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헤겔
지젝은 “라캉: 어떤 점에서 그는 헤겔적인가?”란 글에서 라캉은 여전히 코제브와 이폴리트의 헤겔해석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거울의 단계 (에고/자아)인 상상계를 거쳐 자아는 언어의 상징계, 다시말해 사회안에서 주체로 전환된다. 상상계는 유아의 나르시즘적인 단계이며 거울의 단계를 기초로 자기 동일성 (그러나 기만)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상징계에서 사회구조(아버지의 이름: 큰 타자)가 자아를 주체로 규정하며, 상징적 남성 지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프렉스를 넘어선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작동되며 금지와 법으로 나타난다.
이런 정신 분석학적인 틀에서 하버드 대학 교수인 호미 바바는 모방욕구 이론을 전개하고 비판적이며 해방적인 기능을 다룰려고 한다. 그것은 이미 식민지배와 예속된 자들의 삶을 통역하는 변종의 역할에서 자리를 갖는다.
프로이드와 라깡
라캉과 호미 바마의 모방욕구의 문제를 다루기위해 프로이드는 중요하다. 프로이드는 인성구조를 이드 (쾌락의 원리; 무의식)-자아 (현실원리; 전의식/ 의식)-초자아(사회적 구성; 이상원리)로 구분하고, 삶과 죽음을 향한 충동(에로스/타나토스)에 주목했다.
그의 정신분석은 자아를 이드의 억압된 본능과 욕망을 승화시키고, 현실원리(이성과 상식)를 이상원리(양심/정언명법)에 적절하게 맞추어 살게 한다. 프로이드는 대부분 이드의 욕망에 주목했다(Gay, ed., The Freud Reader, 603, 642).
그러나 라캉은 상상계(자아)-상징계 (주체)-실재계의 틀에서 프로이드의 인성구조를 언어이론을 통해 비판적으로 재해석했다. 거울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형성 (엄마와의 동일성 원칙)은 유아기 (6-18개월)의 나르시즘적인 투사에 상응하며, 자기분열과 오해의 영역 을 지적한다. 자아는 오해와 몸으로부터 소외의 산물이다 (파편화된 몸). 이런 단계에서 라캉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적용하고 정신분석적으로 헤겔의 철학을 변형시킨다.
상징계와 언어현상
상징계는 프로이드의 이드와 무의식과는 달리 언어의 습득을 통해 사회화되는 주체를 지적한다. 상징계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사물의 질서를 변형하며, 작은 타자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하는 것은 큰 타자의 담론 즉 상징적 사회구조 (무의식)이다. 언어구조의 기능이 나로 하여금 이념과 욕망을 소통하게 하며, 이것은 상징질서이며 큰 타자이며 집단적인 무의식이다. 이러한 무의식(타자의 담론)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소통하게 하며, 발화자로서 나의 현존은 지배된다. 나는 기표의 연쇄와 사슬의 지배구조안에 붙들려있고, 나의 예속에서 무의식의 현전이 드러난다.
라캉의 상징계에서 무의식은 꿈의 이미지처럼 언어로 구성된다. 무의식과 언어의 구성 관계는 프로이드와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프로이드에게서 무의식은 개인의 꿈의 세계에 위치하고 오이디푸스 신화가 들어와있다. 무의식은 생물학적이며 사물표상에 속하지만, 전의식은 언어. 달리말해 사물과 단어표상은 전의식과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 이미지를 프로이드는 욕망충동으로 파악하고 사물표상의 전치 (다른 표상으로 넘어감)나 압축을 통해 해석 하지만, 이것은 언어표상과는 다르다.그러나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 꿈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 표상이나 전치나 압축은 욕망충동을 드러내지만 단순히 사물표상이 아니라 언어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예를들어, 시는 언어의 전치나 압축을 통해 내용을 표현한다. 환유는 프로이드의 꿈에서 다른 사람에게 대한 전치나 대체와 같다.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며, 무의식(꿈의 그림내용과 표상: 압축과 전치)은 시의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 구조화된다 (Lacan, Écrits, A Selection, 303).
