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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후설과 하이데거: 비판적 검토

by 파레시아 2023. 6. 18.

후설과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의 실체와 범주를 불충분한 것으로 보았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 인간은 주체성으로 고양되며, 주객도식에 기초한 서구의 인식론은 형이상학임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플라톤주의나 선험적 유아론으로 폄하하지만, 사실, 후설에게서 형상은 수학에서 수나 삼각형같은 보편범주나, 또는 본질적인 타입을 말한다. 후설은 현상학을 의식의 본질을 다루는 엄밀한 학문 즉 제1철학으로 특징지었다.
 
현상학적 태도는 개별 나무에 대한 자연적 태도에 판단중지를 하고, 태도변경을 한다. 감각지각에 들어온 이상적 의미내용을 노에시스는 상상력과 자유로운 반경을 통해 본질직관을 위해 형상적 환원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변경이 감정적 가치의 영역에서 일어날 때 이러한 지향성은 가치론적인 직관에 관련되며, 예술의 창조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Die Idee der Phänomenologie

<Idee 2, 1912>에서 후설은 이러한 감정 지향성과 미학적 합리성을 가치-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본질적 판단에 관련지어 논의한다. 이것은 의지의 영역에서 도덕적 가치와 행위를 본질적으로 다루는 의지의 현상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도성은 이론, 실천, 가치론적 영역 즉 삶의 현실에서 관심에 의해 주도되며 “무전제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 (ibid., 11-13). 무전제적인 것은 선험적이며 자연적 태도에서 물러서는 것을 말한다.
 
의식은 키네스틱 (신체기관의 움직임) 감각에 의해 동반되며, 몸의 차원이 모든 지각을 매개한다. 몸은 공간의 세계를 구성한다. 지각은 몸과의 관련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관련되며, 현존재는 의식의 내적 시간과 신체에 의해 조건되는 주체로서 의미와 관련된다 (ibid., 63, 67). 

살아있는 몸에대한 지각은 일상의 삶의 세계 (생활세계—게오르그 짐멜) 안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상호주관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상호신체성은 공동사회를 지적하며, 후기의 선험적 현상학과 생활 세계론에서 정점에 달한다. 지향적 구조와 삶의 의미영역은 포괄적인 차원 (의지, 감정, 욕구 등)을 동반하며 관심에 의해 주도되며, 생활세계가 상호주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양한 문화적인 삶의 실천과 형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생활세계의 지평안에서 열린존재로 살아간다.
 
의식 (노에시스)과 의미영역 (노에마)은 상관관계에 있고, 의식내적인 시간성의 흐름에서 지향성의 지평들이 나타난다. 나의 의식은 내 앞에 펼쳐진 세계를 삶의 지평으로 지향하며, 이러한 환경의 세계에서 나는 타자의 몸과 더불어 사회 문화적인 삶을 공유한다. 후설에게 현존재는 의미세계의 지평 안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관계적이며 윤리적인 존재이다. 후설은 지평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관점들을 생활세계를 통해 비판적으로 매개하고 종합한다.
 
후설의 해석이론은 노에시스 (의식의 지향성)와 노에마 (지향적으로 지각된 이상적 의미내용; 센스)의 상관관계를 주석하고 전개하는 인식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일상의 생활세계에서 당연시하는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문제틀)를 한다. 현존재는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염려의 실존론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이해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는 살아있는 몸으로 존재하며 비판적 사유와 반성을 통해 주어져있는 세계를 다차적인 측면에서 보고, 윤곽보충 (adum- bration)을 하며 범주화하면서 의미지평을 구성한다.
 
이러한 태도변경에서 후설의 현존재는 몸의 존재로서 사유 (지각의 지향성과 보편적 통각)를 의미의 세계(사회, 문화, 예술 등)로부터 펼쳐나가며, 타자를 인정하고 공감하는 실존이 된다.

 

세계경험과 공감윤리

 

