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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복음서와 유대교 (14))

by 파레시아 2023. 2. 8.


필로와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바울과 2차 성전시기의 유대교와의 관련성은 가다머의 영향사로 파악하기 어렵다. 주전 3세기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70인 역의 오경은 3세기 경 처음으로 번역이 되었고, 이후 예언서들과 다른 문서들이 번역된 것으로 추정된다. 70인 역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서 텍스트로 수용되고, 연구 되었다. 그러나 토라의 하나님은 이방인들 이교제의에서 드러나는 우상들과는 날카롭게 대립되고, 헬라적 유대교 문헌의 중심으로 드러난다.

헬레니즘 유대교 철학자들은 스토아주의의 알레고리를 수용하고, 스토아 철학의 이성 (로고스)을 토라의 중요성을 위해 사용했 다 (솔로몬 지혜서).

그러나 여전히 헬라의 이방제의 (안티오크 4세)에 순교로 저항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이 되라고 강조한다 (마카베오 4서 18: 23- 24). 스토아의 로고스는 자연에 편만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토라에 순종 해야한다.

필로 유대아는 주전 20년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주후 50년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당대 가장 중요한 헬라 유대교의 사상가로 여겨진다. 그의 형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명망있는 지도자였고 부유한 은행가였다. 이 사람은 41 - 44년 사이 유대지역의 왕이었던 헤롯 아그립파의 재정 보증인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가 암살 당하자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의 친구였다. 필로의 조카는 헤롯 아그립파 왕의 딸과 결혼을 했다. 또 다른 조카는 유대와 애굽의 로마 총독관이었고,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기에 로마군대의 총독이었다.

어째튼 필로는 헬라의 철학과 문헌을 연구하고 언어에 정통 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성서의 유일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도입했다. 필로는 주후 40년도 로마황제 가우스 칼리굴라에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 대표로 파견되어, 황제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지 못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유대 중부지역 해안 가에 있는 얍브네 지역에 그리스 공동체가 칼리굴라를 위해 제단을 세우자, 유대인 공동체는 신성모독으로 제단을 파괴했다. 이 일로 인해 칼리굴라는 이전 안티오크스 4세의 정책을 부활시키고 성전과 모든 회당들은 제국의 신당을 섬기는 장소로 변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쥬피터의 모습으로 변신한 칼리굴라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 당했다.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41-54)는 종교 관용정책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행하고 팔레스티나에 자치령을 허락했다.

신플라톤주의자 필로는 헬라철학의 전문가 였지만, 신실한 유대인이었고, 유대교 안에서 종교적 진리와 최고의 철학이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성서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토라의 준수를 강조하고 유대적인 제의는 알레고리칼 하게 받아 들였다.

필로는 하나님의 초월성은 여전히 창조의 질서에 임재하며,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 스토아의 우주안에 편재한 신적인 로고스를 융합 시켰다. 70인역의 하나님 (테오스)은 엘로힘의 번역이며,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자비로운 권능을 상징한다. 주님(퀴리오스)은 야훼의 신명을 번역하고 세계의 지배와 심판의 권능을 표현한다.

신적인 로고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세상을 매개하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중재자이다 (잠언 8:22).
로고스는 히브리 성서의 토라 안에서 구현되며 인류가 지키고 살아야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필로는 스토아의 로고스 개념을 창조주 하나님의 빛에서 지혜(소피아)로 재해석하고,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처음으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로고스는  대제사장이며 죄를 용서하는 보혜사(파라클레이트)이다. 그러나 필로에게 유대적 메시야적 종말론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몸과 영혼의 이분법은 여전히 플라톤적이다.
필로의 알렉산드리아 유대교는 초대 기독교 문헌에 영향을 미치고, 특히 그의 로고스 이념과 알레고리 해석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그의 신플라톤주의적인 유대철학은 기독교 신학자와 유대인 사상가 그리고 중세 카발라 신비주의로 이어졌다.

필로와 요한복음 서설

요한복음은 100ㅡ120년 경 기록되고 팔레스티나ㅡ시리아 지역에 있던 공동체의 자리를 갖는다. 요한기자는 공관복음서와 다른 초기전승자료들을 구전과 기록된 문서들로 가지고 있었고 (21: 25), 특히 수난전승에서 십자가에서 예수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사도요한)을 언급한다. 그는 스가랴 예언의 지평에서 예수의 죽음을 연결한다 (19:35, 37). 그리고 부활의 예수의 현현을 누가처럼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마가처럼 갈릴로 확인하고 내용을 보충한다 (20-21).

요한복음의 서설에서 선재 기독론 말씀/로고스는 하나님으로 불린다. 그러나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정관사가 없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은 하나님을 향해 (프로스 텐 테우스) 있었다. 필로는 로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곁에 존재하는 두번째 하나님으로 말하지만, 로고스가 육신을 입는 다는 성육신은 그에게 낯설다. 요한이 필로의 저술을 연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헬라의 문화세계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요한의 언어는 필로의 지평에 서 있다. 그러나 요한의 구약해석은 팔레스티나 유대교의 전통에 서 있다.

