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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양운덕 발제(1): 카테콘과 메시야 사이에서

by 파레시아 2023. 3. 30.

양운덕 박사
고려 대학교에서 헤겔철학으로 박사학위 
고려대 교양 교육원 연구 교수및 철학 연구부 교수 역임
현 필로소피아 연구소 대표
저서: <피노키오 철학 시리즈 1-4>
<보르헤스의 지팡이> <미셀 푸코> 등이 있다.
 
 
 
카테콘과 메시아 사이에서
: 아감벤의 비잠재성으로 본 바울과 벤야민
 
 
이 글은 아감벤의 비잠제성의 틀로 바울과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고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세 질문에 답한다.

가) 메시아는 언제 오는가? “악의 신비”(「데살로니가 후서」 2장)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나) 바울의 메시아적 상황에서 어떻게 율법의 정지가 그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가?
다)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고에서 ‘참된’ 예외 상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1) 어떻게 법의 문을 닫을 수 있는가?
 
들어가면서
 
메시아는 언제 오는가?

가) 보통 메시아는 마지막 날, 시간의 끝에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벤야민은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한다.  바울도 메시아가 오는 때를 미래의 어느 시간이라고 하지 않고 ‘지금 시간ho nyn kairos’이라고 표현한다.
 
나) 그런데 메시아가 ‘미래’에 온다고 믿는 이들은 메시아와 함께 시간의 끝이 도래하면 지상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생각한다.

메시아적 시간과 “악의 신비”

아감벤은 기독교인이 지상에 머무르는 방식과 관련해서 두 종류의 머무름을 구별한다. paroikousai는 이방인이나 추방된 자가 거주하는 일시적인 머무룸의 방식이다. 이 가운데 일시적인 머무름은 기독교인이 세계 안에 일시적으로 머무름, 곧 메시아적 경험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교회의 시간을 “ho chronos tē paroikias”로 규정한다. (벧전 1:17)
 
그런데 임재parousia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인 머무름의 성격이 바뀐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런 지연을 받아들여서 제도적 법률적 조직화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 메시아적 시간의 구조

메시아적 시간은 묵시록적 시간과 다르다. 묵시록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자리 잡고 시간의 종말, 대 파국을 예견한다. 아감벤은 메시아적인 것과 묵시록적인 것의 차이를 정식화한다.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의 끝/종말’이 아니라 ‘끝의 시간’이다. (CR 8)

이렇게 볼 때 메시아적인 것은 “모든 순간, 모든 kairos가 시간의 끝과 영원성에 대해서 맺는 관계”이다. 이 시간은 수축하고 매듭짓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과 그 끝 사이의 ‘남겨진’ 시간이다. (CR 8-9)

유대 전통은 두 시기와 두 세계를 구별한다. olam hazzéh는 세계의 창조로부터 그 끝까지 이어지는 시간이고, olam habbá는 시간의 끝 이후에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메시아적 시간은 이 두 시간이 아니다. 메시아적 사건(바울에게는 부활)에 따른 휴지cesura로 두 시간이 나뉠 때 이 두 시간 사이의 남겨진 시간이다. (CR 9)
 
바울은 메시아적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ho kairos synestalmennos esti)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hōs mē [:아닌 것처럼])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7:29-31)

바울은 이 구절에 앞서 메시아적 소명, 부름klēsis을 언급한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0-22)

이런 hōs mē는 메시아적 소명의 궁극적 의미가 모든 소명을 취소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메시아적 시간이 연대기적 시간을 안으로부터 변형하듯이 메시아적 소명은 hōs mē 덕분에 새로운 사용을 위해서 모든 소명을 취소하고 변형시킨다. (CR 12)
 
* 끝에서 두 번째인penultime 것
메시아는 주의 재림 (야훼의 날)에 앞서 오는 자이고 그 최후의 심판의 재림을 알리는 자이다. 아감벤은 최종적인ultime 것과 끝에서 두 번째인penultime 것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메시아적 조건을 규정하고자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본회퍼는 급진주의와 타협이라는 두 극단을 가짜 선택지로 본다. 이것은 최종적인 현실과 (개인과 사회의 일상의 조건을 규정하는) 끝에서 두 번째 현실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사고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CR 12-13)

