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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바울과 아게네스 신학: 로마의 관료제 비판 (12)

by 파레시아 2023. 2. 8.

바울과 아게네스

바울은 아게네스 (고전 1: 28)의 신학자다. 로마의 제국의 시대에 바울의 신학에는 노예가 포함된다. 자유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그는 오네시모의 사면권을 빌레몬에게 호소하기도했다. 바울의 아게네스 신학에는 메시야의 인정정치가 깔려있다. 바울의 공공신학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할례거부와 음식논쟁을 이해하기위해 로마제국의 정치 사회계층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50ㅡ5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투쟁 배후에는 단순히 유대적 기독교인들과의 긴장보다는 할례와 음식규정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긴장이 깔려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종교정책에서 유대인들은 토라와 전통적 관습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했다. 당대 유대교의 분파였던 교회 공동체도 유대인의 관습을 준수해야한다.
이것을 통해 쿨라우디우스는 유대인 공동체와 갈등을 피하려고 했다. 할례 선동자들은 박해를 피하기위해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획책했다(갈 5:12).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정치에 순응하고 재유대화가 되어야 했다 (Theissen, Intro. to NT, 63).


여기서 나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브리기테 칼의 갈라디아 주석에 동감한다. "바울 시대에 십자가는 보편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띤다. 제국의 지배 아래서 십자가 처형은 국제적인 사건에 속하며, 로마의 폭력에 의해 사라져가는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Kahl, Galatians Re-imagined, 159)
기원전 8세기 스파르타쿠스 반란실패 후 많은 노예들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갈라디아의 "다른 복음"은 단순히 바울이 유대주의적 기독교인과의 논쟁 보다는, 로마의 관료 시스템을 분석해볼 때 제국의 구원론에 관련된다. 당대 기독교 운동은 로마의 종교정책에 의해 유대교의 분파에 속해있었고 독립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613개 미츠보의 중심에 속하는 코셔규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하며, 동시에 이들은 시민의 의무조항인 제국의 칼렌다 (갈 4: 10)를 지켜야 한다.

갈라디아의 문화적 배경은 주전 18 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로마의 소 아시아의 점령을 도왔다. 갈라디안들은 그레코-로만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인종적으로 켈트족에 속했다. 켈트 족은 기원전 2세기 경 로마를 침략하고 패배시키도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식자층 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아나톨리아 (오늘날 터키) 중심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다 (Betz, Galatians, 2).


바울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 는 정치, 사회 문화적, 종교적 해방의 메세지로 이들에게 계몽으로 받아들여졌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차별없는 복음(갈 3:28 )을 실천한 급진적인 메시야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의 이방제의와 우상을 섬기다 돌아섰지만, 다시 무력하고 천하기 짝이 없는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갔다 (4:8- 9). 이것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추측하는 것 처럼, 단순히 유대적 의식과 관습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부과된 로마의 혼합주의 종교정책에서 나타나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게 하는 관료지배 방식을 말한다. 제국의 법과 유대교의 법이 혼합 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러한 제국의 구원론을 "다른 복음"으로 추종했다.

바리새파 출신 바울은 모세의 제의적 토라와 성전제의를 이방인을 위해 비판했지만,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것이고 자신도 준수했다. 바울 당시 유대교의 성전 절기는 계절과 날들을 유월절과 욤키프르 (죄의 사면)와 관련 되었지, 갈라디아 문화처럼 이교제의와는 상관없다 (Neusner,  An Introduction to Judaism, 158).

차별없는 복음과 권력관계

이미 차별없는 복음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단초를 보게된다. 바리새파 출신의 신도가 주장한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는 고넬료의 회심사건을 보도한 베드로에 의해 거절 되었다 (행전 15:5-11). 안디옥 교회로 온 야고보의 사람들은 할례가 아니라 코셔 규정 때문으로 보이고, 이들은 바울을 비판하지 않았다.

이들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자들을 위한 복음의 사역을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식사도중 베드로는 떠나 물러서야 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누리는 교회의 지위와 권력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전에도 베드로가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식탁 공동체에 함께 한 것을 알고 있었고, 베드로의 위선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사건은 당대 유명한 사건이었지만, 바울을 비난하고 베드로의 입장을 옹호하는 문서도 존재했다. 바울은 상당한 곤경에 처했다.

