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알제리에서 다시 발견된다
20세기 들어오면서 헤겔의 인정투쟁은 알제리의 반식민지 운동에서 주목되고 매우 핵심적인 정치이론으로 발견되었다. 알제리는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정착 식민지배 유형을 보여 준다. 첫번째 기간동안 (1830-1860) 50만명에서 100만명 정도의 알제리인들이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848년 2월 혁명이후 프랑스 제2 공화국은 북부 알제리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고, 프랑 스 로컬 행정구역을 콜론으로 불리는 식민정부아래 조직했다. 식민지의 군인들은 검은 장화 (pieds noirs)를 신고 등장했다. 초기 식민지배 기간 동안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들을 피에르 느와르로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주의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에서 콜론은 지역정부를 지배하고 알제리의 경제를 장악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1차세계 대전에서 시작되었고, 1933년부터 36년 사이 알제리의 사회 경제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당시 콜론은 나치와 협력한 비시정권에 동조 적이었고, 알제리에서 비시정권은 1942년 몰락했다.
1943년 3월 모슬렘 지도자 페르하트 아바스는 56명의 알제리 민족주의와 인터내셔날 지도자들의 서명을 받은 알제리 국민선언을 프랑스 정부에 제출했다. 이것은 알제리의 독자 적인 헌법을 요구하고 모슬렘들의 정치적 참여와 법적 동등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 프랑스 정부는 6만명의 정도의 무슬림에게만 프랑스 시민권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시도했다.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 (1954-62)은 무슬림과 콜론정부 간의 갈등에서 촉발되었고, 탈식민지 역사 에서 잔인한 폭력과 진압으로 점철된 전쟁이었다. 2만5천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전쟁발발 당시 피에르 누와르로 알려진 100만명의 유럽 정착민들이 알제리에 거주 했다. 10만 5천명의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
1954년 11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알제리 전역에서 게릴라전으로 선제공격을 시작 했다. 해방전선은 주로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전을 했지만, 실제 전투는 알제리 근교를 공격 하면서 일어났다 (1956-7). 프랑스는 40만명 이상의 군인들을 파견하고 제압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 반전운동이 나타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알제리 독립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59년 드골 정부는 알제리인들이 독립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콜론을 해산하려고했다. 그러나 1961년 4월 알제리를 장악한 프랑스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알제리를 통제하고 드골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알제리 인민 민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1962년 9월 선포되었다.
저명한 역사가 벤쟈민 스토라(Benjamin Stora)에 의하면, 프랑스에 거주하는 7 백만명이 과거 알제리의 식민지배의 삶과 연관되어있다. 프랑스 정부는 1830년부터 시작된 알제리 식민 점령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회피 하려고한다. 프랑스 현대 정치는 여전히 과거 식민주의 문제와 더불어 도시 슬럼에 집중된 이민문제로 인해 알제리 유령에 시달린다. 알제리 전쟁기간 (1954-62) 동안 대략 100백만명의 피에르 느와르 (알제리 유대인을 포함해서)가 프랑스로 이주 했다. 이 공동체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여전히 역사와 문화의 부메랑으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알제리 모슬렘들은 1945년까지 프랑스 의회에서 이들의 권리를 대변해줄 정당을 갖지 못했다.
프란츠 파농과 헤겔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1952)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은 포스트 콜로니얼 이론의 출발을 알린다. 파농은 1925년 프랑스의 식민지 카르브 섬의 마르티니크에서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자원병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리용에서 의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 <검은 피부와 하얀 가면>은 프랑스 백인사회에서 흑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그리고 심리학을 통해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해명했다.
1953년 파농은 알제리에 소재한 블리다-주앙빌 병원의 정신과장으로 일을 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고문을 당한 환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경악을 금치못했다. 식민 주의적인 사물의 질서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적대감정으로 인해 파농은 더 이상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1956년 파농은 병원에서 사임하고 알제리 독립과 해방 전쟁에 참가했다.
파농은 사임서에서 정신의학은 환자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상황에 낯선 자로 살아 가지 않도록 돕는 의학적 치유인데, 식민지배의 문명선교는 이러한 윤리적인 정신 의학과는 맞지 않는다고 썼다. 아랍인은 자신의 나라에서 비인격화된 존재로 영구히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 알제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랍인들을 지워버리는 낙태와 같다 (Toward the African Revolution, 53). 파농은 튜니지아로 갔고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에 합류했다.
파농에게 혁명은 변혁의 과정이며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영혼과 인간성을 창출한다. 흑인은 악하고, 백인은 선하다는 마니교적인 이항의 대립을 극복하기위해 파농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과거로부터의 단절과 파열을 의미하는 유토피아적인 열망이며, 총체적 혁명을 요구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파농은 주인과 노예의 인정 투쟁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에 몰두했고, 생사를 건 투쟁의 측면이 식민지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임을 인식했다.
