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 공공신학센터 창립기념 강연회
2023년 5월 30일(화) 오후 3시/ 한신대학교신학대학원
공공신학의 스펙트럼과 전망 /
채수일 박사(전 한신대학교총장/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
1. 먼저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센터’(이하 공공신학센터)의 창립을 기념하는 강연회가 한신대 신대원에서 열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기념강연회를 준비한 칼 바르트 센터 소장 임창세 박사님과 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석학교수인 정승훈 박사님, 장소를 협조해주신 한신대학교 강성영 총장님과 전철 신대원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한신대학교는 일찍이 ‘평화와 공공성 센터’를 세워, 남북, 동북아시아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공공신학센터’는 지금까지 신학과 사회과학의 대화를 통한 ‘공공신학’의 전개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온 것 같습니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학제간 대화는 한신대학교가 창립부터 추구한 가치이고, 지금도 지켜져야 할 한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센터와의 협업은 한신의 신학적 전통과 정체성을 더욱 발전시키고, 한국교회의 성숙한 발전에 기여할 것입니다. 신앙의 사유화, 내면화, 반지성주의, 배타적 독단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를 계몽하고, 신학의 (교회성장을 위한, 혹은 타자를 악마로 낙인찍기 위한) 도구화로부터 신학을 해방시키는데 공공신학센터와 한신대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학문으로서의 신학 공부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2009년 한신대 총장 취임 후, 1년 동안 신대원 세미나를 했지만,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교실에 들어가는 것은 학생들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중단 한 후부터 깊이 있는 공부에 매진하지 못했습니다. 제 전공만이 아니라 여러 신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것은 물론, 공공신학이 대화하는 다양한 이론들과(포스트콜로니얼니즘, 후기자본주의, 의사소통이론, 생태학, 생태여성주의, 신체정치학 등등), 공공신학의 장에 소환되는 수많은 이론가들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그래서 공공신학센터의 출범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위해 축사만 하겠다고 했으나, 주최 측이 제목을 ‘공공신학의 스펙트럼과 전망’이라고 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줄 모르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받아드렸습니다. 제목은 그럴듯하게 학문적으로 들리지만, 내용은 비전문가의 상식적인 이야기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아는 대로, 개신교 신학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전통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개신교의 신학적 정체성은, 특히 마틴 루터 (M. Luther, 1483-1546)의 신학사상에 근거한 정체성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혜’로 압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개신교의 신학적 정체성은 개인의 발견과 신앙의 자유를 확립함으로써 서구 근대의 문을 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전통 위에 서있는 개신교의 정체성은 오늘 ‘신앙의 사유화’에로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삶에서 하나의 별개 영역이고 도덕과 죽음의 문제를 다룰 뿐, 경제적 혹은 공적 삶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후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신앙을 공적 삶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켰습니다.
신(神)이 사람의 정신적 영역으로, 기독교가 세계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 것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어,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신학에서 명확하게 되었고,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의 자리도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에로 축소되었다고 생태여성주의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런 ‘신앙의 개인화’, 혹은 ‘내면화’는 감성에 근거한 부흥운동과 교회성장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부활, 라틴 아메리카에서 빠르게 퍼져가는 ‘신(新)은사운동’ 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유화(Privatisierung)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의 역사에서 신앙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신학 운동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20세기에 등장한 신학만 기억해도,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 ‘혁명의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책임사회론’, ‘정의, 평화, 창조’(JPIC), ‘희년신학’, ‘생명의 신학’, ‘생태신학’, ‘에코페미니즘 신학’, ‘공공신학’ 등이 있습니다.
‘공공성’(Oeffentlichkeit) 개념의 역사적 발생과 발전 과정에 대한 논란이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고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저는 ‘공공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populus)이 공개적인 의사소통의 절차를 통하여(publizitaet) 공공복리(salus publica)를 추구하는 속성’으로 규정하는 조한상의 입장을 따르려고 합니다.
