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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정승훈 발제(2): 하버마스와 벤야민

by 파레시아 2023. 3. 29.

하버마스와 벤야민의 계보학

Walter Benjamin

하버마스에 의하면, 벤야민은 역사철학에서 메시야 이념안에서 과거가 구원을 필요한다고 본다. 벤야민은 역사를 영향사의 지속성에서 파악하는 하이데거 해석학에 긍정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진보신념에 저항하는 반-진화론적인 입장에 서 있다 ("Walter Benjamin", 347).

진보사상은 벤야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묵시적인 재난과 파국에 직면하며, 구원을 필요로한다. 벤야민은 메시야가 개입하는 지금시간(Jetztzeit)을 통해 역사를 충만하게 한다. 모든 세대마다 희미한 메시야적 능력이 더불어 존재한다 (ibid., 348). 

벤야민은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에 대한 그의 비평에서 내재적 비판을 개념화한다.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은 문학작품의 근저에 놓여있고, 문학의 외적인 주제와 스토리에 엮어 있다. 작품의 내적 근원인 진리내용을 파악하기위해 외부의 자료층들은 파괴되어야한다. 


내재적 비판은 비평가의 주관에 기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안에 내재하지만 저자조차도 파악 하지 못하는 의미와 진리의 내용을 새롭게 각성시키는 변증법적 비판을 말한다. 진리내용을 테제-반테제- 종합적 구성을 통해 전개하면서, 벤야민은 작품의 총체적 이념에 다가간다.     
 
진보란 벤야민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시간의 흐름의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시간에 대한 간섭과 비판적 개입에서 진정한 새로움이 출현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항상 동일한 것에 새로 움이 나타나고, 또한 새로움에 대한 동일한 것이 드러난다.

보들레르는 근대성을 현상적인 것, 도피하는 것, 우연한 것으로 정의하는 데, 이것은 파리에서 일시적이며, 이행의 상태를 반영한다.  보들레르가 근대의 새로움를 과거에 대립시킨 것과는 달리, 벤야민은 유행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것들의 일상화 내지 진부함에 주목한다. 동일한 것의 형식적 구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복으로 나타난다.  

대도시의 군중안에서 떠돌아다니는 사람(Flaneur)은 보들레르의 시의 중심에 속한다. 이러한 인물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시민과는 달리, 벤야민에게 움직임의 정적인 순간을 은유적으로 포착한다. <악의 꽃>에서 보헤미안, 도시의 떠돌아 다니는 사람, 창녀, 도박꾼, 소매치기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충격적인 인물들과 대도시의 지나가는 군중과의 접촉이 보들레르에게 중요하다. 벤야민에게 이것은 충격의 경험이며 기계 앞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경험에 상응한다.   

벤야민은 미완으로 남겨진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시민사회 (도시문화와 산책자의 중요성)와 하위계층의 문제를 일상의 경험적 사건들과 자본주의 구조를 검토하면서 역사철학적으로 (도시의 삶에 역사는 융해되어있다) 접합시킨다. 여기서 사적 유물론의 방법은 문예비평의 차원에서 대중경험(보들레르)의 한계와 초현실주의 판타지를 넘어서서 예속된 자들의 유효한 역사와 더불어 재구성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를 은유로 파악하며, 이것을 상응으로 말한다. 상부구조는 은유적 사고의 최종교리이며, 이것은 언어적으로 하부구조와 연관된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변형은 하부구조에 비해 매우 늦게 발생하며 문화의 모든 영역들에서 생산조건에 따라 변화를 거친다. 

이것은 그의 에술 작품의 복제에 대한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기술복제의 시대의 예술작품” (1935)에서 벤야민은 파시즘의 예술적 선동과 기만에 주목한다. 파시즘은 프로렐타리아트 대중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표현을 할 기회를 주지만, 소유관계를 변화 시키지 않는다. 

예술이나 필름에서 제의적인 가치를 정치적으로 산출하면서, 파시즘은 대중을 침해하고, 정치를 미학화하지만 전쟁을 신격화한다. 이것은 벤야민적인 의미에서 “위로부터 계급투쟁” (마르크스) 또는 국가 “헤게모니” (그람시)를 말한다. 


다른 한편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을 대중화함으로써 문화산업 (주체의 욕망을 지배하는 문화의 상품화ㅡ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을 넘어서 예술작품을 대중화는 긍정적인 해방의 기눙을 갖기도 한다.

