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과 종교개혁
헤겔 당대 사회적 분위기는 혁명적이었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1819년 러시아 출신의 극작가 코체부(1761-1819)가 간첩혐의로 살해되었다고 생각했다. 메테르니히는 이 사건을 유럽의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프로이센 대학에 대대적인 출판물 검열과 억압이 시작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목표로 결성된 학생연맹(Burschenshaft)의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헤겔의 동료이자 논쟁자였던 베를린 대학의 저명한 신학자 쉴라이에르마허 (1768-1834) 역시 혁명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헤겔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당대 쉴라이에르마허와의 논쟁에 관여되어 있었다. 쉴라에르마허의 <신앙론>은 1821-22년 사이에 출간되었고, 1824년 <종교철학강연>에서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감정이 아니라, 계시와 삼위일체 그리고 화해론을 기초로 그의 철학적 신학을 전개했다. 성육신에서 헤겔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파악하고, 그리스도론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를 이해했다. 헤겔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부정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Religion (1824),” Hegel, Theologian of the Spirit, ed. Hodgson, 239-40, 242).
헤겔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화해론에 기초해 삼위일체론을 전개했고 가난한 자들의 복음의 혁명적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겔 당시 프리드리히 빌헤름 3세의 지배는 프로이센을 나폴레옹 개혁 이전의 시대로 돌려놓는 반동의 시대였다. 특히 헤겔이 죽기 전 프랑스 7월 혁명과 투표권 확대를 위해 시도된 영국의 개혁장전 (1831)을 비판한 것은 카산드라와 같은 그의 입장을 보여준다고 비난 당했다.
그러나 헤겔에서 실천이란, 도구적 행동과는 무관하고 공동체적 인륜성을 정치적 행동과 상호작용으로 파악한다. 헤겔의 실천개념은 항상 이성이 구성되는 현실에 따라 움직 이며, 현실은 이성의 원리에 따라 혁명화된다 (Habermas, Theorie und Praxis, 155).
이러한 실천개념은 헤겔이 왜 프랑스의 상황을 비판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광의 3일'로 알려진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에서 라파예트가 이끄는 온건한 공화파들과 국민들의 맹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1830년 식민지배를 위해 알제리로 출병하고 권력강화를 위해 투표권 대상자를 심하게 제한한 것이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샤를 왕의 먼 친척이지만 대혁명 당시 온건한 입장을 견지한 오를레왕 공의 아들 루이 필립이 추대 되었다. 이것은 국민 대표제를 향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향한 걸음이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1830년 독일에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년 6월25일)를 기념하는 대회가 있었다. 1829년 10월 헤겔은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 되었다. 대학총장으로서 헤겔은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 기념대회에 초청되고 라틴어로 탁월한 강연을 했다 (“Address on the Tercentenary of the Submission of the Augsburg Confession”).
여기서 우리는 헤겔이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했고, 왜 그가 프랑스의 7월 혁명에 대해 냉소적이 었는지 그 이유를 보게된다.
헤겔의 강연에서 핵심은 개신교의 주요교리인 의인론과 카톨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 이다. 여기서 헤겔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각되는 루터의 기독교인의 자유가 하나님의 무한 한 사랑과 자유에 기초된다고 확인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때 인간의 영혼은 야망과 증오, 권력욕, 전제와 어리석음으로 채워지게된다. 교회는 지배와 위계질서로 변질되고 만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식 (성령)과 무한한 사랑은 이러한 족쇄를 부셔버리고 인간에게 자유로운 만남을 허용한다. 프랑스 7월 혁명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종교개혁과 관련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카톨릭으로부터 쟁취한 자유의 획득을 헤겔은 독일의 정치에서 공공히 하려고 했다.
자유의 원리를 근거로 헤겔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정치, 사법, 그리고 인륜성의 체제를 갱신하는데 적용시켰다. 사법지배와 영주의 권위가 결합되고 국민은 여기에 복종한다. 국민 주권이 아니라 국가이념을 사법적 군주제에서 확인하려고했다. 종교개혁은 대중들의 압력이 아니라, 대학에서의 공적토론과 자유로운 실천을 통해 선제후와 영주들에 의한 법의 갱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판적 자유주의자 헤겔에게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념형으로 작용하고, 종교개혁의 교리는 시민법들과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데로 나간다. 종교의 사회적 구성을 헤겔은 철학 적으로 표현했다.
이 지점에 헤겔의 종교철학이 새로운 지반을 갖는다.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가 종교의 우위를 점하거나, 국가가 종교의 영역을 임의대로 지배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헤겔에 의하면 공적인 것은 종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내면화된다.