후설은 이미 <논리연구 1> §14-16에서 세계경험에서 나타나는 윤리와 가치문제를 고려했다. 그는 지각과 행동과 인격성 그리고 문화와 상호주관성에 대한 분석에서 도덕적 가치와 윤리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Idee 1, 2). 후설의 입장은 도덕을 구성하는 가치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고 도덕에 대한 구성적인 접근을 보인다. 도덕적 가치는 객관적이며 규범 적이지만 (객관성), 의지의 행위 안에서 구성되어야하며 (주관성) 타자를 지향한다 (상호주관성) (Smith, Husserl, 369)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윤리는 후설의 선험적 환원과 생활세계론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선험철학은 현상학적 환원을 넘어간다. 이러한 급진적인 태도변경에서 후설은 순수한 의식의 지향성에 주어지고 구성되는 생활세계에 접근한다. 생활세계는 의식과 자연과 문화를 포괄하는 복잡성의 총체이며,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선험적인 전환에서 모든 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한 생활세계가 자아와 타자의 공동지평과 노에마로 나타나며, 순수의식은 상호주관적 의식으로 파악된다. 인간의 모든 지향성과 의미는 고고학적인 지층과 같은 생활세계로부터 온다. 노에시스-노에마의 지향성은 선험적 환원 (현상학적-형상적 세계에 판단중지) 을 통해 순수의식으로 드러나며, 이것은 내적 시간의 흐름과 전개 안에서 의미부여의 주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론적이 아니라 여전히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타자와 관계된 존재를 말한다.
 
후설의 <유럽의 학문의 위기>에서 생활세계는 모든 의미지평 (과학, 역사, 문화, 윤리 등)의 순환적인 시스템으로 작용하며,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 존재론의 근거가된다. 모든 존재론적인 개념들은 선험적인 본래성으로 부터온다 (Husserl CW VI: 99).
 
생활세계론은 모든 의미의 지층에 깔려있는 구조와 동시에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통해 현존재와 역동적인 관계와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시스템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선험적인 존재영역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공동현상과 타자에대한 공감경험과 인정을 사회 문화적인 차원으로 열어 놓는다. 이러한 선험적인 자아는 타자 지향성을 통해 생활세계안에서 모든 자아들의 열린 공동체와 관련된다. 마치 나는 러시아 인형처럼 생활세계의 유기체 안에서 타자와 함께 조그만 인형으로 더불어 존재한다.
 
이러한 객관적인 공동세계에서 나는 타자와 짝을 이루며 상호주관적인 경험을 하며, 칸트와는 달리 후설은 공동세계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정언명법 (사랑과 도덕적 감정을 기초로 한)을 말한다. 이것은 선험적 자아가 모든 정당성과 조화와 타자와의 공감 안에서 살아가는 본질적인 삶의 구조이기도 하다 (The Essential Husserl, 136, 138).
 

생활세계의 문화적 다름의 인정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1935-8>에서 후설은 자연의 수학화가 되고 일상의 생활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미경험을 단절하는 위기에 주목한다. 선험철학은 생활세계 안에서 의미구조와 상호주관성의 중요성을 밝힘으로서 이러한 위기에 해결책을 제시 하려고한다. 생활세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현상학적 구조이며, 일상의 삶에서 경험되는 의미와 가치의 세계이다. 이것은 다양한 삶의 형식을 담는 인덱스처럼 또는 조화로운 다양성처럼 드러난다. 생활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서로 엮어지고, 의존적이며, 의미의 그물망처럼 살아있는 존재적인 차원을 갖는다. 우리는 선험적 자아들로서 생활세계의 시간과 생명과 타자와 공감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에 기초한 선험철학은 엄밀한 학문이며, 모든 지식의 토대이며 보편적인 존재론으로서 현존재에 존재론적인 의미와 토대를 부여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생활세계는 인간의 지각과 지향적 분석과 방법에 본래적인 의미부여의 세계이며, 이것은 전통에 침전된 불명료함과 다르다. 이것은 자연과학과 수학 그리고 기술화를 통해 완전히 지배될 수가 없다. 오히려 생활세계가 현대의 자연과학에 앞서 존재하고 고대의 과학의 역사가 오늘날 자연과학의 배경이 되며 주어진다. 생활세계는 과학을 위한 의미 토대가 되며, 우리가 과학이전에 그리고 외부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선험적인 세계의 의미 지평이다.
 
설령 우리가 낯설은 사회적 영역으로 던져 지더라도—예를들어 콩고의 흑인들, 힌두, 중국의 농부들—우리는 이들의 삶에서 일반화되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진리는 서구와는 다르다. 이러한 문화적 상대성과 이해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활 세계의 대상들을 모두에게 공동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각자의 생활세계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특질을 갖지만, 선험적으로 주어진 일반구조로 작동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생활세계를 의식하고 지향하며, 기존의 것에 대한 태도변경을 통해 주어진 의미영역으로부터 반성을 하며(현상학적 환원/형상적 환원), 선험적 환원에서 순수의식은 타자와 더불어 공감하며 인정하는 상호주관적인 삶을 살아간다. “사태자체로” 돌아가는 현상학은 생활세계의 사회학을 열어준다. 현상학적 철학은 주어진 생활세계와 더불어 전통과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탐구를 통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불명료함으로부터 현존재를 해방 시킨다.
 
