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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과 사회철학

칼 바르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by 파레시아 2023. 6. 19.

바르트의 하이데거 비판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III/3>에서 1929년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나타나는 무의 문제를 다룬다. 하이데거에게서 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다.

이것은 헤겔처럼 합리적인 부정과 다르며, 오히려 무는 헤겔의 부정이나 긍정에 앞서있고, 오히려 자체상 본질적인 역동성과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 무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무화로 나타나며, 절대적 타자이다. 무는 존재의 본질이며, 무로부터 존재가 나온다. 존재는 무를 향해 기획된 존재를 의미한다. 무로인해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상태에서 살아간다.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스스로를 염려한다 (CD III/3: 334).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60)에서 불안을 다루면서, 인간은 세계로 던져져 있으며 삶과 죽음과 무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은 다양한 존재들을 해석하지만 존재자체와 무의 본질를 망각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관점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하고, 형이상학의 역사를 허무주의 (니체)와 동일시한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와 삶을 해석하는 철학이다. 니체처럼 하데거에서게서도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인간중심주의 또는 계몽주의가 배격이 된다. 존재들의 총체성을 부정하는 무는 불안이라는 근본적인 분위기 안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 드러난다. 무의 행동은 현존재를 불안에서 억압하고 무화시키는 데, 이것이 무의 본질이다.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서 무화는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처럼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체가 존재자들을 무화시켜 죽음에 이르게한다. 인간의 현존재는 무에 저항하고 살아감으로써,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넘어서서 초월적이된다. 존재 자체안에 존재자들에 대한 무화가 일어난다. “무는 부정의 기원이다” (“What is Metaphysics?.” Heidegger Basic Writngs, 105).
 
여기서 하이데거는 니체로부터 무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개념안에 수용하고, 서구 형이상학 전반에 걸친 해체의 길을 시도한다. (본래적으로 큰)존재는 세계안에있는 인간 현존재나 존재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무와 더불어 사유된다. 그리고 시인들의 언어는 삶의 심연을 표현한다. 존재와 무가 같이  엮어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프랑스 포스트모던의 해체철학의 발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비판하는 것처럼, 로고스 또는 음성 중심주의나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다머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하이데거는 니체의 플라톤주의 비판을 수용했고, 하이데거의 무를 포함하는 존재철학은 서구의 형이상학을 전도 시킨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선구자는 후설이나 딜타이가 아니라 니체가 된다 (Gadamer, Truth and Method, 257).   
 
현존재는 무나 죽음에서 피할 수가 없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들을 넘어서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면, 무에 관한 물음은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무에서 무가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선 무로부터 피조된 존재가 나온다.

그러나 하이데거 에게서 무는 존재자체에 속한 것이다. 신은 존재의 진리이지만 동시에 죽음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헤겔의 테제—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다—를 자신의 존재론에 수용한다 (ib id., 108). 그러나 헤겔에게서, 하이데거와는 달리, 순수 존재는 무규정적인 것이며 모든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규정성이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것은 무이다. “장미는 아름답다.”

여기서 ‘이다’는 모든 사물의 술어이고, 이런 술어는 장미와 같은 사물로 규정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만 (is), 이러한 존재는 어떤 것이 아니다 (is not). 어떤 것이 아닌 것은 무이다. 따라서 순수 존재는 순수 무이다(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49). 

헤겔은 무를 기존의 사물에 대한 거절내지 비판적 부정으로 말하지, 하이데거 처럼 존재와 무가 같이 있는 동일성의 원리로 말하지 않는다. 헤겔에게 순수존재는 무와 동일하며, 존재의 모든 계기마다 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가 있고 이로인해 동시에 존재가 있다. 사물은 생성, 소멸하는 점에서 존재하며 되어감으로 인식된다. 존재와 무의 공존은 모든 존재자의 구조안에 있으며 존재의 부정에서 생성의 변증법적 과정이 전개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생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정과 비판 그리고 매개와 지양이 아니라, 현존재와 존재(무)의 존재론적 관계로 가져간다. 무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현존재의 무와 죽음안에서 만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바르트는 하이데거가 헤겔의 무와 존재의 동일성을 수용 하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헤겔의 논리학에 기초된 것으로 파악한다 (Church Dogmatics III/3 347).

