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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양운덕 발제 (2): 발터 벤야민ㅡ메시아적인 것과 예외 상태

by 파레시아 2023. 4. 21.

벤야민의 ‘현실적인’ 예외 상태와 메시아적인 것
 
아감벤은 벤야민이 제안하는 ‘참된wirklich’ 예외 상태의 특성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새로운 메시아적 사고의 이론적 바탕을 재구성한다

아감벤이『예외 상태』에서 보여주었듯이 슈미트와 벤야민은 예외 상태, 순수한 폭력과 법질서 간의 관계를 두고 상이한 틀을 제시한다. 벤야민은 슈미트의 예외 상태가 지배 예속 관계를 정당화한다고 보고 다른 예외 상태를 제안한다. 이것은 슈미트처럼 아노미를 종식시키는 질서가 아니라 메시아적 해방을 추구한다. 
 
* ‘참된’ 예외 상태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관하여」의 8번 테제에서 예외상태를 특이한 방식으로 언급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예외 상태’가 규칙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참된 과제로서 우리 앞에 현실적인/참된wirklich 예외 상태를 산출할 것이다. 이로써 반파시즘 투쟁에서 우리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다. ”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1-1 1991, 699)

슈미트는 주권자의 결정에서 출발하는데, 이런 주권의 역설은 주권자가 법을 정지시키는 합법적인 권력을 지니면서 자신을 사법적 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둔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주권자는 ‘법률적으로’ 자신을 법 바깥에 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법은 법 바깥에 있다” 또는 “주권자인 나는 법 바깥에 있고, 법 바깥이란 없다고 선언한다”, 이런 점 때문에 슈미트는 주권을 법 이론의 한계 개념으로 정의하고 그 구조를 예외 이론을 통해서 제시한다. (PP 253/161)
 
“(......) 예외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더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는 정상을 확정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정상적인 것은 예외로만 살아남는다.”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1922, 22)

슈미트의 법질서는 궁극적으로 예외 상태라는 장치에 의존한다. 그런데 예외가 규칙이 되면 이 장치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8번 테제에서 정식화한 것처럼, 규범과 예외 사이를 결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주권자는 더 이상 결정할 수 없게 된다. (EE 99) 

아감벤은 이런 상황을 규칙이 “그것이 기생했던 숙주와 일치해서 제 몸을 갉아먹는다”고 비유한다. 히틀러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지 않은 채 ‘이중국가’를 조직했기 때문에 이런 예외와 규칙의 혼동은 실제로 존재했다. 아감벤은 이런 의미에서 나치제국에서 총통과 국민 사이의 새로운 실질적 관계를 정의하려고 한 슈미트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EE 99-100)
 
벤야민은 ‘현실적인’ 예외 상태를 예외 상태 일반과 구별한다. 예외와 정상 상황이 시공간적으로 구별되는 허구적 예외 상태가 가능하지 않으면, 지금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규칙과 절대로 구별할 수 없는 예외 상태가 현실화된다. 그러면 아노미 영역이 남는다, 예외 상태를 통해서 이런 아노미를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국가 권력의 정체가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의-힘으로) 법을 정지시키면서 법을 유지하도록 강요하는 법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EE 100- 101)

아감벤은 예외 상태를 둘러싼 벤야민과 슈미트의 상이한 태도를 요약한다. 한쪽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법과 맺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고, 다른 쪽은 그런 관계를 벗어난 아노미 영역을 인정한다. 벤야민은 폭력을 다시 법적 맥락에 기입하려는 슈미트의 시도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폭력이 항상 법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 (EE 101)
 
벤야민은 메시아 왕국을 정의하면서 메시아의 도래와 국가 권력의 한계 개념 사이에 평행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예외 상태’이기도 한 메시아의 날들에 법의 숨겨진 기초가 밝혀지고 법 자체가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고 본다. (PP 255/162)

벤야민은 이런 유비를 통해서 메시아주의의 본질적인 성격이 법과 맺는 특수한 관계를 살핀다. (기독교처럼 유대교와 이슬람에서도) 메시아적 사건은 위기, 전체 법질서의 근본적인 변형을 의미한다. (PP 255/162-3)
 
* 내용 없는 율법, 또는 잠재적 조합가능성에 열려 있는 경전
 
메시아적 상황과 법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자.

