바로 잠재적인 예외 상태를 현실화하고 문지기에게 법의 문(예루살렘의 문)을 닫도록 강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메시아가 일단 문이 닫힌 후에야, 즉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을 정지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HS 65-6) 복음서에서 예수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의 동문 즉 메시아의 문에 들어갔다.

아감벤은 이런 이유로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의미가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메시아주의적 맥락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도래하지 못하는 재림”(또는 “도래하지 않음이 도래한 재림”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이 이야기는 비록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실제로 어떤 것인가가 일어나는 지를 보여준다.”(HS 66; PP 270/174)

데리다의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주의는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의 날들로 수정되지만 이스라엘 국가를 메사아의 날들과 일치시키기도 어렵다.

허비츠는 『죽어가는 메시아의 형상』에서 유대 전통에서 메시아의 형상이 이중적이라고 지적한다. 기원전 1세기에 메시아는 ben Joseph과 ben David로 나뉜다. 요셉 집안의 메시아 ben Joseph는 악의 힘에 맞서서 싸우다가 죽고 몰락한다 (고난받는 종 또는 바코바). 다비드 집안의 메시아ben David는 승리하는 메시아로서 왕국을 수복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보통 이런 메시아적 형상의 이중화를 밀쳐놓지만,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하면서 유대 전통의 두 메시아를 그의 인격에 통합한다. (PP 268/172-3)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포스트 쇼아 신학에서 예수의 메시아 성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인가 아니면 이스라엘로부터 출현한 메시아를 두고 논쟁하면서 Ben David의 문제를 열어놓는다.

아감벤은 이런 맥락에서 카프카의 『노트Quadriano in ottavo』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메시아는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라야만 올 것이다. 그는 그의 도착 이후에만 올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이 아니라 바로 최후의 날에 올 것이다.” (HS 66; PP 270)

이렇게 볼 때 임재parousía는 예수의 다시-도래함, 곧 최초의 도래를 보충하는 두 번째 메시아적 사건이 아니다. parousía는 단순히 ‘현전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para-ousía는곁에para 있는 것ousia,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현전하는 것이고, 자신 곁에 있음이다. (TR 70/70) 이것은 무엇을 덧붙여서 완전하게 하는 보완도,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사후에 덧붙이는 보충도 아니다.

메시아적 현전은 그 자체로 자기 옆에 있다. 그것은 연대기적 순간과 함께 있지만, 그 안에서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변형해서 완성에 이른다. 방금 본 카프카적 신학의 사유는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으면, 벤야민이 모든 순간이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항상 이미’ 그의 시간을 마련하고, 그의 시간을 가지고, 그 시간을 완성시킨다.”(TR 71/71)

이런 메시아적 시간 경험을 안식일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Genesis Rabbah』의 저자는 연대기적 시간과 메시아적 시간을 혼동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안식일에 관한 오해를 살핀다. 창세기에서 안식일을 언급하는 구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2) 그런데 70인 역에서는 이처럼 완성과 중단이 역설적으로 일치하는 점을 피하기 위해서 첫 구절을 “일곱째 날”이 아니라 “여섯째 날en tē hēméra tē ektē”로 수정한다. 이 때문에 창조의 마무리가 다른 날(tē hēméra tē hebdōmē)이 된다.

『창세기 라바』의 저자는 이와 달리 연대기적 시간 안에서 그것을 수축하고 변형하고 매듭지음으로써 메시아적 시간을 펼치는 경험을 제시한다. “시간들, 순간들, 시각을 모르는 이는 세속 시간에서 무엇인가를 붙잡아서 그것을 성스러운 시간에 덧붙인다. 하지만 성인은 시간들, 순간들, 시각을 알고 있고, 좁은 틈으로 안식일에 들어갈 것이다.”(Genesis Rabbah 10,9; (TR 71/71-2) 재인용) 

이처럼 메시아적 시간인 안식일은 다른 날들과 동질적인 날 들 가운에 어떤 다른 날, ‘그 날’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 안에서 “좁은 틈새로” 시간을 붙잡고 그것을 완성하는 “가장 내적인 단절이다. (TR 71/71-2))

아감벤은 이런 메시아적 신학방식  에 함축된 이중 구조가 벤야민이 8번 테제에서 제시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예외 상태와 대립되는) “참된/현실적인 예외 상태”에 상응한다고 본다. (PP 270/174) 

그가 구상한 예외 상태는 그의 메시아적 왕국이기도 하다. 이것은 블로호의 <유토피아 정신>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지상에세 세워지는 천년왕국을 의미하는가? 숄렘은 주저한다. 오히려 메시아를 잉태하는 파국의 시대가 적절하며 메시아는 인간이 세우는 지상의 천년왕국을 통해 도래하지는 않는다.

