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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과 사회철학

하버마스와 가다머 논쟁에서 남는 문제

by 파레시아 2023. 2. 5.

하버마스와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을 두고 논쟁을 했다. 가다머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보편성이다. 텍스트나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한다.

가다머는 쉴라이에마르허와 딜타이에서 부각되는 심리주의적 해석의 한계를 극복한다. 가다머에게서 진리는 언어를 통해서 나에게 이해로 드러난다.

진리가 스스로 나에게 언어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텍스트나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은 실종된다. 진리를 다루는 데 방법이 사라진다면 스스로 드러나는 진리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것을 가다머는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의 만남으로 말하고, 이러한 지평들의 융합되는 곳에서 진리와 이해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사고는 진리를 신비롭게 표현하지만, 전통과 권위를 복권 시킨다. 물론 고전 작품을 이해할 때 작품의 권위가 중요하지만 고전 작품 자체가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설령 언어를 통해 이해 된다고 해도, 언어적 이해는 작품에 대한 분석과 방법을 피해 갈 수가 없다.
이른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주객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부각시킨 그의 존재론이 여과 없이 가다머에게 이어진다.

하이데거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라는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을 넘어서기 위해 시간성 안에 인간존재의 철학을 기획했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가 되고 현존재를 분석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중심과제가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중심주의는 형이상학에 불과하며, 현존재는 큰 존재 (역사, 전통, 문화, 민족)의 부름 앞에 설 때 존재의 트임이 생긴다.

큰 존재는 언어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나에게 나타나는 언어가 무엇인지 비판하고 분석하기가 어려워진다. 현존재는 민족이나 인종이라는 큰 존재가 호출하면, 이러한 부름에 실존적으로 결단해야 한다.

마치
칼 슈미트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비상상태에서 정치적 결단을 하고 나를 부르면 나는 거기에 운명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정치적 실존과 하이데거의 현존재 결단이 파시즘철학으로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은 가다머가 언어의 왜곡을 충분히 고려하는 지 묻는다. 소통은 언제든지 왜곡된다. 고전 작품 안에서도 언어는 왜곡을 피해 갈 수가 없다.

만일 16세기 고전작품이 군주제를 지지 한다면 그것이 지금 여기서 있는 나에게 추종해야 할 진리가 되는 가?
하버마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을 해석학의 틀 안에 확보하려고 한다. 해석과 언어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은 새로운 해석학의 모델을 열어준다.

고고학적 해명: 생활세계와 문제틀

하버마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마르크스로부터 수용했다. 마르크스에게서 이데올로기는 캄캄한 상자처럼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가 하면 가다머는 자신의 해석학을 후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가다머 전통에서 데카르트의 한계를 이미 극복한 스피노자의 자리는 없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주객도식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현존재나 큰 존재 같은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세계에 나타나는 인간 존재들은 양태들이며 위계질서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나를 실존적으로 불러내는 큰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 엘리트주의적으로 결단하고 자신의 운명을걸어야 할 그런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없다.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평등 민주주의이며, 이러한 정치제도를 구성하는 시민국가이론이며, 무우주적인 사랑으로 포용하는 윤리이다. 하이데거는 근대성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기껏해야 데카르트 인식론의 협소함을 넘어간 사람이다.


그러나 후설은 하이데거의 파시즘적 구조에 대립한다. 진리는 하이데거처럼 그리 쉽게 지름길로 나에게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 후설은 전통이나 자연의 세계가 나를 호출할 때 판단 중지하고 뒤로 물러선다.

모두가 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위대한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을 오히려 문제틀 한다. 거대한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호출이 적합성을 갖는지 후설은 의미의 세계 (생활세계)와 더불어 부단히 대화하면서 이데올로기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나의 의식은 위대한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의미와 생활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나는 책임적 비판을 통해 생활세계를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한다.
의미의 세계로부터 오는 내재적 비판을 통해 후설은 권위나 전통의 편견으로 뒤 섞인 애매함과 침천을 폭로하고, 이로부터 생활 세계를 방어하는 해방의 기획을 시도한다.

후설의 신중한 인식론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고있고 신체의 중요성을 통해 공감윤리를 구축하고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심리학을 비판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염려하는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생활세계를 위해  해방의 현상학을 파시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후설의 철학은 비판이론이지만 하버마스나 마르크스와는 다르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부정적인 소통의 왜곡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식체계 (에피스테메) 안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지식체계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비판 그리고 해방의 차원을 통해 새롭게 발전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후설의 공감윤리는 중심에 자리하며 하이데거 처럼 윤리를 존재론에 삼켜 버리지 않는다.

가다머의 영향사는 유효한 역사를 비켜간다

가다머가 철학적 해석학을 기초하면서 역사의 영향의 차원(영향사)을 언급할 때, 이러한 영향사는 언어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보편주의는 별자리와 같은 다양한 역사적 계기들을 충분히 고려할 수가 없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언어는 보편적으로 일반화할 수가 없으며, 각각의 다른 역사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다.


역사에는 지배의 역사가 있는 가하면, 예속된 자의 역사가 있고, 서로 다른 다양한 담론의 체계들이 녹아있다. 권력관계과 물질적 이익 그리고 지식의 체계 (에피스테메)에 의해 언어는 보편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개별화되고, 굴절되고 때론 파열되며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처럼 생활세계 안에서 다양한 계기들을 형성한다. 진보신념을 기초로 한 야만의 역사 (사회 진화론과 인종차별, 그리고 식민지 역사)에서 언제든지 밀려나간 담론의 역사-- 유효한 역사--는 현재주의에 "아니오" 하면서 튀어나올 수 있다. 이것을 나는 발터 벤야민의 개념인 내재적 비판으로 유용화한다.

에피스테메의 차이들

시대적으로 다른 종교적 에피스테메에서 예수와 그의 고난 받는 백성은 진리내용에 속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내용은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물질적 이해와 지배방식을 통해 신분과 계급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으로 나타는 지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본래적인 진리내용과 이후의 역사적인 과정에서 왜곡되고 변질된 것들이 내재적으로 비판된다. 지평융합은 생활세계와 고고학적 해명 그리고
내재적 비판을 통해 의미론적인 스펙트럼을 펼쳐진다. 이것은 의미론적 서클을 말하며,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고고학적으로 설정한다. 언어와 권력관계의 그물망이 분석될 필요가 있다.  

지평융합에 앞서 현상학적으로 볼때 지배와 야만에 의해 사라진 부재의 역사 즉 순전한 희생자들의유효한 역사가 존재한다. 이것은 정의나 여타의 수식어로 상품화되는 걸 거절한다. 이러한 부재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타자의 신체를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이념의 지향성과 물질적 이해관계 그리고 권력의 지배에서 드러나는 선택적 친화력에 주목하고 계급과 신분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해명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접합이론을 통해 나는 후설의 생활세계 안에 기초된 책임적 비판과 해방의 기획을 가다머와의 지평융합과는 다르게 유효한 역사를 위해 설정한다. 나의 사회학적 사유는 후설의 생활세계와 더불어 푸코의 고고학으로 가지만 벤야민의 내재적 비판과 선택적 친화력을 의미론적인 서클과 지평융합에 접합 시킨다.


역사는 하늘의 별자리처럼 지금까지 부재로 있었던 것을 새로운 의미영역으로 드러낸다. 역사이해는 지평융합에 앞서 문제틀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것을 해명하는 고고학의 과제가 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인식론과 고고학적 해명이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논쟁에서 밀려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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