하이데거의 문제틀

하이데거의 헤겔해석은 나에게는 문제거리에 속한다.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무와 존재의 종합은 하이데거처럼 세계-내-존재가 아니라 되어감의 계기에 속한다. 헤겔은 무와 존재의 관계를 운동과 되어감에서 파악하고, 대립은 현 존재 (존재와 무와 결합)에 부정의 부정을 통해 부여된다.

우리는 빨간 색을 초록 색이나 다른 색깔들 없이 가질 수가 없다. 존재하는 것 (빨간 색)은 다른 존재들(다른 색깔들)과 대립되며, 이것들은 서로를 부정한다. 즉자는 대자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대립과 부정의 관계를 갖으며 새로운 보편적인 것 (즉자대자)을 정립한다.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과의 관계에 있으며, 절대적인 것은 이러한 관계를 구현한다. 무한한 것은 오로지 유한한 것의 질서안에 “차이의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대립과 상호작용을 통해 헤겔의 존재론은 관계적인 소통의 총체로 나간다 (Taylor, Hegel, 240-1).
 
이런 점에서 헤겔에게서 무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정신(성령)이 존재의 본질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무와 존재의 변증법에서 불안을 통해 무가 계시되는 죽음의 철학과는 다르다.

그리고 유대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의 의미는 초기 유대교 외경 (마카오베 하 7: 28)에서 죽은 자(무)의 부활로부터 오며 세계의 자기 우상성에 도전을 하지 하이데거가 상상하는 무와는 다르다. 하나님은 무성과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그원을 위해 계신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1947년 <인간주의에 관한 편지> 에서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비판적인 응답을 했다. 인간의 주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사르트르의 명제—“존재가 본질을 선행한다”—를 하이데거는 거절했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에 대해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의 진리에 서 있다. 그러나 인간주의는 존재의 밝힘에서 인간의 유니크한 자리를 평가절하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주의는 존재자체의 진리를 망각하고, 인간의 이성과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투사에 근거된다.
 
하이데거에서 무와 불안은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과학을 위해서도 긍정적인 토대를 설정한다. 이런 무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무로 나타나지만, 물론 하이데거는 니체처럼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무에 대신해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사르르트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기반을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전개한다. 사르트르는 무와 불안을 하찮게 여기지 않지만, 이러한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고 단호하게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무성의 철학을 하이데거의 결론으로 본다. 사르트르의 출발점은 인간의 존재의 배후에 절대적인 불능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거절에 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보다 더 날카롭게 무의 문제를 구체화했다(CD III/3: 338).
 

바르트의 평가는 해명을 필요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9.1에서 현존재의 본질은 자신의 존재 (실존)로부터 파악된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  현존재는 이미 항상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결정한다. 여기서 현존재는 내가 되며 존재의 가능성이 된다.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je) 자신의 가능성이며, 그의 각자성(Jemeinigkeit)은 자신의 고유한 본래성을 선택한다. 현존재는 두 가지 존재방식 즉 본래성과 비본래성에서 자신의 각자성이 결정된다. 

 

하이데게에서 현존재의 구체성은 일상의 세계의 비본래성안에서, 다시말해 분주함과 고무된 상테, 관심있음과 빠져있음애 서 살아간다. 그러나 실존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래성을 위햐 결단한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9.1절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는 명제를 자신의 무신론적 휴머니즘으로 수용했다.


사르트르의 관심
 
사르트르는 헤겔의 <소논리학>에서 순수 존재는 절대부정이며 결국 무라는 명제에 주목한다. 헤겔에게서 규정되지 않은 직접 존재는 반대방향으로 나간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다 (Sartre, Being and Nothingness, 46).

사르트르는 헤겔의 명제에서 존재와 무가 대립을 형성하며, 무가 존재의 부정의 계기임을 본다. 부정은 존재를 정의할 때 매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스피노자).

