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지어지는 삼차 예루살렘 성전을 거절한다. 그것은 메시야의 마지막 재림에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적 각성을 위해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에스겔 37:24). 하나님은 이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성소 (예루살렘 성전)를 이들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임재할 것이다 (37: 26).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재림에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폐할 때까지 다스린다. 맨 마지막에 멸망당할 원수는 사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한다 (고전 15: 24-2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만국을 치고 철장으로 다스린다 (계 19: 15). 이러한 다스림은 재림 후 심판과 평화의 다스림일 수 있고 예루살렘에서 곡과 마곡과의 전쟁이후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의 구조는 구약의 우주적 재난의 재림(메시아 시대)과 유토피아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바울 또한 이러한 틀로 재림 후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심판을 통해 마지막 하나님께 받쳐치는 것을 말한다.
3차 성전과 천년왕국
마지막 메시아 시대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영적 대각성과 메타노이아가 일어나고 하나님과 평화의 언약이 수립된다. 3차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로 부터 내려올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구조에서 천년왕국의 다스림 (계20: 4)은 이사야의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통해 남은 자의 메시아 공동체에 임재하고 천년왕국의 은혜와 평화와 복을 이어간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현재화된 종말론 또는 누가의 시간의 중심이며 메시아의 시간과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들은 새언약의 협력자(Mitarbeiter) 이며, 쉐키나의 영으로 인쳐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들에게 항상 예가 된다. 이들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고있는 자들이며 변화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유의 사람들이다(고후 3: 18). 부활의 그리스도는 승천하면서 이미 천년왕국의 평화의 다스림과 부활의 새생명을 남겨진 자의 공동체에 주셨다. 이것은 또한 하늘에서의 천년 간 다스림과 지상의 메시아 공동체의 다스림에 상응하는 이중구조로 나타난다.
개인 종말과 몸의 부활
바울은 개인의 종말에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하늘의 영원한 집을 말한다. 죽음은 부활의 생명에 삼켜진다. 바울에게 죽음은 잠이 아니라 변화를 의미하며, 죽은 사람은 썪어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한다 (고전 15:52). 그리고 심판대에서 성령의 정화의 심판 (고전 3:13)과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보응을 받는다 (고후 5: 10).
이스라엘의 회복
사도행전에서 부활의 예수는 제자들이 지금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할 것인가 하는 메시아 시대에 대한 요청을 거절한다. 나라의 회복은 메시아의 날을 말하며 대재난과 전쟁으로 시작되는 진통을 통해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평화의 시대를 의미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시대이다 (이사야 2:4).
이스라엘 국가와 메시아 시대
오늘날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분쟁에서 볼 때 이스라엘 국가는 극우파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 처럼 메시아 시대로 보기 어렵다.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주의로 옹호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몰록처럼 국가 이스라엘이 벌이는 살해의 정치는 예언자적으로 비판 당해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은 평화와 구원을 위해 메시아의 도래를 간구할 것이다.
자신들의 폭력의 정치를 비판하고 메타노이아를 촉구하는 남은 자들의 공동체도 있다. 메시아의 탄생을 위한 해산의 진통이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러한 메시아 시대는 천년왕국으로 표현 되지만, 유대교 전통에서 천년의 개념은 없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기쁨으로 가득찬 도성이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새 시대를 의미한다 (65:18).
하나님의 날 ㅡ유토피아
주님의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며
이후 예루살렘은 "낮에는 연기와 구름"으로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빛을" 통해 보호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그의 영광으로 덮으시고 피난처가 되게 하신다 (이사야 4: 5-6).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어린아이가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을 이끌고 다니는 유토피아적인 비전이 나타난다 (11: 6ㅡ9). 이것은 메시아 시대 이후 열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유토피아를 말한다.
메시아 시대와 유토피아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상의 천년왕국의 왜곡
구약의 메시야 시대와 하나님 나라의 유토피아 비전은 기독교의 천년왕국과 전혀 다르다. 지상의 천년왕국주의 자들은 인간의 혁명적 활동 (토마스 뮌처나 타보르트 그룹 또는 뮌스터 혁명운동과 청교도 등)을 통해 메시아의 시대가 열린다고 억지를 부린다.
여기에 혁명을 통한 마르크스의 계급없는 사회가 속한다. 그러나 유대적 메시아주의에서 인간의 활동은 수동적으로 머문다. 하지만 기독교 천년왕국 주의는 복음서의 재림과 바울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완전히 오해한데서 온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혁명적 활동을 통해서 자신이 온다는 것을 말한 적도 없고, 오히려 여기, 저기에 그리스도 있다는 선동에 미혹 당하지 말라고 한다. 요한의 환상에서 천년동안 사탄은 묶이고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 기간동안 남은 자들의 메시아 공동체를 위해 박해가 없는 자유의 시간을 허락 하신다.
하늘의 천년왕국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시작될 때 하늘에서 심판의 권세를 쥔 사람들에대한 비전이 나타난다. 예수의 증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인 사람들의 영혼이다. 이들은 몸의 부활의 축복을 얻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천년 간 다스린다 (계 20: 4).