주체는 기표를 통해 의미작용을 하지만, 그러나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과 욕망에 의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상징계의 무의식은 주체의 모방의 충동에 부재와 갭 또는 신경 증적인 징후(흔적)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호미 바바의 모방욕구는 영국 제국주의의 문화 상징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라캉처럼 언어의 흔적이나 갭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식민지 상황에서 모방욕구는 예속된 자들의 억압을 드러내기 위해 오히려 지배계급의 무의식과 상징 구조를 비판 할 때만 해방적일 수가 있다.
무의식(지배의 상징구조)이 타자의 담론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주체는 이미 언어와 규칙의 네트워크 (소쉬르의 랑그)에 기입되어있다. 주체는 상징질서(큰 타자)의 담론 또는 기표 구조의 그물망에 엮어져있고, 사회 문화적 담론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적 존재이다.
이러한 미메시스는 지배구조에 대항하는 예속된 자의 욕망충동과 희열(jouissance)을 표현할 때만 비판적이며 해방적인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라캉의 입장은 기의 (실재계)에 대해 기표(상징계)의 우위성을 두지만, 실재계는 죽음의 충동이나 강박증세 또는 망상이나 신경증에 설정되는 한, 여전히 상징계에 구멍을 내며 들어온다. 이것은 상상계의 어둠이나 부재처럼 여전히 언어나 의미를 넘어서 있으며 말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92).
비판적 반성: 라캉과 구조 인류학
라캉은 사회적인 삶을 상징구조(무의식)로 보는 점에서 구조 인류학 (레비 스트로스)의 영향을 보인다. 레비 스토르스는 언어의 유비의 차원 (비슷하지만 다르게)를 소쉬르의 랑그 (문법체계)와 파롤(소통)의 구분에서 본다. 랑그는 역사안에서 시스템의 구조로서 집단적이며 공시적이지만, 파롤은 통사적인이며 진화론적인 시간을 갖는다.
예를들면 21세기 사회는 18세기 사회와 비교해볼 때, 역사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구조는 장기지속하며 심층에 깔려있는 무의식과도 같다. 더우기 신화구조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전거로 삼으며 무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작용된다. 역사적 사건인 프랑스 혁명도 언어처럼 신화론적 성격 즉 이중구조 (랑그와 파롤)를 갖는다 (Levi-Strauss, Stuructural Anthropology, 210).
레비 스트로스에게서 무의식은 프로이드와는 달리 개인이 아니라 상징의 질서에 기초 되며, 언어와 사회의 소통체계 즉 구조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소통체계에서 더 이상 초월적인 전거나 주체는 중심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관계들의 내적인 놀이와 교환을 통해 의미가 독립적으로 산출된다. 토템의 법은 사회구조를 조직하기위해 자연으로부터 문화를 만들어낸다. 토템 신화나 스토리는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이항의 대립이나 갈등을 교환과 매개를 통해 조정하는 논리체계를 갖는다. 그리고 집단의 역사적 과정에 따라 체계변환이 나타난다.
제의와 신화는 구조적인 요소들을 통해 변증적으로 연관되며 (이항대립-교환/매개-변환), 구조분석과 변증법적 방법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시스템과 이웃부족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접근된다. 이것은 구조 변증법이며 역사의 결정론에 새로운 틀을 제공한다 (Levi- Strauss, 240).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신화는 다른 신화들과 더불어 방법적으로 해석된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해석은 초기전승에 속하지만, 역사적인 과정과 해석을 통해 그것은 공시적으로 변경될 수가 있다. 오히려 구조 분석은 이후의 신화에서 달라지는 관계적인 변화들과 차이들을 고려하고, 신화에서 드러나는 반복과 차이와 대립과 해소의 법칙을 발견한다. 신화의 관계의 그물망에서 볼 때 신화는 근친상간을 주요 모티브로 해석될 수 없다
(Levi-Strauss, 217).
세계는 언어처럼 구성되며, 문화는 많은 관계들의 그물망과 소통체계로 형성되며 작동된다. 언어는 관계들의 체계안에서 무의식적인 구조로 파악되며, 문화의 측면 (친족체계)에 대한 개념적 모델이 된다. 이것은 족외혼과 언어가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하며, 무의식은 구조들의 총체로 파악된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선험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선험구조는 외부의 사회적 소통/교환체계로부터 온다.
