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신학은 발터 벤야민의 계보학을 수용하고, 성서 텍스트에서 인자 메시야와 민중의 관계를 내재적 비판과 묵시문학과의 연관 (에른스트 케제만)에서 발전시킨다. 그리고 크로산의 인자 예수에 대한 묵시적 통찰을 수용한다.
인자 예수와 묵시적 종말론
역사 예수 연구에서 묵시문학적 전환은 예수가 세례요한을 엘리아처럼 여겼지만, 그가 즐겨 사용한 인자 칭호는 다니엘의 예언에 근거되어있다. 여기서 인자는 자신의 고난 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있는 집단적인 메시야상이 형상화된다 (다니엘 7: 18). 다니엘의 환상은 기원전167년 부터 164년 사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기간에 관련되는 데, 인자와 같은 이 (7:13)는 그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왕국을 줄 것이다 (7: 27). 인자는 예수시대에 아람어의 “나” 를 애둘러 표현하는 용어이기도 했지만, 인자칭호는 일반적인 인간성 또는 인류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문학적 메시야상에 예수는 인격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메시야 예수의 독특성은 다니엘과 다른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인자의 집단성을 인격화하고, 자신의 백성을 토라를 통해 영적이며 윤리적이며—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보편적인 존재로 드러낸다. 마가는 예수에 대한 인자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13: 24 -27), 누가 (21:25-28)와 마태(24:29)는 마가의 입장을 추종한다.
주님과 인자ㅡ묵시적 종말론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인자대신 주님의 칭호를 사용한다 (4: 13-18). 바울은 여기서 천사장의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소리, 그리고 구름에 휩싸여 라는 표현을 통해 다니엘 7:13절의 묵시적 지평에 서 있다. 바울은 50년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다니엘의 인자 메시야가 예수의 재림 에서 성취될 것을 보았다. 바울은 인자를 주님으로 대신하고 이후 마가에게서 인자칭호가 사용된다. 바울에게서 묵시적인 주님이 마가의 인자 칭호에 앞선다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245).
마가복음은 예수와 바알세불의 스토리를 비유의 장르로 수용하고 묵시적 전망을 부여했다 (3:33). 마가의 배경에는 다니엘과 에녹서가 있고 예수는 묵시적 메시아로 기술된다. 이것은 종래의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유대 묵시적 차원을 비판적으로 보충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성령의 차원에서 새로운 에온을 열어 놓는다 (Sively, Apocalyptic Imagination in the Hospel of Mark, 85).
또한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예수가 창에 찔렸을때 그를 찌른 자들이 장차 예수를 볼 것으로 말한다(요: 19: 34-37). 요한 계시록에서 인자와 같은 이의 재림을 표현하고(1:7, 13; 14:14)다니엘 7: 13과 직접적인 관계를 보인다. 예수는 단순히 인자칭호가 아니라 묵시적 비전의 하늘의 형상이며 바울의 주님과 일치한다. 요한의 종말론에서 특이한 것은 십자가에서 스가랴 12: 10절의 예언의 성취를 보는 것이다.
다니엘의 인자는 스가랴의 예언과 접합되고 묵시적 주님으로 파악된다 (계 1: 7). 수난과 재림은 스가랴의 예언 (12: 10)과 다니엘의 인자의 재림(7:13)과 순환적인 관계에 서 있다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246). 나는 크로산의 묵시적 예수 해석을 성서의 내재적 바판과 계보학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수용한다. 히브리 성서의 약속은 기독교 종말론의 자료가 되며, 복음서는 묵시적 내용을 문학의 장르로 수용한다.
누가와 이스라엘의 회복
다니엘의 묵시적 비전은 누가복음에서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역사적 현실로 드러난다 (누가 21: 23-24). 그리고 나라를 회복할 때 가 바로 지금이냐는 제자들의 메시야적 질문에 예수는 거절했다. 예수의 부할 후 40일 사역과 메시아적 천년왕국 거절, 땅 끝까지 선교와 마지막 묵시적 재림이 누가와 바울의 종말론적 사유와 메시야 사상을 특징 짓는다.