내재적 비판과 사적 유물론

벤야민의 변증법 아우라 이론은 예속된 자들을 위한 연대와 해방을 통해  내재적 비판으로 나타나며 일체의 파시즘의 형식을 거절한다. 유대적 메시야주의를 기초로 벤야민은 과거에 묻혀버린 지금시간의 새로움과 중요성을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것의 반복강요에 저항한다. 이것은 역사를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통해  반복과 차이로 보는 니체-들뢰즈에 반기를 든다.

이것은 거대한 진보의 역사에 대항하는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를 복권시키며, 메시야적인 시간구조는 역사를 멈춰 세우는 정지의 변증법이다. 
이것은 당연히 여겨지는 것에 대해 문제틀적인 사고이다. 벤야민은 희생자들의 과거에 급진적 반성 (아남네시스)을 통해 개입하며, 구원의 새로움으로 충만한 메시야적 정치로 채우려고 한다. 

벤야민에게 변증법 상상력은 그의 역사철학의 저변에 깔려있는 데,  그것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다름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이러한 비판적 관계사유는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에서 부정의 변증법에 기초해 예술비평으로 수용되지만 (Adorno, Aesthetic Theory, 2), 벤야민처럼 선택적 비판이론이나 정치비판, 종교적 메시야주의 차원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벤야민의 별자리 사유는 이념과 객관적 대상의 변화와 관계적 사고를 말하는 데, 이것은 성좌에서 별들이 정지되거나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에 비견된다. 이것은 역사이해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지배담론(파시즘 또는 자본주의)에 의해 고정된 진보의 역사는 순전한 희생자들을 속출하는 야만에 불과하다. 별자리적 사유를 통해 베야민은 과거의 단편이 흔적으로 역사에 담겨져 있다고 본다.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과거의 희생자들의 역사를 오늘 지금시간에서 메시야의 이념과 인정정치를 통해 회복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프루스트의 기억의 이미지에서 현재순간의 치유될 수 없는 불완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Illuminations, 203).

나는 이러한 별자리적 역사이해와 아남네시스적 인정정치를 니체의 귀족주의와는 다른 평등한 (비판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유효한 역사ㅡ정치 사회적 사건과 국가권력 그리고 인식론적구조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는 내재적 비판의 인식론적 태도ㅡ로 특징 짓는다. 이러한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은 예술가에 의해 과거의 억압된 시간의 맥락으로부터 "인용"을 통해 지금 여기서 창조적으로 재인용되고 변형된다. 미학은 과거의 단절과 파열의 시간으로부터 작품활동을 통해 구원과 해방을 위한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별자리적 사유와 과거의 맥락으로부터의 미학적 인용은 유대적인 관계론적 태도 즉 메시야적 이념에 관련된다. 이제
유대 메시야주의와 역사의 천사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접합된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개념” (1940)에서 유토피아의 내용의 동일화와 반복에 대한 언어의 경험이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고대 로마 공화제의 회귀가 드러나는 것을 본다. 역사적 반복과 차이는 뿌리로 돌아가는 급진성과 내재적 비판과 관련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 분석에서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 공화제의 인물들이 프랑스의 혁명가들의 옷을 입고 은유적으로 또는 상응적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급진성은 뿌리로 되돌아가는 데 있다. 벤야민은 사적 유물론을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혁명의 기회로 인식하고, 과거의 이미지를 위험의 순간에 포착한다. 메시야적 시간의 파열이 현재에서 분출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과연 사적 유물론에 도움이 되는 지 의심한다.

고고학적 해명: 마르크스와 프랑스 혁명
 
하버마스에게서 사적유물론은 헤겔의 노동과 언어와 상호작용을 통해 소통이론으로 전개되고, 경제주의를 비판적으로 갱신한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과도한 경제사를 비판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적 접근을 다루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일 18일” 에서 헤겔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헤겔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사건과 인물들이 되풀이 된다고 말했다. 당통, 로베스피에르 또는 나폴레옹 등은 고대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부르주와 사회를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대로 역사를 형성하지 않는다. 인간은 과거부터 조건지워지고  넘겨받은 환경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어 간다. 과거의 역사와 인물들은 현재의 혁명을 위해 호출되며, 루터는 사도바울을 가장하기도 했다.