친족체계는 언어체계처럼 무의식적인 사고의 단계에서 만들어진다. 근친상간의 금지의 보편화는 단순히 유아기적 거세공포가 아니라 족외혼와 관련해서 문화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야생의 사고와 문화는 프로이드의 생물학적 심리학이 아니라, 언어 계보학적 (루소)으로 즉 심층언어처럼 의미와 도덕감정 그리고 예술적 차원을 통해 독해되어야한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252).
상징의 질서나 집단적인 신화들과 관련하여 무당의 치유기능에서 구전이나 음성문화도 존재한다. 특히 산모의 해산에 관여하는 무당의 노래에서 활력적인 힘은 플라톤적인 형상이나 원형에 상응하기도 한다. 상징의 기능은 효과적이며 정신분석처럼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Levi-Strauss, Stuructural Anthropology, 34, 46, 189).
언어는 사회적 대상과 관계를 형성하며, 레비 스트로스는 역사와 구조를 접합시키는 사회학의 통찰을 담는다. 파롤은 힘과 활동의 언어(verbe)로 개념화되며, 언어는 규칙과 문법을 통해 사회체계를 만들어가는 인간사유의 보편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는 사회학적이며, 개인의 행동은 집단적인 상징체계에 기초된다.
무의식과 집단적인 사고의 카테고리는 하나로 나타나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 역시 상징질서에 대한 번역일 수가 있다. 이러한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은 라깡에게 상징계를 무의식의 사회구조로 파악하고 언어처럼 구조화 된다고 말한다. 라깡은 상징계를 심화시키기위해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를 소쉬르의 기호학과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전개했다. 이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언어를 통해 허물어진다.
그러나 구조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의 의미있는 행동이나 제스처의 배후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다양한 문화적 콘텍스트에 대한 주목이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이것은 기호의 대립이나 친족체계가 아니라, 신화와 문화를 의미의 그물망에서 파악하고 인간의 삶과 행동을 두텁게 기술한다. 문화적 상징과 언어, 제의 그리고 신화(특히 그리스 로마신화)가 세계관에 대한 구조를 제공한다.
인간의 언어게임과 문화적인 규칙과 문법은 사회적 삶의 형식을 창출하며, 이러한 두터운 기술의 현상학은 신화분석과 더불어 역사적인 관계와 문화적인 콘텍스트 그리고 제의와 행위자의 관계에 주목한다. 언어는 공적인 영역에서 소통/
교환 형식이며, 토템의 야생적 문화에서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잘 나타난다. 다양한 삶의 형식들이나 콘텍스트에서 소통/교환과 기표는 삶의 문법과 규칙을 쫒는다.
물론 레비 스토로스에게서 기표(랑그)는 기의(실재)에 선행하며 기의를 결정한다. 이러한 언어 활동은 객관적인 전거를 갖는다. 이러한 객관적인 전거는 구조로서 모든 문화에서 상징적인 관계들의 앙상블로 형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 결혼규칙, 경제관계, 예술, 과학, 종교 등이다. 이러한 관계들의 총체는 선험적으로 사회의 무의식(심층구조)이되며, 상징적인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삶의 형식들은 사회구조 안에서 기본적으로 서로 다르며 불가공약적이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255).
그러나 레비 스토로스는 루소처럼 단순히 기표가 아니라 음성언어와 도덕적 감정, 음악을 통한 자유와 공감의 차원을 간과하지 않았다. 음악가와 작곡가로서의 루소의 면모는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언어는 자연의 상태에서 위험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외침의 소리에서 시작하며, 양심의 소리는 타인에 대한 생각과 연민을 음성과 제스처를 통해 표시된다. 보다 밀접한 소통을 위해 문자의 언어가 공동의 승인 (파롤)을 통해 담론의 논리로 만들어지며 음성을 문법적으로 변화시킨다 (“Second Discourse,” Rousseau, The First and Second Discourses, 122-3).
이러한 측면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문화적 삶의 형식 그리고 생활세계 이론 (의미구조)과 접합될 수 있다, 의미있는 상징체계에 기초된 문화구조 (언어, 신화, 제의, 예술)는 소통/교환과 삶의 의미를 위해 역사적으로 진화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삶에서 경험된다.