유대인들은 요한적 표현 ㅡ아버지와 내가 하나(10:30)ㅡ에서 신성모독을 느끼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5:18). 요한의 기독론에서 예수는 대제사상의 기도에서 정점에 달한다 (17). 요한복음에서 종말론은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믿음 안에서 현실화되었다 (5:24).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9:30).

그렇다고 해서 미래적 종말론을 거절하지 않는다 (1: 50-51; 5:28). 구원은 유대인들로 부터 온다 (4: 22)ㅡ이것은 요한을 반유대주의자로 보기 어렵게한다. 모세는 예수를 증거했다(5: 46).

부활과 파루시아가 동일화 되지만 여전히 보혜사의 활동이 있고 제자들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증언한다 (14:16, 15:26). 그러나 요한은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대적으로 사고한다 ㅡ내 아버지는 나 보다 더 크신 분이다 (14:28: 20:17) (Theissen, The New Testament, 151).

팔레스티나 유대교

필로의 시기에 팔레스티나의 유대교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마카베오 1, 2서와 요셉푸스의 역사기록은 마카베오 저항운동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가져 온 로마-유대 전쟁을 다룬다.

이후 2세기 후반부터 6세기 사이에 편집된 랍비 문헌들에서 구전 토라가 보존되고, 복음서는 2차 예루살렘 시기의 유대교에 대해 보도한다. 그리고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에서 당대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을 담고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에 의한 희생제사와 레위계열의 성전 음악을 담당했다. 반 세겔의 성전세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요구되었다. 산헤드린은 최고 입법과 사법제도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디아스포라 지역에 소재한 지방 법원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로마제국의 관료행정이 유대의 법적 시스템을 콘트롤 하고,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관료제를 통해 지배했다.
이런 종교사적인 틀에서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할례 선동가들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가 있다.

예루살렘의 완고한 할례주의자 유대 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까지 가서 선교를 한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 갈리디아 지역에 거주한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은 할례 준수를 완고하게 주장 하지도 않았다.
어째튼 팔레스티나 유대교에서 회당은 대부분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 기도와 토라의 배움의 장소였다. 토라는 아람어로 번역되고 해석 되었다.

마카베오 상에 보면 하시딤들은 주전 167년 유대인 헬레주의자들에게 저항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살해 당했다. 하시딤들은 에세네파나 아니면 바리새파의 원조로 이해된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라이벌이었고 가르침의 체계가 서로 달랐으며, 유대인 토라에 대한 성격과 권위를 두고 입장을 달리했다.

사두개파는 모세의 오경의 문자에 우선권을 두었고, 제사장의 종교적 권위를 강조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 제사를 담당한 사독계열로 추정되며 (열상 2:35), 이들은 사독의 아들들로 불렸다. 그러나 역사사회적으로 분석해볼 때 이들은 당대 하스모니안 왕가의 영토회복에서 브상한 상인출신들이고, 구체제의 종교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금융귀족의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의 가르침과 분리 한다는 의미를 갖지만, 토라의 성결법전을 강조했다. 이들은 기록되지 않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조상들의 유전 (갈 1:14, 마태 23: 2-4)을 보존하고, 토라해석과 율법 적용에 전문가였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기위해, 39개의 노동금지 규정을 만들었다. 이들은 영혼불멸과 최후의 심판을 믿었고, 마지막 때 모든 사람들의 몸의 부활을 믿었다. 그리고 메시야를 통해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 (올람 하바)를 믿었다. 이러한 바리새파 전통은 70년 성전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로 발전 되었다.

랍비 유대교의 문헌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에스라 시대로부터 소급되고 주전 2세기 마카베오 시대를 거쳐 주후 1세기 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들은 율법학자 에스라의 전통과 관련되며, 기록된 토라와 더불어 구전토라를 해석하고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는 전문가 계층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론 중산/하위 층에 속했다.

이들은 하스모니안 왕가에서부터 헬리주의화된 사두개파와 투쟁을 했고, 헤롯 시대에 6000명의 바리새파가 있었다고 보도된다. 권력 관계에서 산헤드린을 사두개파가 장악했지만, 여기에 바리새파도 참가했다. 지역의 재판소는 비-바리새파적인 서기관들의 관할에 있었다.

바리새파의 주된 활동의 무대는 회당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스토아 학파의 지혜로운 자들과 비교 되기도 했다. 바리새파 현자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간 신비체험을 했다고 보도되지만, 이들은 토라의 지혜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했고, 토라를 창조의 청사진으로 보았다.

주전 37년 헤롯이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을 때, 산헤드린 회원 가운데 하스모니안 왕가를 지지한 사두개파 45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헤롯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던 저명한 바리새파인 힐렐과 샤먀이를 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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