나라의 회복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며 구약의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묵시적 구원 (스가랴 14:7)의 지평에 서 있다. 구약의 메시야적 나라의 회복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며 예수와는 상관없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주님이며 이제 교회의 시간으로 예루살렘에 성령으로 오시며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레미아ㅡ요엘의 새 언약을 성취한다.
마태에게서 갈릴리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의 내용은 열한 제자에게 준 세계를향한 선교의 위임(마 28: 16ㅡ20)이다. 그러나 마가는 부활의 주님을 변모산 사건에서 알고 있었지만 (9:9), 십자가신학으로 파악하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말한다 (13:10). 누가복음에서 부활의 예수의 선교적 위임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약속과 관련된다.
성서 텍스트 안에 차이와 다름과 반복은 의미론적 순한안에 서 있고 외삽법이 아니라 내재적 비판을 요구한다.
편집사 비평의 기여와 한계
빌리 막센은 마가복음에 대한 편집사 연구를 통해 민중 오클로스에 대한 갈릴리 예수에 대한 기념비적인 지평을 열어 놓았다. 이어 한스 콘첼만은 누가 복음에 대한 편집사 연구를 통해 세계사적인 구원의 스펙트럼을 열어 놓았다.
파루시아와 예수의 삶이 현재화되며, 부활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말씀의 사건으로 공동체에 임재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과 구원의 현재성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에서 마지막 재림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역사의 중심이며, 부활의 주님의 40일 사역은 성령의 임재와 승천 그리고 파루시아의 틀에서 구원사의 의미를 갖는다(Conzelmann, The Theology of St Luke, 204).
이러한 편집사 연구와 더불어 한스 가다머의 해석학이 텍스트와 독자의 지평융합을 통해 이해의 역동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ㅡ불트만의 영향이 다른 방식에서 수용 되지만, 이러한 연구는 텍스트에 대한 협소한 실존주의적 자기해석이나 파시즘적인 자기결단을 넘어선다.
이러한 성서해석학의 성과를 고려하면서 나는 포스트콜로니얼 성서해석을 벤야민의 내재적 비판과 고고학적 해명이론을 통해 편집사 비평이나 가다머가 간과해버린 하위계층의 유효한 역사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한다.
나는 종교적 이념이나 담론이 서로 다른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전개될 때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구조 그리고 신학적 정당성이 어떻게 엮어지는 지에 주목한다. 이 지점에서 편집사 비평이 놓쳐버린 복음서의 생활세계 즉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 이념과 묵시문학적 연관성을 검토하고 가다머의 보편적 이해지평에서 간과해버린 종교이념, 물질과 권력관계의 선택적 친화력을 사실주의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서 문제틀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톤 베어캄프는 사회사적으로 그리고 정치 경제학적으로 이러한 차원을 포착했는 데 그의 성서 텍스트 접근 방법은 중요하다 (Veerkamp, Die Welt Anders, 243-53).
토라의 희망과 종말론의 이중구조
희망은 토라의 꽃봉오리이며, 에스겔의 이스라엘 민중의 묵시적 부활비전에 관련된다. 복음서는 수난기사와 더불어 부활과 임박한 파루시아의 묵시적 차원을 담고 있다. 나사렛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관계는 죄의 용서와 죽음의 저주로부터 해방이라는 종말론적 현재성의 구조 안에 통합된다. 예수의 미래는 세계사적인 재앙과 경험의 차원에서 묵시문학적 지평 안에서 증거된다. 종말론의 현재가 묵시적 차원과 더불어 복음서의 해석학의 열쇠가 된다 (Marquardt, Was dűrfen wir hoffen, wenn wir hoffen dűrften 1: 365, 379).