3. 그렇다면 ‘공공신학’이란 무엇일까요?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1926- )은 신학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열정으로부터 생성하며, 이 열정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 생성’하고, ‘이 열정 속에서 신학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세계에 대한 환상’(Phantasie)이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선교신학, ‘공공신학’ (Public Theology)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몰트만에 따르면 ‘공공신학’은 ‘이 시대의 고난에 참여하며, 동시대인들이 실존하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나타내고...... 비판적으로 또 예언자적으로 사회의 공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과제를 가지는데,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서의 공공신학은 그러므로 ‘근본주의적으로 자신의 신앙공동체 속으로 퇴각하지도 않고, 현대주의적으로 사회의 경향에 편승하지도 않으며, 저항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다.’고 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에게 ‘공공신학’이란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공신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시대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는 신학’,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으로 사회의 공적 문제에 개입하게 하는 신학’,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신학’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독일 가톨릭 정치신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씨름해온 요한 밥티스트 메츠 (J. Baptist Metz, 1928- )는 탈현대시대 신학의 의무를 세 가지로 규정했습니다. 그 첫째 의무는 복음을 왜곡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요, 두 번째 의무는 기독교의 교리를 그 등장 초기의 위험했던 정치적 사건과 유비시켜 해석해 주는 일이며, 세 번째 의무는 성서 안의 정치적인 요소들을 탐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는 ‘시대가 부여한 긴급성과 책임 있게 행위 해야 할 필요성을 무한한 시간 밖으로 연장하는 것은 결코 신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신학의 궁극적 과제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게 만드는 고난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창조의 본질임을 환기하는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메츠의 주장은 ‘헬레니즘화된 기독교가 그리스에서 출원한 철학적 이성을 통해, 이스라엘 정신으로부터 나온 고유의 근원과 너무나 멀어져버렸고, 그 결과 신학은 고통의 외침과 보편적 정의에 대한 요구에 너무나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진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메츠가 정당하지 않게 고통받는 자들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결정적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과연 신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씨름하면서, 메츠는 고통의 문제를 ‘플라톤화하면서 그 첨예함을 둔화시키는 태도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메츠는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결코 흔들리지 않은 듯 보이는 신학의 무감각에 저항한 것이지요. 헬레니즘화한 기독교가 자신의 유대적 근원을 거부하고 관념론적 이성의 표현이 되어 버린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메츠는 ‘구원에 대한 성경적 비전이 단지 개인적인 죄의 사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상황으로부터 집단적으로 해방되는 것까지 포함하고 (그리고 신비적인 것과 아울러 일종의 정치적 요인까지 담고 있으며),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종말론적 궐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공공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공공신학의 대변인은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은퇴교수인 맥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 1935-20 16)인데, 그 역시 ‘Public Theology’ 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한국어로는 ‘공공신학’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란 개념을 미국에서 최초로 사용한 신학자로 루터교 신학자인 마틴 마티(Martin Marty, 1928- )를 주목했습니다. 마틴 마티는 사적인 영역으로 퇴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시민종교’로 규정하고, 그에 대립하기 위해 ‘공적 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공공신학’ 이 미국이라는 특수한 콘텍스트에서 발전된 개념이라고 보는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이 초래한 세속화의 관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졌던 신학적 전통에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공공적 지식인으로서 사회정의를 다루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1987년 창립, 이하 기윤실)이 창립 20주년을 기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정립하려는’ 의도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전문가 집담회와 함께 전개되었습니다. 기윤실은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진영의 기독교시민운동의 하나로 출범했는데, 복음주의적 기독교 시민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봉호(1938- )교수가 주창한 이른바 ‘선지자적 비관주의’로는 변화된 시대의 기독교시민운동을 끌고 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공공신학’을 모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차례의 전문가 집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종합하면, 기윤실이 이해하는 ‘공공신학’은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단기 선교팀 피랍사건 후 더욱 분명해진 한국 개신교의 ‘게토화’를 극복하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신학적 담론으로 구상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담아내는 신학적 담론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굳이 새로운 담론을 모색하려는 것은 기독교 시민사회론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교’나 ‘민중신학’ 보다는 ‘공공신학’이라는 담론이 시민사회 안에 있는 교회의 공공성을 이끌어내는데 덜 과격하게 받아드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도 ‘공공신학’이 기독교 시민사회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되었습니다.
