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해명은 양식사 비평(원자료)에서 편집사 비평 (복음서의 기자들의 신학)에 이르는 전승사를 고고학적으로 해명한다. 원자료와 나사렛 예수의 본래적 관계를 해명할 때 복음서의 "예수문서들" 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담겨져있는 이스라엘 이디엄과 묵시문학적 지평을 당대 팔레스타 유대교와 비교분석한다.
고고학적 접근은 복음서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증언에서 나타나는 다름과 단절 또는 변형을 일으킨 배경을 두텁게 기술한다. 이것은 권력관계에 기초한 푸코의 고고학의 불연속성보다는 나사렛 예수의 전승자료들의 다양성과 차이에 주목하고 이것을 해석한 편집자의 신학에 주목한다.
이러한 고고학적 접근은 불트만의 아포테그마타를 기초로 역사적 예수와 초대 공공체의 신약성서의 기본적인 파열이 데카르트적 개인주의적 의심으로 폭로한다. 불트만과 달리 나는 성서의 네러티브와 문학적 구성을 검토할 때 네 가지 차원들을 검토한다.
1) 나사렛 예수의 삶의 자리
예수의 가르침과 메시아적 활동에 관련된 초기 전승문서들 (Q자료와 수난과 부활전승 그리고 묵시문학적 지평) / 복음서의 "예수문서들에 담겨져있는 이스라엘 또는 아람어적 표현방식과 구약성서의 인용과 재해석/ 비유해석ㅡ구약의 지평에서 보는 나사렛 예수는 본래적인 역사의 예수다!
2)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
이러한 가르침이 당대 유대교와의 연관성과 다른 방향/예수의 아람어적 비유언어와 당대 갈릴리 지중해 문화적 배경과 사회계층론 그리고 로마 정치지배 시스템 분석; 초대공동체안들 안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대립과 해석의 갈등 그리고 권력관계ㅡ사회학적 분석
3) 복음서 편집자의 신학적 구성과 공동체의 다른 입장과 방향을 비교 검토. 복음서 전체 순환구조와 바울과 관련하여 재해석하기
요한복음의 특수 자료안에 마가복음보다 더 오랜 나사렛 예수전통이 담겨져있다. 누가와 마태복음의 Q자료는 마가복음에 없다ㅡ원자료비평과 특수자료 분석. 마가는 빌리 막센이 마가복음 편집사 연구에 이야기 하는 것처럼, 갈리리를 예루살렘과 대립시키기 위해 지역적으로 특수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다. 마가는 전승자료에 기초했고 (베드로 복음), 마가 자신의 삶의 자리는 갈릴리 지역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4) 신약성서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에 기초한 최근 해석들을 내재적 비판을 통해 검토. 의미론적 확대를 위해 동시대적으로 전개
성서는 세계와 더불어 읽어져야한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서해석은 원자료에 대한 계보학적 태도를 취하며 사회학적으로 두터운 기술을 시도한다. 두터운 기술은 두가지 차원에서 시도된다ㅡ일차적으로 성서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담론과 사회적 삶의 형식이 분석된다 (언어게임과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문화적 규칙ㅡ비트겐슈타인). 이러한 독특한 사회적 삶의 형식(시스템)이 다른 삶의 언어와 삶의 형식에서 종교-정치지배, 권력, 특권을 둘러싼 긴장, 타협, 파열을 사회계층론에서 파악한다.
언어의 계보학(루소)은 성서 텍스트의 도덕적 담론과 삶의 긍정과 정의에 관련된다. 이것은 선악을 넘어서는 힘에의 의지가 아니리 기존의 삶을 하나님의 용서에서 풍부하게 하는 축제적 차원을 내재적 비판으로 삼는다.
바울의 차별없는 복음
바울과 이방인들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은 차별없는 복음 (3:28)에서 나사렛 예수의 진리내용에 상응 하는 걸로 본다. 이러한 차별없는 복음은 세례를 통해 영적죽음을 경험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믿음은 참여이며, 로마제국 안에서 정치 사회적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갖는다.