1789년 대혁명부터 1814년 나폴레옹 황제의 몰락에 이르는 시기에 혁명가와 반동가들은 로마 공화국과 로마제국의 의상을 차례로 걸치고 나타났다. 1848년 유럽의 혁명은 1789년 혁명의 전통을 서투르게 모방하기도 했다. 역사에 대한 사실주의적 접근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서 사용한 이솝의 우화를 인용한다:  “이곳이 로드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 여기에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추어라.”  


마르크스는 역사에 대해 단순히 계급투쟁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다차적으로 나타나는 파열과 다름 그리고 반동을 사실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파악했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12월 루이 보나빠르뜨가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1851년 12월 그의 쿠데타가 발생하고 황제로 즉위하는 제 2 제정 (1852-1870)이 시작되었다. 

마르크스는 민주당원들이 1852년 5월 루이 보나빠르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것으로 예견하고, 마치 이날을 유대 기독교적인 천년왕국의 시작으로 여긴 순진한 태도를 비판했다. 
역사의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히 경제사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적 영역에서 반복과 파열 그리고 반동의 의식의 변증법을 보았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 분석을 검토해보면, 그는 더 이상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초로 한 부르즈와 자본가와 프로렐타리아트로 이분화를 통해 대입하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는 평민 (제3 신분)이 인구의 96%를 차지했고 매우 다양한 사회그룹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경제는 농업과 상업 자본 그리고 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평민에 속하는 부르주아지가 앙시앙 레짐의 귀족주의와 봉건성을 타파하기위해 혁명을 주도했다.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평민계층이 아니라 자코벵 (중산층 지식인)과 상퀼로텐 (하위 계층: 수공업자, 소상점 주인, 장인, 도제공, 일용노동자 등)을 포함했고 정치와 혁명주체인 시트와이엥으로 출현했다. 산퀼로텐 안에서도 단결된 계급이 형성 되어있지 않았다. 수공업자나 소상점 주인 같은 그룹은 도제공이나 일용 노동자와 같은 그룹과 이해갈등이 심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계층동맹의 제한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시민이 프랑스 사회에서 정치와 혁명의 주체임을 간파했다. 이러한 시민의 혁명적 주체는 루소의 국민주권론으로부터 오며 영국의 자유 방임주의 전통 (존 슈트어트 밀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결부된 부르주아적 사고와 제국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Soboul, Franzȍsische Revolution und Volks- bewegung).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고고학이 밀의 자유방임과 공리주의 그리고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에 있음을 날카롭게 보고 있었다. "여기가 로드스다. 여기서 뛰어라."


사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를 지나치게 경제주의로 몰아부치고 마르크스 자신이 기여한 사회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대한 통찰을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와 의회 민주주의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서 독일에는 시민(citoyen)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부르주와는 개인적으로 경제행위에 관여하고 자기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이기주의자를 말한다. 헤겔은 이것을 bürgerliche Gesell- schaft로 표현하고 영어로는 시민사회 또는 부르즈와 사회로 번역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개념을 수용 했지만, 그가 사용하는 개념에는 편차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상황에서 말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 즉 공장주를 말한다. 이런 계급은 당대 독일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마르크스는 헤겔이 <법 철학>에서 전개하는 정치이론과 관료제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1848년 
3월 독일혁명에 관여하면서, 정치주체로서 시민 또는 공민에 근거한 민족국가와 사법적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고려했다. 
그러나 3월 혁명은 정치주체인 시민이나 공민이 미약한 독일의 사회적 구성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의 산업혁명은 비스마르크가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비로소 대공장과 산업이 증대되면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의 시민사회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는 특히 엥겔스가 쓴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에 대한 입문 (1895)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엥겔스는 매우 중요한 그러나 거의 발견되지 않은 “위로부터 계급투쟁”을 언급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와 비스마르크를 엥겔스는 “위로 부터의 계급투쟁”으로 정의하고,
단순하게 밑으로부터의 계급투쟁의 한계성을 비판적으로 갱신했다. 


계보학적으로 볼 때, 계급투쟁은 헤겔의 지배자와 예속된 자들의 인정투쟁에 기초하며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부터 시작된다. 시민은 독일이나 영국의 자유방임주의에 기초한 부르주와가 아니라 프랑스의 혁명 주체인 시트와이앙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 그리고 초기 로마의 공화제의 민주주의에서 드러난 정치주체를 말한다. 

루소는 이것을 자신의 시민국가에서 개념화하고, 당대 영국의 의회 제도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는 데, 영국에서 자유는 의회 선거에서만 존재한다. 의원들이 선출되면 이들은 더 이상 국민의 관심을 대변하지 않는다. 선거가 끝나면 국민은 노예나 다름없다.