비슷한 성격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새 세대 교회윤리연구소’는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와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발간하였습니다. ‘새 세대 교회윤리연구소’ 문시영 소장에 의하면, 이들의 공공신학 형성 배경에는 시민사회의 ‘교회비판’과 교회의 이른바 ‘은혜 윤리’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자신의 공공성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판 외에 또 다른 길을 시민사회가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그는 시민사회 측으로부터 제기되는 교회의 공공성 세우기의 내용을 몇 가지 제시하는데, ‘목회자 납세문제’, ‘교회와 지역사회의 주차갈등’, ‘저작권 문제’, ‘교회 재정투명성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기고자들 가운데는 세계화 문제, 기독교경제윤리 등 거대담론에서 접근하는 학자도 있지만, 목회자 납세문제, 주차갈등 등 미시담론,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공적 신학’, ‘공공신학’, 혹은 ‘공공성 신학’ 등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신학의 내용과 방향에서는 약간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주의권에서 주장하는 ‘공적 신학’, ‘공공신학’은 복음주의 내부 진영 안에서는 상대적 진보성을 담보하는 담론이었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게 ‘공공신학’은 사회참여신학의 전통에서 다양한 담론으로 이미 논의되었기 때문에, 공공신학이 그렇게 낯선 신학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공공신학을 전개해온 정승훈 교수는 공공신학은 ‘다양한 공론장,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종교, 의료 등에서 공공선과 정의, 그리고 사회에서 밀려 나간 자들에 대한 연대를 담는다.’고 합니다. 공공신학이 관심하는 대상 영역은 가히 세계 자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엄청나게 넓습니다. 공공신학이 대화하는 ‘다양한 공론장’을 조명하기 위해서 정승훈 교수는 ‘사회학적인 논의’를 수용한다고 하는데, 이 사회학적 논의를 위해 동원되는 이론들과 학자들의 계보는 실로 광범위합니다. 수많은 이론들과 학자들이 폭넓게 소환되고, 인용되는데, 이들 사회학적 논의들은 사회분석을 위한 도구들이고, 공공신학은 이런 사회학적 도구들을 밑거름 삼아 변화를 시도합니다.
공공신학의 실천은 ‘공공선과 정의’이고 방법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와 ‘파레시아’(진실을 과감하게 말하기)입니다. 공공신학은 ‘종교 안에 담겨 있는 사회윤리적 지침을 검토하며 시민사회와 생활세계를 정치권력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고’, ‘폭력의 세력에 대한 비판과 변혁을 통해 하나님의 혁명에 헌신하는 사회비판신학으로 자리매김’한다고 합니다. 특히 정승훈 교수는 공공신학의 ‘신체정치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공공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는데, 공공신학은 ‘공중보건과 팬데믹 시대에서 드러나는 인종차별, 경제적 불평등, 교육의 계층화, 젠더와 섹슈얼리티, 매스 미디어의 시뮬레이션 등 시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국가의 신체정치학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담는다.’고 합니다.
정승훈 교수에 의하면 신학자를 포함한 기독교인의 공공성은 ‘파레시아’(진실을 과감하게 말하기)로 구체화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화해의 은총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정의를 증거하기’에서 드러납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과의 공감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과감하게 말하는 것이 신학자, 기독교인의 공공성이라는 것이지요.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신학자, 하나님의 정의를 과감하게 선포하지 않는 신학자는 공공신학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회복적 정의’입니다. 진실을 과감하게 말하지 않는 복음의 윤리는 개인주의적 내면화로 떨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진실을 과감하게 말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이며 타자에 대한 정죄로 가기 때문에 공공신학은 ‘회복적 정의’를 중시합니다.
