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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사도 바울: 타우베스, 바디우, 아감벤 (11)

by 파레시아 2023. 2. 15.

최근 들어 인문학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사도 바울을 주목하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야콥 타우베스나 알랭 바디우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해석에서 새로운 철학의 패러다임을 보인다. 이들은 유대 메시야적 관점이나 또는 사회변혁적 지평을 통해 바울을 독해한다.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Jacob Taubes

타우베스 (1923-1987)는 스위스 유대인 철학자이며 바울의 로마서에서 정치신학의 모델을 돌출시켰다. <바울의 정치신학>은 그가 죽기 얼마 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행한 강연 모음 집이다. 타우베스는 바울을 새로운 종교 운동의 창시자로 이해하고, 바울을 기독교를 묵시적 종말론에서 영지주의로 전환시킨 사람으로 말한다. 그 이유는 예수 재림의 지연과 율법의 종말론적인 성취로 인해 바울은 결국 메시야의 기대를 내면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내면화를 통해 바울은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저항과, 이에 대한 로마의 폭력적인 진압을 애써 피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타우베스는 바울의 영적운동을 로마제국을 대신하는 새로운 영적 메시야 왕국의 출현으로 본다. 로마서 1장 1-7절을 기초로 타우베스는 바울이 황제숭배에 저항했다. 율법의 종교인 유대 기독교인들의 한계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로 부터 구제금을 모았지만 이일로 인해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의 비판을 염려하기도 했다 (롬 15: 30 –33).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계약에 기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다. 비 유대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는 것은 바울의 칭의론과 믿음이며, 이로인해 바울은 할례를 거절했다 (창 15:6; 롬4:3) (Taubes,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17–21). 바울의 새 언약의 공동체는 로마의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의해 정당화된다 (롬 9–11). 유대인들처럼 바울의 새 언약의 백성들은 황제숭배에 가담하지 않았고, 비록 하위계층의 사회에 속했지만 이들은 고결한 윤리적인 영적왕국을 세워 나갔다 (Ibid,, 54).

율법에 저항하는 메시아의 시대에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삶의 특징을 새 계약의 공동체를 통해 강조한다. 바울의 전략은 로마의 지배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고전 7:29-31절 에서 표현한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처럼하 고.” (Ibid., 55–56). 교인들은 사라져가는 세계안에 존재하며 (7:31), 로마제국의 어둠에 거한다. “밤 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다.” (롬 13: 11–14).
그러나 모세의 율법 (예루살렘)과 제국의 법(로마)은 새로운 법—이것이 아무리 혁명적이거나 반동적이든지 간에—을 통해 극복할 수가 없다. 율법을 초월하는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롬 13:8–18).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하나의 사랑을 강조하는 데, 새로운 보편주의가 출현하며, 신앙의 새로운 질서가 사랑의 활동에 기초된다 (Ibid., 52–53).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 신학을 로마제국의 콘텍스트에서 분석했다. 특히 타우베스는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의 로마의 주권을 논의할 때, 칼 슈미트의 ‘비상상태’의 틀에서 논의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을 구약성서적인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타우베스가 바울의 하나님의 주권신학 다시말해 오이코노미아를 파시스트 정치 이론가 칼 슈미트의 비상상태를 통해 독해하는 것은 선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슈미트의 비상사태는 로마의 황제의 전제지배에 적용이 되지, 바울의 정치신학을 이러한 방향에서 파악 하기는 어렵다.

