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공신학에 심원 안병무는 살아 있는가?
필자는 조직신학과 역사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특히 칼 바르트의 교의학을 사회학과 성서주석을 통해 공부한 사람이어서 불트만의 전통에 서 있는 심원과는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먼 거리는 존경의 표시일 수가 있다. 필자가 서구의 학계를 전전하면서 만난 대가들은 한결같이 학문과 진리에 겸손했고 진리와 자유 그리고 해방에 관한 한 파레시아를 하는 분들로 기억한다.
수유리 대학원 시절 심원 선생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분의 탁월한 비평학과 성서해석을 이해하기에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심원의 비평학을 이해하기위해 바르트의 성서해석과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에는 나의 손 때가 묻어있다. 이 두 학자를 돌아서 나는 심원에게 비판적 배움을 얻길 원했다. 나는 민중 신학자가 아니라 헬무트 골비처의 공공신학을 북미에서 새롭게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와트버그 신학대학원 교수 시절 숨밭 김경재 선생을 통해 민중신학의 모델을 세계종교와의 대화와 실천으로 새롭게 전개하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때 나는 다시 장공과 심원을 마주했고 공공신학으로 턴 하기 시작했다(Chung, Asian Contextual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ium: Theology of Minjun in Fourth-Eye Formation).
나는 마가복음과 심원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 해석을 역사 사회학적인 틀과 문헌 비평을 통해 공공신학을 위해 새롭게 해석한다. 이러한 접근은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예수연구에 심원의 민중신학을 자리매김하고 그로부터 오는 비판적 통찰을 배운다. 이러한 논의에는 심원에 대한 필자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과 감사를 동시에 담고 있다.
새로운 역사적 예수연구
도미니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에서 예수를 지중해의 유대인 농부로 기술한다. 그는 갈릴리의 헬라화된 문화에 주목하고 역사적 예수를 갈릴리 농부출신이며 견유학파에 속하는 지혜의 인물로 그린다. 크로산은 경제 사회학자 페르니낭 브로델의 지중해 세계의 연구를 수용하고, 다양한 문화들의 병립과 대립에 주목한다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5-6).
지중해의 복합적인 문명을 갈릴리에 연결하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자료층의 분석을 통해 개별 복음서의 독립성을 확인한다. 그의 방법론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눈여겨 볼 대목은 갈릴리가 예수 당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촌 구석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크로산은 갈릴리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관심하지만 역사적인 접근을 별로 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하스모니안 왕가시절 부터 헬라와 이후 로마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주전 360년 경 유대지역을 점령했고, 이후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한 성전훼손 사건이나 야손 대제사장에 의해 시행된 헬라주의화는 이미 마카베오 1. 2서에 잘 나타난다. 마카베오 반란을 통해 성전을 164년에 회복하고 하누카 (성전 재봉헌) 축제가 있었지만, 이후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책은 친 헬라주의화로 선회했고 여기에 가장 강력한 저항을 한 그룹이 하시딤/바리새파였다 (Hengel, Judentum und Hellenismus, ll. 319, 324).
주전 63년 로마가 점령하고 헤롯 대왕이 25년 동안 통치를 하면서 팔레스티나는 그레코-로마의 문화와 도시 건축, 언어 그리고 종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특히 친 헬라주의자 사두개파 (이들은 상인출신의 부르주와 계급이었고, 하스모니안 왕가에서 구체제의 귀족제를 타파하고 부상한 금융귀족들이었다)들이 성전제사와 경제를 장악했다.
헬라문화가 지배한 갈릴리에는150-200백만명의 유대 인구가 밀접해 있었고, 이방인들과 섞여있는 도시였다. 가버나움과 데가폴리스는 헬라의 건축과 시설들로 즐비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회당에 참가했고 가르쳤다 (누가 4:31-32). 나사렛 예수는 "랍비"로서 문화교류가 활발하고 국제적 성격이 갖는 갈릴리에서 예수운동을 시작했다. 예수 당시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가 통치했고, 안티파스는 가버나움에서 멀지않은 곳에 로마 황제 디베리야스를 기리기 위해 디베리야스 도시를 갈릴리의 수도로 건립했다. 이 수도에 안티파스는 행정권력을 설치하고, 40만명의 인구가 거주한 경제적으로 번창한 도시였다. 그러나 빈곤의 격차가 심했다.
