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옥 교수
장신대 선교학 교수
미네소타 루터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장신대 부설 남북한 평화 신학 연구소장
Missional Church Conversation 네트워크에 관여하며, 공공신학과 선교학의 관계를 칼 바르트와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통해 발전 시키고 있다.
임창세 박사의 “개혁교회 소명론과 막스 베버”에 대한 논찬
이병옥 교수(장신대, 선교학)
논찬자가 볼 때, 목회자이면서 학자이고 학자이면서 목회자인 발표자 임창세 박사(이하, 임창세)의 논문은 자신의 목회 현장의 고민과 학문적 여정의 교차점에서 비롯되었다. 발표자가 서론에서 제시하듯이, 이 논문은 궁극적으로 한국교회에 필요한 마을목회와 공공신학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소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비 및 정립을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논문의 뒷부분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바르트의 소명론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지만, 논찬으로 허락된 짧은 시간을 고려할 때 모든 것을 다 다룰 수는 없고 또한 논의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논찬자는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저자가 제시한 제목 “개혁교회의 소명론과 막스 베버”가 시사하는 바를 따라 베버(Max Weber)에 관한 논의까지를 논찬의 내용의 한계로 잠정적으로 정하고자 한다. 이 논문이 갖는 내용과 깊이를 다 다루기에 논찬자의 식견이 협소하지만, 논찬자가 갖는 선교학자의 눈을 가지고 이 논문의 의도와 기여와 좀 더 발전시켰으면 하는 내용을 조금이나마 제시하고자 한다.
임창세의 논문의 의도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임창세는 한국교회가 대내외적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지적하면서, 위기극복의 방향으로 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우선시하는 지역선교를 제안한다. 임창세는 이 지역선교를 위해서 가장 시급한 과제로 마을목회와 공공신학을 제시한다. 1인가구의 급증과 이에 따른 ‘솔로 사피엔스 시대’,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마을공동체의 붕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무한 경쟁과 빈부격차의 증가 등의 요인들은 교회가 단순히 자신의 공동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목회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목회자와 교회의 공공성의 상실이 한국교회에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고, 그 시작은 대부분의 교회가 지역에 관심이 없고, 지역주민과 소통하지 않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이 필요하다. 임창세는 공공신학이 목회자와 교회의 리더들이 공공지성인으로서 또는 시민운동의 리더로 활동하는데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논의 위에서 임창세는 “공공신학과 마을목회를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기독교의 소명론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표자는 한국교회가 갖는 소명에 대한 개인적이고 협소한 이해가 지역에 대한 관심이나 공적인 차원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루터와 칼빈의 소명의 이해는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론을 통해서 일반인의 세속적인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고, 칼빈은 예정론과 소명론을 통해서 소명의 이해를 사회적 차원까지 확장시켰으며, 이것을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을 강조하는 소명론으로 현대에 계승하고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임창세는 베버의 사회학을 기독교의 소명과 공공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로 사용한다. 단순하게 보자면, 베버의 사회학 자체가 지역사회를 사회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좋은 예가 된다. 좀 더 깊이 보자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현대사회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에 개혁교회의 소명이해가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고, 베버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는 현대 시민사회의 담론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베버의 영향 아래서 하버마스는 시민사회나 공론의 장에서 의사소통이론을 발전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임창세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바르트의 소명론을 통해서 자신의 공공신학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한다.
임창세가 정리한 칼빈의 직업이해와 소명론은 그 자체만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장에 큰 의미를 줄 수 있는 작업이었다. 칼빈은 성도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는데, 여기서 경건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포괄한다. 발표자에 따르면, 예정과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면서, 칼빈은 경건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 성숙의 과정으로 보았는데, 소명은 “경건이 외적으로 표현된 신앙형태”로써 경건한 삶은 직업적 소명에 충실한 것이다. 루터와 비슷하게, 칼빈도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해서 일하고 노동하는 존재로 보았는데,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노동”을 “하나님의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맥그라스의 칼빈의 노동에 관한 이해를 인용하면서, 임창세는 “노동은 창조세계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확인하며 나아가 창조세계에 행복을 더하는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수단으로 보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칼빈은 상공업이 발달한 제네바시에 살고 있었기에, 농업이나 목축업에서만큼 상공업에서의 노동과 직업의 가치를 중요하게 보았다. 이런 이해 위에서 칼빈은 경건과 소명을 통해 제네바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칼빈의 이해는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자신의 경건과 소명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전을 갖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농/목축업이 아닌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제네바시를 살았기 때문에 칼빈은 그 이전의 신학자들보다 직업의 다양성에 열려있었다. 임창세에 따르면, 칼빈은 직업을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진 의무이자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했다. 칼빈은 신분적 직업제도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직업의 변경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직업의 변경에 있어서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왜냐하면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일로서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적절한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실행할 의무”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는 오늘날만큼 직업의 변동의 폭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칼빈의 시대나 그 이후의 현대까지는 굉장히 유의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직업의 종류와 형태가 쉴 새 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N잡러가 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칼빈의 직업소명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지 발표자의 견해가 궁금하다. 2019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목회자의 35%라고 이중직 목회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각 교단에서 지금 이 이중직목회자에 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영향 아래서 이 시대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AI와의 경쟁까지 해야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직업을 소명과 연결하는 칼빈의 이해는 여전히 적절성이 있는가? 직업을 소명과 연결하는 기존의 이해가 오히려 N잡러들에게나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청년 세대에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박탈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점점 더 커져간다.