이것은 믿음이며 경건으로 나타난다. 또한 국가와 시민의 삶에 관여되는 법 또한 하나님에 의해 인준된다.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 국가와 교회가 화해되고, 국가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지만, 교회는 모든 부당한 국가권위를 거절한다. 하나님의 보편적 지배,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절대정신의 역사의 지배와 섭리는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파악된다.
흔히 헤겔을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 통해 헤겔을 무신론자로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 인지를 보여준다. 헤겔은 독일의 종교개혁의 전통을 떠난 본 적이 없다. 그의 <정신 현상학>에서 나타난 화해나 신죽음의 신학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속 한다. 그리고 앞서 본것처럼, 1824년 <종교철학 강연>에서도 헤겔은 철학의 과제는 신앙과 이성을 매개하는 역할에 있다고 본다.
철학의 목표는 절대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 즉 종교의 합리적 내용을 드러내고 종교와 이성의 화해가 필연한 것으로 본다. 오히려 헤겔은 무신론적인 계몽철학이나 이신론을 비판한다 (Hegel, Theologian of the Spirit, 259).
이런 점에서 폴 틸리히가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논평하면서 헤겔의 종교철학이 누락된 것이 가장 큰 결점으로 비판한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더우기 헤겔과 평생을 사상적으로 투쟁한 칼 바르트 역시 헤겔을 개신교의 아퀴나스로 부른 것은 우연한 평가가 아니 다. 바르트의 핵심에 속하는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은 헤겔의 화해와 인정 철학과 매우 깊숙히 관련 되어있다.
어째튼 헤겔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지배아래서 평화의 관계로 들어가며,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과 인간의 의무들을 지배하는 규정들이 여기에 일치하여 나타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한 ‘조응’이라는 표현을 담는다. 또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보편지배를 통하여 서로 접합이되고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된 기독교의 덕과 더불어 가족과 경제적인 삶과 국가에 관계된 모든 의무들은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된다.
이러한 의무들은 기독교의 경건에 의해 확인된다. 이러한 종교의 사회적 구성은 로마 카톨릭과 전혀 다르다. 왜 프랑스의 카톨릭을 독일이 추종해야하는가? 이것은 헤겔의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기초로 한 헤겔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종교적 비판을 담고 있다.
교회와 국가의 합의가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확인되고, 이제 하나님은 국가와 더불어 살아간다. 정의롭고 정직한 법들이 인간의 삶에 만족을 주듯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곳에서 혁명으로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과 폭력이 지양된다. 당대 진보주의자들이 부르짖던 국가와 종교의 분리와는 달리, 헤겔은 당대의 정신을 거슬러 올라간다. 비판적인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는 1555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찰스 5세와 슈말칼드 군사연맹 사이에 맺은 협약인데, 이러한 개신교 군사연맹은 당대 로마 카톨릭의 정치지배로부터 독립 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추종자들인 헤세의 필립 1세와 삭소니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릭 1세에 의해 1531년에 체결되었다. 루터파의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이러한 동맹의 토대가 된다.
종교와 국가의 합의와 인정이 프랑스 7월 혁명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나타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헤겔의 정치철학의 기초가 되지만, 헤겔은 하나님의 보편지배의 빛에서 새로운 사회구성을 보여준다. 물론 루터는 교회와 국가의 화해보다는 분리를 주장했고 국가에 대한 비판을 열어 놓았다. 특히 루터가 경제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고리대금업과 시장의 부정의와 금융가들의 착취에 대해 비판한 것은 가히 예언자적이다. 마르크스가 <자본 1>에서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헤겔에게서 루터의 경제비판은 그의 초기 부르주와지 경제질서로 점철된 시민사회의 대립과 위기에 대한 비판에서 잘 볼 수가 있다.
만일 종교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가 시민의 자유와 경제적 정의로 나가다면 법과 정치 시스템의 개혁은 불가피하다. 물론 헤겔은 종교와 국가의 합의를 통해 공공복지를 부각 시킨다. 그것은 보다 생산적이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법을 개선하며, 시민사회를 위한 국가제도들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개혁의 길에 폭력은 자리잡지 못한다. 개신교의 경건으로 충만한 독일의 영주들은 탐욕스런 카톨릭 프랑스 왕과는 격이 다르다. 공공복리와 시민사회는 개신교적인 덕과 인륜으로 관리되고 영원한 정의의 다스림과 국민의 안전을 보증한다. 이것은 헤겔이 프리드리 빌헬름 3세를 향한 염원이기도 했다.
종교는 절대지와 더불어 인륜적 국가개념에 필수적이며, 철학은 종교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헤겔은 죽을 때까지 루터교의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었다 (Taylor, Hegel,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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