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려고 하나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이며, 스스로 보호할 것도 없으며, 이들은 자본의 예속을 통해 민족적 성격이 빼앗겼다. 법률, 도덕, 종교, 철학, 교육, 이데올로기 등은 부르주아적 편견이나 이해나 권력관계에 의해 가려져 있다.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교육과 아동의 공장 노동을 폐지한다—이러한 마르크스의 시대적 요구는 빅토리아 시기에 실현되고 영국의 민족 정체성과 개혁 그리고 도덕적 존중이 자리잡는다.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과 해외시장으로부터의 수익과 식민지배가 마르크스의 생각을 빗나가게 한다. 무산자들이 사라지고 증산층으로 편입되고, 그들은 더 많은 소유와 특권을 가지려는 강한 모방욕구를 가지게 된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848년은 광범위한 증산층에 의해 자유주의, 민족주의, 독립국가를 향한 열망들이 나타나는 시대였다. 무산자인 산업 예비군들의 역할이 뒤로 밀려 나간다. 1848년 유럽을 뒤 흔든 혁명은 영국의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을 통해 영국에 별 다른 사회적인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혁명이 일어나야 할 영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착취와 자유방임이라는 국가정책을 등에 업고 해외 식민지배와 시장을 통해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했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시장경제나 경제활동이 아니라 국가지지와 군사력 그리고 정치이념과 식민지배로 어울려지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근대의 문명이다. 제국주의와 해외시장이 중심부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해소하면서 사회분화와 계층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1848년 2월에 출간된 <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다. 48년 혁명당시 그는 의회 민주주의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했다. 그는 이런 상부구조의 영역들을 결코 하찮게 보지 않았다. 소유 일반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마이다스 손을 가진 소수 자본가에 의해 특권과 착취에 기초된 사적 소유 시스템을 폐지하려고 한다.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활동 그리고 노동과 자립의 기초를 이루는 재산이 폐지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 중산층이나 시민의 삶이 대자본가나 금융귀족들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도록 경제 시스템을 변혁한다. 이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패한 문화적 현상과 특권주의를 해체하는 것을 포함한다. 물론 국영공장이나 기업을 늘리고 운송수단을 국유화하고, 국립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그리고 모든 지대를 국유화로 하는 내용들은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안에서도 수행된다. 그러나 1848년 6월 노동자 붕기가 파리에서 실패하면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입장은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1848년 유럽 대륙의 혁명과 <공산단 선언>은 깊숙히 관련되어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83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러시아의 혁명문제에 주목하면서,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에 대한 입장이다. 러시아에 부르주아적 토지소유가 있지만 여전히 토지의 절반이상은 농민의 공동소유이다. 이러한 공동 소유형태가 부르주아적 토지소유로 전환되거나, 서유럽의 역사발전을 답습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의 토지 공동소유형태는 산업 자본주의를 통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상 공산주의 발전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은 서유럽의 혁명의 신호탄이 될 수 있고 서로 보완관계로 들어온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보는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생산력의 접합이론이다.
이러한 접합이론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장을 다시 독해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유럽중심적 사고에 포로가 된 자들이 아니라, 경험적 현실을 기초로 각 나라마다 다른 경제질서와 정치 문화적 상황을 고려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민족계급으로 고양되어야하고, 한 민족안에서 계급대립이 사라져야한다.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손안에, 다시말해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로렐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켜 가능한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국립은행과 극가의 신용집중 그리고 국영공장과 공동계획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고 사회화가 되는 과정에서 계급적인 차이는 사라진다.
모든 생산은 연합된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이 조건이 된다. 여기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 다시말해 개인의 중요성은 여전히 견지된다. 이것은 사회화된 마음의 습관을 말하며 집단적 이기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사회관계와 더불어 프로렐타리아의 지배도 사라지고, 공권력도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 그런데 정치권력의 계급적인 성격이 사라지는 데서 과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자발적인 연합체가 나타났는 가? 구 소련의 역사적 실례와 붕괴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강조한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는 일당독재에 기초한 전제국가를 말하며, 19 18년부터 1922년 사이에 한 층 더 강화되었다. 당관료 지배가 나타나고 신경제정책(1922)에서 자본주의로 되돌아갔다. 볼세비키스트들은 이전 차르 시대의 관리들이 수행한 역할을 떠 맡았다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 254).