이러한 스피노자-헤겔의 방향을 사르트르는 뒤집는다. 모든 부정이 규정이다. 존재는 부정하는 자유를 가지며,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무는 효과를 산출한다. 존재는 무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무는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빌려온다. “비 존재는 존재의 표면에서만 존재한다 ...무가 존재를 엄습한다” (ibid., 49).
 
헤겔에게서 존재와 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매개되고 되어감으로 나가는 논리가 이제 사르트르에게서 하이데거적으로 변형된다. 인간의 자유와 연관된 모든 부정은 규정이된다. 현존재가 자유에 입각해 부정을 통해 사물을 규정한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통해 현존재가 무에 직면하고, 불안이 인간의 삶에 현상한다고 본다. 삶의 영역에서 즉 세계내 존재안에서 무의 문제가 인간의 현존재의 삶에서 논구된다.

이것은 헤겔과 달리, 존재의 부정을 통해 무가 다른 존재를 만들어낸다(무화). 존재는 영구히 무화의 과정을 거친다. 무는 부정의 기원이며 토대이며 존재의 중심에 있다. 무는 인간의 자유를 통해 부정으로 세상으로 온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을 선행하고 가능하게 만들며, 본질은 자유안에서 판단중지된다 (ibid., 50. 60).
 
이러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를 너머서서 인간의 자유를 기초로 세계에 대한 무와 부정으로 향한다. 자유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기위해 의식 안에 "그저 그렇게 있는" 즉자적인 상태를 부정한다. 즉자의 상태를 벗어나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자유는 인간의 대자존재를 특징 짖는 데, 나는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부정과 무를 통해 새로운 기획과 사회참여를 향해 나간다. 이것은 반성적 주체이며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을 지적한다.
 
후설의 지향성과 판단중지 또는 태도변경은 사르트르에게 자기를 직면하는 타인에 대한 부정과 무화의 자유로 설정된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세상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원리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타인의 문제가 발생한다. 나를 향한 타자의 시선을 나는 인정하며 나에게 수치로 나타난다.

사르트르의 주체 존재론은 인정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수치스러움으로 파악한다. 나는 타인과 갈등과 분노, 대립과 투쟁으로 들어가며 타인은 나에게 이러한 현상들의 중층결정으로 나타난다. 결국 타인은 나에게 파악될 수 없는 실제의 영역이며 상호관계가 아니라 본래적 관계의 부재가 된다(ibid., 307, 311-13). 타인들의 시선과 판단들에 의해 내가 제단될 때 지옥이 된다.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 (<닫힌 방>).     
 
그러나 사르트르와는 달리 후설에게서 타인은 나와 더불어 생활세계를 공유하며 현존재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의 윤리와 사랑을 발전시킨다. 나는 타인의 아픔에서 가장 깊은 연민과 공감을 인식할수 있고 타인의 삶을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보다 낳은 세계를 책임적인 비판과 해방을 향해 기획해나다.

사르트르와 헤겔

사르트르의 자유의 주체철학은 헤겔의 인정 변증법에서 타자의 부정과 매개를 통해 드러나는 자유의 진보와는 전혀 다르다. 헤겔에게서 존재는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이며 새로운 탄생이다. 현존재는 단지 인간의 자의식이나 실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정치의 폭넓은 스펙트럼과 이행에서 펼쳐지며 인간의 실천을 부각시킨다.

하이데거에서 인간의 실천이 독일 민족존재의 부름에 복종하는 파시즘적 굴복으로 나타난다면, 사르트르는 타인을 거절하고 지옥으로 여기는 부정과 무화의 실존적 자유로 출현한다. 이러한 이기주의적 자유에 기초한 엘리트주의는 사르트르의 대자적 존재를 특징짖는다.

그러나 헤겔은 사르트르처럼 타인을 거절하는 자유의 지향성에 기초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인 과정을 고려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인정을 통해 즉자 대자적인 존재로 고양된다. 그러나 즉자적인 존재는 대자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항상 대타적인 존재로 머문다.