예를들어,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의 국가주권에 대한 반성은 기독교 신학적인 측면에서 율법의 제 1기능에 속하며, 창조의 질서를 말한다. 바울이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 (13:4)으로 부를 때, 이것은 시민공동체의 질서를 정의롭게 수행해나가는 지배자의 행정업무를 말한다. 로마의 시민으로서 바울이 권세에 대한 “복종” (13:1)을 말할 때, 이것은 맹목적인 복종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로움은 권세에 있다. 이것은 13:6절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국가의 제도와 보존, 그리고 유지를 위해 집행되는 정의로운 행정업무에 대해 로마의 교인들은 책임적인 태도를 가져야한다. 복종은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이 다 함께 시민 공동체의 삶을 위해 공동의 책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책임적인 태도는 양심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13:5), 굴복은 자유로운 마음의 순종을 의미한다. 이러한 바울의 입장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입장에 상응한다 (마태 22: 21). 이것은 바울의 시민국가론을 말하지 전제군주에 대한 맹목적 굴종을 말하는 슈미트의 정치 신학과는 다르다 (테제 8, Barth, The Chrisian Community and Civil Community, 1946).

알랭 바디우의 전투적 바울

Alan Badiou

타우베스와는 달리 바디우는 바울을 전투적인 주체성을 창조한 실천가로 파악한다. 바디우는 바울의 종교적 차원을 사회적 영역으로 환원시키고, 여기서부터 자신의 주체/사건 존재론을 전개한다. 바디우는 바울을 과격분자로 보고 로마지배의 현상유지에 대항하는 이미지를 바울에게 채색한다.

마오이스트 입장을 취하는 바디우는 바울을 홀로코스트 이후 정치상황에 재설정하고,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윤리를 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바디우는 프랑스의 마샬 페탱을 나치의 괴뢰 비키 정부에 몸받쳐 헌신한 충견으로, 1972년 극우파 국민연합정당을 창설한 쟝 마리 르펭도 같은 부류로 맹비난을 했다. 후기 자본주의는 사회를 집단적으로 동질화 시키며, 개인의 단일성이나 또는 개성을 빼앗아 가버린다 (Badiou, Saint Paul, 8-10).

바디우가 자신의 보편주의 철학을 위해 바울에서 차용하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3:28절이며, 하나님은 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다 (롬 2:10). 바디우는 바울을 보편주의자로 이해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바울은 성령을 내재화 하였다. 성령의 내재성은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긍정하는 토대 이며, 부활사건은 보편 주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성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평등성을 통해 모든 차이와 구분 (유대인/그리스인, 노예/자유인, 남성/여성)을 철폐한다. 동일성과 평등성이 바울의 보편주의 원리로 등장한다 (Badiou, Saint Paul, 59). 바디우에게 바울은 보편주의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로서 의미가 있다. 바디우는 고전 2:1-5(“너희 믿음이…하나님의 능력에 있게하려 하였노라”에 기초해서 바울을 보편성의 이론가로 규정했다 (롬 10:12) (ibid., 108).

바디우에 의하면, 바울의 보편성의 원리는 진리사건를 선언하는 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성서 전체에서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모택동을 추종하는 자이고 부활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의 세속화된 부활이해는 그의 혁명 주체사상을 위해 설정될 뿐이며, 바디우에게 부활은 비역사적인 우화 정도에 블과하다 (Ibid., 17 –18, 58).

그러나 바디우와는 달리, 바울에게 그리스도 사건은 고난을 동반한 부활이며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메시아적 종말론에 기초된다. 유대 묵시적인 차원에 근거한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 이해는 바디우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바디우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울에게 구원의 의미가 없으며, 그리스도 사건은 고작해야 부활에 대한 신적인 개입에 불과하다 (Ibid., 69–70). 부활사건의 성격과 함께 하나님의 의는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며 (δωρεάν, 롬 3:24),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연결해주는 본질적인 것이다 (Ibid., 77).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바디우는 하나님의 의가 차별없이 주어진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 값없이 (δωρεάν) 오는 것임을 간과한다 (롬3: 22).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그의 부활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와의 화해를 의미한다. 이러한 화해는 누가-바울의 새언약의 전통 예레미아 언약)에 서 있고, 성령의 오심(오순절 성령강림)은 모든 인류의 육체에게 부어지는 요엘의 예언을 성취한다.

