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오해와 한계
헤겔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은 그가 훗날 프로이센 국가의 어용 철학자라는 비난에 있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구독일 제국의 많은 도시들에 도입이 되었고, 시민의 평등과 종교의 자유, 십일조와 봉건제의 폐기, 자유로운 행정과 관료들이 증가 그리고 조세와 법률에 대한 투표권 등이 확대 되었다. 헤겔이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이성의 원리에 입각해 시대적인 보편적 과제로 실현할 역사적인 영웅으로 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헤겔에게 악몽으로 작용하는 것은 1793년에 나타난 프랑스 혁명의 공포 정치 이며, 이러한 공포정치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제도를 이성적인 헌법을 기초로한 국가와 합리적인 관료체제에서 보았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헤겔은 프랑스 혁명을 자신의 철학의 원리로 고양하고, 이것을 통해 당대 철학을 극복 다고 한다. 다시말해 헤겔의 혁명철학은 혁명에 대한 비판 철학을 의미한다 (Habermas, Theorie und Praxis, 128).
그러나 헤겔의 <법철학, 1821>의 서문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어용 철학으로 공격 당했다.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일제국의 해방은
1813년부터 1815년에 일어난 전쟁의 환멸과 사법개혁의 실패로 인해 학생연맹(Burschenschaft)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에 대한 혐오감과 귀족들에 대한 증오,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통해 독일통일과 민족을 구원할 영웅을 추구했다. 독일민족이 사법위에 군림해야 하며, 이러한 사이 비 민주주의 운동에서 파시즘적인 민족 협동체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기는 어렵지가 않다.
헤겔의 <법철학>은 이러한 사이비 민주주의 운동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자유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헤겔의 국가는 비판적 이성과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법에 의해 모든 개인들의 자유와 권익을 보호하는 국가를 말하지, 민족 공동체나 사이비 민주주의와는 결을 달리 한다. 근대국가의 합리성은 인종공동체나 왕권신수설이 아니라 법의 합리성과 지배에 기초한다. 당대 사회경제적 구조가 분석되고 이념으로부터 돌출해내지만 여전히 해겔은 유물론적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99-203).
인륜의 실현으로서 헤겔의 국가이론은 영국에서 국민투표를 기초로 발전되는 대표 정치제도에서 평화보다는 폭력과 사회적 위기를 경고했다. 여기서 국민은 원자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정부의 세금제도에 대한 투표권은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고 국민 대표제를 위한 선거는 비이성에 호소하는 것과 같다. 개인은 사적이익을 추구하며 자유경쟁사회에서 자동적으로 일반의지나 공공선을 추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헤겔과는 달리 1832년 영국의 개혁법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선거제도의 주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 자격을 갖춘 남성들에게 일반적인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귀족의 이익에 부합되었고, 여성선거권 (1918) 이나 빈곤층들에겐 해당이 없었다. 이것은 1836년 21세 이상의 남성 선거권과 의원의 재산 자격제한의 폐지 그리고 비밀 투표를 골자로하는 국민헌장 청원을 차티스트 운동으로 전개 되었다.
헤겔 자신에게 혁명과 반동이 변증법적 경험으로 혼재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것이 현실 적이라면 현실적인 것은 여전히 합리적 이념의 원리에 입각해 갱신되어야 한다. 헤겔의 낙후한 독일과 당대 해외 식민지를 구가하며 산업혁명을 기초로 한 가장 선진적인 영국 사회에서 정치 체제는 전혀 달랐다.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진화론이 이 시기 영국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선도 했다면 독일에서 산업화는 1815년-1835년 사이에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른바 산업혁명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헤겔에게서 자유의 구체적 형태는 자유로운 개인의 노동을 기초로 한 온전한 소유권에 있으며, 인격은 소유에 의해 비로서 이성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근거로 한 소유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국가가 인륜의 형태로서 법적 지배를 통해 인격의 소유권을 인정 하고,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성적인 권리를 구별하지 않는다.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
이러한 부와 소유권에 대한 인격적 접근과 사법적 평등이 이성적인 사회질서가 된다. 독일의 역사발전에서 볼 때, 헤겔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정치나 종교 시스템은 적용되기가 어렵다고 본다. 오히려 독일에 필요한 것은 국가가 시민사회의 경제 위기를 관리하고 공공복리를 위해 인륜적인 시스템으로 작동된다면, 시민사회는 종교개혁을 기초로한 종교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경제사회의 불의와 갈등 그리고 대립은 국가의 인륜적인 몫에 들어가며 여기서 아우구스부르크 협정에서 나타나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다르게 설정된다.