숄렘은 메시아주의와 법 간의 복잡한 관계를 두 질문으로 요약한다
 (「유대 신비주의에서 토라의 의미」). 

가) 타락 이전에 법의 형태와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나) 인간이 그의 원초적 조건으로 되돌아갈 구원의 시간에 토라의 구조는 어떤 것인가? (PP 255/163)

아감벤은 이와 관련해서 카발라의 텍스트인  조하르Zohar에 속하는 <Raya Mehemna>와 <Tikunei ha-Zohar>의 저자들이 토라를 두 측면으로 구별하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에 따르면, Beriah의 토라는 창조의 상태에 있는 토라이고, Aziluth의 토라는 유출 상태에 있는 토라이다. Beriah의 토라는 구원받지 않은 세계의 법이고, 신성한 현전의 외투veste esteriore에 비교된다. 

이와 대비되는 Aziluth의 토라는 추방에 대한 구원으로서, 그 원초적 충만함을 계시한다. 이 저자들은 토라의 두 측면, 곧, 낙원의 두 나무인 생명의 나무와 인식의 나무가 상응한다고 본다. 생명의 나무는 (악과 죽음에 의해 오염된 모든 것을 넘어서는 신성한 것의) 순수하고 원초적인 힘을 표상한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에 세계는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통치되지 않고 선과 악을 포함하는 두 번째 나무의 신비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그 결과 세계는 두 영역으로 쪼개진다. 곧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으로 나뉜다. (PP 255-6/163)

이때 결정적인 질문은 “메시아가 토라의 완전함을 회복했다면, 어떻게 토라의 원초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가?”가 된다.

아감벤은 이와 관련해서 분명한 것은 메시아적 법과 추방의 법이 같은 구조와 대등한 지평에 있는 두 법 간의 대립, 곧 하나의 법을 다른 법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PP 256/164)

그러므로 메시아는 단지 새로운 법전을 가져오는 것도, 단순히Halakah를 소멸하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런 과제가 복잡한 까닭은 보존되어야 하는 법의 원초적 구조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PP 256/164) 

우리는 이미 바울의 경우에 율법이 대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비잠재적인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이제 원초적 토라의 구조와 내용은 어떤 변화를 겪는가?

이런 시각에서 원초적 토라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과 관련된 이론들을 참조하자. 카발라주의자들은 16세기부터 Zohar와 Nachmanides에 포함된 이념을 급진화한다. 이들은 토라의 고유한 의미를 글자들의 조합가능성과 관련짓는다.

“토라는 그 심오한 본질이 신성한 글자들로 구성되었고, 글자들은 그것들 자제가 신성한 빛을 변형한/바꿔 입은rivestita 것이다. 오로지 물질화하는 과정에서만 이 글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먼저 그것들은 고유명을, 그리고 공통의 이름과 파생어들을 형성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되어서 지상의 사건들과 물질적 대상들에 관련된 낱말들을 형성한다.” (PP 257/164 재인용)

이것은 토라의 의미가 텅 빈 것, 곧 다양한 조합가능성에 열려 있다고 본다. 아감벤은 이렇게 법을 탈의미화desemantizzazione하는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이가 18세기에 스미르네에서 활동한 랍비 이타마리Eliahu Cohen Itamary라고 본다. 그는 토라가 모음들과 구두점 없이 씌어져야 했다는 랍비적 규정에 직면해서 율법을 “상대주의화”한다.