메시아적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과 전혀 다른 시간이 아니고 그런 시간을 내적으로 변형하는 것이므로, 최종적인 것을 살아가는 것은 끝에서 두 번째인 것을 다르게 받아들이며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끝에서 두 번째인 것의 경험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CR 13)

그러면 일면적 부정도 양자 부정도 아니라면 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아감벤은 비 잠재성의 사고틀로 해결책을 찾는다. 곧 ‘~하지 않을 가능성’, 작용을 정지함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그는 메시아적 관계를 바울이 사용하는 동사 katargein의 독특한 성격으로 설명한다. 바울은 이 동사로 ‘파괴하다’가 아니라 ‘작용하지 않게inoperante 함’을 표현한다. 최종적인 현실은 끝에서 두 번째 현실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작용하지 않게하고. 정지시키고, 변형시킨다. (CR 13-14)

이렇게 보면 메시아적 시간은 미래의 시간일 수 없다. 바울은 이 시간을 ‘지금 시간ho nyn kairós’이라고 부른다. “(...) 보라 자금nyn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 후서」 6:2)
 
이런 관점은 시간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한다. ‘지금’을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아직 아님’으로 규정하는 사고와 맞선다. 
(예를 들어서 이반 까라마조프가 등장시킨 대심문관은 재림하여 시체들이 불타는 냄새가 가득한 종교 재판의 화형장 부근에 나타난 예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떠나라고 명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시대의 징조들ta semei tōn kairōn’(마태 16:3)를 읽는 능력이다. 만약 역사가 왕국과 관련해서 끝에서 두 번째라면, 왕국이 역사 안에서 현전하는 기호를 읽는 능력, 곧 역사 과정에서 구원의 오이코노미아의 표징signatura을 인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CR 15-16)
 
2. "악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라는 드라마
 
* 카테콘은 누구/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전한 (‘악의 신비’와 관련된) 마지막 날에 관한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의 유명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hos anthropos tēs anomías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 불법의 비밀mystērion tēs anomías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ho katechōn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ánomos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2: 1-10)
 
이 특이한 구절은 교회가 최종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을 때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해석자들이 주목한 바는 무엇보다도 카테콘(저지하는 것, 또는 저지하는 자)와 불법한 자 라는 두 형상을 누구/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였다.

후자를 이레니이우스는 요한일서(2:18)의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이런 주장을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는 항상 살과 피를 지닌 인간,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인 네로나 다소 상상적인 인물들로 여겨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20권 19장에서 이 텍스트를 주석하면서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지적한 뒤에 사도가 “저지하는 자”의 정체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털어놓으면서, 당시의 몇 가지 추측들을 밝힌다.

그는 이런 추측들을 두 그룹으로 정리한다. 하나는 카테콘을 로마제국으로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과 위선자들”로 보는 것이다.
 
바울의 텍스트에 대한 이런 해석들은 역사적 인물이나 권력을 지시하고 마지막 날의 임재에 직접적으로 선행해서 작용할 사건들을 해석한다.  

아감벤은 ‘역사적 드라마’라는 관점에서 논의의 초점을 두 인물(카테콘과 불법의 인간)로부터 시간의 구조로 옮긴다. 그는 ‘악의 신비’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을 이해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이때 바울의 구절에서 mystērion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 신비mystērion의 드라마
 
O. 카젤Casel은 고대 그리스에서 mystērion이 비밀스러운 교리가 아니라 드러냄이 금지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실천, 행위, 또는 ‘드라마’를 가리킨다.
 
아감벤은 이런 카젤의 주장을 진전시킨다. 그는 바울이 mystērion을 사용하는 구절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감추어진 신비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에게 드러나 있는 진리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한 이 세상에서 없어질(katargouménēn; inoperanti) 통치차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는 것이라.”
(고전 2: 6-8 )

이 신비의 내용은 무엇인가? 신의 지혜는 신비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난의 ‘역사적 드라마’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oikonomia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엡 1:9-10)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mystērion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3:9) (번역자는 mystērion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고 ‘비밀의 경륜’으로 옮겼다.)

