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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과 사회철학

찰스 테일러와 바르트: 헤겔과 마르크스

by 파레시아 2023. 6. 19.

찰스 테일러: 헤겔과 마르크스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는 <헤겔>에서 칼 바르트의 헤겔비판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헤겔의 안셀름 해석은 바르트의 신학과 새로운 대화를 위해 열려있다. 그것은 헤겔을 만유 재신론자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유일신론자로 보게하는 가능성이다. 헤겔의 성령이해와 인격개념은 삼위일체론의 의미를 삼신론과는 달리, 보다 풍부하게 히브리적 하나님 이해와 더불어 발전시킬 수가 있다.  
 
테일러는 <헤겔>의 결론에서 일체의 전제주의로부터 헤겔의 정치적 입장을 방어한다. 헤겔에게서 인간은 새로운 인륜성을 이성적인 국가안에서 발견하고 보다 큰 삶과의 연관성안에서 일치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프러시아 절대군주에 대한 충성이념도 아니며, 진영 논리에 기초한 여타의 파시즘으로 오해 될 수도 없다. 
 
헤겔은 마르크스나 레닌과는 달리 그의 인정투쟁을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그에게서 세계는 정신과 화해된 장소이며, 역사는 이성과 자유의 실현으로 정의된다. 여기에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가 들어설 틈이 없다. 정신이 세계의 존재론적인 태도이며, 개인이 아니 라 유적존재로서 인간과 정신은 변증법적으로 관련되며, 역사의 과정에서 자유와 이성 또는 인정과 타인에 대한 무해의 원리로 드러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유적존재는 자연적인 존재이며, 노동을 통해 유적존재의 삶을 객관화하면서 인간은 자기창조를 한다. 인간의 자기창조에는 하나님이나 은혜 또는 창조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헤겔의 불행한 의식처럼, 유적존재로서 인간의 삶에는 객관화된 사회적 삶에서 자신의 참된 본질을 의식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에게서 화해는 1844년 <파리 초고>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서 나타나며, 충분히 발전된 자연주의는 인간주의이며, 또한 충분히 발전한 인간주의는 자연주의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적대는 여기서 해소된다. 존재와 본질, 자유와 필연성, 그리고 개인과 유적존재의 긴장이 해소된다.

마르크스에게서 인간이 스스로를 창조하며 화해 역시 인간에 의해 변혁을 통해 창조된다. 마르크스는 세계변혁을 위한 실천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자기창조의 신화의 전통에 서 있다 (Taylor. Hegel, 549-563)
 
그러나 헤겔에게서 화해는 역사와 사회안에서 구현되는 정신에 대한 인정을 통해서온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프로메테우스는 서로 대립해야 하는가? 테일러가 마르크스의 입장을 거칠게 프로메테우스의 정치적 낭만주의로 몰아부치는 지점에서 (ibid., 559), 나는 여전히 주저한다.  
 
그런가하면 하이데거는 모든 형식의 인간주의는 존재 차제의 진리를 망각한 형이상학의 투사에 근거 된다고 비판했다. 존재의 진리는 언어로 드러나고 밝혀지며 현존재는 이러한 진리의 드러남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공론장에서 실천과 유리된 채로 나타난다. 비록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에게 세계는 존재의 열림의 장소를 지적 하지만, 여기서 인간은 세계안으로 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본질을 염려하는 열린 현존재로서 있다.

만일 세계가 인간에게 존재의 진리를 열어놓은 장소로서 선험적인 자리를 갖는다면 하이데거에게서 하나님의 존재문제는 이차적으로 밀려난다.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규정은 이차적이다. 일차적인 현존재분석이 선행 하고, 이것을 기초로 현존재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설정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무관심은 허무주의 또는 신비주의자나 영지주의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바르트는 하이데거를 비판했다. 만일 모든 인간주의가 형이상학으로 비난 당한다면, 그것은 존재진리의 질문과 사유를 망각하는 데서부터 오는 데, 하나님의 존재에 앞서 있는 존재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로 존재철학화가 되기보다는 토라의 계약안에서 영원한 당신, 또는 약속과 생명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의 인간주의는 예수안에서 성육신한 “하나님”의 인간성에 근거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 불려진다. 존재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형이상학이나 주체성에 기초된 인간주의를 해체한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메시야적인 소명의 윤리로 채워진 성서적 인간이해가 재구성된다. 예수의 하위계급 (massa perditionis)과의 연대와 프로메테우스의 인간해방은 상호 대립적으로 갈 필요가 없다. 자유의 진보 (헤겔)는 자유의 왕국 (마르크스)에서 거절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안에서 용서와 세계변혁 그리고 해방으로 이어지지만, 여타의 독재의 길은 봉쇄된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영역은 변증법적 지양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화된 개인의 연합이지만,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근거해 필연의 영역(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왕국 (계급없는 사회)에로 도약을 하려고 한다.

물론 <자본 3>에서—엥겔스가 편집했지만—성숙한 마르크스는 자신의 순진한 낙관주의를 교정했다. 우리는 여전히 필연의 영역에 머물며 자유의 영역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운동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지양에서 개혁(의회 민주주의)과 혁명 (사회주의 사회)은 분리되지 않고 접합된다.
 
바르트 신학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교회가 회해의 복음을 위해 진지하게 취급해야하는 사안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은 암 하레츠와 오클로스 그리고 사회에서 밀려나간 자 (massa perditionis)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용서와 하나님 나라 의 복음이 주어진다. 전적타자이신 하나님은 세계를 전적으로 다르게 변혁시키시는 분이다. 포이엘바하의 11 테제는 바르트의 화해의 복음안에서 공론장에서 예속된 자들을 향한 인정 정치로 자리잡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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