성령을 통해 예수의 죽음 앞에서 나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고(세례), 믿음을 선물로 얻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은 나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 부활사건이 모두에게 주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약속된 것이며, 케리그마의 선포를 통해 인격의 구체적 결단과 신앙 안에서 경험이된다. 그리고 바울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세계와의 영적 투쟁과 로마제국의 우상숭배를 거절한다. 바울은 보편주의자 이전에 바리새파의 배경을 가진 특수주의자였고, 그의 부활 체험은 영지주의적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부활전승에 일치시켜 공동체적으로 사고했다 (고전 15:3-8). 시리아 북부에 있던 안디옥 공동체는 스데반의 순교 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헬라 크리스천들에 세워졌다. 여기서 초기 아람어로 말해진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 또는 수난과 부활에 관한 전승자료들이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회심 후(33/4) 이 공동체에 입문했다.

바울은 초기 전승자료들을 알고 있었고 이것을 토대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파루시아를 유대 묵시적으로 해석하고 화해를 복음의 중심으로 놓았다. 세상과의 화해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성이나 여성, 또는 노예나 자유인에게 차별없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바울은 갈라디아 공동체의 삶이 역사적인 사실이며 또한 메시아 공동체의 이념형으로 보았다. 바울에게서 칭의론과 연관된 믿음은 로마서 1: 16에서 하박국과 관련되며, 이것은 신실하심(에무나),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키는 데, 바울의 메시야 공동체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접붙임 당한다. 여기서 바울은 바디우의 보편주의와 반유대주의와는 상관이 없고, 이스라엘의 자리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한다 (롬 11).

바울에게서 예수의 케노시스와 십자가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중심에 있다. 바디우처럼 부활이 비역사적인 우화에 불과하거나, 예수의 죽음이 구원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면 바울은 뭐하러 죽을 고생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전하면서 돌아 다녔을 까?

바울은 히브리 성서의 전통과 그의 랍비 유대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모택동주의식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바울의 심층적인 깊이는 부활의 보편사건과 집단적 혁명을 선동하기 위한 철학으로 단순히 등치되지 않는다. 바울신학에 대한 바디우의 자기 중심주의에 기초한 외삽법은 성서 텍스트로부터 오는 내재적 비판과 바울의 삶의 자리를 간과한다.

바울은 토라의 자리를 제거한 율법폐기론자, 혹은 발람주의자의 선조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토라가 중심으로 들어오고, 메시아의 부활의 빛에서 모세의 미츠보(613계명)는 더 이상 멍에가 되어 이방인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화두였고, 이는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와의 충돌을 겪었던 대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바디우의 반유대주의적 보편주의와 영지주의에서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은총과 새로운 피조물, 더 나아가 메시아적 종말론과 정치적 성격은 실종된다. 바울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은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참여와 사회에서 밀려나간 자들을 위한 연대로 나타난다. 이것은 메시아 인정 정치의 세계사적인 혁명을 포함한다 (Verkamp, Die Welt Anders, 253).

조르지오 아감벤과 바울의 메시아 시간

Giorgio Agamben

아감벤은 타우베스에게 자신의 로마서 주석을 헌정하고, 타우베스의 연구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한다. 그것은 바울해석에서 중요한 반환점을 의미한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 물론 아감벤의 로마서 주석은 타우베스와는 다르다. 아감벤은 로마서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통찰을 담고있다.

아감벤의 관심은 바울이 어떻게 메시아적 사건을 이해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의 이중사랑(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계명(롬 13:8 –10)으로 변형시켰는가에 있다 (Ibid., 108).

아감벤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의 목적이며, 율법은 성취가 되었고 사랑 안에서 총괄 갱신된다 (롬 13:8 – 10).
예수의 이중사랑은 토라의 정수인 십계명에 대한 수용과 쉐마 이스라엘인데, 바울이 하나의 사랑으로 묶는 것은 마태복음(23:1-3)에서 나타나는 구전 토라에 대한 예수의 권면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거나 사랑 안에서 활성화되는 믿음 (갈 5: 6)은 힐렐의 토라해석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성령은 바울의 계약 공동체를 충만하게 하고 사랑의 왕국이 이제 로마제국에 대안으로 출현한다. 아감벤은 타우베스의 메시아적 초점을 수용하면서 로마서의 카이로스 개념에 접합 시킨다 (롬 3: 26; 8:18; 11:5; 13:11).