타이센의 테제 비판

타이센이 카리스마적 순회 설교자를 예수운동의 사회학으로 분석한 것은 기능주의적 방법으로 흐른다. 오히려 카리스마는 바울에게서 더 부각된다. 바울은 회심 후 예레미아적 소명을 강조하고, 안디옥 공동체에 속했으며 이른바 예루살렘교회의 "카리스마 순회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1: 16-17). 오히려 예루살렘 공동체는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종교적 유대화와 위계질서로 자리 잡혔다.

타이센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교회를 방문했을 때 다른 사도들을 보지못한 것은 다른 사도들이 선교여행 때문이라고 한다. 것은 억측이다 (Theissen, Sociology of Early Palestinian Christianity, 9).

그렇다면 예루살렘회의(행 15)에서도 사도들이 선교여행 떠나서 불참했나? 여기에는 이미 바리새파 출신이었지만 메시아 예수를 영접한 자들이 있었고 이방인들의 할례요구를 했을 때 오히려 베드로는 저항했다 (15:5-7). 베드로보다 더 급진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도들이 따로 있었나? 타이센의 이른바 급진적 순회 설교자들은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 안했나?

만일 타이센이 안디옥을 카리스마적 순회설교자들의 홈으로 본다면, 굳이 타이센은 30-70년 사이 팔레스티나 유대인 사회에 국한시켜 순회자들의 행동패턴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이들이 미친 사회적 영향을 재구성 할 이유가 없다 (Theissen, ibid., 2-3).

물론 타이센의 예수운동의 사회학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사회학적 연구는 일차적으로 야고보와 바리새파 출신의 신도들의 공동체 제도화와 안디옥 공동체의 긴장의 관계를 검토해야한다. 순회설교와 복음전파는 <디다케>에서 초대 공동체들의 일상적인 여행이었다.

더 나아가 종교이념이 권력관계와 물질적 이해 그리고 특권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으로 드러나는 지 해명해야한다. 더우기 안디옥 공동체도 제도화 되어 있었고 예수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바울은 여기서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배웠다. 카리스마 권위는 선교활동에서 나타나지만, 제도권 교회에서는 법과 조직이 지배한다.

안다옥 사건과 갈라디아 문제

안디옥의 음식
사건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무효화 시키고 바울에게 치명타를 준 사건이었다. 종교적 이념과 실천이 권력관계에 엮어지고, 위선과 선동으로 인해 바나바까지 연류되었다. 이것은 복음과 교회권력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울에게서 복음의 진리와 능력은 부활의 그리스도에게 만 있다.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메시아 예수의 해방과 은혜에 대한 믿음이 나를 새롭게 창조한다(6:15).

물론
안디옥 사건은 갈라디아 교회에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비에 속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할례를 강요했지만, 사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도 아니았다. 이들은 로마의 종교정책에서 박해를 면하려고 십자가의 해방과 은혜를 거절한 자들이었다 (6:12-13).

하나님 앞에서 남은 자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민중은 바울에게 메시야의 십자가에서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제국의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죽어간 희생자들과 함께하며, 이들의 유효한 역사를 메시야 정치를 통해 회복 시킨다. 

예수 이름에서 주님의 고백이 나타나며, 아버지 하나님 (하셈: 위대한 이름)의 영광을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나는...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전 2:2)

이것은 마태나 마가 또는 야고보적인 "갈릴리" 예수가 아니라, 로마제국에 투쟁하는 갈릴리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듭난 민중처럼 영적투쟁을 하며 살아야한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로마제국에 스캔들(scandal)이었다. 부활은 바울에게 죽음과 살해의 지배에 저항하는 메시야 정치의 세계 혁명을 의미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에의해 선택된 남은 자로서 메시야 정치에 가담하고 투쟁하라!
  • 메시야의 몸의 부활은 그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너희들은 본래 세상에서 버려진 민중 massa perditionis 들이었다.  
  • 하나님이 너희들을 부르고 선택할 때 너희들의 처지는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은 자들이었고 별볼일 없는 자들이었다.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울의 아게네스 신학의 고전적인 표현에 속한다 (고전 2:27- 28).
  • 하나님이 너희를 불러 이제 메시야 예수의 진정한 은혜에 접붙이게 한다.

역사적 실례: 빌레몬과 오네시모
 
메시야 인정 정치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건에서 나타난다. 로마는 노예제 사회였고 이미 공화정 시대(기원 509-27)에 제국팽창을 하면서 수 많은 노예들이 유입되었다.