이러한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나는 크로산이 간과한 예수의 삶의 자리를 팔레스티나 유대교와의 연관성을 통해 보충 해명한다. 크로산의 지중해 문명의 세계와 갈릴리의 비교문화 연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편집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마가복음의 문화적 특징
편집사 연구에서 마가는 예수 부활의 목격자가 아니다. 마가복음은 시기적으로 다른 복음서에 비해 가장 먼저 씌여졌고, 그의 관심은 수난전승에 있다. 50년대 기록된 <베드로 복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되기 보다는 70년대 팔레스티나나 시리아 공동체에서 그 기원을 보기도 한다(Waetjen, A Reordering of Power, 1-26).
2차 예루살렘 몰락 이전에 마가복음이 씌여졌다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후가 된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직후 마가가 이방인 선교를 의도하고 그의 소묵시록(13장)을 기록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마가가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에 속했음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마가 복음이 초기 수난전승을 기초로 십자가 신학과 제자직을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가에게 이방인에 대한 관심은 마태와는 달리 주요 관심이다 (7:24 -31; 13 :10).
마가가 십자가의 신학을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의 약속을 천사가 언급 한다면 (16: 7), 그것은 묵시적 재림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3). 부활의 예수는 갈릴리로 재림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예수가 현현하고 베드로를 먼저 만났다고 보도한다.
여기서 해석의 갈등이 존재한다. 빌리 막센은 마가복음에 대한 기념비적인 편집사 연구에서 마가의 신학을 역사적 예수의 케리그마의 관점에서 부활을 보았고, 갈리리에서의 파루시아의 약속에서 누가와는 다른 "밑으로부터"의 신학을 부각 시켰다,
나는 빌리 막센의 주장을 수용 하지만, 예수 파루시아를 <시간의 중심>으로 보고 부활 후 40일 사역으로 전개한 누가의 역사적 관심을 빌리 막센처럼 간과할 이유는 없다. 이런 차이와 다른 문학적 구성은 고고학적 해명을 요구한다. 마가와 누가가 서로 다른 초기부활 전승을 사용하지만, 나는 이러한 전승의 다름을 매개하는 제 3의 공유점 (teritum comparationis)을 부활에 대한 묵시적 지평에서 찿는다. 이것을 통해 마가와 누가의 다른 삶의 자리와 신학적 해석이 두텁게 기술될 수 있다.
초대교회: 십자가와 부활전승
49/ 50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다 (행전 17: 1-15).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바울은 예수의 파루시아 이전에 죽은 자들에 대해 처음으로 부활을 파루시아의 차원에서 썼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다 (4:14). 바울에게서 개인의 종말과 부활 그리고 파루시아는 융합되어있고 안디옥 교회의 부활과 파루시아 전승을 목회적 차원에서 신학화한다. 바울은 53/4년 겨울에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공개적인 현현을 구약성경의 원리에 따라 증언했다.
빌립보 찬가(2:6-11)나 부활신조(고전 15:3-5)는 북부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아람어의 증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가장 초기에 속하는 전승에 속한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12제자들 그리고 500명 이상의 형제들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야고보와 바울에게도 나타났다 (고전 15: 5-8).
마태와 마가와는 다르게 이러한 부활전승에는 갈릴리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바울은 마가와는 다르다. 크로산에 의하면, 마가에게서 십자가 복음은 수난과 파루시아 사이에 설정되며, 부활은 이러한 시간 안에 떠나 있는 상태로 표현된다.
마가에게서 중요한 것은 파루시아의 미리 맛봄으로서 변화산 사건이지, 부활현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가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 것도 아니다 (막 9:2-13). 오히려 마가는 그의 묵시록에서 부활현현이 거짓 예언자들과 그리스도들에 의해 오용될 수 있는 것을 염려했다 (13: 21- 23). 더우기 마가복음 16장에서 빈 무덤의 보도는 생략되지 않는다.
편집사 연구의 문제
케제만에 의하면 유대 묵시적 종말론과 십자가 신학에서 볼 때 마가와 바울은 서로 갈라지지 않는다. 십자가 신학은 로마서 5장 1-11절에서 바울이 이해한 하나님, 구원, 인간론 그리고 종말론에 열쇠개념이 된다 (Käsemann, Commentary on Romans, 138).