이런 차원에서 후설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일상성의 구조에서 인격성의 유형의 심리학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생활세계를 자연적인 파악과 철학적인 선험적인 파악으로 구분했고, 삶은 하이데거처럼 일상성에 던져진 인간 현존재로부터 시작하거나, 아니면 순진하게 이미 주어진 자연세계에 몰입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후설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구체적인 세계 내의 현존재에 대한 본질론이며 인간학에 불과하다 (Husserl, CW VI, 31, 287). 결국 현존재는 세계내에 포위가 되버리고 염려와 죽음의 사이를 오고가는 불안의 존재다.

그러니 후설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비판적 인식론과 생활세계론을 통해 문제틀과 타자의 문화에 대한 인정 그리고 해방을 위한 기획으로 나간다. 이것은 세계로 기투된 현존재의 운명을 체념해서 받아들이는 염려의 입장과는 결이 다르다. 생활세계는 인식론과 더불어 상호주관성의 존재론과 공감의 윤리의 근거가 되며, 후설의 의지의 현상학은 도덕의 가치에 기초하며 사랑, 연민, 공감과 같은 감정을 윤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그에게 사랑의 윤리의 토대가 된다. 

데리다 비판의 한계

 

데리다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파괴 내지 해체를 차용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차이에 주목을 하고 하늘이란 시니피앙은 실제로서 시니피에 하늘자체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은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오성의 한계와 물자체에서 나타난다. 데리다가 해체철학자라면 칸트가 인식론의 해체를 말한다.

 

데리다는 문자학에 기초해 문법체계(랑그)가 소통의미(파롤)를 결정한다고 보고 파롤의 한계를 지적한다. 차연이란 프랑스의 단어는 다름이라는 단어의 발음에서 구분할 수가 없다. 모든 다름에는 지연이 존재하고 의미와 진리는 결정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 언어중심이 중국어나 한국어에서 가능한가? 차연이란 단어는 이미 사회적 관계에서 언어놀이로 들어오면 의미를 획득한다. 

 

하이제거가 형이상학을 인간중심이나 이성중심으로 비판하고 파괴한다면, 이재 데리다는 문자학을 통해 시니피엥과 시니피에의 다름과 차이를 기초로 모든 의미와 진리의 비결정성과 해체를 말하려고한다. 예를들어 농구놀이와 축구놀이가 의미의 비결정성으로 인해 놀이나 개임이 해체 되는가? 사회적 소통관계에서 의미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과 규칙이 의미를 만들어간다.  데리다를 해체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다 

 

데리다가 비판하는 것 처럼, 후설의 현상학은 주객도식에 기초된 정적인 형이상학이나 “현전”의 형이상학이 아니다. 의미의 현전 (노에마)은 의식의 활동(노에시스)에 일방적으로 의존하 않는다.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상관관계 또는 지향성은 외부의 대상의 폭넓은 지평의 변화와 새로운 윤곽에 따라 변경되고 심화된다. 또한 내적 시간의 흐름에서 음악의 소리가 뒤로 뻗어 과거를 잡음 (retension)을 통해 마치 혜성의 꼬리처럼 그때 그때의 지각에 연결된다.
 
이것은 일차적 기억으로서 반성으로서의 2차적 기억과는 구분된다. 미래적 기대 (pretension)는 이러한 반성과 관련되며, 시간체험의 현실성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교차 되고 구성된다. 노에마는 단순히 현전하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더불어 시간의 내적흐름과 더 넓은 생활 세계의 구조의 영향 가운데 서 있다. 표현과 의미는 데리다의 비판처럼 유아론적인 내적인 삶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Derrida, Speech and Phemomena, xxxvi), 여전히 노에마의 현전에는 부재가 있다.

지각의 현재계기에는 부분적으로 채워지고 (익숙함) 변경되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비어있는 (낯설은) 의도들의 네트워크로 나타난다. 모든 의미현상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비어있는 지평안에 보다 확대된 의미의 플러스가 있다 (The Essential Husserl, 224, 226).
 
후설의 현상학은 내적 시간성의 영향과 더불어 외부 대상에 대한 윤곽의 지평을 확대 하면서 매우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자연적 태도를 변경하고 문제틀하면서 생생한 현재 (vivid present)의 의미를 구성하지, 단순히 거기에 주어진 노에마의 현전의 형이상학과는 다르다. 생생한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기대를 교차시키는 급진적 반성을 통해서 온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지금시간은 생활세계와 더불어 현재화가 되며 미래를 기획한다. 시간은 반성이며 열려있는 생활세계와의 연관성을 통해 미래가 현재로 들어온다 (동시성).
 