프랑스 혁명에서 정치 주체로서 시민은 대의원들이 국민적 승인을 얻어야하고 사법적 대변인이 아니라 위임받은 대표로 자격이 부여되며 시민은 소환권을 갖는다.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그룹은 프랑스 혁명당시 상킐로텐들이었고, 이들의 전통이 1871년 저 유명한 파리꼬뮌에서 이어진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로 개념화하지만 그의 글을 검토해보면, 일당지배에 의한 계급독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당제에 기초한 탈 중심화된 민주주의와 보통선거, 의무교육, 국가종교로서의 카톨릭의 해체, 개인종교 활동의 허락, 경제적 정의가 실현된 상퀼로텐의 입장이 정점에 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국가관료 지배를 극복한 최초의 역사적 실례를 보여주며, 루소의 정치이론의 마지막 유산으로 볼 수 있다.  
 
베야민의 미완의 작업인 <아케이드 프로젝트> 19세기 파리의 역사적 사건과 사회구조를 접합시키고,  시민사회와 하위계층의 문제를 사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보여준다.

비판적 반성
 
하버마스와는 달리, 벤야민의 계보학은 유대적 메시야주의에 기초되며, 역사에서 밀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를 회복하려고 한다. 소통합리성은 이러한 유효한 역사의 흔적을 동시대화할 수가 있는가? 이러한 측면을 아감벤은 문제틀하면서 계보학과 사적 유물론의  접합을 고고학적인 해명을 통해 전개했다     (Agamben, The Man without Content, 69).
 
벤야민은 상호주관성이 아니라 역사철학 테제 (VIII-IX)에서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Angelus Novus에 주목한다. 심판의 천사는 역사적 진보의 뒤안 길에 쌓여진 고통받는 무수한 희생자들의 잔해를 쳐다보고 있다. 죽은 자들을 다시 불러내고 살려내고 싶어하지만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우로 인해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천사 앞에 쌓여있는 잔해더미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이 폭풍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서 나타나는 신정론의 문제이며, 천사조차도 해결을 하지 못한다. 벤야민은 메시야를 요청하고 밀려 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 (지금시간) 즉 신정론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독해하고 현재에서 복권시키는 변혁적 내용을 담는다.
 
벤야민에게서 비상상태는 악압된 자들의 유효한 역사에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이된다. 밴야민에게서 진정한 의미의 비상상태는 진보로 가장한 파시즘에 저항하는 투쟁에서 구체화된다 (역사철학 테제 VIII). 
 
벤야민의 억압된 자들의 역사에 대한 아남네시스적인 반성과 파시즘 투쟁 그리고 메시아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구조안에 공명을 갖는다. 이것은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사적유물론의 수용과 관료제 비판 그리고 현재의 시간을 치고 들어오며 모든 것을 새롭게 변혁 시키는 하나님의 혁명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혁명으로 메시아 공동체를 해방의 소명으로 부르고, 땅에서 밀려나간 자들 (massa peditionis)의 권리를 보호한다. 

공공신학과 인정투쟁

하버마스와 벤야민을 다루면서 나는 공공신학과 인정의 사회적 실천을 다음처럼 요약한다. 인간은 담론과 네러티브에서 사회적 소통과 유효한 역사를 위한 사회적 실천에 관련된다 ㅡ이것이 "나"의 문화적 정체성과 생활세계를 규정한다ㅡ이것을 침해하는 일상의 파시즘과 관료지배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미디어 영역에서 나타날 때 저항과 투쟁이 시작된다ㅡ정치에선 인권투쟁이, 경제영역에선 계급투쟁이, 미디어 영역에선 진리투쟁(이데올로기 비판)이, 문화영역에선 위신과 신분투쟁이 일어난다 ㅡ담론과 사회적 실천이 없는 투쟁은 파시즘 선동으로 현상하지만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도덕적 판단은 전제적인 국가폭력을 승인하지 않는다. 국가는 전제와 독점권력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비판적 민주주의, 국민주권과 승인을 기초로 하위계층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면서 세워져야한다. 이것이 하버마스와 벤야민으로 부터 오는 통찰을 비판적으로 통섭하고, 아게네스(고전 1:28)와 삶과 연대하는 공공신학의 인정정치와 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를 향한 질문 
          
문화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심은 무엇보다 더 2001년 9-11사건에서부터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하버마스는 세속화된 서구사회와 이슬람의 종교 세계의 갈등과 대립이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폭발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의 종교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은 <인간 본성의 미래, 2001>와 2004년 교황 요셉 라칭거와의 공개 토론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책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 2005>에서 하버마스는 심지어 신학적인 전환을 보이기도 한다.
 