기원 후 4세기 경 로마제국에서 노예의 목에 부착된 쇠사슬이 발견되었는데 라틴어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내가 도망치지 않도록 붙들어 나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시오
나의 주인은 칼리스투스의 지역의 비벤티우스요
 
이것은 이탈리아와 특별히 로마에서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쇠사슬은 쉽게 제거될 수 없도록 노예의 목에 조여놓았고, 도망친 노예를 쉽게 추포할 수 있도록 했다. 때론 문구는 매우 간단히 기록되기도 했다; "나를 붙들어 돌려보내시오 (tene me et revoca me). 돌려보내는 사람에겐 보상을 한다고 삽입되기도 했다. 노예는 오늘날 고급 자가용처럼 고가의 품목이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일반적으로 전쟁포로들이었다. 아니면 빈곤으로 인해 부채를 갚기위해서 스스로 노예로 팔린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에는 노예시장이 두 군데가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포에니 전쟁이나 다른 크고 작은 전쟁들을 거치면서 수 많은 포로들이 노예가 되었다. 이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지역들, 예를들어 브리튼 지역과 다시아 (오늘날 루마니아)를 정복하면서 많은 노예들은 로마의 국경지대의 시장에서 팔렸다.

 
제국의 시대 (기원 27-476)에 수 많은 사람들이 노예를 포함하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동구의 지역과 흑해지역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로 부터 로마제국으로 유입되었다. 심지어 노예들은 로마제국의 지역 안에서도, 예를들어 소아시아와 시리아 등에서도 로마시로 팔려 오기도 했다.
 
1세기 로마시 는 백만명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고 30% 정도가 노예로 추정된다. 도시노예들은 주인의 허락하에 농촌의 노예에 비해 자유민이 되는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황실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관리가 입석한 가운데 소송을 통해 자유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자유민이 되더라도 이전의 주인에 대한 의무는 다 해야했다.
 
초대교회가 있던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소아시의 지역의 노예들은 카파도키아, 피리기아 또는 시리아 출신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에베소에서 쓰고 차별없는 새언약의 복음을 언급할 때 이것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네시모는 갈라디아의 이웃 지역인 피리기아 지역의 고대도시 골로새 출신이며 이 교회에 속해 있었다 (골 4:9). 빌레몬도 골로새에 거주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곳의 출신들이 에베소에 있는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다. 

 
당대 로마제국이 전역에서 노예는 20% 정도로 추산되고 귀족 엘리트나 대토지 소유자들뿐 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가정에서도 노예는 가정의 일과 농업이나 광산에서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가사를 돕는 노예들은 일반적으로 농업이나 광산같은 야외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에 비해 나은 삶의 수준을 가졌다. 그러나 이들은 신체적인 폭력이나 주인의 연회장소에서 시중들면서 성 노리개 감으로 희롱 당했다.
 
세네카는 제국의 시대인 55-56년 경 노예에 대해 인간적인 대우를 권면하고. 이러한 대우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쓰기도했다 (Seneca, Clem. 1. 18.2). 61년 네로시대에 자명한 원로원이 가정의 노예에게 암살당하자 이 가정의 모든 노예들을 처형하는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노예저항의 억제책으로 집단처벌이 강화되었다.
 
이런 역사적 삶의 정황에서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돈을 훔치고 에베소나 (아니면 로마)로 도피하고 그곳에서 감옥에 있던 바울을 만나 회심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의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썼다. 여기서 사랑받는 형제처럼 대하라는 말은 이미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해방하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빌 1: 16). 
 
바울의 메시야 정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용서와 인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을 훔친 도주노예라기보다는 바울을 만나 주인의 노예 면제권(manu- mission)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당시 도주노예들은 일반적으로 도적에게 포섭당하거나 대 도시의 하층문화에 빠져들거나 신전의 노예나 또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지역으로 가는 것이 상례였다.

사실, 오네시모가 바울을 찾아간 것은 의도성이 있었다. 노예신분인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복음안에서 새로운 출생 즉 새로운 포스트콜로이얼 주체성을 경험했고, 그는 주인 빌레몬에게 되돌아가려고 결심했다. 바울은 회복의 정의를 위해 그와 연대하고 빌레몬에게 호소했다.

만일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기위해 여행경비를 부득히 빌레몬의 돈을 훔쳐 사용했거나 아니면 다른  불의를 행했다면 (1:18), 바울이 책임을 진다. 당대 로마의 법은 도주노예를 대접한 자는 매일 손해를 본 근로의 비용을 주인에게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노예사면권은 중재자를 통해 행해진 실천이기도 했다 (Stuhlmacher, Der Brief an Philemon, 25-26). 