어째튼 아감벤은 이런 패러다임이 종말eschaton을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본다. 그것이 역시적 사건에 속하는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종결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사건은 둘이자 하나인 형상, 두 명의 메시아라는 상이한 두 형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역사의 소멸에서 소멸되고, 다른 하나는 그의 도래 이후에 나타난다. 메시아적 사건은 이런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과 일치하지만 동시에 그것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시간 안에서 그것을 변형시키고 다르게 작용하도록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종말로 작용하는 이것은 벤야민이 “조금만 변화시킨” 것으로서 메시아적 왕국을 구성한다. (PP 270/174)

이런 메시아적 왕국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마련할 수 있을까? 벤야민은 반 파시즘 전선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시도로서 ‘현실적인’ 예외 상태를 추구한다. 이것은 기존 사회 구조를 대체하는 새로운 법질서를 내세워서 삶을 억압하는 형식이 아니라 법과 권력을 다르게 사용하고 배치하는 실험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런 벤야민의 시도는 바울의 메시아적 사고와 이어지고, 예외 상태를 지배하려는 카테콘에 맞선다. 
과학기술, 정치, 법, 문화, 삶을 더 완전한 것으로 대체하는 지배의 정당화가 아니라 그것들을 다르게 배치하고 오이코노미아 이후의 다른 삶, 삶이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자기 곁에서 고유한 형식을 마련하고 창발적으로 자기조직하는 양태를 제시할 것이다.
 
나가면서: 누가 메시아를 반기는가? 또는 카테콘의 친구와 적들
 
가) 누가 메시아를 반기는가?

과연 누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를 반기고, 그가 선물하는 새로운 시간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받아들일까? 교회? 국가? 신앙인? 개인들? 누가 메시아를 원하는가? 카테콘과 메시아 사이에서 우리는, 각자는 어느 쪽을 지향하는가?

카테콘은 지상의 삶을 옹호하고 메시아와 종말을 가로막는다. 현세적 삶을 질서와 안정 가운데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법의 지배가 멈춘 메시아적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가?
교회는 더 이상 메시아적 시간을 지향하지 않으며, ‘위대한 거부’를 통해서 종말론적 과제를 떠맡지 않는다. 구원의 오이코노미아를 짊어진 교회는 이 과정을 지속적으로 연장하면서 메시아적 시간을 저 너머에 유폐한다. 그러면 이 구원의 오이코노미아 과정은 언제 완성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법과 관련지으면 메시아는 법과 질서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정지, 법의 완성을 제시한다. 메시아적 상황은 명령, 금지, 지배와 예속의 공간이 아니다. 약함과 사랑에 바탕을 둔 터전ēthos이다. 메시아는 카테콘과 불법인 자가 내세우는 지상의 영원한 질서, 지상의 위조된 천국을 그 비 잠재성으로 되돌린다.

나) 카테콘의 적들
(1) 역사를 옹호하는 카테콘

이 점을 슈미트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논의를 정리해보자. 이때 두 가지가 문제되는데, 하나는 카테콘의 긍정적인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카테콘과 적그리스도의 투쟁이다.
일찍이 테르툴리아누스는 시간의 종말을 연기시키거나 멈추는 권력을 긍정했다. “우리는 세계의 영속성을 위해서, 사물들의 평화를 위해서 종말을 연기시키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고대의 전통은 슈미트 이론에서 그 정점에 이르는데, 이것은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기독교적인 국가 권력의 토대를 찾으려고 한다.(TR 103/ 109) “기독교 제국의 보편적인 특징은 그것이 결코 영원한 왕국이 아니며, 그것이 항상 그 고요한 종말뿐만 아니라 현재 시대의 종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연속성을 근거짓는 결정적이고 역사적으로 강력한 개념은 ‘저지하는 힘’ 바로 kat-echon이다. “제국”은 여기에서 적그리스도의 도래, 현 시대의 종말을 억지할 수 있는 역사적인 권력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한 말에 따르면 저지하는qui tenet 힘이다. (......) 나는 kat-echon이 역사의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세계의 종말을 저지할 수 있는 억지하는 힘에 대한 믿음은 유일한 연결고리로서 모든 인간 행동의 종말론적 마비로부터 게르만 왕들의 시대에 기독교적 제국의 위대한 역사적 권력을 이끌 것이다.”( Schmitt, Der Nomos der Erde, 1974, 43-44)

아감벤은 이런 해석이 카테콘을 정당화하는 근대적 해석들, 카테콘을 사실상 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임재를 지연시키는 것을 구원의 신성한 계획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들은 카테콘 덕분에 적그리스도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임재를 미룰 수 있다고 본다. “카테콘은 바르게 이해하면 신 자신이다. (...) 세속적 힘의 문제가 아니고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것은 신성한 시간적 계획에 함축된 임재를 지연시키는 문제이다.” (Strobel, 106-7; TR 103/109 재인용)

슈미트는 새로운 제국인 나치가 역사의 종말과 허무주의로부터 인간과 역사를 지키는 임무를 떠맡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초래한 참혹한 결과나 제국의 패배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성을 보이지 않는다. 