“이 규정은 저급한 영역으로 옮겨지기 이전에 신의 눈앞에 존재했던 토라의 상태에 관한 암시이다. 신 앞에는 단지 질서도 없고 분절되지도 않은 글자들의 집합체coacervo 가 있을 뿐인데, 이는 후속적인 조합은 오로지 이 저급한 세계가 행하는 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 이후에 신은 자신 앞에 있는 글자들을 죽음과 다른 연결을 갖는 술어들, 예를 들면 역연혼 같은 것을 이루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죽음이 없었을 것이고 같은 글자가 다른 의미를 갖는 말들을 이루는 방식으로 배치되었을 것이다. (...) 참된 신성한 의도는 토라에서 메시아가 도래할 때 계시될 것이다. 그는 “죽음을 영원히 삼키고ingoierà”, 토라에는 죽음, 불순함과 같은 것과 관련된 어떤 규정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현재의 우리의 토라를 이루는 글자들의 조합을 무화시킬 것이고 다르게 모을 것이다.” (PP 257-8/165 재인용)

아감벤은 이런 사고의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함축이 (절대적이어야 할 율법의 가동성과 가소성보다는) 토라의 원초적 형태가 어떠한 질서도 없는--곧 의미가 없는--글자들의 집합체coacervo라는 주장이라고 본다. (258/165)

확정된 의미나 진리를 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원초적 토라는 (그것이 질서나 분절 없는 글자들의 덩어리인 한에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이처럼 율법의 원초적 형태가 ‘아무 것도 명령하지 않는 명령’이라면 문제의 초점이 달라진다. 이제 메시아주의의 결정적인 문제는, ‘어떻게 메시아는 의미를 지니지 않은 법을 보존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PP 258-9/
165-6) 의미 없는 법과 관련된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법의 효력과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물론 밴야민은 이런 기대에 긍정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 메시아주의의 이율배반

이러한 문제와 대면하기 전에 숄렘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자. 그는 에세이 「유대교에서 메시아적 이념을 이해하기 위하여」(1959)에서 메시아주의가 두 가지 대립된 긴장을 지닌다고 본다. 

첫 번째는 기원의 원상회복restituo in integrum을 목표로 삼는 복구적인 경향이고, 두 번째는 미래와 갱신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이 대립된 힘들로부터 나오는 모순 때문에 메시아주의의 근본 성격이 규정되고 이율배반이 불가피해진다. 이것은 “아무 것도 완성될 수 없고 어떤 것도 최종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지연과 연기 가운데 살아가는 삶Leben im Aufschub”을 말한다. 숄렘은 메시아주의가 “결코 참된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긴장”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PP 259/166)

이와 달리 아감벤은 메시아주의의 이율배반적인 제스처가 기원적 구조에서 생기는 법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 이런 법의 구조와 대면하려면 메시아주의의 아포리아를 해결할 실마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율배반과 법의 성격에 관련된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자.

탈무드적인 문헌 (Sanhederin의 문장이 있는 Pesiqta Rabbati의 구절)에서 (메시아의 마지막 날과 관련된) 율법의 성격에 대해서, “율법은 그 학생들/연구자들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구절이 “율법은 그 새로운 형태로 돌아올 것이다”로 바뀐다. 

이에 대해서 아감벤은 “새로운 형태로 돌아옴”이 지닌 역설적 측면뿐만 아니라 명령과 그것의 위반이 명령을 완성한다고 보는 점에 주목한다. (PP 259-260/167) 이것은 메시아적 공동체에서 이율배반적인 경향이 작용함을 뜻한다. 

그래서 제비Shabbatai Zevi는 “토라의 파괴는 그것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토라의 완성과 관련해서 Beriah의 토라와 Aziluth의 토라 간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은데 이는 효력을 유지하는 토라가 그것과 반대로 명령하는 두 번째 토라에 의해서 단순히 취소된 것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사정이 복잡해진다. 이때 토라의 완성adempimento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바울의 경우에 율법의 정지와 그 완성이라는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율법의 작용정지가 폐지,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율법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경우에 율법을 비 잠재성의 상태로 되돌림과 율법의 완성은 맞닿아있다. 

