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왕국과 놀이하는 인간
아렌트는 엥겔스의 마르크스이해를 기초로 "역사의 다윈"에 주목했다. 이러한 표현은 엥겔스로 부터 온 것이며,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론은 다윈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변증법으로 둔갑한다. 여기서 사회진화론적인 모티브 즉 생존투쟁과 적자생존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론에 부착된다. 노동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역사발전에서 적자가 된다 (The Human Condition, 116)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 변증법은 적자생존이나 인종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인간을 소외된 노동과 물신숭배 사회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이행을 말한다. 그래서 순진한 유토피아적으로 비판당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당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자유의 왕국은 <자본> 3권에서 실현 되기보다는 사회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접근운동에 속한다. 노동시간이 부의 원천이 되는 것이 멈추고, 교환가치로 사용가치를 측정하지 않는다.
개인은 예술과 과학과 교육을 통해 자유로운 창조자가 되며 놀이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노동시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가의 창조적 시간이 부의 원천이 되며 온전하고 조화로운 인격을 발전시킬 것이다. 화란의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인간 개념 (homo ludens)을 문화와 문명의 실제적인 창조자로 파악했다.
이것은 자유의 왕국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하는 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놀이가 인간의 실천의 특수한 형식이 된다. 언어만 놀이하면서 삶의 형식을 창출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 자유의 왕국에서 놀이하면서 규칙과 룰을 지키면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출할 것이다.
자유는 헤겔처럼 역사에서 진보하며, 필연의 영역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의미가 꽃을 피운다. 사회주의 사회 역시 필연에 속하는 불행한 의식의 왕국에 속한다. 그러나 자유는 실제적인 물질생산의 영역 너머에 있다. 자유의 왕국이 이제 필연의 왕국인 사회주의에대한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자리한다.
그러나 우리안에 부분적으로 실현될 수 없을까? 마르크스는 창조적인 자유주의자이며 여전히 유대-기독교적인 종말론의 마지막 주자로 서 있다. 때론 마르크스의 성경인용과 지식이 신학자인 나를 무색하게 할 때가 많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해된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이행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을 말하지만 그 진의가 가장 오해되었다. 이것은 계급투쟁과 더불어 당대 프랑스 공화제 사회주의 그룹 안에서 사용되던 흔한 용어였다. 경험적으로는 1871년 사회 공화주의를 세워려던 마지막 혁명 시도인 파리 꼬뮌을 지적한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념으로 작동된 루소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연대정치(프루동주의, 블랑키스트, 건전한 자코뱅주의, 소수의 마르크스주의)를 말한다. 가난한 구역에 살던 일반 노동자들과 보불전쟁에 참가했던 방위군이 참여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로 비스마르크에게 알사스 로렌지역을 양보하는 것은 파리 시민들에겐 커다란 치욕과 굴욕이었다.
150년 주년 꼬뮌의 역사적 사건을 조명하면서 France 24은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파리 꼬뮌은 알려지지 않았던 시민혁명으로 재조명되었다. 불순한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과 이에 대한 정당한 국가진압이 아니라,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시민사회를 진일보시킨 시민공동체 정부로 자리 매김된다.
이런 역사적 비극을 왜곡이나 하는 듯이, 프랑스는1875년에 몽마르트의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고 19 14년에 완성했다. 하나님은 꼬뮌의 폭도들을 심판했다. 이러한 몽마르트의 대성당은 오늘날 파리 시민들에게 수모를 당한다.
꼬뮌정부는 나폴레옹 3세의 독재와 전쟁 실패 그리고 추종자 아돌프 티에르의 굴욕 협정에 저항으로 일어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유효한 역사는 해방과 연대정치 그리고 비판의 상징으로 오늘날 15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시민들과 이들의 민주주의 영혼으로 되돌아온다.
