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과 사실주의적 지평

누가복음은 사실주의적 해석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누가는 예수 전통의 자료 들을 편집하고 자신의 교회의 삶에 관련지을 때 그의 문학적 구조에 역사적 사실과 사회학적 의미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Q자료, 그리고 팔레스티나와는 전혀 다른 로마의 삶의 자리)를 부여한다.
예수전통의 근원을 추적하지만, 마가복음의 “갈릴리”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로마에 이르는 교회 공동체의 선교적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사도행전). 이것은 남은 자들의 메시아 공동체 운동으로 전개되고 갈라디아 교회의 차별없는 복음에서 정점에 달한다.
새언약과 천년왕국
바울은 로마서에서 남은 자의 공동체와 구원의 의미를 메시아의 현재 시간 즉 천년왕국적인 모티브로 해명했다. 이것이 누가-바울의 전통에서 언급되는 새언약의 의미이며 예례미아의 출-바벨론 전통을 동시대화한다. 더 이상 부활의 예수나 민중은 갈릴리에 묶어둘 수 없다! 오순절 성령이 임재했고 베드로의 케리그마를 통해 3천명이 메타노이아를 경험하고 남은 자들로 선택되었다. 이것이 마가와 마태에 대한 누가의 신학적 도전이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함부로 지역적으로 독점하지 못한다.
누가는 부활전승에서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현현한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요한복음 역시 이것을 지지한다. 마태나 마가와는 전혀 달리 누가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한다. 비록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운동의 기원을 부활의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령강림에서 예레미아 새언약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동시대화한다. 예루살렘에 부활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오순절에 임재 하셨고 남은 자들을 선택하고 메타노이아를 통해 그분의 교회를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로마로 향한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향한 길에서 더 이상 부활의 예수는 인간적인 기준이나 갈릴리 문화에 가둘수가 없다. 부활의 예수가 과거의 삶의 자리(갈릴리)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연결하는 중심으로 드러난다.
남은 자들의 공동체
마태복음이 유대인 민중을 위한 복음이라면, 누가의 사회적 배경은 로마제국이며 이방인들의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이다. 누가는 마태복음의 텍스트가 아니라 다른 Q자료를 사용했다. 누가는 로마의 교회 공동체의 이해관계나 현재주의를 통해 예수전통에 대해 투사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또한 예수전통이나 갈릴리 지역주의를 남은 자들의 메시아 공동체에 적용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수 전통의 삶의 자리가 존중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누가의 시대적 배경에 다름과 중요성을 드러낸다. 누가에게서 오클로스가 아니라 남은 자들의 공동체가 새언약의 복음의 주체로 드러나고 메시아의 구원과 제자직으로 불려진다. 누가의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이미 왔다. 마가복음(1: 14-5)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은 종말론적인 현재화가되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구원사가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파루시아의 지연은 시간의 중심인 그리스도 안에 통섭되고, 신학의 중심 축은 하나님의 영원성이 현재화되는 곳, 즉 메타노이아와 하나님의 자비에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 즉 시스템적인 순한 구조에서 누가는 구원사를 두껍게 기술하며, 예수는 역사와 시간의 중심으로 부각되며, 하나님의 영원성이 현재로 들어온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이며 세계의 주님이다 (Conzelmann, The Theology of St Luke, 16, 37).
누가와 천년왕국
마가가 메시아 비밀을 신학화한다면, 누가는 천년왕국을 예수의 삶에서 개념화한다. 누가의 통찰은 그의 광야의 유혹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사탄은 모든 시험을 마치고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를 떠났다. 그러나 수난기사에서 사탄은 다시 나타나고 가롯 유다는 여기에 굴복한다 (22:3).
한편에서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의 시간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현재의 교회가 처한 사탄의 유혹이 있다. 천년왕국의 모티브가 여기서 반영 된다. 천년왕국은 부활의 메시아와 성령임재를 통해 남은 자의 공동체로 이어진다.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살아가지만, 여전히 사탄의 유혹과 주인없는 세력들과의 투쟁으로 불려진다. 누가는 예수의 삶에서 천년왕국적인 삶이 실현된 것으로 본다. 사도행전에서 부활의 그리스도가 승천을 하기 전 제자들이 나라를 회복할 때가 지금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거절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천년왕국을 세울 것을 기대 했지만 예수의 거절은 에스겔과 스가랴의 묵시적 지평에 서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메시아 비밀에 대한 누가의 답변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천년왕국 즉 메시아 시대를 열기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물론 마가도 여기에 상응한다. 메시아의 비밀을 안 사람은 십자가 예수 앞에서 고백한 로마의 백부장이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15:39). 마가에게 갈릴리 민중이 예수의 메시아 미밀을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오클로스는 선동에 의해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라고 한 자들로 말한다 (15:11).
누가의 오클로스 ㅡ호모 페르디티오니스
누가는 마가와는 달리 오클로스를 신중하게 사용한다. 이들은 게르의 계층에 속하며 예수를 따라다녔고,
예수는 이들에게 종말론적인 메시야 복음을 가르치고 잃어버린 양들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를 처형하라고 한 자들을 오클로스로 말하지 않고 선동된 '라오스'의 소리로 말한다. 심지어 누가의 특수자료에서 바리새파들이 찾아와서 예수에게 헤롯왕이 죽이려고 한다고 일러준다. 그리고 예수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외에 다른 곳에서 죽을 수가 없다(13 : 31-33).