바울이 「로마서」 (8:4)에서 제시하는 율법 이론(율법의 정당함은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도 이와 관련된다. 문제의 초점은 토라가 완성되는 상태에서 그 원초적 형태를 되찾는 데, 그것이 어떠한 명령이나 금지도 포함하지 않고 단지 질서 없는 글자들의 집합체임이 드러나는 점이다. (PP 260-1/167)

이런 맥락에서 놀라운 언명이 타나이즘적tannatico 미드라쉬인 Mekilta에 나오는 “결국 토라는 망각될 운명에 처한다”는 주장이다. 달리 표현하면 “토라의 완성은 그 망각됨이다”가 될 것이다. (PP 261/167-8)

이감벤은 이와 비슷한 사고가 메시아적 왕국의 과도기interim적 성격에도 있다고 본다. 먼저 메시아는 신성한 왕국의 종말론적 실현을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야훼가 왕으로 출현해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한다. 그런데 랍비 문헌들에서 “메시아의 날들”이라는 표현은 현재 시간과 도래할 세계olam habbá 사이의 매개적 시간(일 뿐)이다. 

산헤드린 문헌(97a)에서도 이런 과도기 개념이 제시된다. “세계는 6천 년 간 지속되는데, 2천년은 카오스이고, 2천년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2천년은 메시아적 시간이다.” (PP 261-2/168)

그런데 아감벤은 산헤드린에서 방금 인용한 구절에 뒤이어서 “우리의 사악함 때문에 모든 시간은 마지막 시기로부터 상실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율법 아래에 있는 시기는 끝나고 아직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고 지적한다. (PP 262/168) 

이런 ‘사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바로 벤야민의 사고는 메시아적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역사적 시간과 구별되지 않으며, 메시아의 날들은 역사적 시간과 도래할 세계olam habbá 사이에 자리 잡은 시간의 흐름을 이루지 않고 오히려 율법 아래에 있는 시간을 연기하고 지연시키는 형태로, 곧 결핍된 시간의 역사적 효과로 현전한다.“ (PP 262 /168)

역사적 시간은 단순히 지워질 수 없기에 메시아적 시간은 역사와 완전히 동질적일 수 없다. 곧 이질적인 두 시간이 공존하고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하나이면서 둘인 시간은 서로 동행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역사적 시간 안에서 그것을 수축시키고 변형시키면서 작용하는 양태로 그것과 맞물려 있다. 하나로 합쳐지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고, 서로 뗄 수없이 공존한다.

여기에서 아감벤은 신화학자인 제시Furio Jesi의 제안을 참조한다. 신화의 존재 양태를 이해하려면 ‘이다’-‘아니다’의 대립에 제 3항을 도입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아님이 있다(ci non è/there is-not)’로 정식화한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주장을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시간 자체의 숨겨진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PP 262-3/168). 일상의 시간 (크로노스)안에 메시아적 시간인 카이로스는 들어와있다.
 
* 의미 없이 유효한 법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벤야민이 8번 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과 예외 상태를 비교한 점이 타당하다면 원초적 상태에 있는 법과 예외 상태 간의 구조적 유비를 보다 명료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카프카 작품에 나타난 법 개념을 주제로 벤야민과 숄렘이 주고받은 편지(1934년 7월에서 11월 사이)에서 살펴보자.

숄렘은 벤야민의 독해를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렸다고) 비판하면서 카프카 작품에 나타난 법이 “계시의 무”를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성을 지닌다고 본다. 숄렘은 “계시가 의미하는 바는 없지만 여전히 그것이 유효하다는/강제력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법의 무대“에서 법의 “의미의 풍요로움이 사라지고 고유한 내용이 0이 되는 지점까지 축소되지만, 여전히 소멸되지 않은 그곳에 무가 출현한다.” 이런 조건하에 있는 법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할 수 없다. 그는 벤야민이 언급한 학생들은 “경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본다. (PP 263-4/169)
아감벤은 이런 카프카적 세계의 법--의미가 없지만 유효함ㅡ을 토라 해석과 연결 짓는다.
Geltung ohne Bedeutung이라는 정식은 앞서 본 (고정된 질서도 의미도 없는 글자들의 집합체인) 신 앞에 있는 토라의 상태에 적용된다. 이 때의 토라는 유효하지만/강제력을 지니지만 아직 확정된 내용과 의미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의미가 없지만 유효한 법과 의미가 확정될 수 없지만 유효한 토라는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다.
 