 
그러나 이러한 중재역할은 도주노예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의 법을 그리스도의 화해의 빛에서 급진화시키고 용서와 회복하는 정의를 통해 초대 공동체의 이념형으로 부가시켰다. 이것은 그의 아게네스 신학의 진수를 표현한다. 

빌레몬은 그의 아내 압비아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고 부유한 사람들이고 가정교회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빌레몬은 그의 형제 오네시모와 함께 네로의 박해기간 중 골로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자 메시아와 아게네스

바울의 아게네스 신학에서 메시야의 정치는 용서와 회복의 정의를 지향하며, 평화와 생명은 토라의 목적 (telos tou momous, 롬10:4) 이 된다. 토라는 해방의 의미를 가지며 희년의 사상과 오네시모의 노예 면제권에서 그리스도의 화해와 자유의 복음이 자리한다.

메시야는 토라의 종언이 아니라 오히려 토라를 완성한다. 이것은 바울의 인자 메시야에 대한 우주적 차원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 (bar ' enosch, 단 7:14) 굴복 시켰다" (고전 15: 27).

인자 예수는 부활의 그리스도로서 바울에게 성령으로 체험되며, 아게네스 신학에서 발전된다. 평화와 생명의 토라의 하나님이 만유 안에 임하고 세계를 지배한다. 바울적인 의미에서 민중은 하위계층으로서 남은 자들 (아게네스, 고전1:28)이며
부유한 시민 교인들은 여기에 연대했다.

이들은 새언약의 복음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간다. 인자 메시야의 평화와 생명의 정치에 참여한다. 이러한 바울의 메시야 정치와 아게네스 신학은 공공신학에 성서비평적 차원을 제공한다. 


마의 정치제도와 관료제
 
로마제국은 점령 지역인 유럽, 서아시아, 북 아프리카에 총독을 파견하고 관료제로 지배했다. 기원 전 2차 포에니 전쟁(218-202)에서 로마는 한니발 장군을 대패시켰다. 190년에 시리아를 다스리던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출신 후예의 셀루시드 제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168년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보병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스페인으로 뻗어나갔다. 50년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영토를 라인강까지 확장하고 그의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다뉴브 강까지 넓혔다.
 
로마의 공화제에서 원로원의 귀족들이 지배하는 정치제도였고, 해마다 2명의 집정관들이 로마 전체시민으로 구성된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집정관들은 국가 최고의 행정집행 관리였고 법적으로 기원전 366년까지 귀족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평민들이 등장하면서 한 명의 집정관은 평민계급이 차지했다. 172년 경 처음으로 두 명의 집정관직을 평민계급에서 차지했다 (Anderson, Passages from Antiquity to Feudalism, 54).

이러한 귀족과 평민을 포함시키는 공화제 체제에서 고대 아테네 도시 국가처럼 귀족제와 참주와 민주정의 평민들의 갈등으로 인해 전복된 적이 없었다.

빈곤층은 자신들의 권리를 대변해 줄 호민관제도를 쟁취하고, 호민관은 해마다 지역부족의 평등민회에서 선출되었다. 호민관은 집정관의 행정결정이나 원로원의 법령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실세는 집정관과 원로회에 있었고 호민관은 원로원의 유순한 도구로 변질 되었다.

264년 이후부터 이탈리아 외부에 지역들을 감독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역의 감독관들은 세금과 행정 그리고 치안유지를 위해 소규모의 개인 스텝들을 고용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관료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강력한 관료 중심제는 로마제국에서 출현하는데 점령지역들에 중앙집권의 행정으로 통치했다.
이러한 관료제는 35만명의 제국의 군인들의 생계와 봉급 그리고 지위와 승진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징수때문에 생겨났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27BC-14AD)는 공납제가 아니라 인구조사를 통해 모든 제국의 지역들에서 직접적인 세금을 내도록 했다.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세금징수원들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지역행정에 나름의 자율권에 주어지면서 관리들의 부패와 착취를 방지하고 국가수입을 증대시켰다. 안토니우스 황제시대 (86-161)에 중앙 행정부에는 5천명의 관리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제국의 요새지역들은 황제가 직접 지배아래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이 행정과 세금과 예산을 관장했지만, 일반지역들에서는 원로원에서 공화제의 원칙에 따라 추첨으로 관리들이 선정되었다.