이제 헤겔은 파농을 통해 알제리 해방운동에 접합된다. 파농에게서 식민지배가 마니교 적인 세계이며 예속된 본토민을 비인간화시키고 정신장애를 일으킨다. 폭력은 총제적이고 전체 사회로 확산되며 영구화된다. 식민지 이데올로기는 백인의 우월성과 문명선교에 의해 지지되고, 흑인에게 백인이 되려는 모방욕구를 채워놓는다.
파농의 헤겔 독해에서 두드러진 것은 백인주인을 모방하려는 흑인의 욕구를 정신 분석 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철학에 대한 파농의 기여에 속한다. 헤겔은 식민지 문제 를 근대 유럽의 십자군으로 파악하고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피지배자의 투쟁에 주목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문제는 그의 변증법에서 별 다른 자리를 갖지 못했다.
파농의 ‘헤겔’은 이후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토대가 된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가 아니라 생사를 건 헤겔의 노예와 인정투쟁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헤겔 철학이 탈식민 주의 운동의 상징인 ‘칼리반’으로 등장한다.
헤겔은 포스트콜로니얼 칼리반
변증법적 드라마에서 헤겔은 지성적인 칼리반이 되는데, 이것은 세익스피어의 연극 “폭풍우”(The Tempest)에 나오는 반은 인간, 반은 괴물의 모습을 한 주인공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식민주의 억압 에서 예속된 백성의 고통을 상징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현상학에서 이러한 상징적인 모습은 유럽의 식민지에 저항하고, 동시에 비유럽권의 인정과 해방욕구를 확인하면서 진행된다.
“헤겔과 니그로”에 대한 반성에서 파농은 헤겔의 인정철학에서 주인과 노예가 상호간의 인정으로 들어가는 단계를 핵심으로 본다. 인정의 권리를 위해 주인과 노예는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생사를 걸게된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파열, 전투, 그리고 다름으로 나타난다. 헤겔은 인간화과정에서 위신투쟁에 주목했고, 역사의 과정에서 지배와 억압의 시스 템을 철폐하고 자유의 이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부분은 코제브가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을 분석하면서 헤겔철학의 중심 자리 로 옮겨 놓았다. 인정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에 속하며 노예의 위신과 삶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자유의 이념이 실현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나타난다. 자유의 진보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상황에서 인정투쟁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헤겔의 인정투쟁은 파시즘적인 생사를 건 투쟁을 넘어서서 지배자를 변혁시키고 인정해주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한다. 코제브가 암시하는 사회 파시즘적 투쟁 (스탈린)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실존화된 죽음충동은 집단적 이기주의나 절대자유의 공포정치 (프랑스 혁명) 또는 파시즘의 지배권력에 쉽게 먹이 감이 되고 만다. 이러한 죽음충동은 실존이나 정신 분석에서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서 반복과 차이 그리고 병리현상으로 나타나지만, 헤겔의 관심은 니체처럼 영원회귀에 있지 않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죽음충동 보다는 노동과 외화 그리고 교양이 자유의 진보를 향한 여정에서 나타나며 인정투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다양한 스펙트럼과 형식을 띈다.
헤겔과 역사의 종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코제브의 헤겔 해석을 소개하면서 성급하게 역사의 종언을 돌출 했다. 헤겔에게서 철학은 시대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사변은 없다.
역사의 종언은 인정원리가 완성된 상태를 말하며, 자유의 진보를 통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전망 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종언되었다고 말한다. 후쿠야마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마지 막 인간 (부르즈와적으로 평준화된 인간)을 헤겔의 인정욕구와 동일시했다. 귀족주의자 니체는 영원회귀, 권력의지 그리고 초인의 출현을 위해 이러한 마지막 민주주의적 인간에 대한 경멸을 표시했다.
후쿠야마와는 달리, 헤겔은 인정을 절대지에서 파악하면서, 역사는 자본주의적으로 종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가 새롭게 출현한다고 본다. 헤겔에서 종언은 이전 시대의 철학과의 파열을 의미하지 역사의 종언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개념적으로 시대의 문제를 파악하는 리얼리스트였지 묵시론적 사상가 아니다. 그는 사실주의 철학자로서 <법 철학>에서 말한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기존질서(현실적인 것)는 이성의 원리에 따라 구성 되어야한다. 이것은 자유의 진보를 통해 역사에서 인정원리를 향해 나간다.
그러나 니체는 인정욕구가 실현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의 다름이 동질화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역겨워했다. 니체의 근대적 인간에 대한 역겨 움과 피로감은 헤겔의 말하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인정을 기초로하는 민주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 니체가 귀족적이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혹독한 비판가였다면, 헤겔은 시민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착취와 경제적인 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적대감정의 사회를 넘어가는 하위계급으로부터의 혁명을 그리고 있었다.