바울은 비록 인자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시용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전통에서 파악하지만, 이것은 이미 다니엘의 인자를 이런 관점에서 파악한 에녹서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과 마가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마가가 증언자들과 목격자들의 어떤 초기 전승들을 신학화 했는가를 고고학적으로 검토하고 해명하는 데 있다.
이것은 빌리 막센의 마가복음 편집사 연구의 한계를 넘어선다. 양식사나 편집사 비평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전승자료들이 기원적으로 익명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초기 예수전통은 구전이나 파피루스를 통해 많은 목격자들과 증언자들에 의해 공동으로 전해진 것이다.
안디옥 공동체에서 아람어로 된 전승자료들은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쳤다. 누가 복음의 서설에서 목격자들과 말씀의 사역자들의 다원적 활동이 언급되며 이들 사이에 세대차이가 언급된다. 누가나 마가에게서 신학적인 차이가 나타나고 자료수집의 배열이 다르다.
마틴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마가복음 10장 38-39절은 마태복음(20: 22-23)과 비교할 때, 마가는 역사적으로 야고보와 요한의 순교를 알고 있었고(vaticinium ex eventu), 마태의 간결한 파라다임보다는 마가에게서 사회학적 측면에서 해석의 지평이 확대된다 (Dibel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61).
나사렛 예수와 역사의 실천 현장은 사실주의적 성격을 가지며, 편집사 비평에서 마가에 의해 의미지평이 확대된다. 편집사 연구는 전승자료의 배열과 해석과 더불어 공동체의 상황을 고려하고, 더 나아가 담론의 사회적 연관성과 권력관계를 문화 사회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사렛 예수와 코스모폴리탄 문화
크로산이 초대교회의 외경들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갈릴리 농부이자 견유학파에 속하는 선생으로 본다면, 누가복음에서 증거되는 예수는 헬라적이라기 보다는 랍비 유대교에 가깝다. 나사렛은 대단히 유대적인 문화가 강했고 로마에 농작물을 세금제도로 바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갈릴리 북부와 남부 지역은 차이가 있었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남부에 속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미친 헬레니즘화를 무시할 수 없다. 북부 갈릴리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유대교가 강했다.
세포리스는 갈릴리 지역의 수도였다. 지중해 연안도시인 프톨레마이스를 통해 세포리스는 코스모폴리탄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법원과 로마군의 요새, 3- 4000명의 좌석을 갖춘 무대, 아크로폴리스 위에 헬라적 스타일의 도시와 궁전, 두 개의 시장, 은행 등이 있었고, 3만여명의 인구가 살았다 (Crossan, ibid., 18-19).
나사렛 예수는 헬라화된 문화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고대 팔레스티나의 번잡한 무역과 로마 지방정부의 행정 중심지에서 자랐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애굽의 알렉산드라의 동화가 팔레스티나로 유입된 것이다. 예수는 아람어 성서번역(타쿰)에 익숙했고 다니엘의 인자 메시야 전통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켰다. 공관복음에서 묵시록이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마케베오 저항운동에 관련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수난전승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베드로에 대해 사탄이라는 거침없이 적대 감정을 표현한다. 이는 마가를 전통적으로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든다. 마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당대 예수에 대한 영지주의 입장을 반박한 데 있다. 마가의 오클로스가 마태에게서 구전토라의 가르침으로 변형된다면 (마태 23:1), 누가는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와 희망으로 구체화된다.
그런가하면 마가는 묵시적으로 예수를 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메시아 비밀(브레데)을 신학화한다. 그러나 마가복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Q자료에서 예수는 묵시적 배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재림을 말한 메시아로 언급된다.
빌리 막센과 안병무의 갈릴리 예수
마가복음에 대한 막센의 편집사 연구는 기념비적이다. 빌리 막센은 부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예수 케리그마)의 연속성을 보았다. 불트만과는 달리 막센은 부활이 공동체의 믿음을 각성 시켰다고 강조한다.
심원 안병무선생은 불트만의 양식비평과 빌리 막센의 편집사 연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갇혀진 갈릴리 예수의 생생한 현재를 향해 치고 들어간다. 그런가하면 막센의 마가복음 연구에서 갈리리 지역의 중요성과 예수와 오클로스를 수용하지만, 심원은 역사적 예수가 서 있던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투쟁에 주목한다. 심원은 마가에게서 갈릴리 예수를 살려내는 민중/오클로스 신학을 간파했고, 자신의 역사와 시대적 문제에서 동시대화 하려고 했다.