지역 총독들은 전문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1년간 임명이 되고, 이들은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법과 규정을 집행했다. 여기에 군 시법관이나 군 지휘관, 그리고 백부장과 비공식적으로 고용된 능력있는 사람들이 스텝으로 일하면서 부속주민들을 다스렸다.
 
로마제국은 지역의 도시국가들의 연맹체로 결합되고 중앙정부는 지역으로 행정 명령과 국가수입을 위한 과세지침를 하달했다. 지역 관리들은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노예들은 행정업무에 비공식적으로 일을 했다. 
 
바울이 활동하던 초기 로마제국의 시대에  중앙정부 관료제와 지역 도시국가들의 네트워크는 연맹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갈라디아나 골로새 또는 에베소와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음식규정과 할례문제는 노예문제와 더불어 제국의 황제 숭배신학과 비판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베버의 카리스마와 관료지배

앞서 시도한 고고학적 해명에서 나는 바울의 화해의 생활세계를  베버의 카리스마 (은혜)의 사회학에 접합시켜, 인정 합리성의 차원을 보충한다. 사실 베버는 비스마르크를 독일 정치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보고 그의 관료주의를 극복 하려고 했다.

Max Weber

베버의 카이사르주의 분석에서 대중 선동주의 정치는 인종/민족의 동질성을 부각 시키고, 인민대중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호출을 하는 파시즘 정치로 나타났다. 집단 이기주의가 시민의 인격성을 삼키고 만다. 

베버에 의하면, 국민전체를 동원하는 정치기구는 지배하는 자가 결국 보통선거를 장악하고 의회 민주주의의 의원들을 콘트롤 한다. 이러한 선거 정치기구의 지도자가 정당 지도자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데, 이런 정치기계를 창출하는 것은 바로 민중 선동 민주주의의 도래를 알린다 ("Politics as a Vocation," From Max Weber, 103).

베버의 관료제 분석에서 법적 지배는 사회계층에서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관료제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참여를 봉쇄한다. 로마제국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지만, 이러한 경제는 황제의 권력과 원로원에 의해 독점이 되고, 중앙의 행정관리와 지역 도시 국가(부역국가)들의 행정에서 감독관이나 총독의 관료제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러한 부역국가의 관료제는 제국의 평화의 시기에  노예들이 유입이 막히면서 로마의 도시경제에 피해를 미쳤다. 관료제를 기초로한 독점자본은 고리대금업의 병폐로 나타났다.

베버와 정치 자본주의

베버는 제국주의와 전리품과 노예에 기초한 정치적 자본주의를 구분한다. 정치적 자본주의나 식민지 전리품 자본주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다.

 
베버는 베를린 대학에서 당대 로마 문명사의 대가였던 테오도르 몸젠의 지도아래 교수자격 취득 논문 <로마의 농촌역사>에서 국가와 사적인 법의 관계를 규명했다 (Roman Agrarain History in its Relation to Roman Public and Civil Law). 

로마의 토지와 법은 고대 공화제에서 농촌 자본주의 형태로 발전하지만, 토지 소유권이 없던 프로렐타리아트는 빈민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무산자들이였고 보병부대의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할 수 없어서,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역할(proles)
을 했다. 로마군대의 팽창으로 인해 프로렐타리아트는 기원전 3세기 말 시민 대다수는 프로렐타리아트였다 (Anderson, ibid., 56).

군사적 지배를 기초로 한 사회조직에 대한 베버의 접근은 부의 집중과 축적을 강조한다. 행
정조직은 분업에 의해 법과 규정이 만들어지고 비인격적인 관계들이 지배하며, 관료제는 기계처럼 작동한다. 행정의 전문화와 분업, 권위의 위계질서 그리고 비인격적인 기구의 작동은 로마의 초기제국에 여전히 나타난다.      
그러나 베버는 로마시대의 농촌사회의 가부장 (paterfamilias) 제도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하지 못했다. 로마시대의 가부장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계경제에 대한 권위를 의미한다. 로마법은 가부장의 권위를 세 가지 분류했다. 그것은 자녀들과 후손에 대한 권위, 노예들과 가족에 대한 권위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위이다 (Finley, The Ancient Economy, 19).
 
인정정치는 생활세계의 파시즘화에 저항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평민투표에 기초된 입법제도(plebiscite)는 로마 공화제에서 로마의 평민들에게 허락된 찬반 투표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평민대표인 호민관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것은 이후 평민의 이름으로 종종 포퓰리즘으로 남용되기도 했다. 