나치의 ‘신성한’ 역사적 임무는 실패했더라도 이런 지향과 목적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로 남고 다른 국가들이 그것을 이어받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은 국가를 파국을 멈추거나 지연시켜야 하는 권력으로 생각하는 (홉스를 포함한) 국가이론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의 해석에 대한 세속화라고 본다. (TR 103-4/110)

이런 국가이론을 위해서 바울까지 카테콘인 국가 카테콘을 옹호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아감벤은 바울의 해당 구절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카테콘에 대해서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반대로 그것은 ‘불법의 신비’가 전적으로 계시되기/폭로되기 위해서 저지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7-9절을 다시 읽어보자.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parousía(effective presence)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katárgēsei 악한 자의 나타남parousía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아감벤은 anomía를 히에로니무스처럼 일반적인 악”이나 “죄”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바울은 메시아적 시간에는 율법이 작용하지 않고inoperante 작용정지katargēsis된 상태라고 본다. (TR 104/110)

아감벤은 바울의 술어들에서 활동함energein과 활동하지 않음katargēsis에 주목하면, 카테콘은 활동하지 않음katargēsis에 반대하고 그것을 숨기는 힘이라고 본다. 카테콘은 ‘무법의 신비’를 폭로함을 지연시킨다. 이런 신비를 폭로하면 법의 작용정지와 메시아적 시간에서 모든 권력의 실체가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TR 104/111)

아감벤은 카테콘과 불법인 자를 분리된 두 형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지만, 단일한 형상이 최종적인 드러냄 이전과 이후에 다르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세속 권력은 메시아적 시간의 실체적인 불법을 덮어 가리는 가상이다. “신비”가 폭로되면 가상이 벗겨지고, 권력은 불법인 자의 형상, 절대적인 무법의 형상을 떠맡는다. 

이 때문에 메시아적인 것은 두 임재 사이의 충돌에서 성취된다. 곧 불법인 자의 임재와 메시아의 임재가 있는데, 전자는 모든 권력을 이용한 사탄의 활동으로 두드러지고, 후자는 활동을 무위로 만든다.  아감벤은 바울이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를 상기시킨다.(TR 104/111)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린도 전서」 15: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종말론적 사유에서 메시아의 날들과 애훼의 날들이 구분되어 다루어진다. 요컨대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을 바탕에 두고 슈미트처럼 권력의 기독교적 교의를 정초할 수는 없다. (TR 104-5/111) 

(2) 적그리스도라는 카테콘의 적

슈미트는 바울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주인공 카테콘을 중심에 둔다. 그의 카테콘은 적그리스도를 적으로 여기고 적그리스도의 위험을 경고한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그리스도와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한다. “그는 친절하고 올바르고 청렴하고 합리적으로 행세한다. 그는 신이 창조한 세계를 모조하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처녀의 배에서 태어난다. 이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악마는 세계를 개조하여 땅의 모습을 변모시켜 자연을 복종시킨다. 이에 놀아난 인류는 그 작업을 목도한다. 자연은 정복당하여 안정의 시대가 와 신의 섭리를 대신해 모든 일은 예측되고 계획된다. 그는 마법같은 화폐경제에 의해 이상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높은 수준의 문화적 요구에도 응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배신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세상의 삼라만상이 인간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으로 믿는다. 이런 작업의 정점에 거대한 기술이 있다. (.....)” (Schmitt, Theodor Daeublers "Nordlicht"[1916}, 1991, 김항 206-7 재인용)

슈미트에게 구원은 기다리되 오지 말아야 할 시간이고. 적은 맞서 싸워야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바탕을 둔다) 

그의 기독교 정치신학은 구원을 위해서 도래하는 사랑의 신, 곧 메시아와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내전’이라면, 이 내전은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신학에서 역사세계의 의미를 보장하는 근원적 분열이다. 마르키온의 후예들이 이 내전을 메시아의 손으로 끝내기를 원한다면, 슈미트는 이에 맞서 카테콘을 통해서 내전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김항, 208)

슈미트는 가톨릭 교회와 근대 주권국가가 카테콘적인 제도들이고, 나치는 주권국가 체제의 붕괴 이후에 도래한 카테콘이라고 본다. 이처럼 슈미트는 자신의 정치신학에 맞서는 세력들을 적그리스도로 본다. 그런데 카테콘이 메시아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투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카테콘은 종말을 선포하는 메시아와 지상의 낙원을 위조하는 적그리스도라는 두 적과 맞서는 신의 대리인, 또는 지상의 신인가? 바울이 말하는 공중의 권세를 장악한 비인격적인 힘의 세력들과의 영적전쟁을 의미하는 가?

