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와 바울
유대인 신학자 핀카스 라피데는 바울이 만난 부활의 예수는 고전 15장 3-8절을 근거로 공동체의 목격자들의 증언에 기초하며, 바울의 삶에서 전환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Lapide, The Resurrection of Jesus, 99).
고린도 전서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부활전승으로 볼 수 있고, 예루살렘 공동체와 공유 하지만, 이외에도 초기 부활전승은 구전과 기록된 형태로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예배 그리고 선교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4복음서에서 공동으로 보고되는 예수부활은 실증주의적 역사개념으로 파악될 수가 없다. 실증주의적 역사개념은 랑케의 표현대로 역사에 있었던 그대로를 기술하는 데, 설령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사진기를 들고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부활의 예수를 사진으로 찍을 수가 없다.
복음서에서 역사개념은 나사렛 예수의 삶과 활동 그리고 아람어로 말해진 가르침이나 논쟁에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의 실증주의적 개념인 역사를 외삽법적으로 복음서의 예수에게 갖다 부쳐, 최소단위 아포테그마타를 기초로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을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후대 공동체의 산물인지 이분화 시키는 것은 더 이상 지지 받지 못한다. 나사렛 예수의 사회적 삶의 자리와 당대 종교체제로 부터 밀려난 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 투쟁은 후대 공동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저명한 신약 성서학자인 존 마이어는 2022년 10월 사망했다. 그는 3차 역사적 예수 연구를 새로운 방법을 통해 발전시킨 영향력있는 카톨릭 학자이다. 마이어는 5권으로 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대작을 출간하고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을 검토 하면서, 실제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간격을 줄여 나간다. 특히 3권에서 마이어는 실제의 예수를 주변부의 유대인으로 이해하고 예수운동의 협조자들과 경쟁자들을 분석한다 (Meyer, Companions
and Competitors. Vol. 3 of A Marginal Jew, 489).
그는 역사적 예수를 접근하기위해 다섯 가지 기준들을 복음서에 적용한다: 1) 당혹스럼 (예수의 나사렛 출신, 로마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사건을 독자들을 당혹하게 위해 창작한 것이 아니다) 2) 불연속성 (구약성서의 나사렛 지명의 부재, 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 3) 다차적인 입증 (복음서와 바울서신들), 4) 역사 문화적인 일치 (예수는 주변적인 유대인), 5) 메시아 예수에 대한 거절과 처형 (ibid., 11-12). 이런 기준들 가운데 몇 가지가 복음서의 본문에서 확인될 때 그것은 역사적 가능성으로 수용된다.

그런가하면 아람어로 된 예수의 어룩과 비유 또는1세기 팔레스티나나 유대교의 배경은 역사적인 예수를 증거하는 자료로 사용된다. 마이어는 역사학자로서 예수에 대한 연구를 진척 시키고 신앙의 그리스도나 신학적인 이슈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나사렛 예수는 당대 사회적으로 볼때 주변부에 속한 유대인이며, 그의 삶과 실천 그리고 십자가 처형은 히브리적 이디엄과 구약의 지평에서 증거되고 해석된다.
토라는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삶의 지침과 예배 그리고 네러티브로 파악된다. 나사렛 예수는 토라의 지평에서 그의 복음과 메시아의 구원사역이 증거된다 (Fretheim, The Pentateuch, 20).
토라와 복음서의 연관성은 신약성서의 증언들을 기초로 실제의 예수가 누군지를 구성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으로 십자가에서 종결된 것이 아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으로 신약성서의 증언을 통해 그의 제자들과 공동체의 삶에서 케리그마와 성령을 통해 동시대화된다. 역사적 연구와 신앙의 차원을 분리시킬 이유는 없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상관이 없는 예수운동이나 초대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의 역사적 의미는 초기 목격자들과 말씀의 사역과 전승자들의 믿음에 기초하며, 이후 공동체의 복음서와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선교를 통해 확장된다. 물론 신학적 발전을 역사적 예수와 동일시 할 필요는 없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사실주의적 접근은 예수의 담론이 사회적인 삶의 배경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제자들의 예수 운동에 어떤 영향과 방향을 주었는 지를 분석한다.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스펙트럼에서 두터운 기술을 시도한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분석하고 전승 층들을 내재적으로 검토하는 방법은 편집사적인 측면에서 전개된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나사렛 예수와 교회의 신앙 사이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 즉 담론과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 그리고 이념의 정당성을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해명한다.
