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트 정치 신학의 문제틀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드러나는 국가주권론은 16세기 왕권 신수설과 같은 카톨릭 신학에 기초되어있고,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새로운 국민주권에 기초한 국가론을 거절한다. 시민국가와 국민주권 그리고 일체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슈마트는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전제적 지도자의 정치적 영도력에 기초한 정치신학을 주장한다. 히틀러는 국가의 비상사태에서 하나님이 슈미트에게 보낸 기적의 선물에 속한다.
1934년 6월 30-7월 2일 사이에 히틀러와 괴링이 나치 민병대의 해체를 수행했을 때, 슈미트는 히틀러의 행동을 지지하면서 8월 1일자 신문에 "지도자는 법적 질서를 보호했다"는 기사를 썼다.
"긴 칼의 밤"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민병대장 하인리히 룀은 정치 조작에 의해 반역자로 체포되고 수백명의 부하들은 사살 당했다. 민병대는 해산되고 동성애자 였던 룀이 제거되었을 때 슈미트는 히틀러의 정치 능력에 만족을 표시했다. 도덕과 질서에 기초한 통제국가에서 동성애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민족사회주의는 하나님의 도구이며 악한 자들을 원수로 삼고 제거해야한다.
슈미트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후서 2: 6-7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연시키는 억제세력(katechon)을 카톨릭 교회로 보았고, 스스로를 도스트엡브스키의 소설 <대심문관>에 연결지었다.
카톨릭 교회가 히틀러의 독일제국에서 실현되고 "카테콘"으로 파악하는 슈미트의 방식은 바울의 메시야적 종말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바울에 의하면 불법의 신비가 이미 작동 하지만, 그것은 카테콘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제거될 것이다. 슈미트는 이러한 바울의 종말론적 복음에서 독일의 기독교 제국을 카테콘으로 일치시키고 전제주권이론을 정당화하는 그의 정치신학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제국을 카테콘으로 보지 않았다. "멸망의 자식"은 믿음을 배신하는 일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히틀러제국은 카테콘이 아니라 멸망의 자식을 의미한다.
아감벤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은 정치신학의 파괴
아감벤은 파루시아 지연과 카테콘을 둘러싼 슈미트와 카톨릭 신학자 에릭 페테슨과의 논쟁에 주목하고, 자신의 오이코니미아 신학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그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리를 내어주며 슈미트와 페테슨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고, 마지막 때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을 얻을 것 (롬 11:26)이라는 바울의 입장을 부각시켰다. ㅡ아감벤은 페터슨과 바르트의 엄청난 논쟁을 의식하지만 베버와 트뢸취로 이동한다.
아감벤은 자신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을 위해 1925년 에른스트 트뢸취의 중요한 문장을 인용한다. "오늘날 종말론적인 부서(bureau)는 이미 닫혀있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기초를 구성하는 생각들은 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Agamben, The Kingdom and the Glory, 8)
이 지점에서 아감벤은 자신의 오이코니아 신학을 통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대화를 열어가는 데, 이것은 몰트만의 희망신학이나 C.H.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이 아니라 벤야민의 메시야 주의를 기초로 전개한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 신학은 반유대적인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해체한다. 몰트만의 정치적 결단주의에서 슈미트와 같은 혼동이 나타난다. 오이코노미아 신학은 신체정치학을 슈미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일체의 반유대주의 문제를 거절한다.
슈미트와 베버: 말해지지 않은 것의 고고학
슈미트는 베버의 개념을 카톨릭 파시즘 국가이론으로 사용하지만, 베버의 정치 사회학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간다. 슈미트가 베버에 의존하는 사회학적 방법은 이념의 지성적인 구성을 다룰 때 이러한 이념의 담지자로서 신분그룹의 역할에 있다.
여기서 슈미트는 법적 개념의 사회학에 대해 언급하고, 베버와 더불어 다양한 법적 영역들의 분화와 훈련된 법률가들의 발전 그리고 행정과 정의를 집행하는 국가 공무원을 언급한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관료와 법률가나 교수들로 임명된다 (Political Theology, 44).