코제브가 노예가 주인을 타도해서 미래가 새로운 인정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는 지점 에서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을 보면서 존 로크적인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승리를 선언하고 역사는 종언되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어설픈 독법은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 아니라 로크의 정치이론에 더 많은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종언되는 사회는 부패하고 변질된다. 후쿠야마가 그토록 옹호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지금 우쿠라이나 전쟁 에서 종언을 고하고 있다.
언어의 모방욕구와 해방
헤겔의 자유의 진보는 미래를 향한 역사를 닫아놓지 않는다. 파농은 자유의 진보에서 백인과 투쟁하는 흑인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려고한다. <검은피부, 하얀가면>에서 파농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를 인용하면서 개인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육체에서 길을 잃어버린 신처럼 보인다고 쓴다. 언어는 피부의 색깔에 의존된 권력의 도구이며 문화적 편견 이다. 하얀 피부의 프랑스인들의 언어를 흑인들은 배우고 싶어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벗겨내려고 한다. 신은 피부색갈과 인종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헤겔에게 언어가 정신의 현존재라면, 파농은 인종차별에서 언어의 권력관계와 특권적인 지위를 본다. 여기서 예속된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주인의 언어에 대한 모방욕구가 나타난다.
헤겔의 인정철학에서 파농은 언어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파농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진정한 혁명은 서구의 사회와는 달리 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들을 통해 오며, 문화혁명의 주체로 드러난다. 파농은 인정투쟁을 마르크스적인 노동자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 에서 드러나는 억압된 농민들과 인종차별 그리고 문화에서 보았고 혁명의 정신분석학을 시도 했다. 언어와 정신분석학이 헤겔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 해석에서 인정투쟁의 문화적 차원을 개방한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파농은 알제리 임시정부를 위해 가나의 대사로 일을 했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의 집필에 몰두했고, 식민주의 조건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해에 사르트르에 의해 출간되었다. 1961년 12월 파농은 암으로 인해 미국 메릴랜드의 국립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알제리 로 돌아갔고 알제리 민족해방군의 영접을 받으며 안장되었다.
파농이 제기하는 문제들
파농에 의하면, 폭력과 백인 정체성은 식민지 주권의 기초를 놓으며, 그 예속의 과정은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실천으로 응답된다. 식민지를 형성하는 것은 테러정치이며, 권력 은 식민지 백성을 정복의 기획으로 통합시킨다. 이러한 잔인한 영역에서 권력은 살해정치학 으로 등장한다. 적수를 일차적으로 선정하고 살해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삼는다.
살해의 정치는 노예와 인정의 투쟁에서 지배계급이 행사하는 국가권력이며, 죽음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지배계급의 투쟁을 말한다. 여기서 노동과 언어가 더 이상 매개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점이 출현하고, 식민지배는 마니교적인 이분법으로 사회를 갈라놓는다.
헤겔에게서 인정투쟁은 노동과 비판적 담론으로 매개된다. 노예는 생존하기위해 주인을 위해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어낸다. 주인은 노예노동을 향유하지만 결국 노동능력을 상실하고 노예의 산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사물을 둘러싼 사회질서에서 노동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지 노동을 향유하는 왕이나 귀족은 타도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노예개념을 단순히 흑인노예로 좁혀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지배자와 예속된 자의 사회 변증법을 파악하는 기초 이론에 속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며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은 긴장, 대립, 부정 그리고 지양의 절차를 통해 폭넓은 역사 사회적인 스펙트럼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언어나 비판적 담론은 사회 문화적 삶의 자리안에 설정된다.
헤겔은 투쟁을 통해 권력의 이동이나 신분의 자리바꿈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보편성과 더불어 매개를 통해 사유한 사람이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계기들은 오로지 보편성 과의 연관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철학적으로 사실주의적이지만 시스템적 사고를 보여 준다. 보편과 매개되는 구체나 개별적 계기는 그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회복과 인정을 향해 고양이 된다. 새롭게 등장하는 보편성은 단순한 개별들의 종합이 아니라, 변증법적 작용과 운동과정을 통해 개별적인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스템과 환경으로 드러난다.