바울과 화해의 복음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기대와 이디엄에서 하나님의 묵시적인 정의와 죄사함의 은혜는 바울에게서 예수의 화해의 복음의 중심에 서 있다. 예수의 심정 윤리와 메시야의 인정정치는 이후 제자들의 다양한 공동체와 바울의 화해의 복음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에서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남는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인 현재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의 남겨진 메시야 백성들은 쉐키나에 의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며 차별을 철폐하고 인정윤리로 나간다.
이런 점에서 사실주의적 성서해석은 현재주의에 대한 과몰입에 의해 텍스트를 콘트롤 하거나,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의 물질적 이익이나 권력관계를 투사시켜 텍스트를 지배하지 않는다. 알랑 바디우처럼 혁명이나 민중사건을 이상화하고 여기에 맞춰 바울을 독해하는 모택동주의 사건주의나 “민중 메시야 동일화” 전략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거절한다. 사실주의 성서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진리가 고정되지 않으며 어떤 신학도 이러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텍스트의 세계는 끊임없이 열려있고,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와 사회구성과 접합되며 대화와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오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후 교회의 역사의 전개에서 내재적 비판의 원류가 된다.
그리스도의 화해 안에서 하나님은 성서와 동시대를 통해 메시야 인정정치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가신다. 사실주의적 접근은 성서 텍스트가 “누구”의 손에 의해서 이용되고 권력투쟁과 지배의 정당화로 담론화 되는 지를 문제틀로 삼는다. 텍스트는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에서 파악되며, 이것은 콘–텍스트 (동시대적인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 여전히 중요하다 (“Historischer Materialismus und
Theologie,” Gollwitzer, 78-9).
이러한 사실주의적 접근은 성서의 삶의 자리와 콘-텍스트 사이에 나타나는 역사적인 간격과 문화적 차이와 대립, 그리고 정치 경제적인 다름에 주목한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백성의 상관관계”가 오늘날 후기 지본주의 현실에서 밀려나간 시민과 하위계층의 삶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지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문제틀적인 인식은 사회분석을 통해 “민중”에 대해 당연히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판단중지를 내리고 민중의 유효한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서 유럽중심적 교회사와 헤게모니 그리고 지배신학을 해체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해석에서 거리두기 태도와 비판적인 개념성찰은 단순히 민중 이야기나 사건 또는 투쟁을 나사렛 예수의 삶의 자리와 생활세계과 성급하게 “동일시” 하는 반-변증법적 실존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여기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인격과 활동 그리고 그의 삶의 자리는 오늘의 민중투쟁과의 동일화를 위해 불트만적인 “가현론” 이 나타난다.
비판적 거리두기
오히려 다름과 차이에 기초한 비판적 거리두기 전략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에 주목한다. 저녁에 보는 모든 소가 다 검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가서 보면 다를 수가 있다. 실천은 역사적인 다름과 차이를 인식하는데서 사회 비판적 효과를 갖는다. 이것은 별자리 또는 생활세계안에서 다양한 개별적인 것들의 중요성을 본다. 이러한 계보학적 인식은 집단주의를 거절하고, 오히려 관계 안에 있는 인격에 주목한다.