다문화사회에서 변화된 문화적 환경은 종교와 공론장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든다. 이것은 종교 엘리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종교간의 대화를 말하지 않는다. 종교가 사회구성을 어떻게 이끌어가며 다원화된 사회안에서 소통과 상호인정 그리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생활세계의 사회학을 지적한다.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137)
 
그러나 하버마스와는 달리 종교의 생활세계에는 단순히 합리화와 타협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일례로 출애굽의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과 해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더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출애굽의 사건이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이스라엘 국가 파시즘에 남용되고 팔레스티나 기독교인들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된다. 종교적 이념이 파시스트들의 손에 의해 짝퉁처럼 변질될 때, 팔레스티나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기를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포스트 쇼아의 전통에 서 있는 반-파시스트 신학자들은 출애굽의 파시즘 해석을 거절하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여기서 소통이론은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의 그믈망에 엮어지고 만다.
 
이러한 논쟁은 성서의 언어와 사회 문화적 관계를 두텁게 기술하고 해명하도록 요구한다. 만일 하버마스가 후설의 생활세계 이론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규칙성을 그의 소통이론에서 중요하게 수용한다면, 후설의 언어이론 (문법, 소통, 번역가능성)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공적사용과 게임 그리고 삶의 형식에서 추종하는 규칙은 보다 인정과 해방의 차원에서 확대될 필요가 있다.
 
한 일례로 자바 섬의 투계놀이 (클리포드 거츠의 문화이론)는 서구인들에게 합리적으로 소통되기 전에 자바인들의 삶의 문화적 형식에 기초되며, 이들의 언어는 동시에 화란의 식민지 문화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있다. 언어와 사회적 삶의 형식 또는 생활세계는 랑그의 문법으로 환원되거나 문자학으로 (소쉬르-데리다) 해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랑그의 문법이나 차연이나 해체가 사회적 관계안에서 공적으로 사용되고 삶의 형식에서 나타나는 권력관계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사적언어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난센스가 되고 만다. 물론 하버마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상호주관적 규칙개념을 수용하고 가다머의 지평융합론에서  비판한다.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II: 18). 
 
그러나 내가 보기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은 공적사용과 삶의 활동과 문화형식을 통해 후설의 생활세계론과 관련된다. 두터운 기술이론은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을 넘어서서, 종교, 문화, 예술영역에서  창조성과 인정 그리고 해방의 기획을 가능하게 하고 번역하게 한다.      
 
다른 한편 푸코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에서, 푸코가 칸트의 계몽철학의 유산과 보들레르를  중요하게 수용하는 사실이 간과된다. 근대성은 성인이 되기위한 역사 비판적 태도를 의미하며, 이러한 비판적인 방법은 하버마스처럼 보편적인 소통 합리성을 기초로 설정되지 않는다. 이미 서구의 합리성은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그물망 그리고 담론의 정당성을 통해 사회적 지식체계 (에피스테메)의 지배로 성립된다. 
 
특히 푸코의 계보학은 유효한 역사와 더불어 생명 제어정치 (국가의 신체 정치학)에 관계되며, 이 영역은 하버마스의 소통 합리성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규율권력과 신체를 유순하게 길들이는 전략은 이미 마르크스의 소외된 노동개념에서 그리고 베버의 노동과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규율 시스템 (테일러 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담론의 고고학적 분석과 계보학적 역사서술에서 푸코는 상호주관적 소통이론에서 밀려나간 자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물론 하버마스는 1969년 초기논문인 “인식과 관심”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인식과 관심의 일치는 [자기반성의] 변증법에서 입증되며, 이러한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억압된 대화의 흔적에서부터 억압된 담론을 재구성한다”
(Technik und Wisenschaft als >Ideologie<, 164). 포스트 세속화시대에 신학은 더 이상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판적인 지성인들과의 토론과 합의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회의 담벼락 안에서 특권을 구가하던 시대는 끝나간다. 

이 지점에서 공공신학은 언어의 번역과 소통의 진실함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생활세계와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방어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을 간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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