특히 여성 지도자들, 러시아 출신 엘리자베쓰 드미트리에와 루이 미셀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여성의 보통선거 주장이나 여성 노동자들의 평등한 임금, 심지어 바리케이드에서 여성 클럽의 담대한 활동에서 근대 페미니즘의 시작으로 조명한다. 여성은 역시 위대하다. 이들 대부분은 베르사이유 임시정부에 의해 학살 당했다. 루소의 시민공화국은 시민과 하위계급 연대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파리 꼬뮌에서 참여 민주주의의 정점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파악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으로 전환된 노동자 계급의 독재는 거기에 없었다. 프랑스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는 집중적인 산업화와 해외 식민지 시장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와는 많이 달랐다. 꼬뮌에서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활동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830년 7월 군주제에서 권력을 쥔 금융귀족의 지배 즉 부르주아 지배에 저항하는 48년 혁명에서도, 특히 루이 블랑이 임시정부역할이나 그의 국립작업장 시도 또는 노동자들의 교육을 위해 일반선거 연기를 주장하면서 사용된 구호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 혁명기간에도 꼬뮌독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구스트 불랑키에의해 유포되기도 했지만, 이행기에 반동세력에 방어하고 교육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1862년 마르크스를 방문한 라살레는 개인의 자유를 혐오하고 자신의 독재개념을 민족주의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민족독재나 비스마르크에 가까운 라살레를 조롱하면서 계몽적 보나파르티스트로 불렀다. 1863년 라살레는 비스마르크와 자신의 사회민주당을 야합시키고, 군주제의 전제지배를 지지하려고 시도했다. 더우기 바쿠닌은 무제한적인 비밀 독재권력과 반민주의의 정부를 주장했다.
바쿠닌은 1869년부터 1차 인터내셔날을 자신의 비밀독재로 지배하려고 했고, 마르크스는 여기에 날카롭게 대립했다. 독일 3월 혁명에서 캄파우젠은 라인주 자본가였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와 임시정부 의장이었고, 국민지배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독재를 요구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신라인 신문에서 군주제에 저항하는 이행기의 독재형식을 임시적인 것이며, 민주주의 영구혁명의 틀에서 보았다. 당대 대부분 혁명이 반동으로 얼룩져있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프랑스 혁명사 전문가인 예일대학의 존 메리먼 (John Merriman)교수가 설득력 있게 밝히듯이, 파리 꼬뮌의 계급구성은 비판적 시민이나 중산층에 속하는 장인이나 숙련된 기술자, 생활이 어려운 일용 노동자, 가난한 자들이었다. 정치 이념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연합된 사회공화국이었고,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개념이 중심이 되지, 과거 소련이나 오늘날 중국처럼 당 -국가 인민독재와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시민 사회의 무질서와 계급의 대립을 해결하는 수 있는—헤겔적인 의미에서—윤리적 국가로 등장 했는가? 아니면 공포와 집단화와 폭력으로 갔는가? 이런 물음에서 역사는 후자로 나타난다. 국가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자유의 왕국인 시민 공동체로 나갈 수 있는 지는 심지어 마르크스 자신도 말년에 의심했다.
마르크스의 국가는 소멸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적 세력이 정치적 성격과 권력을 상실하는 지점을 예견한다. 프로렐타리아트는 혁명이후 브르주아지를 전복시키면서 그 우위를 설정할 것이다. 국가는 프로렐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조직되는 것인데 이행기에 나타나는 잠정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로 정의했다. 이것은 모든 계급을 타파하고 오로지 계급없는 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출현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태를 20년 후 <프랑스의 시민전쟁>
에서 드러난 파리 꼬뮌에서 보았다. 마르크스에게서 국가권력은 계급적대의 표현이며, 계급없는 사회에서 사라질 것이다.
<고타강령 비판, 1875>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애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데 국가는 혁명적인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엥겔스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입장을 국가의 파괴가 아니라 죽는 것으로 표현했다. 생산수단이 사회적인 부로 전환되고, 생산과정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초하여 새롭게 조직관리될 때, 국가의 개입은 점진적으로 사라진다. 국가기계는 물레나 청동도끼와 함께 고대 박물관에 속할 것이다.