 

예를들어, 내가 부자이고 돈밖에 모르는 자라면 (즉자적 존재) 배고프고 고민하는 "돼지" (대자적 존재)가 더 낳을 수가 있다. 그러나 "돼지"같은 대자적 존재가 타자와 소통하고 (대타적 존재) 인정하는 삶으로 고양될때 (즉자 대자적 존재) 자유는 진보한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존재론적으로 낳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헤겔에게서 매개를 무화(부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신반인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이 무를 끊임없이 지지해야 한다면. 이것은 부정의 변증법이며, 여기서 타인에 대한 헤겔의 인정원리는 고려되지 않는다 (ibid., 53). 헤겔에게 매개는 반신 반인이 아니라 이항의 대립과 투쟁의 파국에서 공멸을 막아주는 제3의 지대를 의미하며 상호간의 인정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탐욕스런 부자와 배고픈 "돼지"사이에서 일어날 수있는 투쟁과 파국은 공공선의 매개가 막는다.
 
물론 사르트르는 <정신 현상학>에서 헤겔이 대타존재(타자)를 상호주관적인 인정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을 알고 있고, 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대자개념을 위해 대타로서 노예와 노동의 의미 그리고 위신투쟁을 탈각시킨다 (ibid., 321).

헤겔에게서 타자인 노예가 주인을 전복하고 그를 인정하면서 “너와 내가 우리” 라는 인정의 사회로 이행되지만, 이러한 사회학적인 차원은 사르트르의 주체철학 (대자존재와 타인을 부정하는 자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사르트르의 주체철학은 타자의 중요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결국 사르트르는 헤겔의 구체-보편의 변증법을 단순히 자기 동일성의 지식으로 오해하고 엘리트 실존주의에 머문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대자의 존재는 타인에 의해 알려질 수가 없다. 이런 입장은 헤겔을 존재론적인 낙관주의와 진리의 총체성에 사로잡힌 것으로 비판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실존은 본질에 의해 정신의 운동을 통해 지양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안에서 타자의 역할을 탈각시켜버린 휴머니즘으로 정점에 달했다. 

 

사르트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쟁은 레비 스트로스의 문화 인류학으로 부터 온다. 브라질의 야생의 상태에서 실존의 자유를 모르는 자들과 문화는 사르트르의 서구 엘리트 자유주의에 송두리채 거부되어야하나?ㅡ루소나 레비 스토로스는 이러한 유럽중심심주의에 작별을 고한다. 그러나 헤겔과 루소의 논쟁은 다른 챕터를 열어 놓는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와 인간적 현실에 주목했다. 현존재는 타자들과 더불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더불어 존재”는 타자와의 구체적인 만남보다는 현존재의 본래적 구조를 말하며, 헤겔적인 의미에서 상호 주관성이나 관계의 총체성과는 다르다.

사르트르에게 나는 타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타인은 나의 존재에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 타자는 나의 현존재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 아니라 탈중심적인 경계의 자리를 갖는다. 이것은 상호주관적 인정이나 투쟁을 의도하지 않는다 (ibid., 330 -1).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자기 가능성을 통해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완전한 자유안에서 나의 “더불어 존재”를 실현하고, 양심의 소리에 부응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비본래적인 삶의 가운데 있는 일상인들의 본래적 삶을 위한 책임성과 단호한 결단으로 말한다. 나의 본래적 삶이 타인을 본래적 삶으로 인도한다 (Ibid., 331-2). 하이데거에게서 부정이 본래적인 초월구조라면, 세계를 초월하는 인간실재의 본래적 구조는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제자로 남아있고 존재를 대자존재로 설정하고 타인을 무화시키는 나의 자유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엘리트적인 나의 부정의 자유가 나를 공동존재로 만들어가고 타자를 미몽에서 벗어나게하는 계몽의 실천으로 나가게 한다. 타자는 하이데거처럼 표현하면 일상의 비본래성에 빠져있는 군중들이 된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에서 현존재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통해 구체적인 개인의 삶을 사르트르처럼 계몽과 자유의 실천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선험적 구조에 기인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관념론을 피해가지 못하며, 존재의 탈은폐에서 인간 현존재의 한계를 벗어나는 탈존 개념은 이미 선험적인 존재의 밝음안에 들어와있다 (ibid., 336).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관념론자가 된다.