바울에게 “신비의 역사적 오이코노미아”가 있다. 이제 신비한 것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신의 실천으로 피조물들의 세계에서 신성한 현전으로 배치되고 드러난다. (M II-5)

바울이 말하는 신비는 그 자체가 역사적인데, 이는 마지막 날의 역사가 그에게 신비-드라마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적 해석에 따르면, 종말과 메시아적 시간은 각자와 무관한 미래의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다. 저마다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면서 자신의 삶과 다른 시간을 마련하고 기존의 시간과 삶을 변형시키면서 만들고 동시에 만들어지는 연극의 일부가 된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이런 신성한 연극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힌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théatron가 되었노라”(고전 4:9)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연극의 배역을 맡은 이들 가운에 하나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종말론적 드라마는 세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변증법으로 상연된다. 등장하는 세 인물은 카테콘(저지하는 자), 불법인 자 (무법한 자), 메시아이다.

* 법이 멈춘 곳에서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는 이중적이다. 곧 늦추는 요소와 결정하는 요소가 있다. 전자는 카테콘이고(제국이나 교회로 보는 경우에 인물이 아니라 제도가 된다) 후자는 메시아이다. (M II-8)

이 둘 사이에 무법의 인간이 출현한다. 그의 등장/계시는 카테콘의 퇴장 장면과 일치하고, 그는 최종적인 전투에서 패배한다.

카테콘은 메시아적 시간을 정의하는 무법에 반대하고 숨기면서 “무법anomia의 신비”가 계시/폭로됨을 늦추는 권력이다. 이것은 제국이거나 율법적으로 구성된 모든 권위인 교회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메시아적 시간은 이중적 성격, 곧 모순되게 ‘이미’이면서 ‘아직 아닌’으로 정의된다. 바울의 텍스트는 드라마의 최종 결과를 주(主)가 불법인 자anomos를 “그의 입김으로” 제거함, 주의 도래를 현시하면서, 그를 활동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제시한다.(M II-9)

* 종말론 없는 오이코노미아
 
교회에는 두 가지 화해할 수 없는 요소가 함께 뒤얽혀 있다. 이 두 요소가 ‘오이코노미아’와 ‘종말론’이다. 전자는 세계의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신의 구원 활동이고, 후자는 세계와 시간의 종말이다.

아감벤은 정치를 “저지하는 권력”
에 정초하려는 슈미트 이론이 그의 주장과 달리 바울에 어떠한 근거도 갖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II. 비잠재성과 예외 상태로 본 메시아적 시간: 율법의 정지와 그 완성
 
이제 바울의 「로마서」를 비잠재성의 틀로 해석하면서 메시아적 시간을 해명해보자. 이는 율법과 그것의 작용중지를 통해서 ‘법 없는 의로움’을 실현하는 (예외적인) 상황을 살피려는 것이다.
 
* ~하지 않을 잠재성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 개념에서 ‘~ 않을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성dynamia이 무엇을 하지 않음a-dynamia을 포함한다고 본다.

아감벤은 건축가가 자기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지식을 ‘현실화하지 않을’mē energein 수 있기 때문에 잠재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PP 277) 잠재성은 ‘~하지 않는’ 잠재력, 또는 ‘현실화하지 않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잠재성은 때로는 어떤 것을 갖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이 결핍되기 때문에 잠재적이다. 만약 결핍이 일종의 상태hexis라면, 잠재성은 그것이 어떤 상태를 갖기 때문에, 또는 그것의 결핍sterēsis을 갖기 때문에 잠재적이다.” (Aristoteles, Metaphysica, 1019 b 5-8)

* 믿음과 율법, 또는 믿음의 율법과 행위의 율법

아감벤은 바울이 강조한 율법과 믿음 간의 (표면적인) 대립, 이율배반을 재조명하면서 메시아적인 것이 도입하는 비잠재성의 존재론을 제안한다.