이 지점에서 아감벤은 바디우의 보편주의를 거절한다. 보편성은 타자들 간의 동일성과 평등성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구체적인 삶의 형식에서 드러나는 다름과 차이는 반복되지도 않을 뿐더러, 이러한 구체성을 상실한 보편성은 지극히 추상적인 집단주의로 막을 내린다. 물론 이것은 아감벤의 비판이라기 보다는 바디우의 비변증법적인 주체주의에 담겨있는 한계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바울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바울을 유대 메시아의 콘텍스트에 재설정한다 (Ibid., 2). 바울은 메시아 공동체와 유대주의자들의 차이를 관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갈 1:7)으로 정죄 하기도 했다.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유대주의화하는 동질화의 입장이나 고린도교회의 종교의 혼합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감벤에 의하면,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바울에게 불가능하며, 오히려 바울의 선험적 태도는 율법의 차별과 분리를 근거 없는 것으로 거절한다. 바울은 보편적인 인간이나 또는 기독교인을 최종 원리로 주장하지 않았다. 보편주의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심연에서 발견될 수가 없다 (Ibid., 52–53).

아감벤의 독해 전략은 바울의 메시아 시간을 근본 원리로 설정하고, 바울의 시간 개념과 내적 형식을 파악한다. 바울은 현재의 시간을 지금시간(ho nyn kairos)으로 정의했는데, 이것은 일상의 삶에 치고 들어오는 메시아적 파열을 의미한다 (ibid., 52–53). 물론 카이로스 개념은 아감벤 이전에 폴 틸리히에 의해 개념적으로 해명되었다. 메시아의 시간 즉 카이로스는 역사적 시간(크로노스)의 패라다임으로 정의된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인간의 자율과 권위적인 타율과는 달리 신율의 역사적 개입으로 보았다. 카이로스의 역사 개입은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며, 여전히 종말론적인 유보 가운데 있다. 틸리히의 카이로스는 새로운 존재와 관련되며 성령의 보편적인 틀에서 다루어진다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I: 144). 그러나 아감벤은 타우베스의 해석학적 전략을 수용하고 유대철학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 아감벤은 메시아의 카이로스를 고전 7: 29절 (남겨진 시간—“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번역)) 을 통해서 보는 데, 이 표현은 고전 (7:17–22, 29–32)에서도 나타난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19–27).

이러한 남겨진 시간은 특별히 메시아적 상황을 지적하는 데, 이것은 바울의 사도적 소명을 이해하는 데 최적의 길을 제공한다(롬 1:1: klêtos). 이런 해석의 관심에서 아감벤은 고전 7장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hõs mê, 7:29–31)을 분석한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통해 세계의 의미와 중요성을 상대화했다.

메시아의 추종자들에게 바울은 로마의 법적인 관계가 권위를 갖지 않는 것처럼 살아 가라고 말한다. 메시아 공동체는 글자 그대로 메시아적 소명에 의해 살아가며, 세속의 문화적 정체성과는 다르며 자유롭다 (할례/무할례, 자유인/노예, 남성/여성) (ibid., 22–23, 26).

이들은 아감벤이 로마서에 말하는 남은 자로 말할 수가 있는가? 아니면 아감벤은 계급 철폐가 이루어진 갈라디아 공동체에서 프로렐타리아트의 기능을 보려고 하는가? 내가 보기에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푸코에 의존하며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중요하게 보지만,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배경에 깔고 자신의 호모 사케르를 전개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바디우와는 달리 프로렐타이아트나 하위계급에게 메시아적 기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남은 자 사상은 예언자 이사야와 엘리야와 관련된다(롬 9: 27, 11:4). 남은 자는 화해의 복음을 수용하고 믿음의 실천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소수의 백성들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암 하 아레츠’나 ‘오클로스’와는 다르다. 우상과 탐심 그리고 폭력의 지배로 넘치는 로마제국에서 성령 안에서 화해의 복음을 통해 메시아의 인정정치에 가담하는 자들을 바울은 남은 자로 부른다. 여기서 그는 위계질서를 넘어서는 자유와 해방의 공동체를 본다.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 사실주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과 로마의 법을 활동정지 시킨다.