심원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마가는 70인역(LXX)에서 무려 2000번 정도 사용된 라오스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중심적인 것을 알고 피해갔다. 심원은 마가가 70년 로마전쟁 직후 복음서를 기록한 것으로 전제하고, 참혹한 사회적 상황에서 갈릴리 예수와 오클로스를 통해 새로운 복음의 전망을 부여 했다고 본다. 예수는 이들이 마치 목자가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 (6:34).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요 형제자매들 이라고 선언했다 (3:34).
예수가 떠돌이 설교자라면 저들은 떠돌이 무리들이었다. 타이센이 예수운동을 초대 공동체의 카리스마적 순회 설교자에서 보았다면, 심원은 갈릴리 예수 자신에게서 운동의 출발과 카리스마를 보았다.
여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타이센은 불트만에게 충실하며 역사적 예수보다 이후 공동체의 관점에서 예수운동을 기술했다. 그러나 심원에게서 이미 역사적 예수는 운동에서 갈릴리에서 오클로스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진리내용으로 부터 비판 (Sachekritik)이라는 계보학적 해석학을 담고있다. 갈릴리 예수와 그의 복음의 담론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서 밀려나간 주변부들에서 친화력을 갖는다.
심원은 비유연구로 저명한 독일 성서학자 요하킴 예레미아스가 세리와 죄인을 구분한 것을 수용하고, 죄인은 불명예스런 직업으로 인해 간주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예례미아스가 간과한 것은 당대 유대사회에서 병들었거나 가난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이 모두 죄인으로 규정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안병무, "예수와 민중").
심원은 세리의 민중차원을 부각시키는 마가의 입장을 사회경제적으로 설명한다. 요셉푸스는 갈릴리에서 로마 저항군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심원은 로마를 위한 세금징수원이 갈릴리 지역에서 증오의 대상이란 것을 잘 알고있다. 왜 이런 그룹이 예수운동으로 들어온 걸까? 그것은 예수전승이기 때문이다 (안병무 ibid., 10).
나는 이 부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본다. 앞서 디벨리우스가 언급했듯이 안디옥 교회에 갈릴리 예수에 대한 전승을 구전이나 파피루스 형태로 전해준 배우지 못한 가난한 증언자들이 있었다. 마가는 이것을 존중했다. 마가는 단순히 초대 교회의 엘리트가 아니라 전승안에 담겨져있는 놀라운 내용들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편집을 했다. Q 자료에서 갈릴리 예수는 죄인으로 칭해지는 세리와 창기를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차지 하는 자로 부각한다 (마 11:19, 21: 31).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막2:17).
정결법에 대한 예수의 말씀 (7:15)에서 심원은 아포테그마타로 파악하고 이것을 상황언어 즉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상황의 프레임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7: 1-5-14b-15).
이런 편집비평을 통해 심원은 예레미아스를 근거로 유대사회에서 불결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규정을 어기는 것은 암 하 아레츠로 간주 되었다고 말한다.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를 접합시키면서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으로 선언했다 (2:27). 이러한 해방선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마태 11:28)을 위한 것이다 (안병무 ibid., 14).
빌리 막센이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지역구도를 틀로 놓고 마가복음을 갈릴리에 재림할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면, 심원은 오히려 마가복음에 대한 전승사와 편집비평을 통해 담론의 사회비판적 차원과 암 하 아레츠에 주목한다.
심원은 마가복음(9:37)에서 지극히 작은 자(어린이)를 마태 25: 40절이 아니라 누가 (9:48)와 관련하여 해석을 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다음처럼 의미를 확대한다 "너의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누가 17:1-2절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이 마가의 전승자료의 원형이며, 누가의 Q 자료로 소급되고, 오클로스의 차원은 이제 가난한 자, 우는 자, 배고픈 자와 결부된다 (누 6:20-22)
여기서 심원은 마가와 누가의 Q자료를 융합 시키면서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을 독특한 계보학적 방식을 통해 재구성한다. 물론 심원은 계보학적인 접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안병무 ibid., 14). 특별히 심원은 언어비평을 통해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를 연결한다. 암 하 아레츠는 바벨론 포로이전 유대민족의 상류층을 지적했지만 그러나 포로시대와 더불어 의미가 변형되었다. 바벨론의 포로들은 토지 소유자들이었지만, 이들의 땅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과 사마리안인들에게 땅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들이 암 하 아레츠로 불렸다.