간략히 말해, 헤겔은 종교개혁의 율법의 제 1기능, 즉 국가의 기능을 철학화하고 자기 시대에 재해석을 한다.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질서이며 율법에 속하며 인간의 합리 적인 법과 이성의 지배에 의해 다스려져야한다. 그러나 국가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종교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언제든지 이성과 합리성을 기초로 정치영역에 관여할 수가 있다. 그러나 복음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가 없다. 국가의 역할은 사유재산의 소유자들의 무정부 상태와 집단적 이기주의를 넘어서서 상호인정과 자유를 기초로한 이성적인 사회질서로 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파시즘과 날카롭게 구별된다. 히틀러 시대에 에어랑엔 학파의 폴 알트하우스와 같은 보수파 루터주의자들은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켜 시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총체성안에서 개별적인 것들의 대립과 부정 그리고 이행을 다룬다. 그는 가족,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를 구분하고 상대적인 권리를 가지며 국가조차도 정신의 세계사적 스펙 트럼에서 이성의 절대권위에 복종시켰다, 그에게서 국가는 정치형태라기보다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속적인 것이며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인륜적인 차원을 갖는다.
그러나 파시즘에서 산업가들은 생산을 독점하고 제국의 팽창주의로 나간다. 생산력은 증대되고 개인의 삶은 정치권력자와 관료계급에 복종해야한다.
국가는 인종/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드러나며 민족성이 국가우위에 서 있으며 반유대주의와 인종 학살정책이 수행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인 시민사회와 인권는 국가-당-민족의 일치안에 통합된다.
보편타당한 사법에 의해 지배되는 이성으로서 국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 자리에 피와 땅에 결속된 인종집단주의가 나타난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이 구현된 국가개념과는 다르다. 헤겔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제주의 국가가 아니라, 구체적 자유 즉 개인의 주체성과 공동의 보편성이 화해가 드러나는 정치 인륜 공동체를 강조했다
(Taylor, Hegel, 387).
어째튼 헤겔은 여러가지 점에서 마르크스의 선구자로 볼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있다. 개인의 삶을 보편정신과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방법론적인 보편주의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는 헤겔에게 개념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인 개혁 운동을 통해 전개된다. 헤겔의 시대는 자유와 인권, 계몽보다는 반동과 전제적 지배로 점철된 정치 체제였다.
역사의 블랙 코미디
헤겔은 역사적인 개별사건들을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사회과학적으로 평가하는 마르 크스의 사적유물론과는 다르다. 헤겔의 철학은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종교를 철학적으로 반성적이지만, 마르크스는 기존 사회와 국가를 부정하고 사유재산에 기초된 계급사회를 전복하려고 한다.
헤겔로부터 갈라서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봉건 군주제가 지배하는 독일에서 나폴레옹은 세계정신일런지 모르지만, 마르크스는 방동 광장 꼭대기에 세워놓은 나폴레옹의 동상이 산산조각이 나서 나뒹굴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조카 루이 보나빠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어깨에 걸친 황제의 망토가 결국 내려올 때, 그의 삼촌 나폴레옹 황제의 동상 또한 방동 광장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견은 정확했다.