엥겔스에 의하면 파리 꼬뮌에서 모든 일꾼들은 행정과 사법 그리고 공공교육에서 일반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언제든지 이들은 국민들의 결정에 의해 소환될 수가 있다. 높은 직책이든지 낮은 직책이든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동일한 급료가 지불되었다. 이것은 국가권력과 관료제를 제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참된 권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바쿠닌의 엘리트 혁명가들에 의해 주도되는 권위국가론에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국가론은 아나키스트나 --노조나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초한--생디칼리스트 그리고 레닌의 국가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자들의 일반파업을 통해 모든 정치적 행동을 거절하고, 정치 프로그램은 생디칼리즘의 원리에 대립된다고 보았다.
그런가하면 독일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 비판을 공유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비스마르크와 야합한 라살레의 입장을 수용하고 수정주의 노선을 취하기도 했다. 1890년대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당내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카우츠기를 포함하여) 부르주아 정당과 합력하여 개혁의 길을 걸었다. 결국 이러한 길은 2차 인터내셔날의 성격을 규정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파국으로 막을 내렸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과 러시아로 되돌아가기 전 스위스에 머물면서 쓴 <타지로부터 편지>에서 자신은 파리 꼬뮌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추종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1917년 <4월 테제>에서 자신의 프로렐타리아트 독재애 기초한 국가개념을 강조했다. 그리고 1917년 늦 여름 핀란드에 숨어서 <국가와 혁명>에서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를 통한 국가 파괴와 일당독재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레닌이 과연 프랑스 1871년 일어난 파리 꼬뮌에서 푸루동주의의 역할과 탈 중심화된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는 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레닌은 독재의 잠정기를 10년 이상으로, 또는 30년 이상으로 상정하기도 했다.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에게 자유는 없다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 248). 레닌의 일당독재국가는 사멸한 것이 아니라 1917년에서 부터 시작해서 1991년 해체되어서 그의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스, 어거스틴 그리고 루소
마르크스와 어거스틴은 만날 수가 있다. 어거스틴에게 국가 (세상의 도시)는 비도덕적인 원리 즉 개인주의적 게급이해의 표현이다. 국가는 악한 도시이며, 그것은 극복되고 계급없는 하나님의 도시를 위해 소멸되어야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마르크스처럼 하나님의 도시를 인간이 세상에 설립하는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악의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에 의해 스며들고 변혁되어야한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정치적으로 사실주의자였지 유토피안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유적존재와 경제적 정의와 민주주의 대한 관심은 루소와 만날 수 있다. 루소에게서 자연상태에서 유적존재로서 인간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거칠지만 연민과 평화를 추구하며 산다. 시민사회로 진입할 때 비로서 자연적 인간은 이기적인 개인인 부르주아의 정치권리와 인권을 갖는 보편적 시민으로 분리된다. 시민사회가 개인의 삶을 유지하고 개인의 의지는 보편의지로, 정치적으로 국민주권과 헌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시민사회안에 경제적 불의와 착취가 존재하고 위기와 대립이 발생한다.
헤겔-마르크스의 전통과는 달리 국가입법이 보편적 시민적 승인을 통해 국민주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반의지는 더 이상 부르주아 지배가 아니라 참여 민주주의와 경제적 공공선 그리고 식민지 비판 등을 통해 나타난다. 이것은 시민국가의 비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적 정의와 도시국가의 기능은 시민적 승인과 국민주권을 통해 세워지는 참여 민주주의에서 설정되고 마르크스의 문제틀을 비판적으로 매개한다. 시민사회의 소통과 공적행위에서 인간은ㅡ루소가 제의한ㅡ 공공선 거버넌스를 기초로 시민들과 더불어 놀이와 축제하는 존재가 될 수 없을까?