예수는 복음서와 바울 그리고 다른 목회서신들과 요한 계시록에서 다양한 삶의 자리에 있던 초대 공동체와 관계 안에 서 있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두터운 기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는 마가복음에 대한 과몰입을 통해 갈릴리 민중예수에 대한 연구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는 것을 순진한 것으로 간주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정성은 오히려 초기 안디옥 공동체 교회에서 아람어 전승자료의 번역과정을 분석하거나 예수의 비유에서 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 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두터운 기술은 신약성서를 관계안에 있는 총체적 텍스트로 이해하며, 더 이상 마가복음만이 역사적 예수를 접근할수 있는 신뢰할만 자료라는 주장에 비판적 거리감을 취한다. 더 나아가 “비판적 거리감의 효과”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주객도식을 파시즘적 동일성으로 전환시키는 이데올로기 호출에 저항한다. "예수가 민중이라는 동일논리"는 예수가 누구였는 지 그리고 예수 시대의 민중이 누구였는 지 알 길이 없다.
예수의 시대의 민중은 단순히 오클로스가 아니라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와 그의 거룩한 백성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니엘 이전에 게르 (이방인)나 암 하 아레츠(땅의 백성들) 문제는 에스라-느헤미아 개혁운동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오히려 민중의 문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서 사마리아 인종차별를 철폐하는데 서 잘 나타난다.
적어도 마가복음에서 사용되는 오클로스에 대한 언어비평은 마가가 오클로스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예수를 처형하라는 무리를 오클로스로 일치시킨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군중의 소리를 오클로스로 말하지 않고 라오스로 신중히 구분한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의 예수는 오클로스에게 회당의 바리새파의 토라를 배우라고 말한다 (마태 23:1).
"어떤" 오클로스이며 "누구의" 오클로스인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오클로스가 말해지는가? 이 개념이 과연 예수와 그의 거룩한 백성의 관계론적 기독론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가? 성서적인 의미에서 민중, 이른바 땅에서 멸망당할 자들 (massa perditionis)은 오클로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두터운 기술울 요구하며, 바울에게서 다른 의미지평으로 확대된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민중 (아게네스/메 온타)
마틴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초기자료 전승과 부활 그리고 묵시적 차원을 안디옥 공동체를 통해 복음서보다 더 빨리 알고 있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를 방문하고 교회를 설립했다 (행 18:19-20). 바울은 에배소에 체류했던 기간이 53-55년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고린도 서신을 집필한 것으로 본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고전 1:18 -25절에서 나타나는데, 십자가의 말씀(로고스)은 묵시적 차원에서 지혜로 파악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와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한다 (사 29: 14).
바울은 장차 미래의 사건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 데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 구원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온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메시아)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가 유대인에게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는 것을 보면 (신 21:22, 갈 3:13), 이러한 유대적인 꺼림 (스칸달론)은 십자가를 비이성적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는 헬라의 지혜와 상응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은 좋은 혈통이나 가문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이들은 수공인들이거나 소상인들 아니면 노예들로 구성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대의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는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행 18:8, 고전 1: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선택하고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선택하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2세기에 활동한 유대 철학자 셀수스는 낮고 천한 자들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적 현상을 비판하고. 그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여기서 언급되는 고린도의 하위계층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은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오클로스에 상응하지만, 갈릴리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는 전혀 다르다.
천하게 태어난 자들(agenes) 이나 멸시받는 자들 또는 없는 것들( 메 온타 me onta)이 선택되고 부르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혁명적인 활동을 지적한다. 그것은 세상의 있는 것들 (타 온타, ta onta)을 폐하시는 (카타르게제) 하나님의 전복의 차원을 지적한다.
아게네스와 메 온타는 오클로스 개념의 지평을 당대 호모 사케르에 속한 노예들을 포함하며 인종차별을 철폐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근거로 차별없는 공동체를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은 세계를 전적으로 다르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혁명을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본다. 예수의 복음은 교차 텍스트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접합)로 나타난다. 메시야 정치는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하며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마 12: 18-21). 올바른 실천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화해의 복음과 메시야의 인정정치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아게네와 메 온타를 통해 세상의 기존질서와 현상유지를 전복한다.
민중은 아게네스(하위계층)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하위계층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아게네스와 메 온타같은 존재들은 우상숭배와 음행, 소송분쟁에 휘말리고, 열광주의에 빠져 있다. 바울은 이러한 분쟁을 치리하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기준을 제공했다 (6: 9- 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는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된 의로운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들이다 (6:20).