사르트르에게서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과 부정/무의 개념은 구체와 보편의 틀에서 대립, 매개, 지양과 인정과 상관이 없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주체의 대자의식 (후설의 지향성)안에 설정된다. 현존재의 삶에서 타인을 미몽에서 구출해내는 실천과 타인존재의  본래성을 위한 사회적인 앙가주망이 드러난다. 여기서부터 인간 존재에 대한 정언적인 긍정이 있다. 이러한 긍정이 사르트르의 철학의 주제이다. 그는 단호한 실존주의자이며 경계상황에 머물지 않는다.
 
바르트의 평가

바르트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열정적인 관심은 인간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야한다. 인간은 공포, 절망, 전쟁 그리고 지옥을 알고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의 근거를 1차세계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사르트르는 2차세계대전에서 프랑스 저항운동의 단호한 타입을 보여준다. 무 앞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메세지를 전한다. 이러한 인간주의는 하이데거가 말한 무의 왜곡일 수가 있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적 지평은 사르르트에게 적합하지도 또한 궁극적이지도 않다.

인간존재에 대한 사르트르의 긍정에는 패배를 받아들이지않는 인간의 주권적인 초월성이 있다. 이러한 운동을 향해 최종의 실존적인 결단이 사르트르의 철학의 핵심이며, 바르트는 이것을 실존주의 입장으로 특징 짖는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자유를 그는 오로지 무와 더불어 시작한다.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도 없다.

그러나 하이데게에게서 실존주의는 인간주의이며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독일의 현존재는 파시즘의 구원의 소리에 경청하고 여기에 복종하면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되찾아야한다. 이와는 달리 사르트르의 자유의 철학은 인간이 기댈 곳은 무이며, 여기서부터 삶이 가능해지며 진정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다. 무가 존재자체이다. 죽음과 무에 이르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본질에 선행하는 삶을 산다. 인간은 세계로 기획되고 투사된 존재이지만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인간은 저주되었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유하고 선택하고 세계와 본질을 만들어간다.

삶은 선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삶을 살기 전에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동 이외에 현실은 없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삶이며, 행동의 총계이며 전적인 앙가주망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지적하며 진정한 인간주의적 낙관주의를 말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공동존재를 의미한다 (CD III/3: 340-1).   
 
하이데거/사르트르 비판
 
바르트는 무와 부정의 문제를 둘러싼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검토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본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나타난다. 설령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 될 수 있다고해도, 그것은 자유를 향해 저주된 인간 존재를 선행하는 것일 수가 없다. 전투적인 무신론이 등장한다.

인간존재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본질은 절대적으로 피상적이다. 사르트르의 테제—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오로지 인간에게 신의 자리와 기능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기본입장이다.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과 각자성은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형산학적 분석의 핵심에 속한다.

 

사르트르와는 달리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올바르게 제시하는 가능성은 존재를 이해로 가져가는 것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존재하는 자이고, 자신을 이해하는 자이다. 이것은 현존재의 실존구성의 형식적인 의미를 지적한다. 이러한 틀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문제틀을 실존성으로부터 발전시키고, 존재론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이것은 실존성과 존재론적인 해석이며, 현존재의 일상성의 무차별성에 주목한다. 일상성은 사르트르처럼 부정되어야할 무가 아니라, 긍정적이며 현상적인 성격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무차별성을 평균성으로 부르고 여기서 현존재를 분석한다. 이러한 일상의 편균성에서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게 그리고 잘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철학에서 일상의 삶을 부각 시킨 사상가는 니체와 딜타이 그리고 후설이었다.

 

하이데거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10. 16에 주목한다. "주님, 나는 정말 이 문제를 놓고  고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내가 그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곳은  내 자신의 내부입니다."