이런 상응관계는 「역사 개념에 관하여」에서 제안한 현실적 예외 상태와 연결된다. 아감벤의 가설은 Geltung ohne Bedeutung이라는 정식은 신 앞에 있는 토라의 상태뿐만 아니라 법에 관한 현재 상태 (우리가 살고 있는 ‘예외 상태’)를 규정한다. (PP 264/169- 170) 그는 이 정식이 우리 시대가 직면하지만 벗어나거나 장악할 수 없는 법 상태도 잘 표현한다고 본다.

이제 예외 상태는 의미 없이 유효함Geltung ohne Bedeutung이라는 상태에 있는 법을 뜻한다. 법의 자기 정지, 곧 법으로부터 물러서지만 추방령을 통해서 법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 없이 강제력을 지님Geltung ohne Bedeutung의 본보기이다. (PP 265/170)

만약 슈미트가 제시한 주권의 역설이 “법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형태를 취한다면, 벤야민이 지적하듯이 예외가 규칙이 될 때에는 완전히 대칭적인 형태가 된다. “법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모든 법--은 법-바깥에 있다. 곧 어떤 것도 법적 질서, 규칙을 지니지 않는다. 이제 내용 없는 법은 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제 모든 인간과 지구 전체는 법이 그것의 추방령으로 모조리 취해야하는 예외가 된다.” (PP 265/170)
슈미트가 주권적 법 이론으로 모든 것을 법질서로 포섭하고 지배하려고 한다면, 벤야민은 주권자가 사실상 이무 것도 결정할 수 없고, 법은 예외 상태의 아노미를 은폐하는 허구적 장치라고 본다. 법 안에는 어떤 고정된 의미도 없고 안과 바깥을 구별할 수 없다.

아감벤은 이런 상황을 화석화되거나 마비된 메시아주의와 비교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법을 무화시키지만, 계시하는 바가 없음인 상태로 유지한다. 이것은 영속적이고 끝나지 않는 예외 상태, “우리가 살고 있는 ‘예외상태’”를 말한다. (PP 265-6/170-1)

바울의 메시아적 상황과 예외 상태가 상동적이라고 했다면, 이제 벤야민은 이런 예외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된’ 예외 상태를 제안한다. 이제 새로운 메시아적인 것은 바울의 메시아적 상황을 급진화한다.
 
* 열쇠를 잃어버린 경전과 삶이 된 법

아감벤은 벤야민의 테제가 이런 맥락에서 적절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벤야민과 숄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믿고 있듯이, 메시아주의와 허무주의가 등가라면, 두 형식의 허무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불완전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법을 무화하지만 그 타당성이 영속적이고 무한하게 미뤄진 상태로 무를 유지한다. 두 번째는 ‘완전한’ 허무주의인데, 그 의미를 넘어서서 존속하는 타당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벤야민이 카프카에 관해서 지적했듯이 “무를 전복시켜서 구원을 찾는데 성공한” 것이다. (PP 266/171)
벤야민은 의미 없이 효력을 행사함Geltung ohne Bedeutung이라는 숄렘의 사고에 맞서서 명령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법을 제안한다.

“학생들은 경전을 잃어버렸든, 그것을 해석할 수 없든 간에 결국은 같은 처지에 있는 셈인데, 열쇠가 없는 경전은 성서가 아니라 삶이고. [카프카의 『성』에서 보듯이--필자] 성이 서있는 언덕 아래 있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삶을 경전으로 번역하려고 하는 시도에서 나는 수많은 카프카의 알레고리들이 지향하는 전도의 의미를 본다.”(Benjamin, Briefe 1, 1966, 618)

우리는 이처럼 현실적인 예외 상태를 추구하는 벤야민의 과제를 매듭지으며 다시 질문 앞에 선다. 어떻게 참된 예외 상태, 메시아적 상황을 마련할 수 있는가? 모든 순간이 메시아가 오는 순간이라면, 우리는 메시아적 시간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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