간략히 말하면,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전통에서 비판되는 후설은 실제의 후설과는 상관이 없다. 이미 <Idee 2>에서 구성되는 몸의 현상학은 데리다와 하이데거를 넘어서서 몸의 감각이 지각을 형성하며, 의식의 지향성과 더불어 공동경험을 보여준다. 몸이 보고 느끼고 접촉한다. 타자의 몸이 나에게 현전한다. 신체의 경험은 지각의 기능과 지향성에서 공동으로 구성되며, 타자의 몸에 공감하는 상호 주관적 관계로 들어간다 (ibid., 72).

몸은 지각의 중심으로서 화육된 상호주체성의 자리가 되며, “신체의 감각 사태”로 돌아 가는 것은 생활세계를 향한 의도성과 가치와 윤리적 공감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존재망각
 
하이데거처럼 잃어버린 존재 (존재의미의 망각)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지름길처럼 또는 드러남의 사건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시간의 구조안에 있는 현존재가 존재와 진리의 드러남의 사건에 열려 있다면, 이러한 지름길의 철학은 헤겔에게서 불가능하다.

헤겔의 현상학은 역사 사회학적인 여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계기들의 대립과 오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리고 매개와 부정 그리고 지양의 종합을 통해 순환적인 시스템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전통철학은 형이상학으로 단죄되고 존재망각의 길을 통해 자연과 존재자들은 인간의 기술지배에 그릇되게 몰아 세워진 틀(Gestell)에 갇힌 허무주의로 간다. 근대성의 기술합리성과 자연지배 그리고 쇠창살 우리와 같은 허무적인 현실이 단순하게 이전의 형이상학 철학으로 비난될 수가 있을 까?

여기에는 오히려 자본주의와 파시즘 정치가 더 큰 역할을 하지 않는가? 존재자 저편의 존재 자체로 밀고 들어가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는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자신을 숨기지만 또한 드러내면서 현존재에 가까이 다가오거나 아니면 멀어지는 존재의 역운을 정해주는 존재근거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개방하는 가? 유신론이나 무신론은 하이데거의 존재신비주의에 적합하지가 않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진리존재의 운명으로부터 발생하고, 존재는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여전히 초월해있으며, 역사는 현존재의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나타난다. 존재중심의 신비주의와 운명의 사건이 인간의 주체성을 예속시키고, 존재진리는 현존재의 역사성 즉 의미와 해석에서 경험된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 의해 내던져져있고, 존재의 밝은 터 (트임) (Lichtung)으로 들어와 은폐와 탈은폐를 경험하는 것은 현존재의 결정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의 은폐와 탈은폐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물음은 주체성과 비판적 이성을 결여한 인간에게 가능한가?
 
하이데거의 문제는 인간이 존재의 보냄에 상응해야하고 이러한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가야 하는 데 있다. 존재자체는 언어 안에서 스스로를 숲의 열린 공간처럼 사건으로 드러내지만, 여전히 이전의 모든 철학과 현존재의 이해와 언어의 해석을 초월해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보냄과 섭리에의 순종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존재의 이데올로기적 호출에 무력하지 않는 가?
 
어쨰튼 하이데거가 존재진리를 사유하는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해온 모든 서구철학의 주체성의 전통을 파괴할 때, 그는 존재의 이데올로기적 호출에 순응하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존재의 보냄과 신의 문제는 그의 존재신비주의의 성격을 여전히 허무주의적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의 답변일 수가 있으며, 힘에의 의지와 운동에 기초한 영원회귀을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존재자체로 되돌아가는 것"ㅡ스스로 드러나는 존재는 과연 단번에 진리가 되는 가?
 
하이데거는 시인들의 신화적이고 시적인 언어에서 거룩한 신의 존재와 구원을 위한 과제와 역할을 본다. 시인들은 역사적인 존재의 보냄에 속한다. 존재는 사건으로서 이름없이 일어난다. 이러한 존재사건은 기독교적인 인격적인 신과는 상관이 없다.

존재사건을 신적인 사건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에 기초한 생철학과 초인 그리고 예술은 하이데게에게서 여전히 인간중심에 기초한 형이상학적일 수가 있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개념적 파악과는 달리 실존론적인 해석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하이데게에게서 윤리는 그리스 전통에서 신들의 거주하는 장소로 수용되며, 인간은 이러한 열린 장소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다이몬 신의 근처에서 살아간다 (헤라클레이토스). 인간의 사유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며, 존재에 속하며 실천적인 귀결을 갖지 않는다. 윤리는 존재론안으로 사라진다 (<Letter on Humanism>,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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