아갑멘은 바울이 주제화하는 약속-믿음과 율법간의 대립이 두 이질적인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하나로 다른 하나를 부정하거나 대체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TR 90/93-4)

바울은 이런 양자택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거듭 율법의 신성함과 선함을 재 확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완성하고자 한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바울은 (대부분의 경우에) 약속-믿음과 율법 간의 보다 복합한 관계를 분절하기 위해서 그 대립을 중립화함으로써 이율배반적 제스처를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inoperante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 31)

“의로운 자는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합 2:4)와 율법에 충실하라는 명령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사이를 대립시키거나 율법을 믿음에 예속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TR 90/94)

바울이 제시하는 메시아의 법은 믿음의 법이지만 율법을 부정하지 않는다.(TR 91/95)
 
* 율법과 작용정지katargeín
당면 문제는 두가지이다. 율법의 비규범적인 측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약속-믿음과 율법 간의 관계, 보다 일반적으로 메시아적인 것과 율법의 관계를 작용정지katargeín라는 틀로 파악한다.

아감벤은 바울이 사용하는 동사 katargeín의 의미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무화시키다, 파괴하다”를 뜻하지 않는다.

한 예를 보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자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메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katargēthēmen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롬 7:5-6)

이때 사용된 katargēo는 행위energeia를 그만두게 함이다. 이런 점을 잠재성dynamis과 현실성energeia의 대립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TR 92/96-7)

메시아적인 것은 활동이 아니라 '활동의 정지'에 바탕을 둔다. 곧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힘과 활동ergon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화하지 않음’에서 출발한다. 곧 활동을 정지함, (강함이나 능력 행사가 아니라) 약함asthéneia과 능력의 유보, ‘결핍의 형태’로 그 목적telos에 이른다. (92-3/97)

한 예로, 바울은 살에 박힌 가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주께 간청하는데, “(...) 이는 내 능력dynamis이 약한 데서en asthēneia 온전하여짐이라teleitai (...)”(고후 12:9)를 듣게 된다.

이것을 직역하면, “권능(또는 잠재성)dynamis은 그 자체를 약함으로en astheneia 실현한다가 된다. 여기에서 (主의) 능력이 강함, 곧 그것을 사용하고 활동하게 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약함, 곧 능력을 사용하지 않음, 활동을 중지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룬다--메시아적 전도. 바울은 이런 변화, 전도를 통해서 율법이 그 목적에 이른다고 본다.

* 약함의 존재론

그러면 어떻게 이런 ~하지 않을 잠재성, ‘약함’으로 목적telos을 실현할 수 있는가? 아감벤은 비잠재성의 사고틀로 해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서 잠재성이 결핍을 지니는 측면, 곧 ‘~하지 않을 잠재성’이라는 점을 보았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가짐으로써, 또는 그와 같은 것이 결핍됨으로써 잠재적이다.”
(Metaphysica, 1019 b 9-10)

이제 비잠재성의 틀로 율법의 완성을 살펴보자. 이는 바울의 메시아적 전도를 아감벤의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로 번역하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약속의 힘/능력이 작용으로 옮아가고 명령하는 규율로 이행한다. 이와 달리 메시아적인 것은 이런 행함을 작용하지 않게 한다. 곧 잠재성을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으로) 비 잠재성의 형태로 되돌리고, 효력을 지니지 않음으로 되돌린다. 이처럼 메시아적인 것은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활동을 정지시킴이고, 율법을 실행하지 않음에 머무르게 한다. (TR 93/ 97-8)


바울은 메시아가 율법의 권능을 직용 정지시키고 동시에 율법을 '완성한다'고 본다. 메시아는 한편으로는 “(...)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katargēsē (...)”(고전 15:24),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마침telos”(롬 10:4)을 구성한다.

아직 남은 문제는 이때의 “telos” 가 “종말”인가, “완성”인가 하는 점이다.  아감벤은 메시아가 율법을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율법을 (비)잠재성의 상태로 되돌리는 한에서만 telos가 종말이자 완성이라고 본다.