민족주의는 비판적 민주주의 틀안에
마르크스연구에서 1848 혁명의 중요성은 거의 논의 되지 않는다. 48혁명은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인정투쟁을 향한 정치이념과 문화적 열망으로 가득찬 시민의 봄이였다. 근대사의 혁명과 전쟁에서 우리는 정치투쟁 (권력), 계급 투쟁(경제) 그리고 인정 투쟁 (문화와 민족)이 어떻게 교차하면서 나타나는 지를 본다. 역사를 추동해가는 것은 물질적 이해와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에 있고,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에서 누가 정치적 이념을 담지하고 주도권을 쥐는 가에 따라 진보, 단절, 파열 그런가하면 반동과 진압이 나타난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신분과 하위계급의 연대는 때론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48년 혁명을 쿠데타로 후퇴시킨 루이 나폴레옹 3세와 같은 블랙 코미디도 있었고, 비스마르크와 같은 융커와 막강한 군사력을 기초로 한 통일 독일제국의 현실 정치가도 나타난다.
역사는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맹목적으로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진영 도그마는 역사 사회학적 상관관계에서 밀려난다. 사회적 약자가 언제든지 노동귀족으로 부상하는 열망에 갇혀있다. 아일랜드의 노동자들에 대한 영국의 노동자들의 차별에 마르크스는 이기적인 노동귀족의 모습을 보고 침묵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비판 이론의 원류로 남아있다.
‘0유로’와 시민사회로 가는 길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과학기술과 합리화 과정이 정점에 달하고, 사회의 발전은 신분과 계급을 계층화시키며 공론장들은 전문화가되고 다양하게 분화된다. 국가의 권력과 관료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기재들이 사회를 조직하고, 사회는 미디어의 정보와 소통가치를 통해 허위의식을 포장하는 시뮬라시옹으로 만들어간다.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상품의 물신숭배 사회에서 그는 이제 ‘0유로’의 상품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의미와 가치를 아는 구매 자에게 단순한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징가치 즉 경제를 가치 합리성으로 보려는 윤리적 태도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0유로’의 화폐는 시장에서 교환가치로 사용되지 않는다. 1유로가 ‘0 유로’ 화폐를 만드는데 사용된다고 해도, 그것을 3유로로 구입하는 시민의 태도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오이코노미아’의 전통에 서 있다. 이것은 근대성 1을 넘어서는 성숙한 대안 근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21세기의 해결책이 아니다. 역사는 종종 그가 틀렸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엥겔스도 역사란 가장 비극적인 여신이라고 부를 정도였지 않았는가. 자신들의 교리와 분석을 비웃듯이 비켜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의미는 그가 본 문제틀에 있지 해결책에 있지 않았다.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자신의 비판이론을 통해 사회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지 문제제기를 한다. 그는 역사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방향은 언제 든지 수정하고 새로운 연구와 경험적 자료를 통해 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사회과학은 도그마가 아니며, 내용 없는 선동구호도 아니며, 파시즘적인 권력투쟁과도 상관없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인정투쟁은 다양한 공론장들에서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조건 안에 묶이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식민주의 폭력 구조가 주변부를 향한 침투와 착취와 분할로 드러난다. 세계 체제안에서 이민자들의 물결과 신분과 계급의 계층화, 섹슈얼리티와 젠더 그리고 인종문제, 이슬람, 타종교들과의 만남 그리고 생태학의 위기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다.
시민사회는 더 이상 고전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나 정치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분화되는 공론장에서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가 나타난다. 비판적 민주주의가 자유와 연대 그리고 공공선을 향해 가동된다.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과 하위계급의 연대는 생활세계를 지키는 문화투쟁에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민족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민사회와 민족 주의의 접합은 비판적 민주주의 전통에서 새롭게 전개된다. 마르크스의 얼굴을 ‘0유로’ 로 화폐 화한 독일사회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버리지 않는다. 그를 통해 카르텔의 특권과 돈을 숭배하고 욕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로 남겨두길 원한다. 권력과 탐욕에 찌든 자처럼 살지마라! 생태계 조차도 아우성을 지른다.—이것이 ‘0유로’가 갖는 비판적 근대성의 태도이며 시민사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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