리우스 카이사르는 포퓰리즘 정책과 중앙 관료제를 통해 종신 독재관의 길을 구축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도시국가에서 페리클레시스와는 좀 다르다. 페리클레시스는 민중 민주정의 틀에서 15년간 최고 권력의 자리인 장군으로 선출되면서 포퓰리즘 정치를 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공화제의 귀족종과 민주정의 혼합된 형태에서 종신 독재관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황제와 이후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서 재현된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에게 신적 군주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선동주의는 포퓰리즘 정치에 기초가 되며, 전통적 민주적인 정당성이나 정치대변 제도나 책임성을 제거하고 시민 참여 민주주의 자리를 박탈했다.
 

이것은 이후 로마의 황제의 지배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황제는 우상숭배의 자리를 갖지만,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다. 오히려 원로원과 관료주의가 로마의 사회와 식민지의 모든 영역을 행정 시스템안에 묶고 사법적인 틀에서 지배했다.

이러한 정치 시스템이 바울의 메시야 정치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또한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지배방식은 분봉왕 시스템에 기초한 헤롯의 가문과 빌라도의 통치의 연계에 있었다. 여기에 제사장들의 성전 시스템과 권력구조가 엮어져 있었다. 바울은 선교 여행과 로마의 삶에서 제국의 관료 지배방식을 날카롭고 보고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코셔 (음식)규정과 할례에 저항한 것은 단순히 미츠보에 대한 거절이라기 보다는 메시야 시대에서 더 이상 토라는 멍에가 될 수가 없다는 그의 신학 때문이었다. 이제 지배하는 것은 메시야의 토라이며 이것은 용서와 메타노이아 그리고 기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음으로 인해 바울은 베드로를 갈라디아서에서 호되게 비판했다. 안디옥 사건은 갈라디아의 차별없는 복음에
연관되며 제국의 관료주의와 황제숭배신학을 비판한다. 로마의 코셔규정과 예수 초기 추종자들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인종주의는 메시야의 복음과 화해의 정치를 제국의 신학으로 변질시킨다.


로마의 관료주의 정책이 초대 기독교 메시야 공동체를 유대교의 분파로 취급하고 유대의 전통적인 율법을 추종하라는 명령에 대해 바울은 차별없는 복음과 인정과 자유의 정치 (빌레몬과 오네시모)로 맞섰다.푸코의 평가와는 달리 바울의 동성애 비판은 로마의 성문화의 지배구조인 페드라스트 제도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호모 사케르인 노예는 주인의 성 노리개 감으로 전락한다.

바울의 아게네스 신학은 로마제국에서 호모 사케르를 수용하고 화해와 인정정치로 나간다.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잘났다고하는 것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28) 

바울은 메시아의 부름을 입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아게네스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남은 자로서 예수의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 물살을 거슬로 올라가는 은혜의 혁명이었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공동체는 그리스적인 의미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 (oikos theou)으로 표현된다. 민회를 의미하는 에클리시아가 라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오이코스이다. 바울과 그의 제자들은 이것을 메시야 공동체로 파악하고, 세워 나가려고 했다 (엡 4:16; 롬 14:19; 고전 14:3; 고후 12:19).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여기서부터 일탈되어있다. 아론의 금송아지 앞에 뛰어놀던 자들처럼,
자본의 노예가 되고 권력에 굶주려있다. 메시아 공동체는 남은 자로서 좁은 길로 가야한다. 이것은 바울의 인정정치를 말하는 데, 로마의 제국을 지배하는 관료주의와 위계질서 그리고 섹슈알리티(페드라스티)와 인종차별은 화해와 인정 (진리내용)을 통해 거절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륜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왔고, 이스라엘의 지평은 항상 중심의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의 민중성을 오클로스가 아니라 아게네스의 차원에서 의미론적으로 확대해나갔다. 이미 기원전 2세기 경 그리스에서 오클로스 지배정치(ochlocracy)는 민주정의 변질로 폭도정치로 비난 받았다. 바울은 오틀로스 용어를 신중하게 피해갔다.


유대인 바울

바울은 힐렐과 샤마이학파를 종합한 가말리엘 학파에서 랍비의 학문에서 드러나는 성서주석(미드라쉼)과 내재적 비판의 대가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다윗-메시야 연계를 흔히 오해하듯이 유대인 민족주의나 쇼비니즘을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에스겔 37장 5절의 묵시적인 지평에 서 있다.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겔37:5).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았고 메시야 공동체 안에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죽음과 폭력의 문화에 '아니오' 를 선포하는 그의 복음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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