바울은 메시아를 고후 (3:12-13)에서 곧 “활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목적으로 본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서」(3:31)의 애매해 보이는 구절을 해석해보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기하느냐katargoumen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histáanomen.”

어떻게 율법의 명령에 갇히지 않는 믿음의 율법을 바로 세울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초기 주석자들은 사도가 자기모순에 빠진다고 보았다(오리게네스).

아감벤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테모스의 분석을 참조한다. 그는 이런 이중적 의미를 분석하면서 katáargēsis를 존재의 파괴, 전면적인 해소가 아니라, 보다 선한 상태로 진전시킴, 보다 좋음을 증진시킴이라고 해석한다. (TR 94/99)

이렇게 보면 메시아적인 작용중지katárgēsis는 단순히 소멸시킴이 아니라 보존하고 완성함이다. (아감베은 루터가 이 술어를 번역할 때 止揚Aufhebung으로, 곧 부정함-보존함-고양시킴의 뜻을 지닌 술어--헤겔 변증법의 중심 술어--로 옮겼다고 밝힌다.)
 
* 예외상태와 메시아적인 것

슈미트는 법의 고유한 기능과 구조가 규범/정상/규칙이 아니라 ‘예외Ausnahme’라고 규정한다. 예외 상태는 주권자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킴으로써 법 없는 질서를 지배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예외가 (일반 규범에서 배제된 개별사례라는 점에서) 일종의 배제이지만, 배제된 것이 규범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예외상태는 (법질서에 앞서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정지에서 비롯된 효과이다.

아감벤은 이런 법적인 예외 상태에서 법의 근본 측면을 3 가지로 정리한다--외부와 내부를 구별할 수 없음, 법을 준수할 수 없음, 정식화할 수 없음.

예외 상태에서는 법을 절대적으로 정식화할 수 없다. 법은 규준이나 금지의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외 상태인 1933년 2월 28일 나치 치하에서 국민과 국가에 관한 보존 명령이 내려졌다. 그것은 단지 “제국 헌법의 114조, 115조, 117조, 118조, 123조, 124조, 153조 들은 후속 명령이 있을 때까지 효력이 정지 된다.”라고 진술할 뿐이다. (이 조치는 나치 체제의 전 기간 동안 효력을 지녔다)

여기서보면 단순히 헌법 조항들을 정지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이때 무엇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를 알 수도 없다. 아감벤은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인 강제노동수용소는 법의 ‘정식화할 수 없음’에 바탕을 둔다고 본다. (TR 100/105-6)

아감벤은 예외 상태에서 법의 이런 특성들을 메시아적 작용정지katárgēsis의 지평에있는 율법과 비교한다. 이것은 바울의 경우에 단순히 법을 비유대인들에게 확대 적용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남겨진 자를 도입함으로써 유대인과 비유대인, 율법 안에 있는 이들과 바깥에 있는 이들을 구별할 수 없게 한다.  

남겨진 자는 메시아적인 법의 활동하지 않음katárgēsis의 암호이다. 이런 남겨진 자는 극단적인 예외이므로 역설적으로만 정식화할 수 있다. (TR 100/106)

아감벤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주체의 나누어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7:15-19)이 전적으로 따를 수 없는 율법, 단지 비난하기 위한 일반 원칙으로 기능할 뿐인 율법에 직면한 인간의 (괴로운) 조건을 지적한다고 본다. (TR 101-2/107-8)

바울은 믿음의 측면에서 모세의 명령들을 메시아적으로 재규정한다. 그는 율법의 자리에 사랑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런데 사랑은 새롭고 더 나은 율법도, 불완전한 율법을 넘어서는 완전하고 지고한 율법도 아니다. 사랑은 율법을 작용하지 않도록 해서, 율법의 궁극목적tēlos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연다. 사랑 없는 율법은 금지와 그에 따르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법 없는 사랑, 금지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는 사랑은 율법의 한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 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3: 10)




 
 
 
https://www.youtube.com/watch?v=BwOsw2X7PMc&t=2s 

 
 
 

양운덕의 벤야민 강의 소개
 
http://artnmobile.xcdn.kr/m_udyang004/m_udyang004_sam_01.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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