바울에게서 현재화된 종말 (남은 자의 공동체의 시간)과 묵시적 재림은 계시록에서 유토피아적 하나님의 도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묵시적인 재림에서 (덷전 4:13 -18), 인자란 칭호는 주님으로 표현된다. 주님(엘로힘)이 인자보다 연대적으로 앞서 있는 표현이다. 수난과 재림의 인식론적인 순환은 아람어 성서 이사야 (2:2)와 스가랴 (2: 11,12: 10)에서 설정되고 다니엘 7:13절에서 발전된다.
이러한 묵시문학적인 지평은 마가 (13장) 와 마태 (24장)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서 인자 예수의 재림 이전에 세계의 재난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메시야 해산의 진통이다 (마태 24:8). Q자료 (마 24: 37-41)에서 인자는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파국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누가ㅡ바울신학에서 부활의 예수는 40일간의 사역을 통해 이미 재림했고, 세계의 파국과 구원으로 마지막 때 미래의 시간으로 펼쳐진다ㅡ더 이상 파루시아의 지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재적 비판과 묵시문학의 차이
다니엘의 메시야 이념(예수와 그의 백성)은 텍스트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자기를 비판적으로 마지막 시간에 실현 시킨다. 바울과 요한에게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스가랴의 지평이 접합된다. 마가에게서 현재화된 부활예수와 죄의 용서의 차원보다는,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의 선포 (예수와 에세네파 세례요한)가 중심에 서 있다. 마가는 메시아 비밀(브레데)을 통해 예수의 수난을 2세대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전해주고 싶어한다. 메시아의 비밀은 팔레스티나 유대인 기독인이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열린다.
마가신학의 정수는 수난전승에 기초한 십자가 신학이며 다니엘의 묵시적 비전을 통해 인자 예수의 의미를 확인해준다. 영지주의가 배격된다. 이것은 바울의 묵시록과 부활하신 분의 십자가 그리고 계시록의 히브리적 지평(다니엘과 스가랴)에서 접합되고, 오늘 남겨진 자의 공동체에서 희망의 꽃봉오리로 이어진다.
에른스트 케제만과 마태복음
마태는 마가와 Q자료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시적 종말론의 틀에서 발전시켰다. 성서비평학연구에서 묵시적 메시아는 후대의 삽입으로 밀려나고 헬라적 사상에 초점이 주어지지만 (불트만 학파와 어느 정도로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세례요한과의 연관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마태의 예수는 이스라엘과 다니엘의 묵시적 종말론을 성취하는 메시아로 소개된다 (27:45).
케제만에 따르면, 마태는 예루살렘 유대-기독교 공동체에 충실하고 이스라엘 중심적이다. 묵시적 종말론은 예루살렘 공동체 신학의 모체이며, 누가ㅡ바울의 전통에는 세계사적인 구원사로 이어진다. 묵시주의는 모든 기독교 신학의 모체이며 묵시적 메시아 예수가 중심에 설정된다 (Kasemann, Die Anfange christlicher Theologie, ZThK, 162-185).
케제만의 묵시적 메시아에 대한 재구성은 마태의 특수자료와 그의 공동체의 자리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경계지역)르에 주목하고 마태의 히브리 성서 인용 (마태 7: 22-23, 23: 8-10, 5:19)을 검토한다. 토라의 권위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안티노미안 태도에 비판한다. 또한 마태는 이방인 기독인들을 재 유대화하려는 예루살렘의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에게 수긍하지 않는다.
케제만은 예수를 구약의 묵시문학적 틀에서 파악하면서, 마태를 토라의 권위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랍비로 이해한다 (마태 5:17-20). 구약의 묵시적 전통과 랍비적 기독교의 입장이 메시아 예수안에서 통섭된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갈등보다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반율법적인 삶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묵시적 재림은 가까웠다 (마가 9:1, 마태 16:28, 24: 34).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마태복음에 기초해 묵시적 메시아와 랍비적 기독교의 융합을 열어놓음으로써 그의 동료 귄터 보른캄의 마태복음 편집사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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