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절대자유를 비판한다
헤겔은 여전히 <정신현상학>에서 디디로의 <라모의 조카>에서 예속받는 의식의 저항과 혁명성에 주목을 했고, 이것을 프랑스 혁명의 전야의 상태로 표현했다. 여기서 정치 권력과 경제적 특권에 대한 비판적 담론 (파레시아)은 통렬한 시니피앙으로 나타나며, 프로이드의 체제 순응적인 태도와는 다르다.
헤겔에게는 쾌락과 현실원리를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인정과 공공선 그리고 화해의 원리가 작동한다. 물론 헤겔의 절대 지는 관계의 총체를 말하며 다름이 인정되는 상호주관적인 차원을 지적한다. 헤겔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주체의 절대자유 (프랑스 혁명의 공포 정치)를 강력히게 비판했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코제브의 테제 즉 죽음으로서 표현될 수 있는 무 또는 부정성과는 다르다. 헤겔의 자유가 코제브가 생각하는 것 처럼 본질적으로 부정성이고 무이자 죽음이라면, 이것은 생명, 현존재, 타자에 대한 무해의 원리와는 다르다 (ibid., 340). 코제브가 공포정치를 죽음과 무를 통해 일반의지에 기초한 자유의 실현으로 파악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헤겔은 일반의지에 대한 혹독한 비판가이며 삶에 대한 인정의 철학자로 나타난다.
헤겔은 라캉의 죽음충동과는 다르다
라캉이나 지젝은 헤겔의 지양이나 개념에서 사물이나 타자에 대한 죽음이 일어 난다고 본다. 죽음충동은 상징화 과정에서 사물과 타자를 파괴해 버린다. 사물과 타자는 주체에 의해 매개되고 지양되면서 실제에 도달하지만, 이들은 변증법적 개념의 일치를 위해 사라지고 죽어야한다. 상징계 안에서 주체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표상에 제한되며, 인정의 변증법에서 상호 주관성은 결코 충분히 도달할 수가 없다. 기표의 운동의 애매함 (미끄러짐이나 연쇄나 사슬)으로 인해 주체는 다른 주체의 의식으로 완전하게 들어갈 수가 없다. 화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곤혹스럽다. 헤겔은 다른 의식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를 통해 타자를 지양하고 인정하는 상호관계로 진입한다.
화해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고,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이 개인에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인권이 가능할 수 있어야한다. ‘나와 너가 우리’가 되는 것은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이며 헤겔의 사회철학의 인정원리를 지적한다. 이것은 시스템적인 사고이며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지양하는 인륜적인 삶을 지적한다.
더욱이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개념원리는 타자를 무해의 원리와 창조성 그리고 인정과 자유 안에 회복시킨다. 역사와 자유의 진보과정에서 지양된 것은 인정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에 대한 무해의 원리가 헤겔의 지양안에 담겨져있다. 이것은 비동일성에 참다운 자유와 창조성을 부여하며 다름의 다원성을 가능하게 한다.
헤겔의 논리 개념은 화해의 개념을 타자의 삶에서 구체화하고 다름의 삶에 자유와 창조성을 부여해주는 리얼리스트 원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지는 라캉의 실재계와 다르다. 헤겔에게서 절대지는 역사적 변증법의 운동을 통해 파악되며 실재적인 것은 합리적이며 타자에 대한 인정과 삶에 창조성을 부여한다.
헤겔, 신죽음 그리고 생활세계
사실 헤겔의 사유는 시스템적 사고를 표현하지만, 라캉은 자신의 실재계의 흔적과 구멍을 통해 부정의 부정(아도르노)을 말하고, 헤겔의 지양과 절대지를 문제틀한다. 실재계는 언어 놀이를 통해 상징화되지만 여전히 바깥에 존재하며, 주체의 경험에서 싱징계를 위협하는 다양한 형식들로 (트로마의 흔적이나 망상 또는 부정) 나타난다. 여기서 신적인 권위의 상징적 아버지는 프로이드의 >토템과 타부>와 <모세와 유일신론>에서 처럼 제거되고 기념이 된다.
라깡에게서 모세 살해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로 연결되며 은총에 의한 율법의 완성으로 파악된다. 율법의 기원신화는 아버지의 살해에서 구현된다. 이러한 신의 죽음에서 이웃사랑이라는 인간학적 전환이 일어난다. 라깡은 이러한 무신론적인 모티브를 헤겔에게서 본다 (“Lacan Text: The Death of God,” The Postmodern God, 43).
그러나 헤겔에게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화육을 하고 화해와 인정의 원리로 나타난다. 그의 신죽음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전통에서 온다. 심지어 헤겔은 내적인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개념적 파악을 통해 논리화 시키며, 하나님의 존재는 후설의 생활세계처럼 상징계와 매개된다.
그러나 후설의 생활세계는 존재자들의 삶의 형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인 의미 토대로 작용하지만, 단순히 초월적인 기의라기보다는 전통의 침천과 문화적 습속 그리고 불 명료함에 대한 책임적인 비판과 해방의 기획을 갖는다.
그리고 생활세계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며 문화의 상대적인 독특함을 인정한다.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전적타자인 하나님은 화해의 세계에서 생활세계처럼 타자 (탁월한 하나님의 소통수단)를 통해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헤겔의 정신운동은 근원음성의 자유와 생활세계의 다원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역사적인 발전에서 드러나는 자유의 진보를 지적한다. 헤겔에게서 인간의 주체성은 라캉처럼 언어 상징체계에서 문화의 상호작용 (언어와 욕망)의 산물일뿐 만 아니라, 그것은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차적인 인정투쟁의 계기들에 관여된다. 인간은 큰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형성되는 지배되는 욕망의 주체라기 보다는, 보다 낳은 생활세계를 공유 하기위해 사회적 앙상블에 엮어진 인정투쟁에 관여하는 실천적인 주체이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해방과 인정의 사회를 지향한다.