아감벤은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남은 자의 신학을 서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유산을 담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메시아적 백성은 전체나 부분도 아니며, 또한 다수나 소수도 아니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57).

남은 자는 차별없는 복음을 수용하고 크로노스 안에서 메시아 공동체의 사람으로서 카이로스를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파루시아는 바울적인 의미에서 메시아의 임재를 해체하지만 (ibid., 70–71), 메시아의 사건은 두개의 다른 이질적 영역 즉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로 구성되고 병행된다. 그러나 아감벤에 의하면 메시아의 사건은 전통적인 그리스도 재림의 교리와는 보충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감벤의 남은 자의 정치적 함의는 메시아의 시간 구조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프로렐타리아트 개념에 유비될 수도 있다. 남은 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으로 드러나며, 이들은 실제적인 정치 주체로 등장한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57).

그러나 남은 자는 바울에게서 근대 정치개념인 인민대중과는 다르며, 회해의 복음 안에서 메시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존재의 혁명을 경험한 새로운 피조물을 말한다. 이것은 집단개념보다는 공동체안의 인격을 가르킨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히브리적 관계존재론을 말하는 데, 개별적인 인격이나 남은 자들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예수의 인격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속죄론은 전형적으로 히브리적 관계존재론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남은 자에 대한 바울의 사고에서 개별존재는 전체성을 대표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는 관계론적 존재론 (pars-pro-toto)으로 나타난다 (Marquardt, Eine Christologie, I:188).

아감벤은 로마서의 바울을 이해하는 데 유대적인 카테고리를 사용하지만, 예언자의 소명을 바울의 사도적인 소명과 메시아적인 현재에 적용하기에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묵시적인 종말론을 바울의 메시아적 카이로스와 혼동해서도 안된다. 메시아는 이미 왔고 그의 구원의 사건은 시작이 되었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64. 71).

이러한 아감벤의 종말론의 이해는 전통적인 신학의 개념인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 라는 실현된 종말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바울의 “지금 카이로스”에서 아감벤은 메시아의 시간이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시간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고 말한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67). 남겨진 백성들은 정치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투쟁에서 메시아 시간을 경험 할 수 있다.

이것은 혁명적 활동을 담지할 수 있는가? 메시아적 삶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행동은 무엇인가? 아감벤은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경륜에서(고전1:27; 고후 12:9–10), 메시아의 구원사건에 참여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말한다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97). 강함과 약함의 역동적인 관계는 바울이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구원론적으로 선언 하기 보다는 이에 대한 참여를 말한다 (고후 4:10–12; 12:9–10; 13:4).

아감벤의 바울 해석에서 결정적인 것은 구원에 있고, 구원은 세계의 종언을 의미하는 급작스러운 묵시적 대재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변혁을 의미하며, 드높은 하나님의 정의의 빛에서 세상의 정의의 기준을 상대화한다.

그렇다면 왜 아감벤은 바울에게서 그토록 중요한 죄의 용서와 은혜의 변증법을 구원으로부터 격리 시키는 걸까? 바울이 칭의론을 하박국에서 돌출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범으로 네 세운다면, 이러한 히브리적 믿음 형식(에무나—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되며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 성취된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은혜는 바울에게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메타노이아를 체험하는 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이 된다. 믿음이 메시아의 구원사건과 관련된다.