다) 끝의 시간

트뢸치는 교회가 종말론적 사무소의 문을 닫았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종말론은 마지막 날이 모든 행위를 쓸모없게 만들고 역사적 사건들을 마비시킴을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끝에서 두 번째penultime 존재들을 이끌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최후의 것이 지닌 의미에 관련된다. 바울은 메시아적 시간을 (임재의 임박함으로 간섭받지 않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시간ho nyn kairos’이라고 명시했고, 사도의 관심은 마지막 날, ‘시간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간’, 곧 메시아적 사건이 산출하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변화시키고 신자들의 삶을 변형시킴에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다룬 악의 신비는 초시간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역사와 구원의 오이코노미아를 끝내는 것이다. 이 구원의 과정은 역사적 드라마이고, 신비mystērion는 드라마로 전개된다. 이것은 미래의 특정한 시점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진행되고, 그 순간들에서 인간의 운명, 구원이나 몰락이 결정된다. (M I-8)

이것을 교회의 경우로 보면, 티코니우스가 주장하듯이 종말론의 예언들은 날들의 종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첫 번째 도래와 두 번째 도래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시간 안에 있는 교회의 조건을 가리킨다. (M I-9) 

교회는 최후의 심판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이면서 적그리스도의 교회이고, 적그리스도는 교회에 속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거대한 분리’에 이를 때까지 함께 한다. (M I-3) 

그런데 이런 거대한 분리는 현재와 떨어져 있는 마지막 날, 현재와 무관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와 지금’ 기독교인의 행동이 지향해야할 어떤 것이다. (아감벤은 이런 점에서 슈미트의 주장과 반대로 카테콘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행동을 고무하지도 연기시킬 수 없다고 본다) (M I-9)

교회의 역설은, 교회가 종말론적 관점으로 세계를 부정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오이코노미아가 세계와 관련되므로 교회가 그 자체를 부정해야만 세계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M I-9) 교회는 매순간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을 인지하고 촉구해야 한다. 

라) 법의 새로운 사용

바울은 율법이 죄와 사망을 가져오고, 율법이 그 위반을 부추긴다고 지적하면서 율법을 정지시키지 않고는 생명의 길을 열 수 없다고, 법 없이는 죄도 없다고 주장한다. 죄가 법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죄가 법의 존재이유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죄를 만든다면 죄를 없애는 길은 법을 정지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카프카는 이런 맥락에서 적용/집행되지 않고 다만 연구될 뿐인 법을 제시한다. 아감벤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법의 이미지가 폭력과 권력 사이의 연결이 끊어진 후에도 여전히 가능한 법의 형상이라고 본다. 이것은 강제력을 지니지도, 적용되지도 않는 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낡은 서적의 책장들’을 펼치고 있는 ‘새로운 변호사’가 궁리하고 있는 법이나 푸꼬가 훈육과 주권과 맺는 관계망에서 벗어난 ‘새로운 법’을 제안한 것과 같은 것이다. (EE 108)

이처럼 법의 지위를 박탈당한 뒤에도 존속하는 법은 어떤 것인가? 이는 벤야민이 마주친 어려움을 정식화하는 문제이다.

아감벤은 벤야민이 카프카의 「새로운 변호사」에 대한 독해를 통해서 이 질문에 답한다고 본다. 물론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탐구되는) 법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로 이끄는 문일 뿐이다. 정의에 이르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작용하지 않게 함d작동정지, 곧 법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감벤은 “언젠가 인류는 마치 어린이가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법을 가지고 놀 것”이라고 본다. 이는 법을 카논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법 이후에 발견되는 것은 (법에 선행하는, 보다 적절하고 원래적인 사용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사용이다. 이런 해방이 바로 탐구나 놀이의 임무이다. 아감벤은 이런 탐구하는 놀이가 “정의에 이르는 통로”라고 본다. 

벤야민은 정의를 세계의 상태가 절대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이거나 법질서에 예속될 수 없는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EE 109)

마) 질문들

다시 한 번 질문들 앞에 서자. 카테콘을 앞세워 메시아를 가로막고 주권적 법질서로 역사 안에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메시아적 상황에서 메시아적 시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모색할 것인가?

달리 표현해보자. 교회의 믿음과 국가의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법과 권력의 작용을 어떻게 중지시킬 것인가?  당신은 카테콘의 친구(또는 그 손과 발)인가? 당신의 교회는 메시아적 시간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메시아적 시간 이전에 붙 박혀 있는가? 당신의 믿음은 구원의 오이코노미아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너머로 나아가는가? 비잠재성과 무위의 사고는 어떻게 안식일의 윤리학과 이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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