그리고 에스라 시대에서 부터 예수 당시까지 암 하 아레츠는 종교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뒤바뀌고, 배우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한 반율법적인 계층을 지적했다. 랍비 유대교에서 암 하 아레츠는 결혼이 금지되며 음식을 나눌 수 가 없으며 몇 가지 부정적인 제한이 가해졌다.
이것은 마가시대에도 여전했다. 갈릴리는 이러한 암 하 아레츠와 오클로스를 지리적으로 상징하며, 예수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렸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메시아였다. 그러나 질문이 존재한다. 과연 갈릴리가 암 하 레츠의 지역이었나? 아니면 사마리아가 암 하 레츠 지역이 었나? 이렇게 보면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강도 만난 자가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천대받던 사마리아 출신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나타난다.
"너의 질문이 대답을 결정해"
심원은 하이데거-불트만의 해석학을 넘어간다. 한편에 성서 텍스트가 있지만, 다른 한편 대한민국의 역사적 민중전통과 인권운동 그리고 가열찬 노동 운동이 있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심원에게, 칼 바르트에게 1차세계대전이 로마서의 배경이되듯이, 그리고 홀로코스트가 포스트 쇼아 신학의 배경되는 것처럼 작용한다.
적어도 심원에게서 콘텍스트는 단순한 사회적 배경이나 환경이 아니라 더불어 있는 또 다른 동시대적인 텍스트 (con-text)를 의미한다. 심원은 수업시간에 즐겨 이런 말을 하셨다ㅡ"너의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 불트만처럼 질문하는 자의 전이해를 말하지만 그러나 심원의 전이해는 역사적으로 민중과 더불어 있던 갈릴리 예수를 지적한다. 이것은 심원이 추구한 민중신학의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남는다. 그가 그토록 예수를 개인으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집요함 역시 서구 인식론의 주객도식을 사건의 차원에서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데카르트나 칸트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과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스피노자를 피해갔다. 그러나 심원은 사르트르를 알고 있었지만 사르트트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과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이론에 냉담했다. 이것이 나에겐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건 주체론'은 사회구성이나 문화 계층론에 대한 두터운 기술이 없이는 사회 분석을 생략한 채 예수/민중 존재론적 동일화로 가게된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은 개기일식 처럼 되고 만다.
심원으로 부터 비판적으로 배우기
심원의 민중신학은 흔히 서구학자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군사독재시절에 국한되는 상황신학이 아니다. 오늘날 새로운 역사적 예수연구 (크로산, 존 마이어, 헤르만 웨이첸, 데이비드 플루서)를 선취한다. 마가복음에 대한 사회학적 성서해석을 통해 교리주의화되고 박제된 그리스도론을 해체하고, 시민사회와 공론장에서 예수와 민중의 하나됨을 열어 놓는다.
심원은 다니엘의 인자 메시아와 마가의 갈릴리 예수를 문제틀하고 진정한 기독론을 "인자와 그의 백성" 에서 모색했다. 그래서 그는 민중을 인민대중이나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민중개념은 이미 죽은 것이다. 사자란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살아있는 사자처럼 포효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수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사건으로 나타난다. 예수사건은 역사와 사회에서 민중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민중은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사건의 빛에서 정의 될 필요가 있다. 그렇치않으면 민중사건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사회나 정치운동의 영역에서 모두 가 다 민중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나 파시스트도 마찬가지다.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호출의 먹이감으로 전락했다. 존재의 알레테이아는 큰 존재의 집단 사건으로 드러난다. 드러나는 알레테이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하이데거에게 없다.
민중이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성서주석적으로 개념적 명료함을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 호출에 먹이감이 될 수 있다. 더우기 마가는 메타노이아를 인격의 차원에서 간과하지 않는다. 치유사건은 구체적인 인격과 믿음에서 일어난다. 세관원 레위를 향한 부르심도 개인적 차원에서 나타난다 ( 2:14). 이것은 메타노이아를 말하면 존재의 혁명이며 자기초월의 차원을 담는다.