이러한 누가의 특수자료는 가장 초기전승에 속하며 50년도 기록된 <베드로 복음>에 가깝다 (2:1). 예수에 우호적인 바리새파들이 있었고 헤롯은 오클로스가 아니라 라오스를 선동하고, 이들이 예수를 처형한 주범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항변과 회심(23:41)은 <베드로 복음>(4)에 일치한다.
이 지점에서 누가는 마가의 <베드로 복음> 해석보다 더 초기 전승에 충실하다. 누가는 수난전승에서 마가가 아니라 <베드로 복음>을 알고 있었고 사실주의적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오클로스는 예수의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했고 모두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 (23:48). <베드로의 복음>(8장)에서 모든 백성들은 예수의 처형에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큰 돌로 봉인했을 때 예루살렘과 주변의 오클로스들은 소식을 듣고 바로 예수를 추념하고 봉인된 무덤을 보려고 몰려들었다(9장)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오클로스를 멸망할 무리들 (massa perditionis)로 파악하고 예수를 암 하 아레츠ㅡ프토코스의 편을 당파적으로 드는 분으로 말한다. 인자 메시아는 저신의 백성과 함께 걔신 분이다.
그리고 누가의 보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 (23 :46)는 예언자의 최후에 상응하며, 마가보다 더 이른 본래적 사실에 속한다. 누가의 십자가 신학은 인자 메시야의 우주적 지배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22: 69-70). 이러한 측면에서 누가는 <베드로의 복음 11장>의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의 고백에 긍정한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23: 47).
갈릴리 또는 예루살렘 현현?
이러한 역사사회적 문헌비평에서 나는 두터운 기술을 사도한다. 누가에게 마가와 같은 메시아 비밀은 없다. 왜냐햐면 마가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오클로스의 진정한 의미와 묵시적인 재림의 의미를 충분히 해명 하지 못했다.
마가는 <베드로 복음>의 13장의 종결을 그대로 쫒아간다 (막 16: 1-8). 그러나 <베드로 복음>은 구체적으로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갔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부활의 예수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장소로 되돌아갔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부활 예수의 현현이 갈릴리 중심인가 아니면 예루살렘인가하는 논쟁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 마가는 부활을 재림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갈릴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현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 될수도 있다. 1차적 재림의 형식으로 부활은 어느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직 누가만이 부활 후 예수의 40일 사역을 언급한다. 예수는 부활했고 지상에 다시왔고 40일 사역을 마치고 승천을 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메시아 공동체의 시작을 알린다. 이것은 누가에게 2차적 재림의 형식이며 부활의 메시야는 이분의 남겨진 백성 즉 공동체와 함께있다. 메시아 시간은 바울적인 의미에서 남겨진 시간이며, 교회는 중간시기에 거한다. 메시아 예수가 시간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재림의 지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남은 자들을 채워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예언자적 사역을 남은 자들과 함께 이어가신다. 이것은 공동체의 소명이며 남은 자들의 제자직에 속한다. 이것은 누가의 현재화된 아포칼립시스이며, 재림의 지연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재림은 지연될 이유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은혜에 의해 새 하늘과 새땅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미 부활의 생명이 공동체에서 시작이 되고 하나님은 그분의 화해의 사역을 이어가신다. 마지막 묵시적인 대재난을 통해 부활의 그리스도는 세계의 혁명으로 오신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적 대재난에서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한다. 이들은 요한 계시록적인 의미에서 십사만 사천일 수가 있다. 이들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스데반이 설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광야의 교회의 삶을 살아간다.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시간
누가에게서 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에서 역사 안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전 15장의 종말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최종의 안식으로 표현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곳에서 수립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며 만유의 주님으로서 만유 안에 하나님은 거하신다.
하나님이 만유안에 거하실 때 어떤 유토피아가 나타나는가? 이러한 종말론의 비전을 요한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도성으로 이어간다. 여기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다 (계 21: 22).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과 그 도성이 성전이다 (21: 22).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선택된 남은 자들이 구원의 지복을 누린다. 여기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내쫒고 기적을 행한 자들은 없다(7: 21ㅡ23).
그리스도의 우주적 재림에서 남은 자들이 부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할 수도 없으며 이것을 말하는 자는 스가라 13장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말한다 (슥13:3).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영적각성과 메타노이아의 시간이 될 것이다 (12:10). 누가복음에서 부활의 그리스도에게 소망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즉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거절된다.
그러나 유대적인 천년왕국의 모티브는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의 삶 안에서 표현되며, 동시대의 교회는 사탄의 풀려남을 통해 여전히 죄와 유혹의 시간에 노출된다. 이러한 교회의 메시아 정치는 예루살렘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천년왕국 (메시아의 시대)의 정의와 평화 그리고 나라의 회복을 빼앗지 않는다 (사 2:4). 누가에게 예수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누가 2: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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