임창세는 상대적으로 루터의 소명론보다 칼빈의 소명론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이런 접근은 큰 틀에서 베버의 이해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루터보다 칼빈, 보다 정확하게는 칼빈주의에 방점을 찍고 있다. 베버는 칼빈주의자들이 경건적 금욕주의를 넘어서 노동, 재산, 경제적 성공에서 외적 증거를 찾으려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점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 베버가 말하는 칼빈도 칼빈주의에 의해서 해석된 칼빈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발표자의 칼빈에 관한 이해는 자신의 이해인지 베버의 이해를 수용한 것인지가 궁금하다.
베버처럼 칼빈의 연속선상에서 칼빈주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주의와는 다른 칼빈의 이해들을 새롭게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가 궁금하다. 물론 베버가 암묵적으로 청교도 또는 칼빈주의의 실천적 삼단논법을 지지했다고 보면서, 발표자는 방델(Wendel)를 통해서 이 삼단논법이 칼빈의 것이 아니라 후대의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발표자는 베버가 칼빈과 칼빈주의를 연결해서 보려고 하는데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여지가 많다. 하지만 바르트의 소명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최소한 소명론 차원에서 칼빈과 칼빈주의를 구분하고, 칼빈주의가 놓쳤던 칼빈의 이해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베버가 놓쳤던 부분을 보강하고, 오늘에도 칼빈의 이해가 줄 수 있는 함의를 찾는 작업을 좀 더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칼빈을 한 차례만 언급했을 뿐이며, 베버도 이 책에서 칼빈의 사상이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다루었다. 따라서 베버가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칼빈주의의 연관성을 자본주의와 칼빈과의 직접적인 연결로 당연시하는 시도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칼빈은 자본의 축적을 옹호하기 보다는 사회적 책임에 입각하여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옹호하고자 했으며, 재산에 대한 사적인 소유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공적인 이익을 위한 경우에는 국가는 사적인 소유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직업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유익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익을 위한 것이다. 칼빈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기적 욕망으로 착취할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기독교 공동체는 이웃과 사회를 위한 공공선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직업도 공공선을 섬기기 위해서 공동의 이익을 공유하고 인류와의, 특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어떤 면에서 칼빈의 사상 자체가 칼빈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가장 좋은 근거나 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발표자가 베버를 자신의 논의에서 등장시킨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목회자나 교회의 리더들이 마을목회를 수행해가기 위한 사회과학적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베버가 활동할 당시 유럽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급변하는 시기였는데, 이런 가운데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많은 문제를 양산해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스(Karl Marx)나 막스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을 가지고 오직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유물론적 결정론의 일방적인 접근에 대해서, 베버는 경제적 요인이 종교적 형식과 교리에 지대하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교도 경제제도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베버의 의도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읽어보자면, 지역이나 마을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이 하나의 기준이나 틀이 아니라 다양할 수 있기에 다양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목회자와 교회는 열려있어야 한다.
또한 발표자가 마을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서, 루터나 칼빈의 만인제사장의 이해를 논문에서 깊이있게 다루지 않은 부분은 의아하게 다가왔다. 마을목회에서 평신도를 선교의 일선에 세우기 위해서는 만인제사장에 대한 이해가 직업소명론 이상으로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하는 직장과 사는 곳이 다르기에 직업에 대한 소명의 강조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마을목회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특히나 앞에서 말했듯이 N잡러이거나 무직인 경우에도 평신도가 마을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소명론과 함께 만인제사장론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새로운 해석하고 강조해야 한다.
논찬을 마치면서 생각하건데, 베버까지의 논의를 논찬의 범위로 정했기에 이 논문의 논지를 완벽하게 다루었다고 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논찬자의 입장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바르트의 소명론까지 다루려면 또 하나의 논문을 써야할 만큼의 방대한 작업으로 다가왔기에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논찬을 하면서 임창세의 논문에 사족을 붙인 것은 이 논문이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에 이 논의를 확장시키기 위함이었음을 밝힌다. 목회와 학문을 동시에 추구하는 신학적 목회자, 목회적 신학자 임창세 박사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NL-QKA6izY&t=2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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