 

어거스틴이 씨름하는 문제는 망각의 문제이다. 망각은 기억안에 간직되어있다. 망각을 기억할 때  망각자체가 아니라 망각에 대한 이미지가 나의 기억안에 현존해있는 것인지 결론 지을 수 있는가? 그러나 망각자체가 기억안에 현존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잊은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잊게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어거스틴의 질문에서 고양된 존재론적 과제을 본다. 현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방식은 일상성의 삶에서 긍정적인 특징으로 접근할 수가 있다. 현존재의 일상적 평균성은 단순한 측면으로 취할 수가 없다. 이러한 비본래성의 방식안에 선험적인 실존성의 구조가 놓여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선험적 실존성과는 달리 어거스틴은 기억의 현상학을 고려한다. 인간의 마음과 기억은 가장 가까운데 있는 나 자신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기억을 나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력이 없이는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어거스틴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망각을 기억하고 있을 때 망각 그 자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이미 기억한 것을 지워버린 망각까지도 기억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아남네시스의 반성은 선험적인 실존성의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철학이 존재론을 앞서간다.       

 

바르트]에게서 인간의 의식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계시앞에 직면하고 어거스틴의 기억의 현상학을 말씀의 자유와 행동으로 발전시킨다. 하나님의 말씀행위는 나의 기억을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한다. 나의 기억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에 경청을 하는 태도로 바뀐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향한 바르트의 질문은 이들에게서 비판되는 신개념이 서구철학의 지고존재인지, 아니면 성서적인 하나님을 말하는지에 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를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로 독해했다. 물론 하이데거는 독일존재로의 도피주의로 인해 자신의 입장을 무신론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르트르 역시 다른 방식으로 무신론자로만 볼 수도 없다 (CD III/3: 343).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의 본질은 염려의 현존재—과거로부터 던져지고, 현재에 의해 미래를 기획하는 것 처럼—존재자체의 드러남 또는 밝혀지는 세계안에서 탈존 (ex- sistence)의 운명으로 이해된다. 존재자체가 인간을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목자, 즉 거기에 존재하는 자로 유용화한다. “현존재의 본질은 거기에 존재하는 자에 있다. ” (“Letter on Humanism,” ibid., 229, 248)
 
인간은 존재에 경청하고 속한다. 언어는 특히 시의 창조에서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고 거주하는 집이 되며, 인간은 이러한 집을 지키는 자이다. 언어는 존재자체에 의해 침투되며, 존재를 밝히고 은폐하는 사건이며, 또한 다가옴이다. 존재자체는 선험적으로 모든 다른 존재 자들의 우위에 있으며, 원한을 통해 오는 악에 대한 무화는 본질적으로 존재자체안에서 부정과 치유로 전개된다. 존재자체의 무화는 무의 본질이다 (ibid., 217, 230, 261).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주의에 관한 편지> 이후 하이데거는 무의 자리에 대신해서 존재의 긍정을 보다 더 강조한다. 무를 향한 존재의 기획은 존재진리에 대한 입장으로 파악되며, 신들에 대한 자리는 존재의 차원 즉 거룩의 차원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무는 존재이며, 어떤 점에서 무는 거룩하며 하나님일 수가 있다.

인간은 무의 청지기이며, 존재를 배려하고 지키는 목자가 된다.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가 더 이상 세계를 기획하고 투사하는 창시자라기 보다는 존재 자체가 언어 안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1929년 초기에 나타나는 무에 대한 개념과 이후 1947년에 나타나는 존재개념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지 않는다.

이른바 하이데거 I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의 경험 분석)과 하이데거 II (존재와 언어)로 구분되는 전회에서 기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을 찾기가 어렵다 (Heidegger, Basic Writings, 33).

존재가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재가 거꾸로 존재 자체로부터 해명되고, 현존재는 존재가 밝아오는 장소로 이해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거절과 그리스도교적 사유에 대한 거절은 하이데거를 초기 그리스적 사유 (아낙시만드로스, 헬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등)로 되돌아가게한다. 이것은 다른 시원 즉 존재를 진리의 사건으로 내보이는 하이데거의 존재-역사적 사유를 말한다.