문명과 문화가 장기지속하는 구조의 역사를 말한다고 해도, 이것은 사건의 역사와 사회 구조의 변화와 파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와 대립될 필요가 없다. 완벽한 신화의 네러티브에 기초한 공시적 문명이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신화나 사가 (saga)의 스토리는 역사를 해석하는 틀을 제공하며, 의미론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레비 스토로스에게서 신화, 토템제의, 결혼규정 등은 의미론적 텍스트로 이해될 필요 가 있다. 상징적인 의미가 사회적 기능과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와 관련하여 형성되고 체계 변환 될 때, 이것은 인간의 감정과 개념과 윤리적 태도, 더 나아가 사회구성을 다르게 조직한다. 사회규범이 친족관계와 호칭에 관련된다고 해도, 이것이 소유와 권력관계로 분화될 때 사회 계층화가 되며 언제든지 카스트 지배제도가 나타난다. 여기서 부에 대한 경쟁과 라이벌 의식, 그리고 권력과 지배를 위한 전쟁이 출현한다.
더 나아가 집단 간의 이해 충돌과 더불어 타자를 희생시켜 수익을 얻으려는 열망이 자연의 상태를 벗어난 초기사회를 지배한다. 이러한 루소의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비판적 반성은 문화 연구에서 사회학적으로 중요하게 통합될 수 있다.
라깡와 기표의 네트워크
구조 인류학은 라깡의 언어이론과 정신분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라캉 에게서 기의(s)는 기표(S)에 의해 미끄러지고 지배당하며, 기표는 목걸이의 사슬처럼 다른 기표들과의 연쇄에 있다.
모든 발화행위 (파롤)는 이러한 기표들(문법과 문자: 랑그)의 움직임과 굴러 떨어짐 또는 미끄러짐에 의해 감추어지고 구속되거나(신경증) 과도하게 풀려지거나 (광기 현상) 연결 되면서 드러낸다. 파롤은 기표들의 사슬과 연쇄에서 붙들려있고 기의에 대한 모든 창조적인 의미화는 기표들의 네트워크에서 만들어진다. 일상의 언어는 무의식의 기표 (심층 구조) 또는 상징질서에서 지배되지만, 라캉의 기표우위성에서 근원음성은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문화에서처럼 고려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데리다처럼 문자학에 가깝다.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연관성은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환자의 기표들이나 무의식의 상징문자 에서 더 이상 타당하지 않으며,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다. 프로이드의 꿈의 이미지와 사물표상은 기표의 연쇄와 사슬을 통해 은우와 환유처럼로 나타나며, 소쉬르는 해체가된다.
그러나 환자들의 파롤과 기표는 자체상 언어게임과 삶의 콘텍스트와 연관되지 않는가? 환자가 시처럼 기표를 쓰는 가? 오히려 말하지 않는 가? 기표의 연쇄작용과 사슬이 기의를 결정 한다면, 환자의 언어활동(파롤)은 일상의 언어소통처럼 단순히 상징계의 큰 타자의 무의적인 지배담론으로 환원 되어야 하는가?
예를들어 유대인 최종멸절에 관여한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에서 그가 범죄행위를 파시즘의 총통체제의 지배에 대한 복종으로 변명한다면, 아이히만의 죄책과 인간성에 대한 범죄는 그의 결핍욕망에서 찾아져야 하는가?
또는 도덕법과 욕망의 일치를 안티고느의 윤리적 태도에서 찾는다면, 아이히만의 살해욕망은 주이상스에 속하지 않는가? 만일 라캉이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욕망(코나투스)을 인간의 본질이며 도덕적 사고의 토대로 본다면, 그는 급진적인 악(칸트)에 대한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을 말할 수가 없다.
레비 스토로스에게서 친족관계는 족외혼을 금지 하는 의미있는 행동과 유럽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문화적 합리성과 도덕이 존재한다. 언어게임이 규칙과 문법을 통해 족외혼이라는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지배체제를 넘어서는 도덕법을 담고있다. 야생의 문화에는 손재주와 같은 예술적 합리성(브리콜라주)이 존재하며, 파롤의 은유적인 표현과 음악의 근원성과 사먄의 치유기능이 함께있다.