4. 공공신학의 전망
신앙과 신학이 분리되어 있고, 반지성주의가 지배하는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신앙의 내면성과 공공성, 신학의 게토화와 보편성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긴장을 기독교인 개인은 물론 교회공동체가 유지하면서도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공적 책임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반공주의와 약탈적 자본주의 가치를 추종하고, 반대자들을 정치적이라고 매도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더 정치적인 행태와 권력 비판적인 정치 참여 사이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신앙적인 것인지를 분간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과제입니다. 동시에 공공신학은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는 사안들에 대하여 회복적 정의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소개한 공공신학은 거칠게 이해하면 세상(생활세계) 안에서 신학의 공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문제가 곧 공공신학의 관심사인 것은 아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공공신학은 일종의 약방의 감초와 같다고 할까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만병통치 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외쿠메네와 대화하는 신학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는 공공신학의 폭넓은 콘택스트와 여러 학문들과의 대화가 즐겁습니다. 다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억하는 것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그의 ‘도덕의 형이상학’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가는 물리적 길은 항상 한 줄기 선일뿐 평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살아가며 어느 하나를 취해서 가지려 한다면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것들을 그대로 버려둬야 한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장터의 아이들마냥 스쳐가는 흥밋거리에 모두 손을 뻗치는 사람은 선을 평면으로 바꾸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그재그로 걸어가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모든 것이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자칫 대화하는 신학이 ‘지그재그로 걸어가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지요. 신학이 모든 문제와 씨름하면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하다가는 자칫 아무 것도 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당대 철학에게 경고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철학에서는 행간의 눈물과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와 다들 죽고 죽이느라 아우성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겠지요.
공공신학은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권력비판적인 신학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공공신학은 지금까지 플라톤 철학과 헬레니즘의 기반 위에서 형성된 서구 신학의 개인화, 내면화, 교회의 게토화를 비판하는 과제와 함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학문들, 특히 사회과학과 대화하고, 공공신학 실천의 장인 교회의 세계 개입을 열어가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한 사람의 신학자가 할 수 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정승훈 교수의 ‘공공신학과 신체정치학’을 읽었는데, 놀랍게도 정승훈 교수는 그 일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생활세계와 시민사회의 다양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이론들과 그것을 공공신학의 전개를 위해 동원하여 대화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리스트에 놀라게 됩니다. 신학자 한 사람이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세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의 거대한 넷트워크로 얽혀 상호의존적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문제가 곧 한국의 문제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사회, 한국인의 생활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서구 학자들의 이론이 도움이 되고, 또 중요합니다. 다만 공공신학의 이론과 실천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스팩트럼을 넓히고, 구체적인 전망을 모색, 제시하는 것이 한국 공공신학자의 과제라면, 미-중 신냉전 시대의 동아시아 평화와 한국의 분단체제 극복, 민주주의의 위기, 기술과학(특히 인공지능과 관계된)의 문제, 한국교회의 배타성(성소수자, 난민, 북한에 대한)과 교회의 정치세력화, 진보, 보수 사이의 이념갈등(역사전쟁)과 극단적 양극화, 사이비 이단 기독교 종파(신천지, 전광훈 현상 등)와 제도권 교회의 관계, (재정 악화와 정체성 위기로 인해) 흔들리는 외쿠메네 등이 공공신학의 의제로 확대되고,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채수일 석좌교수(한신대 전 총장)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선교학과 종교학, 외쿠메네를 전공했고, 한국신학연구소장, 한신대학교 총장,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 현재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 '대화하는 신학'에 관심이 있음.
https://www.youtube.com/watch?v=OuE71A4euYA
'[창립강연]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창세 발제(3) - Max Weber (0) | 2023.04.05 |
---|---|
임창세 발제(2) - Max Weber (0) | 2023.04.05 |
공공신학이란 ? (0) | 2023.03.30 |
칼 바르트와 공공신학 센터 안내 (0) | 2023.03.30 |
이병옥 논찬: 개혁교회 소명론과 막스 베버 (0) | 2023.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