헤겔의 인정 시스템에서 혁명이후 나타나는 집단적 이기주의나 폭력 그리고 죽음의 테러정치는 봉쇄된다. 개별적인 계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성이 시스템, 환경, 문화로 인식의 과정에 관여한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을 가진 고결한 자들은 노동 을 향유 하는 게으른 귀족이나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투쟁하는 예속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덕목이 된다. 노동이 인간의 삶을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만든다. 기표 (시니피앙)로서 언어는 말하는 주체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비트겐슈타인처럼 공적인 차원에서 삶의 형식을 창출해내는 실천이 된다. 노동과 담론은 정신의 현존재로서 인륜적인 국가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은 착취되거나 소외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것을 국가는 공공선의 윤리적 차원에서 보증해 주어야한다. 국가의 인륜성은 노동의 소외와 시민사회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지, 그역이 아니다. 이러한 문화적 실천을 위해 비판적 지식인 들은 저항의 담론을 만들어 내고 불의에 대한 파레시아의 실천을 한다.
생사를 건 투쟁을 하지만 폭력을 지양하는 용서와 인정이 알제리 상황에서 헤겔처럼 가능한가? 흑인은 백인주인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이러한 모방 욕구는 흑인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현실에서 열등감을 산출한다. 파농은 흑인들의 심리학적 억압에서 출발하지만 흑인여성들에 대한 별다른 주목이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파농의 식민지배 조건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들에 대한 파농의 약점에 불만을 표현할 것이다.
노예와 인종차별 그리고 노동을 통한 자본축적은 식민주의와 제국의 팽창의 조건이다. 인종차별은 사회 문화적 구성에 기입이 되고, 다양한 영역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통해 계층화가 된다. 노동도 사회적으로 분화되며 문화에서 계층화가 일어난다. 프랑스 식민 주의는 문명선교로 특징된다. 이것은 흑인을 프랑스 문화적 기준과 가치에 순응시키는 것이다. 예속된 자들에 대한 편견은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심지어 정치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서 파농은 헤겔의 제자이지만 헤겔의 한계를 넘어서서 흑인 정체성(네그리테)을 폭 넓은 스펙트럼에서 인정정치를 위해 문화투쟁으로 가져간다.
식민지 이후의 부메랑
식민지 이후 현실은 부메랑처럼 유럽인들을 향한 반작용과 반격으로 되돌아온다. 이것 은 지배와 헤게모니를 위해 위로부터 계급혁명을 주도한 유럽인들에 대한 운명이고 보복이다. 이러한 부메랑은 식민지 이후 프랑스의 피에르 누와르의 공동체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프랑스 에 살지만 모두에게 외면당했고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고통스런 갈망을 가지고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서구의 계몽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 성이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권과 경제적인 발전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것은 식민지를 통한 착취와 노예 그리고 반유대주의 더 나아가 문화산업으로 귀결될 것으로 본다. 계몽의 변증법의 어두운 역사는 역사에서 부메랑으로 나타난다.
식민지 근대성의 변증법은 포스트콜로니얼 사회인 프랑스에서 피에르 느와르를 통해 부메랑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제1 세계에 존재하는 포스트콜로니얼 조건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알제리 모슬렘들이 이들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헤겔의 매개는 여기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가능한가? 존재가 무에 의해 매개되고 되어가는 과정으로 나타 난다면, 개인은 노동과 저항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매개된다. 지배자를 용서하고 새로운 존재로 고양시키는 인정과 회복하게 하는 정의가 중요 해진다. 진정한 용서는 희생자로부터 온다. 이것은 남아공의 만델라의 인정정치에 의해 구현 되기도 한다. 이것은 파농이후에 전개되는 새로운 헤겔 해석일 수가있다. 화해와 인정은 회복하게 하는 정의 (용서)와 더불어 고양된다.
모방, 변종, 해체
언어의 식민지화는 피지배자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흑인이 프랑스 언어를 사용 하는 것은 프랑스인의 집단 문화의식으로 통합되고, 이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지배 문명의 우월 성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흑인 정체성은 악이나 죄로 간주된다. 문화적 가치는 흑인의 의식 에 내면화 되고, 흑인의 의식과 신체의 기본적인 괴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조건에서 지배와 헤게모니의 식민주의적 담론이 흑인의 마음에 이식되고 흑인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이탈 되고 백인을 향한 모방욕구에의해 지배당한다. 이것은 식민주의 모방의 심리학이다.
파농의 분석에 따르면, 흑인은 유럽주인의 백인의 피부를 갈망하고 이들의 언어와 문화 를 습득하고 그들처럼 되길 원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근대성은 알제리에서 폭력적으로 이식 되었고 다양한 계층들과 사회구성으로 변형되었다.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은 밀려나간 자들의 권위를 회복하고 이들의 유효한 역사에서 인정 의 변증법을 통해 보려고 한다. 알제리 유대인 출신 자크 데리다의 해체가 헤겔의 부정의 변증 법에 대신해서 나타난다. 포스트콜로니얼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는 유럽중심의 지배구조와 지식 체계는 해체란 저항에 직면한다. 해체는 매개가 불가능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전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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