라깡은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너머서서 (The Other Side of Psychoanalysis, 87-140), 이것을 프로이드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 내지 꿈으로 본다. 프로이드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불안은 남근기(3-5세)에 나르시즘과 더불어 나타나지만, 오히려 라캉에게서 이것은 거울의 단계 (6개월-18개월)에서 나타난다. 아이의 원초적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된 채 남겨져있다.
그러나 라깡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징계에서 언어의 금지 효과를 통해 욕망의 거세로 나타나지, 프로이드처럼 실제의 아버지 살해처럼 성적차원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라깡의 상징계에서 아버지의 법과 권위와 관련되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기표가 오이디푸스 의미 (기의)를 해석하며,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이름 즉 법의 죽음이다.
라깡은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헤겔에게서 인간의 욕망의 대상은 타자의 욕망을 매개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사물을 만들고 주인에게 봉사한다. 노동에의해 사물의 매개를 라캉은 욕망에 의해 사물의 죽음으로 이해한다. 라깡에게서 무의 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며, 상징계의 큰 타자의 지배담론을 말하는 데, 헤겔의 욕망과 인정은 이미 이러한 담론에 의해 지배된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집단적이며 상징계에 속하며, 의사소통은 이러한 집단적인 상징 질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징의 질서에서 주체의 욕망이 타자의 주체들과 소통될 때, 큰 타자인 무의식의 담론 (Word)에 의해 통제 당한다. 무의식과 타자는 주체를 초월하며, 큰 타자로서 인간주체의 외부에 진리 (거짓의 싸인 아래서)로 제 3의 자리를 갖는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269).
모방욕구, 결핍, 그리고 승화
라캉의 기표의 인식론은 치유나 정상화보다는, 보다 복합적인 주체의 욕망의 언어와 소리를 드러내려고 한다. 물 (La chose, das Ding)의 존엄은 대상과 다르며—상징계와 상상계의 교차점에서 만들어지는— 현실원리을 초월하며, 주체의 외부에 그러나 중심에 자리 한다. 이것은 실재계에 존재하지만 언어의 외부에 있으며, 칸트의 물자체에 근접한다. 이것은 잃어버린 대상이지만 망각될 수 없는 타자 (어머니)이며, 끊임없이 재발견되어야한다. 이것은 자아와 주체의 분열에서 생겨난 빈 자리에 기입된 욕망이며, 문명의 상장화의 바깥에 위치한다.
쾌락원리는 법에 의해 설정되며 주체를 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러나 주체는 물을 향한 결핍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물은 주체에게 최고선을 제시하지만, 이것은 고통/악으로 경험 된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러한 최고선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은 실재계에 속하지만, 상상계에서 나타나는 objet petite a는 도달될 수 없는 조그만 타자/대상를 말한다.
이것은 이미 거세불안이나 금지로 인해 어머니의 몸을 향한 유아의 과도충동 (주이상스)이 제거된 대상을 말한다. 이러한 제거된 결핍욕구는 상징계로 진입할 때 언어와 대상과 관련 되지만, 부재나 무 처럼 기능한다. 이러한 objet a는 실현될 수 없는 충동의 원인과 결핍이며, 주체는 이것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충족될 수 없으며, 실재계가 상징계에 마치 구멍을 내면서 드러날 때, 죽음충동이나 강박증세처럼 나타난다. 결핍 욕구는 과도한 희열충동(jousisance)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이드와는 달리 동시에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하는 의지일 수가 있다.
여기서 라캉은 칸트의 실천이성의 최고선과 더불어 사드의 성적 순수욕망이 큰 타자에 의해 지배되는 상징계를 너머서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칸트와 사드가 공유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라깡의 윤리적인 관심은 안티고네의 비극에 있다. 안티고네는 상징계를 넘어서는 욕망의 무한성을 보여주며, 죽음의 충동에도 불구하고 큰 타자(크레온 왕)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미학윤리, 즉 주이상스의 승화 또는 실재계의 윤리적 차원을 보여준다. 이것은 승화의 윤리적 차원을 지적하며, 실재계의 결여와 부재를 인정하지만, 현실원칙 (모방욕구)을 넘어서서 지배담론을 해체하는 새로운 윤리적인 차원 즉 실재계의 윤리를 고려하게 한다 (Zupancic, Ethics of the Real, 5).