심원은 인격개념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었나? 그런 거 같지는 않다. 그는 자기초월의 개념을 민중 인격에 부여한다. 그러나 자기초월로 만은 메타노이아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44-45). 집단주의는 섬기기보다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공공신학은 관계의 총체안에 있는 인격을 거절하지 않는다. 정치주체로서 시민과 하위계층의 연대를 시민사회와 다차적 공론장에서 구체화한다. 사회 안에서 부와 권력, 교육과 취업 등에 접근 할 때 공론장은 위계질서로 계층화되며 관료주의는 지배와 특권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강화한다.
결국 포효하는 사자를 변증법적인 문제틀로 개념화하지 못하면 사자와 늑대 또는 여우의 다름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민중신학과 다른 공공신학의 차원을 말한다.
예수사건=민중사건?
나는 예수사건=전태일 사건을 '심원'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해명한다. 하나님은 두개의 텍스트(성사와 역사적 사회)를 가지고 있다. 메시아 예수는 분신사건에 같이있다. 이것은 인자 메시아의 집단적 담론을 말한다. 경제개발과 진보의 뒤안 길에서 사라져 간 노동자나 순전한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는 인자 메시아의 생활세계에 속한다. 하나님은 역사와 사회에서 암 하 아레츠와 게르 그리고 오클로스의 삶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심원의 서구 주객도식의 극복을 나는 사실주의적으로 그러나 예수의 '비유의 차원' 에서 이해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마가의 오클로스 개념보다는 프토코스(막 10:21)를 누가의 특수자료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와 관련지어 주석적으로 접합시킨다.
이 두 개념의 의미지평은 암 하 아레츠/ 사마리아/ 하위계층의 차원에서 확대된다. 46/48년에 예루살렘의 빈곤과 기아 상황은 요세푸스가 보도한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지중해 문명체제에서 구조화된 폭력과 식민지역의 관료지배와 경제착취에서 기인한다. 나사로에게 "하나님은 도우신다" (Gollwitzer, Gottes Freude, 201).
필자가 서 있는 북미의 공공신학에 서 빈곤과 인종차별 (게르/사마리아)은 사회에서 멸망해야 할 존재(homo perditionis)의 신체정치학과 더불어 결정적이다. 낯설은 신체들은 사회문화 계층에서 권력, 신분특권, 교육 등에서 정치화가된다. "너의 질문이 대답을 결정해"ㅡ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시야 예수사건은 민중사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임재하지만 나사로 사건이 예수사건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몇 가지 고고학적 해명
인도의 성서학자 수기타라자가 비판하는 것 처럼, 오늘날 성서학계는 갈릴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있다. 심원의 갈릴리 중심주의 예수를 비판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유치하다 (Introduction by R. S.Sugirtharajah, Stories of Minjung Theology, xiv)
심원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는 탁월한 통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의 진지함에 있다. 심원은 당대 독일 학계에서도 가장 난해한 역사적 예수연구와 당대 최고 비평학을 섭렵하고, 유럽의 선생과 동료들을 넘어서려고 했다. 갈릴리 지역이 코스모폴리탄 지역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사회문화 계층의 분화와 위계질서에서 권력, 특권, 종교 이데올로기에서 밀려나간 희생자들과 주변부들의 삶은 조직적으로 착취되고 더욱 더 열악 해질 수 밖에 없다 (게하르트 렌스키).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안병무 선생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고난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서가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저서가 있었다. 사르트르는 거의 다 읽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심원은 성서학자였고, 말씀은 예수 사건으로 올 수 밖에 없다는 심정과 해방의 신학자였다.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예수 해방의 사건을 방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심원은 영지주의나 플라톤주의에 저항한 마가의 십자가 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
볼프강 크뢰거는 파송 선교사로 기장교회를 위해 헌신한 분이다. 그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반유대주의를 비판한다 (Kroeger, Befreiung des Minjungs). 심원의 민중신학이 반유대주의로 비판당한 것은 참 유감스럽다. 하이데거 -불트만의 존재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의 실존론적-사회학적 주석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심원에게는 오클로스를 구약의 암 하 아레츠와 사회학적으로 접합시켜 구약의 에렙 라브 (erev rav: 인종적으로 혼합된 무리), 하피루, 게르, 선한 사마리안에 대한 파격적인 성서해석의 통찰을 열어주는 차원도 같이 있다 (Ahn, "Jesus and Ochlos in the Context of His Galilean Ministry," Chung. ibid., 49). 그러나 거기까지 심원은 못간다.