그러나 하늘의 축복의 천년이 끝나가면서, 지상에서 곡과 마곡이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이들을 삼켜버리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한다. 이후 마지막 심판을 거쳐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진다.바울에 의하면 맨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이다(고전 15:26)
메시아의 묵시적 재림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우주적 재림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 [첫번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일어난다.
지상의 메시아 공동체에 속하는 남겨진 자들은 이들과 함께 성령의 쉐키나의 구름에 이끌려 몸의 부활을 입고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덷전 4:17).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에서 다스린다 (마태 25; 계 20: 11- 15). 재림의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을 가지고 오며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이 일어난다 (스가랴 12: 10).
바울과 모제스 마이오니데스
바울은 모세즈 마이오니데스 (11 38 -1204)의 메시야주의 와는 다르다. 마이오니데스는 이슬람의 지배 아래서 알 파라비나 아비센나와 같은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올 메시야는 평범한 인간이며 묵시적인 파국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스라엘의 나라 회복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이후 예루살렘 삼차 성전이 지워지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 계열이 회복되고 다윗의 후손 가운데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이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언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에서 어용 정통 유대주의에서 시도되는 에스겔 삼차성전 계획이고, 이슬람 국가와 핵 전쟁으로 가는 시나리오기도 하다. 여기에 가세해서 미국의 극우파 시한부 종말론주의들은 이전의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아마겟돈 전쟁 운운 하다가 에스겔 삼차성전으로 선회하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비즈니스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짝퉁 메시야 주의에 쉽게 먹히고 만다. 식민지화된 개신교의 민낯이다.
메시야의 기쁨의 토라
바울이 말하는 다윗-메시야는 파국적인 재난과 심판 그리고 구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마지막 메시야로 기다리는 다윗의 아들이 바로 메시야 예수임을 증거한다. 바로 이분이 다니엘의 인자 메시야이다. 예수 당시 6000명에 속한 바리새파 출신인 바울은 메시야의 부활에서 새로운 에온이 열리고 구전 토라를 메시야의 토라 빛에서 비판하고 새롭게 설정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누가 5: 38).메시야의 날은 기쁨의 날이고, 멍에를 매개한 토라 (미츠보)는 기쁨의 메시야 토라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을 유대 메시아의 빛에서 보고, 이것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부활 후 40일 사역에서 파악하고, 이후 전개되는 메시야 공동체의 원류로 파악했다. 남은 자의 공동체를 위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만찬과 케리그마로 이루어진 예배이며, 메시아의 은혜는 노래와 감사의 찬송으로 불러져야한다. 이것은 바울의 작품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가장 오랜 전승에 기초한다. 4복음서의 공통으로 자리한다.
바울로 부터 배우기
바울은 구약의 전통에서 "위대한 이름"(하셈)을 알고있고, 70인역을 통해 퀴리오스를 사용하지만 그는 엘로힘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출애굽 3장 14절--'ehjeh' 'ascher 'ehjej--는 70인 역에서 ego eimi ho on --"나는 존재하는 자"로 번역된다. 그러나 시편 96장 5절에서 에서 오직 이름만이 하나님이지 그외에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테오스(theos)는 헛된 우상이요 아무 것도 아니다.
테트라그람 (YHWH)이 위대한 이름(하셈, Hashem) 곁에 서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 되었다. 히브리적 신명은 그리스인 존재자로 번역될 수가 없다. 그리스 동사 eimi (be)는 히브리어 hajah (발생한다)와 다르다. "나는 장차 거기에 있든지/ 일어날 것 처럼, 그렇게 장차 있든지 일어날 것이다." (Ich werde da sein/geschen, wie ich da sein/geschen werde).
"나는 일어나는 자로서 일어난다." (Ich geschehe als der Geschehende) 이러한 하나님의 신명은 예수 안에서 아바 아버지 즉 인격적인 분으로 일어나고 계시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가르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인 아바 아버지에 담겨져있는 인격성이 이방인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실종될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남겨진 자 들의 사상을 이사야와 엘리아로 부터 거듭 확인하고, 예수는 마지막 때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부패한 시대임을 경고했다. 심지어 예례미아에게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가 의인 한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씀 하신다(예레 5:1).
바울의 영적투쟁의 의미는 여기에 근거한다. 교회의 소명은 새언약을 회복하고 메타노이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령의 임재에 의해 살아가는 남은 자의 공동체로 머물러야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의 예언자적 투쟁에 참가하는 자들은 토라와 쉐키나에의해 거듭난 민중들이고 남은 자들이고 새언약의 주체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우상숭배와 페드라스티 성적 착취제도 그리고 사회계층의 위계질서와 관료지배에 도전한다. 바울로 부터 배우는 과정은 과거복귀나 노스텔지어가 아니다. 고고학은 종말론의 진리내용을 역사의 과정에서 이념의 선택적 친화력, 정치주권과 경제적 정의 그리고 법적인 정당성을 검토하면서 동시대화한다. 그것은 관료주의 지배방식에서 희생 당하는 시민과 하위계층을 메시아의 인정정치를 통해 "지금 여기서" 방어한다. 이것은 화해의 복음과 생활세계에 침투해들어 오는 파시즘의 지배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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