바울은 사라와 하갈의 본문 (창 16장. 21: 1-21)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 그의 알레고리는 사라를 하늘의 예루살렘의 계약 (예례미아의 새계약)으로, 반면에 하갈을 시내산의 계약으로 즉 이슬람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다르게 읽는 독해 방식을 취한다. 바울의 알레고리 해석은 고고학의 단초를 제공하고 구약성서를 동시대적으로 인용한다. 랍비적 미드라쉼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바울의 자유와 부자유의 변증법인데, 메시야의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을 하갈의 후손으로 폄훼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복과 예레미아의 새언약이 메시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와 은혜에 모두가 다 참여하고 새로운 창조로 살아가길 강조한다 (Veerkamp, Die Welt Anders, 278).
바울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차별없는 복음을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메시야 이념의 빛에서 사실적으로 부각시키며, 정치 사회적인 자유와 해방을 표현한다. 이것은 랍비적 유대교의 미드라쉬에서 진리의 본래적 내용을 상응적으로 파악하는 해석방식에 가깝다. 메시야의 인정정치는 인종 간의 (유대인/이방인) 차별과 사회적 대립(주인/ 노예), 성적인 차별 (남성/여성)을 자유의 변증법으로 지양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은 메시아와 메시아 공동체의 관계로 발전된다 (엡 5:22-33).
바울과 새언약의 복음
그러나 바울에게 새언악의 복음은 예레미아에서 오순절 강림에서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 파악된다. 이러한 입장은 히브리서의 새언약 해석을 반유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작용한다 (히 8: 13). 새언약은 예레미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시내산 계약을 제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죄로 인한 삼대째 저주를 철폐하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표현한다. 이것은 이미 시내산 계약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인격적인 책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내산 계약을 파기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하나님은 새언약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을 유대인의 마음밭에 부어 주시고 죄의 용서를 통해 그의 백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 하신다. 유대적 믿음은 죄의 용서에 깊게 천착 되어있다. 이러한 새언약은 누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사용되고, 고전 11:25절에서 확인된다.
이어 히브리서 8: 8-12절과 9장 15절, 그리고 10장 15-18절에서 이어진다 (박동현 <예레미아 II>, 182). 히브리서는 누가-바울의 원류에서 해석되어야한다. 바울은 이러한 예레미아의 새언약이 메시야 예수의 저주의 나무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해방에서 성취되고,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누가-바울의 입장은 이후 새언약을 그리스도 공동체 적용하고, 유대교를 낡은 계약으로 대립시키는 시도에 저항한다 (히 8:8-13; 9:15-22, Brueggemann, A Commentary on Jeremiah, 294).
다름과 지평확대
새언약에 기초한 차별없는 복음과 메시야 공동체 신학은 복음서의 “예수와 그의 백성”과의 연관성에 서 있다. 바울의 제자들의 서신을 통해 복음의 의미는 역사적 과정에서 확대된다. 텍스트 안에 있는 각각 다른 삶의 자리와 자료의 층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텍스트의 내적세계와 복잡성이 예수/민중의 관계를 현재주의에 입각한 “인민 대중”이나 또는 파시즘적인 민족(인종) 공동체를 통해 파악할 수 없게 한다. "내"가 성서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성서가 "나"를 해체한다. 예수의 민중성에 대한 성서주석은 바울의 화해와 차별없는 복음에서 상응되고 역사적으로 발전된다.
바울의 차별없는 복음은 정치해방의 스펙트럼을 담고 있지만 당대 필로의 그리스 유대교나 스토아 철학의 지평에 서 있다. 이러한 상응관계와 종교사적인 상호 연관성 (corelation)은 "현재주의와 독자의 주체성"에 의해 주장되는 예수/민중 이상형이나 독자 중심적인 외사법과는 거리가 멀다. 텍스트의 생활세계와 내재적 비판이 독자의 현재주의나 포이엘바하적인 투사의 이상형을 해체한다.