이와는 달리 서구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이 계속진행되어 갔다. 지배계급은 세계시장을 이용하고,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교환체계를 코스모폴리탄적으로 만들어갔다. 자연과학의 발전과 기술발전 그리고 교통수단을 통해 가장 미개한 지역의 사람들까지 문명화했다. 자본주의가 일으킨 세계사적 혁명은 문명선교의 역할을 하며, 해외시장이 자본과 노동사이의 갈등과 대립를 매개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형상에따라 세계를 창조했다--이것은 세계지배를 형한 지속적인 창조이다. 과잉생산의 전염병은 금융자본과 독점을 통해 제국주의 정책으로 전화되면서 해외시장으로 판매된다. 수직적 분업을 통해 주변부로부터 값싼 원료가 중심부로 수입되고 고가의 상품으로 재조되어 다시 팔려나간다. 여기서부터 유입되는 잉여자본은 중심부의 노동계층을 중산층으로 편입시킨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이윤율 저하의 법칙과 자본주의 붕괴는 빗나가고, 그 대신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오랜 시기동안 장기지속으로 구조화된다. 이러한 현실은 당대 영국의 인도지배와 해외시장에서 식민지 정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고, 마르크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혁명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지배의 역사는 다시 기술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와 자기갱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이론적 모델에서 해외무역, 국가개입, 제국주의 요소 등을 생략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구성하는 경제외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 자본2 와 3>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제외적 요소들을 도입하고, 그의 이론적 모델은 역사적 현실과 더불어 다루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자본주의의 내적 대립에 대해 반작용을 한다.
예를들면. 자본수출과 독점, 해외시장에서 잉여가치의 유입과 증대 그리고 정부개입 등이 고려된다. 그리고 러시아의 농촌공동체에 대한 반성은 포스트마르크스 이론에서 농민투쟁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자본의 집중은 독점으로 전환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나타나지만, 여전히 경쟁은 새로운 형태로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레닌처럼 제국주의 이론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자본주의 혁명의 세계사적 측면과 인도의 식민지 지배를 고려하할 때 그의 제국주의론은 새롭게 구성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자본주의 임박한 위기와 공황 그리고 프로렐타리아트의 궁핍화를 세계체제 안에서 새롭게 분석해야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축적의 모델 (자본-상품-증가된 자본)은 그의 본원적 축적과 함께 역사 사회적 시기에서 나타나는 발전유형에 유용하다. 상품의 과잉생산은 해외시장을 둘러싼 경쟁과 투쟁 그리고 자본축적의 역할에서 국가의 새로운 역할과 인터내셔널 제도들이 분석 되어야 한다.
자유경쟁과 독점체(카르텔, 트러스트, 콘체른)은 서로 접합이 되며, 은행과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으로 융합되고 정부와 비즈니스는 서로 유착된다. 영국의 인도지배의 모델은 후기 식민지 조건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다국적 기업, 자유무역협정 등) 중심부에 유리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서 멈춘다.
마르크스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계급이 매우 광범위하며,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혁명의 과정에서 시민의 역할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6월 붕기 또는 1871년 파리 꼬뮌을 분석할 때, 산업 노동자계급의 이념형은 경제사학자들의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어쩌면 당대 영국의 산업자본과 경제적 측면에서 프랑스의 광범위한 중산층을 파악해서 그럴 것이다. 프랑스의 산업화는 영국과는 전혀 다르게 매우 늦게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농민들은 거의 다 경작할 땅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엔클로저 (Enclosure) 법안처럼 파리와 같은 대도시로 유입할 만한 값싼 노동인구가 없었다. 파리의 혁명 주체는 시민이었고 특히 프티 부르주아로 불리는 교사나 장인 또는 숙련공이었지 영국과 같은 공장 노동자로 보기가 어렵다.
프랑스는 농업경제가 중심이었고 장인이나 숙련공은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위해 질 높은 도자기나 그릇 또는 가구나 구두와 같은 수제품을 만들었다. 1850년 이후부터 전국적인 철도망이 연결되면서 1861년부터 파리는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산업과 무역이 급증하게 된 것은 1851-69년 사이였고 광범위한 프티 부르주아들이 대규모 산업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몰락했다. 소수의 대자본가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적 관계가 특권과 불공정, 갑질의 태도로 드러날 때 분노하지 않을 시민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는 1848년 2월혁명을 ‘아름다운 혁명’으로 부르고 계급간의 연대를 높이 평가했다.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이 국가주도에 의해 국립작업장에서 일자리 문제해결을 시도한 것도 사실은 모든 시민의 ‘노동권리’를 위한 것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3일간에 걸쳐 일어난 6월 폭동에서 급진적 공화주의자들과 시민들의 참여가 두드려졌다.