칼리반 헤겔과 예속된 자의 희망
모방욕구는 헤겔의 구체-보편성의 틀에서 삶의 전체성을 파악하게하고 식민지 시대에서 지식인들과 하위계급들의 담론정치를 중요하게 보게한다. 지양의 개념적 의미는 삶의 총체성에 기초된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게 하는데,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다양한 그룹과 계층 그리고 계급의 연대는 담론과 인정정치로 나타난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아첨하는 그룹도 존재한다. 그런가하면 입으로는 진보, 뒤로는 국우와의 연계라는 이중구조의 불행의식도있다.
현상학의 드라마에서 헤겔은 예속된 자들을 위한 희망을 표현한다.
예속된 자들의 삶이 역사에서 파묻혀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창조성과 새로운 변혁의 의미가 이들의 삶에 주어진다. 개념적 파악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와 다름 그리고 예속된 자들의 삶의 풍부 함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 창조성, 비폭력의 빛에서 고려한다.
헤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학자의 과제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완성된 역사를 뒤쫒아가는 것이라면, 역사는 지금도 완성되지않고 진행 중이다. 그것은 오늘날 판데믹과 신체 정치학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역사의 여신은 모든 철학자들의 진리에 대한 확증을 비웃 고 지나간다. 헤겔도 예외가 아니다.
생활세계론은 헤겔을 비판적으로 보충해줄수 있다. 절대지란 타자를 인정해주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상호인정의 차원을 갖는 보편적인 의식을 말하며, 예속된 자들의 승화를 말한다. 이것은 역사에서 도달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타자들의 생활세계를 인정하면서 진행되어 나간다.
신체 현상학과 욕망존재론
생활세계론을 통해 나는 헤겔과 후설이 만나는 지점을 신체의 현상학에서 본다. 후설은 <Idee 2>에서 신체와 의도성을 반성하고 신체의 경험이 의식의 의미구조 (노에시스-노에마) 에서 공동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나는 신체를 가진 현존재이며, 타자를 신체의 경험을 통해 공감하고 유비론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공감은 상호주체와 윤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생활세계를 향해 열린다. 나의 의식은 항상 타자의 신체와 생활세계를 의식하며, 이러한 지향성은 비판과 해방의 관심에 의해 이끌린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파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가하면 헤겔은 <엔치클로페디>의 논리의 마지막 장에서 어떻게 이념이 죽고 인간의 신체 안에서 세계로 드러나는 지를 분석한다. 삶 자체가 정신에게 존재를 부여하고, 정신은 자연의 최종목적이며,
이념의 진정한 현실화가 된다. 여기서 삶은 형이상학적인 성격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로 드러난다.
정신의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신체를 가진 인간존재가 된다(Encylopedia,§251).
주인과 노예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헤겔의 현상학은 신체에 주목되고, 이러한 투쟁에서 정신이 스스로를 표현한다. 인간의 의식은 신체의 경험을 통해 매개되며, 정신의 운동의 방향을 이끌어간다. 신체는 내가 외부의 일반세계로 나가는 매개역할을 한다. 신체를 통해 나는 나의 목적을 외부의 세계에서 실현해나간다 (<정신현상학>§ 408Z). 자연과 정신을 노동으로 매개 하고 삶의 구조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신체성이며 이것이 객관정신의 토대가 된다.
반성의식은 현존재를 자연과 타자와 세계와 상호관계적으로 파악하며, 세계 안에서 타자와 더불어 사회 정치 문화적인 구조를 창출해나간다. 이러한 신체의 지향성은 현상학의 중심개념에 속한다. 헤겔의 절대지는 이러한 신체적 차원이 없이는 오해가 되기 쉬우며, 이것은 상호주체의 신체를 인정하는 단계이며, 그리스도의 화해안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러한 차원을 파악하는 절대지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헤겔의 현상학은 이것을 향해 나간다.
후설과 헤겔의 현상학은 신체성과 상호주체성 그리고 생활세계와의 연관에서 접합될 수가 있다. 현상학적 경험은 현존재의 구체적인 신체의 차원을 담고있다. 식민지화된 사물의 질서에서 신체정치학은 여전히 지배자와 예속된 자들의 변증법을 규정한다. 여전히 저항의 의식은 살아있지만 모방욕구처럼 불행의식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의식은 식민지적인 삶의 콘텍스에서 예속된 자들의 생활세계에 희망에 근거한다. 인정은 주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속된 자들의 노동과 저항과 해방의 담론으로부터 매개된다.
헤겔은 여전히 일본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식민지 근대성과 불행한 의식을 거절하고, 아첨의 언어를 넘어서서 가게 한다. 이것은 집단적 이기주의나 파시즘의 나르시즘적 언어의 포로가 아니라, 과거의 식민지 범죄를 정직하게 비판하고 진리를 말하는 파레시아를 말한다. 이것은 일상의 파시즘화를 비판하고 예속된 자들로부터 오는 회복하게 하는 정의
(메타노이아와 용서)를 통해 비판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여전히 포스트콜로니얼 태도를 가지고 있고, 후기 자본주의 안에서 새로운 근대성을 향해 자유, 창조성, 인정 그리고 무해의 원리에서 모색하게 하는 칼리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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