여기서 라캉은 레비 스트로스의 치유적 관심과 공유할 수가 있다. 샤만의 노래와 상징에서 병든 신체 부분에대한 심리적인 치유 효과가 존재한다. 샤만의 노래는 영혼을 되찾기위해 선한 영과 악령의 드라마틱힌 투쟁을 상징한다. 이것은 시적언어나 메타포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과 비교된다. 샤만의 치유와 노래가 상징적 기능처럼 프로이드 심리학의 명료하지않는 부분을 해명해 줄 수 있다 (Levi-Strauss, 192, 202).
라캉의 관심은 상징계에 있으며 이것은 상상계와 실재계의 우위에 있다. 이들은 상상계 로부터 출현하며,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며 기의를 결정한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295).
이러한 인식론은 레비 스트라스와 공유한다. 사회는 언어처럼 독립적인 실제이며, 사회관계의 구조는 에피스테미처럼 기능한다. 인간은 이러한 에피스테메 즉 상징적 아버지의 이름과 법에 의존하는 상징계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는다.
지양, 죽음이념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
라깡은 헤겔의 절대지가 ‘모든 것이 아니다’ (not-all)로 해석한다. 라깡의 입장은 지양을 통한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과는 다르다. 지양에서 사물의 죽음이 일어나며 실재계는 여전히 종합에 대해 부재와 해체로 거기에 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적인 개념인 부정과 억압 그리고 승화의 관계에서 라깡은 헤겔적인 변증법을 해석하려고 한다.
라깡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안에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본다. 무의식은 여전히 변증법적 운동에서 흔적과 부재를 남긴다. 그는 프로이드의 부정과 억압의 관계에 주목하고 헤겔의 지양개념에 근접한다. 사유는 부정을 통해 타자를 인식하며 자의식에서 표현한다. 이것은 이미 억압에 대한 비판적 고양과 보존(지양)을 지적하지만, 헤겔은 억압된 것 자체의 수용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압의 반복과 증세들이 나타난다.
프로이드를 통한 라깡의 헤겔해석은 사회비판적 차원에서 징후발견적일 수 가 있다 (알뛰세). 라깡의 해석은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영향으로부터 온다. 코제브에 의하면 헤겔의 변증법에서 생사를 건 투쟁에서 죽음의 이념은 인간의 자존심과 위신을 충족 시키는 유일한 것이다. 죽음으로 표명되는 무에서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노동자들과 투쟁가들은 실존으로 변화된다. 죽음 속에 머무는 것이 부정성을 실현하며, 죽음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죽음에 대한 이념만이 인간의 긍지를 충족시킨다면 이것은 프로이드의 죽음충동과 만날 수 있다. 프로이드에게서 생명이란 죽음으로 가는 우회로이며 죽음충동 (본능)은에서 파괴성과 공격성으로 주로 나타난다.
코제브에게서 인간의 욕구는 생사를 건 투쟁에서 모든 자유로은 개인의 인정으로 나타나지만, 여전히 죽음충동이 중심에 있다. 이러한 보편성의 우주 안에서 개인은 신이 없는 그리고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이러한 자유의 인정에 기초한 무신론적인 감정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격에 독특한 것이다 (꼬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330-1)
이러한 코제브의 헤겔해석과 죽음의 이념은 라캉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한 방식에서 헤겔의 불행한 의식과 아름다운 영혼은 실존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매개된다. 불행의식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내면화되는 노예의 체념을 지적하며, 역사적으로 신경 증처럼 반복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영혼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영혼은 고귀하기 보다는 외화의 능력을 상실하고, 상호주관적인 관계에서 언어를 통해 자기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헤겔에게서 인정의 변증법은 문화적으로 외화되는 비판적인 사회학을 말하지, 프로이드처럼 심리학적 기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불행한 아름다운 영혼은 여전히 타자를 인정하는 언어의 매개를 필요로하며 사회화가 된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을 넘어서서 내면적이며 영혼의 신성에 대한 관조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학적이며 동시에 신의 음성을 내면에서 듣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 (쉴라이에르마허) (Hyppolite, Genesis and Structure of Genesis of Phenomenoloy,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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