시민이 중심의 자리로 들어온다. 자본가도 시민이 되지만 시민이 자본가는 아니다. 프랑스 정치전통에서 부르주아지가 자본가로 등치되지 않는다. 전자는 중세의 길드에서 발전되고 그리고 전문교육을 통해 새로운 신분계층으로 등장한 변호사나 교사 그리고 지식인을 포함하는 문화계층의 성격이 짙다.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서 정치주체로서 평민 즉 시민 으로 등장했다. 하위계층 또한 시민이 되지만 시민이 하위계층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연대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갈라서기도 했다. 그러나 하위계급은 대공장에서 노동했던 영국의 프로렐타리아트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19세기 말부터 중산층은 놀라울 정도로 전문화가되고 계층화가되고 분화되어 나갔다. 시민과 하위계급 그리고 학생신분이 사회운동을 이끌어갔다.
이제 시민사회는 단순히 경제가 아니라, 정치개혁, 교육과 문화 그리고 종교를 통해 사회화된 ‘마음의 습관’을 민주주의 ‘영혼’으로 자리잡게된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모방욕구에 저항하고, 사회구성원을 공공선을 향한 도덕적 유대감으로 묶어준다.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학적 분석은 마르크스가 산업 자본주의에서 생각했던 두 계급의 이념형을 무색하게한다.
더욱이 과연 국가권력의 지배자들이 스스로 포기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와 결사체로 이행하는 지는 이후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누가 잡은 권력의 맛을 놓으려고 하겠나? 여기에 숙주처럼 기생하는 자들이 얻어내는 특권, 갑질행위, 그리고 ‘내로남불’이라는 진영테제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모방의 욕구와 습속(habitus) 의 현상학은 관료지배와 미디어의 정보가치로 어느 사회든지 침투한다.
이전의 사회 안에 침전되고 뿌려진 잘못된 구태와 특권의식은 개인의 삶과 의식에 깊숙히 습속처럼 자리한다. 내가 아무리 해방의식이나 계급투쟁을 말한 들, 나는 여전히 부르주아 숙취 현상에 갇혀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자유의 왕국을 향한 출애굽은 쉽지도 않고 설령 한다고 해도 광야의 생활에서 애굽의 고기가마가 그리워 ‘도로아미타불’이 되기도 한다.
바로 보고 바로 걸어가라—그것은 좁은 길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바로 보고 바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좁은 길이다. 무슨 사회주의 교파들이 그리도 많은지 정신이 없다. 바로가려면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담론의 매력과 정치적 정당성 그리고 폭발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는 의회 민주주의 선거 혁명 이후 노동당이 다수의 지배를 획득할 때 사회주의 초기단계에서 여전히 화폐증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전사회의 경제구조와 문화적 발달이 존속하며 사회에 대한 개인의 노동의 기여에 따라 소비와 분배를 받게 된다. 능력에 따라 일을 한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의 능력과 건강, 가정 상황등에 따라 여전히 동등하지 않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개인에게 주어지는 분배의 사회는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모든 협업을 통해 부의 원천이 넘쳐나는데서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자유의 나라는 아직 역사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단계의 사회는 영국의 협동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 (1771-1858)에게서도 볼 수 있다.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의 노동을 예속시키는 자본의 힘을 억제하고, 가급적 분배 정의와 복지를 위해 국가가 합리적으로 관여하고, 법의 개혁과 정당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개인소유를 탈취해서 독재를 통해 집단 ‘동물농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로부터 생활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공론장의 영역에서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국가 견인이 고려된다. 시민 사회 안에는 여전히 협동조합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생산관계가 있으며, 또한 국가에 예속되지 않은 시민적 연합과 결사체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정의가 지배하는 도시국가는—노예제도와 가부장에 기초된 한계에도 불구하고—정치주체로서 시민과 공공선에 대한 통찰을 여전히 줄 수 있다. 그리고 루소의 시민국가는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분배의 정의와 도덕적 유대감을 통해, 차별을 넘어서는 인정정치를 지적한다. 중용의 덕을 함양하고 모방욕구를 제거해나가는 인정정치가 중요해진다. 마르크스에게 칸트의 정언명령은 엄중하게 작동한다. 이것은 좁은 길이다.
'공공신학과 사회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크스와 놀이하는 인간 (4) (0) | 2023.06.27 |
---|---|
마르크스와 비판적 민주주의 (3) (0) | 2023.06.27 |
칼 마르크스: 시민사회와 ‘0 유로 (1) (0) | 2023.06.26 |
찰스 테일러와 바르트: 헤겔과 마르크스 (0) | 2023.06.19 |
칼 바르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1) | 202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