심원이 주장하는 인자 메시아와 "가장 거룩하신 분의 거룩한 백성" (7: 27)의 편집사적 해석은 반유대주의를 넘어서 에른스트 케제만처럼 묵시문학적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
심원에 앞서 칼 바르트는 예수를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와 더불어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무리들 (massa perditionis)과 식탁 공동체를 나누고, 가난한 자들을 무조건 편든 하나님의 혁명의 전위였다는 주장을 했다. 심원은 바르트를 몹시 못 마땅했다. 그러나 인정하든 안하든 바르트는 성서주석에서 네러티브와 사적 유물론적 사유를 접합시키고 가장 강력하게 관료제를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불트만이나 심원에 앞서 있다.
나는 성서해석을 위해 심원으로부터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의 사회학적 접합을 칼 바르트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 더 나아가 구약의 하피루 전통과 게르 그리고 암 하 아레츠가 느혜미야 -에스라 개혁에서 실패로 끝난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인자와 그의 백성의 관계는 마가의 소묵시록에서 이어지고 공관복음에 기독론적인 젖줄을 대준다.
무엇보다 더 마가와 누가를 사회학적으로 접합시키는 것은 필자에게 누가복음의 특수자료에서 드러나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심원은 여기서 멈춘다. 이후는 공공신학의 과제에 속한다. 예수의 세속의 비유와 언어대해 심원은 예레미아스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사회사적으로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역사적 예수를 파악하려면 이미 비유를 아람어로 재번역하는데서 드러난다.
불트만이 복음서를 초대공동체의 산물로 과도주장하고 역사적 예수를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은 허구로 끝난다.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와 심지어 바울 서신안에서 초대 전승자료 (네러티브 파라다임: 마틴 디벨리우스)를 역사적 역사적 예수 케리그마를 복원함으로써 재구성할 수 있다. 심원이 바울을 역사적 예수의 의미를 하락 시켰다는 주장은 지지받기 어렵다. 양식사 비평과 사회적인 삶의 자리에서 볼 때, 증언자들과 목격자들의 내러티브가 이미 바울이 속한 안디옥과 다메섹 공동체에서 번역되어 있었고 바울에게 전승되어 있었다.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몰랐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으로 역사적 에수를 단절시켰는가?
그렇다면 마가가 역사적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면, 그의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의 보고로 파악하는 시도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마가는 사실 갈릴리 지명조차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해명은 빌리 막센과 심원이 주장하는 갈릴리 중심주의 허구를 드러낸다. 예를들어 마가가 말하는 팔레스티나 지명은 정확하지 않다 (5:1; 6:45, 53;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한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마가 7:31) 갈릴리 지명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두로에서 위 지역인 시돈을 거쳐 바로 갈릴리로 오면 될 것을 지역적으로 상관도 없는 데가볼리로 올 이유가 없다. 마가는 갈릴리 지명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막센의 기본 테제-"부활의 메시아는 갈릴리로 갔다"-는 모든 교회가 갈릴리로 모이라는 선포로 파악하지만, 갈릴리에서 무엇을 했는 지는 마태복음에서 주어진다. 막센과 심원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 사회학적 자리를 전혀 검토하지 못했고, 갈릴리-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인 이항의 대립에 과몰입을 했다.
다르게 이해하기: 민중은 역사의 주체?
"민중은 역사의 주체다"--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민중은 언제 역사의 주체가 되었는가?. "지금까지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ㅡ그런가? 계급투쟁에서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는 위로부터 계급투쟁이었다."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과 만나는 역사적 사례는 고대 아테네 도시국가의 오클로스 지배체제로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심원의 민중은 역사의 주체란 말을 역사 사회학적으로 문제틀한다. 메시아 예수가 민중을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먼저 초대했다. 이것은 당대 폭탄선언이고 정의될 수 없는 담론사건이었다. 그래서 민중은 ㅡ정의 되지 않은 채ㅡ역사의 주체로 남는다. 일체의 담론의 합리화나 정당성을 거절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지배자들의 계급투쟁이었다. 그래서 메시야는 오늘도 민중의 유효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계신다. 그런데 민중은 역사의 주체란 말이 개념적 정의가 아닌가?