신학으로부터 오는 비판적 반성

바울의 랍비 유대적 종말론과 메시아주의에서 세상의 지배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영적 투쟁은 차별없는 복음과 메시아 인정정치 (빌레몬과 오네시모)에서 나타난다.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메시아의 나라를 위한 언약의 백성, 즉 새로운 피조물로서 존재의 혁명을 경험한 자들이 된다. 이들은 메시아 공동체의 삶에서 제국의 지배를 정지시킨다.

이러한 차원을 게하르트 숄렘은 바울의 “하나님 자녀의 자유”에서 보고, 랍비적 유대교와 묵시적 유토피아의 접합을 지적한다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21). 바울에게서 민중은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로서 존재의 혁명을 경험한 메시아의 나라의 주체들이며, 티쿤 올람(세계의 치유) 을 위해 이들은 토라와 쉐키나에 의해 메시아의 인정투쟁으로 불려진다. 이것은 기독교 천년왕국주의자들이나 위르겐 몰트만이 지지하는 에른스트 블로호의 <유토피아 정신>과는 다르다.

바울의 묵시론적 전환은 우리시대를 지배하는 주인없는 폭력의 실재 (Lordless powers; 국가 권력, 자본주의, 맘몬, 백인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문화적 부정의 등)가 사회 구성체 안에서 어떻게 시민과 계급을 계층적으로 각인하는 지를 보게한다. 이러한 전환이 그리스도의 카리스마로 채워진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주인 없는 폭력의 실재를 비신화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움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며 나가게 한다.


바울에게서 메시아 공동체의 이념형은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차별없는 공동체이며, 여전히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특히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매개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바울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로움을 지적하며 로마서 13:1절에서 드러나는 국가 인정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갖는 공동 책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국가 이론에서 이러한 입장은 루터의 두 왕국론으로 오해되었고, 혁명적인 국가론은 토마스 뮌처의 묵시론적인 천년왕국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독일 농민전쟁에 대한 연구에서 루터는 반동적인 사상가로, 뮌처는 혁명적인 실천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수용되었다.

루터는 칭의론과 개인의 양심의 문제를 통해 바울을 해석했지만 그의 사회경제의 불의와 고리 대금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이후의 역사에서 논의되는 루터의 칭의론에서 실종되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훗날 히틀러 파시즘 정치에서 교회와 국가의 이분화로 왜곡되었다. 에어랑엔 대학의 교수단을 대표하는 베르너 엘러트와 파울 알트하우스는 <안스바하 조언, 1934> 에서 독일 교회는 위대한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 (칼 슈미트)을 하나님의 선물로 환영하고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지지했다.

Barmer Theologische Erklarung

여기에 저항하여 칼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 선언서>에서 고백교회를 대표하고 히틀러의 파시즘 정책과 아리안주의를 거절했다. 바울의 하나님의 주권신학 (오이코노미아)은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혁명의 신학으로 개념화 되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1판> (1919)과 수정된 2판(1922)은 당대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스위스의 대파업 그리고 당대 사회주의 운동의 복잡한 상황에서 바울을 동시대화했다.

바울을 동시대인으로 보기

바울을 동시대인으로 파악하는 접근은 아감벤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Agamben, What is the Contemporary?) 아감벤에게서 동시대인은 자신의 시대에서 어두움 또는 불명료함을 보는 자이다.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 진보의 역사에 동반한 빛에 대해 가치중립을 선언한다. 어둠은 빛과 같이 있다. 밤 하늘의 어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한 빛을 보는 것이다. 동시대성은 근원을 현재사에 불명료한 방식으로 기입한다. 역사의 과정에서 근원은 원형처럼 작용하며 현재에 대해 숨겨져 있지만, 동시대적으로는 흐릿하게 흔적으로 남아있다. 아방가르드는 산적해있는 크로노스를 넘어서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를 시도하며, 현재에 대한 접근은 근원을 추구하는 고고학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노스텔지아가 아니라 현재의 어둠의 부분 또는 흔적으로 남겨져있는 근원에 접근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시간의 흐름에서 살아오지 못한 것이며, 이것을 고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우리가 접근하지 못한 현재에 대한 동시대적인 삶일 수가 있다.