계보학적 태도: 예수와 민중
예수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검토할 때, 텍스트로부터 시작되는 내재적 비판이 중심이 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의 중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공적 죄인들에 대한 용서, 메타노이아,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의 삶에 초첨을 맞춘다. 이것은 본래적 진리내용이 된다. 이러한 진리내용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서 차별없는 복음으로 이어지며 종교사적인 연관성에 서 있다.
계보학은 성서 텍스트를 분석할 때 고고학적 해명과 더불어 종교 이념이 갖는 물질적 이익과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네트워크에서 어떤 담론이 어떤 그룹에 의해 실천되고 정당성을 갖는 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성서의 사회구성과 현재의 사회구성 사이에 나타나는 선택적 친화력을 내재적으로 비판한다.
하나님은 성서 뿐만 아니라 동시대적인 콘-텍스트를 향해 말씀 하신다. 예를들면 구약의 암 하 아레츠 (땅의 백성)은 복음서의 오클로스와 의미론적인 상응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성서적 민중개념은 구약안에 담겨져있는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 (요나의 분노와 니느웨)과 유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유효한 역사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완고한 팔레스타인 유대 기독교인들에게서 실종된다. 계보학적 접근은 멸망할 죄인 (massa perditionis)의 틀에서 암 하레츠와 이방인 그리고 오클로스를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 분석하고,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차별없는 복음에서 의미론적인 지평의 확대를 본다.
반복, 차이 그리고 해체
바울의 차별없는 복음은 화해의 복음의 빛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나 로마의 교회의 현실과는 다르다. 남은 자나 새로운 피조물 개념을 통해 고린도 교회 (고전 7:21- 24)나 로마교회에서 어떻게 예수와 그의 백성의 지평이 이어지고 차이로 나타나는 지가 중요하다.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총체성을 통해 바울은 로마의 정치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사실주의자였다.
공관 복음서에서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공동체와는 다른 가난한 자들의 복음을 전개한다. 누가의 삶의 자리에서 상류층이나 하위계층과의 대립이나 갈등이 드러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세리장 삭개오의 메타노이아를 소개하고 배상의 정의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메타노이아와 배상의 정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누가는 동시에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말한다. 쇼트로프나 슈테게만처럼 누가를 사회주의적 사상가로 성급하게 채색할 이유는 없다 (Schottroff / Stegemann, Jesus von Nazareth, 150). 당대 사회주의란 용어는 없었다. 고고학적 성서해석은 동시대적인 차원을 살려내는 데 이것은 현재주의 입장에서 성서 텍스트에 갖다 부치는 외삽법을 해체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해지지 않고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살려내는 것이 그를 동시대인으로 만드는 고고학적 성서해석이다. 그것은 근원으로부터 내재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된다. 삭개오의 메타노이아나 사도행전의 친교 공동체주의에서 누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개인의 소유는 공공선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누가는 예루살렘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사회적 상황과 이방인 교회의 자리에서 메시야 예수를 따르는 것은 억울한 희생자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로 말한다. 누가의 사회적 삶의 형식과 복음의 담론은 메타노이아와 '선한 사마리안'의 체제 전복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사마리아인에게 선함을 부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 그는 사경을 헤메는 희생자에게 구원의 행위를 베풀고,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안처럼 행하라고 한다.
불의한 부자 삭개오의 경우를 통해 부유한 회원들은 공공선을 위해 나눔의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에서 찿을 수가 없고 누 가복음에 대한 두터운 기술을 의미한다. 이런 친교 공동체주와 공공선을 실천하는 공동체는 바울의 갈라디아에서 차별없는 복음으로 이어진다.
'공공신학의 지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랍비 유대교와 미슈나 (11) (0) | 2023.02.08 |
---|---|
바울과 아게네스 신학: 로마의 관료제 비판 (12) (0) | 2023.02.08 |
복음서와 유대교 (14)) (0) | 2023.02.08 |
예수와 바울 (15) (0) | 2023.02.08 |
바울과 아게네스 (하위계층) (16) (0) | 2023.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