심원과는 달리 마가는 최초로 이방인을 위한 성서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 예수의 삶에서 쉐마 이스라엘의 기도를 간과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의 삶에서 중심의 자리를 갖는 본래적 십계명 즉 윤리적 십계명(멘덴홀)을 부각 시킨다 (12:29-31). 수난전승을 기초로 한 십자가 신학과 사회경제적 비판 그리고 인자 메시아와 게르(이방인)의 공감은 여전히 오늘 시대에 교회와 사회에 내재적 비판과 해방의 원류로 남는다.
마가는 바알세불 비유(3: 23 -27)에서 묵시적 차원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최초로 복원했다. 마가는 이러한 엄청난 하늘의 해방사건을 어떻게 알았나. 안병무는 말한다. 유언비어로 부터! 당대 로마 식민주의와 헤롯의 정치지배와 성전체제로부터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은 유언비어에 속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갈릴리 예수가 다니엘의 기대한 묵시적 인자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유언비어였다.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 게르/오클로스들이 자신들이 만난 예수를 안디옥 공동체에 구전과 파피루스로 전해주고 마가의 손을 거쳐 편집된 것은 결정적이다. 다시말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자체가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님의 혁명이요 사건이었다. 유언비어는사회학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담론을 의미한다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70).
유언비어가 지배 이데올로기애 저항하는 담론이라면, 예수의 세속의 비유는 유언비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유언비어를 듣고 선동당할 오클로스는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세속의 비유를 듣고 선동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매타노이아로 나간다. 비유를 듣는 자는 지배담론의 사회구성을 당연시하게 여겨지 않는다. 비유의 담론은 지배자의 현실을 옹호하는 에피스테메와 관료지배방식 (권력, 특권, 이데올로기 호출)을 의도적으로 뒤엎어버리고, 인자 메시야의 유효한 역사를 위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파열은 사회적 정당성을 요구하지 유언비어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우기 문헌사적으로 볼때 오클로스는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출신의 역사학자 폴리비우스에 의해 매우 경멸적인 오클로스 지배, 즉 난동가들의 폭력으로 사용 되었다, 오클로스 지배(ochlocracy)는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나타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이들은 역사의 주체였다. 이애 대한 저항으로 시민사회와 정치 공동체가 출현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이 오클로스란 용어를 사용해야 했나?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아게네스란 용어를 사용했다 (고전 1:28). 오클로스는 계보학적 해명을 요구하는 담론이다. 마가가 과연 오클로스 개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을 까? 예수가 민중이었나? 마가는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클로스 가운데 끼어 뒤로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고 전한다 (5:27-8). 이 옷은 청색과 흰색으로 된 조그만 기도복 (arba kanfot)인데 경건한 유대인들의 매일 복장이었다 (민 15: 37-40; 신 22:12)).
이것은 토라를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복장 (tassels)이며 마가는 이것을 확인하며 (6:56), 마태와 누가 역시 이것을 부각시킨다. 예수가 입은 옷은 유대인 기도절기에 맞는 복장이며, 그는 쉐마 이스라엘을 가장 중요한 기도로 말했다 (마 12:29), 그리고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편드는 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들 다시말해 지극이 적은 소자 (elachiston/mikron, 마태 10:42; 25: 45)와 동일시했다.이들이 오클로스였나? 예수는 주변부에 속한 랍비였고 신분이나 계층적으로 민중이 아니었다. 마가에 의하면 오클로스는 빌라도를 향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게 하라고 한 자들이다 (15: 13).
심원으로부터 비판적 배우기에서 공공신학은 복음서에 대한 두터운 기술과 더불어 바울의 아게네스 신학과 종말론 그리고 메시야 정치가 자리한다. "질문이 너의 대답을 결정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성서본문의 내러티브의 교차와 계보학적 담론해명이 나의 대답을 결정한다! 공공신학은 성서에 대한 사실주의적 주석과 더불어 시민사회 안에서 시민과 하위계급이 어떻게 계층화되는 지에 관심한다. 부와 권력, 교육, 취업 그리고 관료지배에 이들은 어떻게 분화되고 구속 되는가? 이러한 해명을 위해 사회 과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것은 민중에 대한 문화 침전론에 거리를 두며, 민중 메시아론에 과몰입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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