아감벤에 의하면 바울은 메시아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삶으로써, 다시 말해 메시아의 지금 시간을 통해 자신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동시대인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유형화하고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와 동시대화한다. 구원의 경륜적 시간을 통해 바울은 성서의 생활 세계를 인용하고 과거의 인물들은 로마의 지배와 어둠을 넘어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수많은 역사의 인덱스에는 과거의 이미지들이 포함되어있고,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인 메시아의 지금 시간에서 진보로 가장한 야만의 문서들에서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를 읽어낼 수가 있다. 이러한 벤야만적인 역사철학의 틀에서 아감벤은 바울을 우리시대의 동시대인으로 살려내지만, 그는 바울의 랍비적 메시아의 기원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했다.

바울에게서 로마서의 현재화된 종말론은 데살로니가에서 묵시적 메시야주의와 유리되지 않는다 (살전1:9–10; 4:13–18). 그리고 바울에게는 현재화된 종말론과 묵시적 메시아의 재림은 포개져 있다. 사도행전에서 부활의 예수는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을 때 (천년왕국) 거절했다. 오히려 오순절 성령 임재를 통해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했다. 바울의 메시아 시간은 시간의 중심에 속하며, 이러한 남겨진 시간은 공동체와 더불어 부활하신 메시아의 예언자적인 활동의 시간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토마스 뮌처처럼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세울 때 메시아가 재림 한다는 생각을 수용하지 않는다.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 지상의 천년왕국은 윤리적인 영역으로 이전되지만, 그의 화해의 복음은 차별이 없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나간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메타노이아를 의미하며 이전 세계로부터의 급진적인 전환을 말한다. 죄의 현실은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영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 불의한 지배방식과 탐욕 그리고 권력투쟁에 각인 되어있다. 바울은 예수의 오클로스(마가복음)나 초기 예수 전통의 묵시적 자료에서 다니엘과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다.

공공신학과 바울의 메시아 인정 정치

마가는 예루살렘 멸망 직전 편집한 그의 복음서에서 오클로스를 세상에서 버려진 멸망할 무리들 (massa perditionis)로 파악하고 역사적으로 갈릴리 예수 운동에서 하나님 나라에 초대된 화해된 존재로 보았다. 바울은 오클로스와 묵시적 메시아 전통을 마가보다 앞서, 이방인 선교에서 화해와 차별없는 복음으로 로마의 제국의 신학에 저항했다. 이 지점에서 공공신학은 바울의 남겨진 자들과 마가의 오클로스를 메시아의 인정투쟁으로 접합하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을 시민과 하위계급으로 동시대화한다.

시민은 단순히 부르즈와 계급이 아니라 계보학적으로 고대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에클레시아에서 정치와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 초기 로마의 공화제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민중을 대변하고, 17세기 정치이론에서 루소에 의해 시민국가론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서 정치와 역사의주체로서 시민은 하위계급과 더불어 존재하며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민주적인 입법은 루소의 일반의지론과 정치 경제학안에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이런 정치 사회학적 해명은 헤겔 ㅡ마르크스의 일방적인 시민/부르주아의 동일화를 해체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시민사회 (부르즈와 사회)를 여과없이 수용하고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자본가 (또는 금융귀족)와 프로렐타리아트로 개념화하고 혁명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전히 차티스트의 의회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면 마르크스는 부르즈와 운동에 속하는 가? 마르크스는 자본가/프로렐타리아트 이념형을 프랑스 혁명에서 적용 시켰지만, 그는 여전히 로베스피에르와 상퀼로텐의 연대정치를 알고 있었고, 이들을 금융귀족이나 부르즈와로 무차별하게 남용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다양한 역사적 전개에서 로베스피에르와 상퀼로텐의 연대는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남아 있었고 심지어 레닌조차도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했다. 그럼 레닌도 부르주와지인가?