이들은 새언약의 복음 안에서 자라나야한다. 바울은 이들의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새언약을 썼다. 우리 모두는 모세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성령은 우리를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한다 (고후 3: 18).
바울은 하위계층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복적인 선택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메타노이아를 촉구한다. 바울은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은혜의 신학을 전개하며, 십자가의 말씀을 부활의 빛에서 해명한다. 부활은 묵시적 차원 즉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그리고 몸의 변화를 통해 해명된다. 죽은 사람은 썩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이다 (15:52).
바울의 화해의 복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민중을 새로운 피조물을 부각시킨다. 바울의 새 언약의 복음에서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고후 6:16),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살며, 이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되시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레 26: 12. 렘 32:38, 겔 37:27).
바울에게서 고린도 교회의 하위계층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야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어야한다. 바울에게는 하위계층이나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적 생각이나 집단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의 입장은 공동체의 관계 안에 있는 인격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히브리 성서의 약속과 구원에 서 있다. 이것은 바울의 성서원리를 말한다.
히브리 성서 텍스트와 초대공동체의 전승자료 그리고 바울의 콘-텍스트는 자체의 고유한 생활세계를 갖는다. 바울의 삶의 자리는 메시야의 시간(부활/재림의 포개짐)과 더불어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고 토라의 약속을 지적한다. 이것은 바울의 내재적 비판의 원류에 속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이외에 예레미아의 새언약을 성취시키고 성령을 통해 보증하는 분은 없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독자인 “나” 의 의식과 경험은 성서 텍스트를 읽기 전에 이미 동시대적인 텍스트 안에서 역사적인 영향과 에피스테메의 구조, 문화의식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과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호관계는 예수의 인격과 활동이 처해있던 역사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인 환경 즉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분석한다.
이런 사회학적 접합에서 나타나는 시스템과 구조이론은 독자인 “나” 도 새로운 의미 지평 안에서 하나님의 혁명을 위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백성인 남은 자는 바울에게서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새로운 존재를 말한다. 나의 경험이나 질문이 대답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생활세계와 사회 문화적인 접합에서 그리고 사회구조 안에서 나의 경험과 질문 또한 화해의 복음과 메시야의 인정정치를 통해 변혁이 된다.
공공신학의 성서해석은 초기 자료들의 전승사와 복음서로 편집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복음서들의 차이와 유사점과 반복을 의미지평에서 사회학적으로 접합시킨다. 복음서는 순환론적 자평에 서 있고, 각각의 다른 삶의 자리들이 검토된다.
오늘날 사회구성을 분석하고 민중의 삶의 계층을 되 묻고 성서로부터 의미지평을 확대해나간다. 순전한 희생자들, 오클로스 또는 아게네와 메온타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에서 임재했던 부활의 그리스도는 오늘 여기서 우리와 만난다.
동시대화의 프로젝트는 현재사에서 말해지 않고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문제틀하고 더 이상 민중을 일반화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아게네와 메 온타를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으로 신학화하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재구성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은 바울에게서 성령안에서 새로움을 경험하고 변화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바울의 성서해석은 지배자와 예속된 자의 이분화를 통해 민중을 메시아로 동일시하는 실존주의 외삽법이나 집단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합리화와 전문화 그리고 분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 물화현상과 관료지배 체제 아래서 살아간다. 후기 자본주의 안에서 민중의 의식은 단편화되고 굴절되며, 부르주와적 의식이나 문화적 하비투스(습속)에 쉽게 포로가 된다. 이러한 물화의 현상은 일상세계의 파시즘화를 야기한다. 시민과 하위계층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성서적인 민중 카테고리 (게르, 암 하 아레츠, 오클로스, 가난한 자들, 남은 자들, 억울한 희생자들, 아게네스, 메 온타)의 스펙트럼을 우리의 시대의 문제에서 심화시킨다. 후기 자본주의 복합성은 공공신학으로 하여금 묵시론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내재적 비판과 공론장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그리고 사실주의적 성서해석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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