존재 사건은 진리의 사건이며 신의 사건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회자하는 그러나 존재 파시즘의 문구가 여기에 속한다 ㅡ"예수 사건은 독일 현존재 민중사건이다. 현존재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얘수는 아리안이 된다,

누가 역사적 사건을 예수와 독일현존재의 민중사건으로 동일시하면서 존재와 진리사건으로 규정하는 가 ㅡ위대한 민족의 부름을 듣고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하이데거나 칼 슈미트같은 파시스트들이다.

존재는 형이상학의 잔재에 사로잡혀있는 존재자의 존재도 아니며, 신의 존재자체도 아니다. 이미 <인간주의 서한>에서  존재 자체는 이름없는 비인격적인 힘으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인간은 여기에 적합하게 응답해야하는 역사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과 신들을 다스리는 필연성 (ananke)에 속한다.
 
존재는 일어남(은폐, 탈은페, 밝아짐과 물러감. 다가옴과 달아남 등)에 사건으로 온다. 이러한 사건에서 신은 인간에게 맡겨지고 인간은 신에게 맡겨진다. 마지막 신의 은폐와 밝힘에 도달할 인간은 형이상학적 욕구를 넘어서 있고, 대지의 단순 소박함을 회복하는 소수이다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소수 엘리트가 군중을 지도한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에게서 군중개인은 존재의 의미와 본래성을 찾는다. 결국 하이데거의 전회에서 마지막 신은 인간에 의존되는 존재 또는 존재와 무의 동일화라는 신화론적인 회귀 즉 알려지지 않은 신(행 17: 23)에 대한 기념과 존경이 담겨져 있는 가? 그렇게 예수사건은 독일 현존재 군중사건, 그리고 군중사건은 존재의 부름에 결단하면서 아리안 예수 사건이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의 변증법에서 영지주의자이며 신비주의자의 길을 개방한다 (CD III/3: 348). 불안과 공포가 무를 드러낸다. 무에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의 문제에 속하며, 이것은 성서적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무를 신성의 은폐로 파악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신성의 기능과 자리를 폐기하며, 신들에 대한 신화론적인 계보학을 제시한다 (ibid., 343).
 
무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와 기준 된다면, 무는 더 이상 형이상학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해명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르트르에게서 신의 거절은 신이 인간존재와 무의 바깥에서 자신의 기능과 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았고 신의 기능과 자리를 인간으로 옮겼다. 하이데거에게서 무가 신성을 은폐하는 유사이름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고려된다. 무는 인간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무드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인간에게 계시된다. 무는 인간존재의 초월의 기원이며 인간의 과학의 순수내용이다 (ibid., 343).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짖는 것은 인간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는 하이데거에게서 무에 대한 신화론적인 계보학으로 전개된다. 모든 존재들은 무로부터 나온다. 무는 신의 본래적인 특질들 (즉자성, 전지 전능함, 무한성 등)을 결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적 하나님과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면서 절규했고 그가 그토록 믿은 아바 아버지 하나님은 침묵했다. 이러한 십자가 신학에서 사도바울이 나온다. 그는 예수의 죽음에서 죽음의 부정을 보았고 새로운 존재와 생명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서 무와 부정의 관점에서 인간이 고려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믿지만 하이데거는 그렇지가 않다. 휴머니즘은 하이데거에게서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르트르에게서 부정과 무는 자유의 실천을 통해 하이데거의 무처럼 기능을 하지는 않는가? 묻는다 (ibid., 343).
 