1871년 3월 파리코뮌이 세워지고, 과거의 제국의 전쟁과 정복을 상징하는 나폴레옹의 동상은 부서지고 철거되었다. 방동 광장은 더 이상 제국의 쇼비니즘과 전쟁미화가 아니라 인터 네셔날 형제애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개명된다.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이념을 본 헤겔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그의 조카의 블랙 코미디를 통해 그의 삼촌의 영예가 같이 무너질 것을 보았다.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단절과 파열 그리고 부메랑이 일어난다.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변증법적 논리 이고 문제틀이 되는 영역이다. 세계정신이 역사의 과정에서 민중에게 짓밟힌다.
파리코뮌의 공화주의자들은 방동 광장이 더 이상 제국의 쇼비니즘과 정복을 상징하는 곳이 아니라 인터내셔날 형제애와 평화를 상징해야한다고 동상을 제거했다. 역사가 현재주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실례에 속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사가 과거 쇼비니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터내셔날 형제와 평화의 정신으로 다시 씌여져야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현재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역사의 계보학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기준에서 재단 질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된 자들의 유효한 역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막을 내린 시대에 살고있다. 구체-보편 변증법이론은 헤겔이나 마르크스를 넘어서서 새로운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이후 국가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리바이어던>과 같은 전제국가가 들어섰다. 그리고 공포정치와 중앙 관료제 그리고 인권탄압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화는 지난하고 결국 붕괴 되었다
(Lukacs, die Oktober Revolution und Perestroika. Ed. Claussen).
헤겔로부터 배우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관계설정에 있으며, 전제주의 국가나 사이비 파시즘 국가는 역사의 경험에서 비극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헤겔을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여전히 오늘날 의미있는 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하지만 민주주의는 남는다
프러시아 정치적 상황으로 가보자. 러시아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패배로 인해 프러시아는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풀려나고 1815년 워터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비엔나 회의에서 독일은 이전의 영토를 회복했는데, 특히 베스트팔리아의 루르 지역은 프러시아의 산업화와 특히 군수산업의 중심지가 포함되었다. 1815년 프러시아는 독일연맹의 일부로 편입된다. 보수주의자들이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독일을 독립적인 군주제로 발전하길 원했지만, 리버럴들, 특히 학생연맹 (Burschenschaft)로 불리는 운동세력들은 독일연방을 민주적인 사법 체계안에서 통일하길 원했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 사법적 군주제를 옹호했지 보통선거를 통한 의회 민주 주의에는 거리를 두었다. 투표권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허락되었고, 산업 증산층의 정치권리에 관련되지 노동자 계급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더 강했다. 개별 민족은 자신의 정부를 가져야한다. 특히 많은 공국으로 분열된 독일인 경우 연방 국가로서의 통일을 열망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예속민족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는 기존 정치질서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이 되고 자유만이 독립국가의 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1848년 3월 총독일의회로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모이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것은 새로운 통일독일 위해 의회민주주의를 기초로하는 헌법을 준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사법적 군주제도안에서 통치한다.
대표위원들은 직접 보통선거를 통해 의회로 파견된다. 1848년 혁명의 시기에 프리드히 빌헬름 4세는 국민의회를 소집하고 사법의 지배를 잠정적으로 허락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그에게 통일독일의 왕관을 수여 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혁명의회가 해체되면서 빌헬름 4세는 그의 권위 아래 첫 번째 프러시아의 사법체계를 통제하고 (1850), 완벽한 행정권위를 구가했다. 이 여파로 동부지역의 융커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계급으로 남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1862년 빌헬름 1세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1898)를 프러시아의 총리로 임명하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하면서 다음 해 통일독일이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의 세계 정신과 독일통일의 비스마르크 사이에 있다. 그러 나 비스마르크는 헤겔과 관계가 없다. 헤겔의 자유를 향한 변증법은 역사의 한 지점에 묶어 놓을 수 없다. 조카 나폴레옹이 블랙 코미디로 남지만 헤겔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비스마르크의 역사의 경계를 넘어서간다. 헤겔 철학은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종교와 시민사회와 민족주의를 반성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를 위한 출발을 공공신학과 실천에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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