이러한 공공신학적 해명은 타우베스나 바디우 그리고 아감벤의 바울해석을 묵시적 메시아의 해석학 지평에서 문제틀한다. 마가와 마태의 복음서에서 오클로스는 구약의 지평인 암 하 아레츠와 연관되고, 예수와 세상에서 버려진 멸망당할 자들(massa perditionis) 과의 연대가 중심으로 들어온다. 마가와 마태에 앞서 바울은 40년 대 쓰여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안디옥 공동체에서 번역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파루시아에 대한 전승을 수용했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 예수전통을 가장 먼저 묵시적 메시아의 빛에서 해석했다.

당대 로마시민이었던 바울은 노예 (호모 사케르)가 갈라디아 공동체에서 차별없는 복음안에서 화해된 존재로 인정된 것을 보았고, 그는 메시아의 인정정치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고 묵시적 종말론의 차원에서 동시대화했다.

이 지점에서 바울과 마가는 공공신학과 메시아 인정정치의 원류에 속한다. 만일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건에서 그런가하면 바울이 왜 로마 문화의 페드라스트(pederast; 소아남색자)를 비판했는 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제국에서 누구의 신체가 폭력적으로 상품처럼 사용되었는 가? 푸코는 <성의 역사1>에서 페드라스트를 다루면서 그리스인의 삶의 미학에 과몰입했기에, 이에 대한 바울의 정치사회적 비판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서 13:1-10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공권력에 대한 인정과 13:11 -14의 묵시적 파루시아의 교차를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아감벤처럼 전통적인 파루시아 교리는 바울의 메시아의 현재 시간에 상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로마서 13:11– 14은 바울의 묵시적인 종말론 (살전 5:1–10)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의 이중 구조는 개인의 종말에서 나타나는 몸의 부활과 유리되지 않는다 (고전 15: 50-52). 이 지점에서 바울의 변화의 교리 (칼 바르트)는 당대 시한부 종말론 이나 열광주의 재림 선동가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바울에게서 그물망처럼 엮어져 텍스트처럼 드러나는 종말론은 한편에서 현재화된 메시아 시간 구조 (부활의 현재화—공동체의 남겨진 시간)와 개인의 종말에서 변화의 교리 (몸의 부활)를 말한다. 다른 한편 세계와의 화해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혁명은 역사의 과정에서 시작되고, 이제 남은 자들을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인정 투쟁으로 불러낸다. 이것은 공동체의 소명에 속한다. 그리고 최종의 세계회복에서 바울은 유대적인 관계론적 존재론을 부각시킨다.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이때가 마지막이며, 그리스도가 다스림을 통해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고 나라를 하나님께 넘긴다. 그리스도까지도 하나님에게 굴복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이다 (고전27- 28). 유대적인 묵시적 대재난은 새계 혁명으로 나타나며 (막13), 재림 후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여전히 역사적 시기에 속하며,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폐해지고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순종한다. 바울은 메시아의 묵시적 종말론과 이스라엘 하나님의 최종의 안식(메누자)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원이 된다 (칼 바르트). 이러한 시간 이해가 바울을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 남겨진 자들과 동시대적으로 만든다.

랍비 유대교에서 멍에를 매개하는 토라는 당연히 메시아의 시대에 기쁨의 토라 즉 그리스도의 토라로 변화된다.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안티노미안)가 아니며, 메시아의 기쁨의 시대에 토라를 멍에가 아니라 거룩함과 세계의 치유를 위해 회복한다. 바울의 메시아의 카이로스는 여전히 묵시적 대재난과 재림 그리고 메시아의 순종과 하나님의 최종의 안식에서 히브리적으로 엮어져 있다. 이것이 바울 종말론의 이중구조를 말하며 종말론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견지한다 (Marquardt, Eine Eschatologie 2: 29).

타우베스나 바디우나 아감벤은 전문적으로 훈련된 성서 신학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자들이 사도바울을 정치신학적으로 복권시키고 우리 시대에 메시아적 시간을 회복 하려는 시도는 교회가 피해가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과 더불어 세계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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