비판적 반성: 하이데거와 파시즘
 
바르트는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반성에서 영지주의와 신비주의의 길을 보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은 죽음을 향한 파시즘의 구조를 갖는다. 그는 독일민족에게서 세계사적인 운명을 보았고, 나치당에서 신적인 촉매차원을 보았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언어를 통해 존재는 독일국민과 관련된다. 민족의 존재진리가 배려하는 현존재를 독일의 언어안에 거주 시킨다. 언어는 존재자체와 독일국민의 집이다. 독일국민은 언어적이며 역사적인 사명을 갖는다. 신화론적 인종은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에 민족사회주의 이념을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민족의 현존재로 그리고 지도자의 권력장악과 이데올로기 호출과 동일시하고, 파시즘의 투쟁과 혁명을 그의 존재철학으로 끌어드렸다. 존재를 망각했던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제 현존재를 큰 존재—인종 파시즘—을 위한 봉사와 순응 그리고 운명으로 결정 짓는다.

여기서 지도자 히틀러에 의해 집단적 의지로 결정된 민족의  역사적 실존이 큰 존재의 진리로 스스로 드러나며 (알레테이아), 이러한 야만 (폭력과 살해)의 트임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환호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개인의 실존은 민족의 부름과 사건 앞에서 비로소 진리의 드러남을 만난다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2).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사건의 철학이다. 하이데거의 언어이해에서 사회적 담론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의 관계의 그물망에서 왜곡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용되는 차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무(죽음)를 향한 존재는 자연 스러운 것이다. 그에게서 큰 민족의 상징인 나치즘의 집단 ”언어” 는 독일 민족의 “존재의 집”으로 등장한다. 개별존재는 언제든지 이데올로기 호출에 착출 당하고, 민족의 집단적 현존재로 복무해야한다.

형이상학을 현존재의 기본구조와 사건으로 전환시킨 하이데거는 그의 현존재가 나치의 돌격대로 변형되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봐야했다. 비록 하이데거가 <인간주의에 관한 편지>에서 민족주의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하지만, 하이데거의 핵심개념인 존재의 진리와 존재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운명은 고향인 민족의 언어로 표현되며, 인간은 민족의 세계에 던져져있다. 독일민족은 운명적인 독일국가에 속함으로써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코스모폴리탄주의는 거절된다 (“Letter on Humanism,” 242, 243).

하이데거의 존재의 본질과 운명은 철저하게 독일 중심의 낭만주의이며 (횔더린), 독일을 본향으로 삼는다. 하이데거 사후 발견된 <검은노트, 1931-1970>는 그가 여전히 파시즘적 사유와 반유대주의에 몰두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독일의 파시즘에의해 자행된 유대주의 말살정책은 여전히 정당화된다.  
 
더우기 하이데거의 과학 기술비판은 원초적 자연주의로 돌아가길 원한다. 기술의 본질은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고,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위해 도구적으로 유용하기 보다는, 기술 자체의 세계를 드러낸다. 기술의 지배에서 대지와 혈통에 기초된 자연주의로 귀환은 한편에서 하이데거의 생태학적 관심을 보이지만, 동시에 파시즘의 자연철학을 반복한다.

인간은 자연의 세계와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한다. 하이데거에게서 기술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존재이며,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의 진리를 개방하는 세계에서 드러나며 염려하는 현존재와 관련되며 인간에 의존해서 트임을 열어가지, 신앙과는 무관하다.

존재의 진리가 열리는 세계의 “신성화”를 위해 하이데거는 기술의 수단과 목적 그리고 기술적인 존재방식을 원초적으로 제거하려고, 이러한 원초적인 세계에서만 오직 존재/하나님이 진리로 드러난다 (Heidegger’s interview in Spiegel, 1966, 9-23, “Only a God Can Save Us”).
 
하이데거의 하나님은 세계의 고난에 무관심하다. 오직 존재의 진리를 신비하게 열었다가 닫는 무한한 반복의 전기 콘센트에 불과하다. 선함 즉 윤리는 존재의 진리와는 무관하며, 현존재의 배려에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데, 이것은 기술적인 인간과 대중사회를 염려하는 윤리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는 존재론으로 함몰되고 만다. 결국, 글로벌 기술의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농업과 식량산업을 홀로코스트의 가스 방이나 집단살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Young, Heidegger, Philosphy, Naz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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