그러나 슈미트가 프랑스 혁명에 반감을 표시하고 베버의 법사회학을 관료제로 파악하고 이것을 자신의 전제지배의 틀에서 수용하는 곳에서, 역으로 베버는 프랑스 혁명을 가능하게 한 서구 전통의 사법적 합리성을 중요하게 검토한다.
이것은 힌두교의 미만사 학파나 아슬람의 종교 법학자들 (울레마) 보다는 고대 로마의 공화제와 사법체계에 있다. 이러한 정치적 합리성이 중세기에서 기독교적인 법적사유와 접합된다. 이러한 사법적 합리성은 기독교적 자연법과 함께 화란에서, 특히 칼빈주의 저항권자들(모나코막스)에게서 드러나며, 베버는 프랑스 혁명에서 변호사 출신들의 주도적 역할에 주목했다.
이러한 법사회학적 접근에서 베버는 서구 민주주의와 혁명이 사법적 합리성에 기초되며 프랑스 혁명의 정신 임을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래 근대의 변호사와 민주주의는 절대적으로 같이 속한다"("Politics as a Vocation," From Max Weber, 94)
베버의 사법적인 합리성은 슈미트가 주권개념의 사회학을 통해 사법체계를 넘어서는 개인 지도자의 전제지배를 지지하지 않는다. <정치로서의 소명, 1919> 에서 베버는 정치 지배론을 독재나 민중선동에 근거짓지 않았다.
베버의 정치소명론은 공정한 행정과 도덕 그리고 책임에 기초한다. 책임윤리는 도덕적 훈련과 자기부정, 그리고 공정한 행정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베버는 종교에서 나타나는 심정 (예언자적) 윤리와 정치가의 책임윤리를 분리시키지 않고, 접합 시켰다. 그러나 슈미트는 베버의 <소명으로서 정치>를 그의 정치신학에서 윤리적 차원을 위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슈미트에게서 가치중립과 비정치적인 영역 ㅡ 종교, 문화, 교육, 경제, 언론 등ㅡ은 통제국가로 포섭되어야 하며, 국가와 사회는 하나가 된다. 일당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에서 시민사회의 영역들은 정치화가 된다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22).
20세기의 통제 국가는 모든 영역을 정치화하는 국가인데, 여기서 민주주의는 모든 다름과 구분을 제거하는 균일화로 이해된다. 모두가 국가권력과 지도자를 한 마음으로 지지하면서 균일화가 된다. 이것은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일당에 의해 주도되는 파시즘 통체국가이다.
물론 베버는 민중선동 정치가 민주주의 형식으로 나타난 고대 그리스 정부 형태를 알고 있었고 , 특히 그는 페리클레시스에게 민중선동정치를 사용하지만, 개혁운동가인 클론에게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ibid, 96).
슈미트가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무분별하게 독재자에게 적용하는 것과는 달리, 베버는 의회 민주주의 안에서 관료제의 문제를 비판하고 책임과 심정윤리에 기초한 소명의 정치가를 언급할 때 사용했다. 베버의 민주주의는 슈미트와는 정반대로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베버에 의하면 프랑스의 역사에서 케사르 주의를 자신의 구테타 통치와 동일시한 사람은 율리우스 시저의 숭배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제 2공화국에서 대통령 직에 있다가 (1848-1852), 1851년 쿠테타에 성공해 1870년 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자신의 통치를 사회적 케사르주의로 부르기도 했다.
베버는 이런 포퓰리즘과 정치현상을 미국의 정치에서 보고 경멸했다. 정치적 소명이 아니라 권력에 눈이 돌아간 모리배들이 판을 친다. 민중 선동주의나 케사르주의는 관료지배와 더불어 현대사회에 깊숙히 들어와있다. 이것은 슈미트가 원하는 정치적 결단주의로 쉽게 간다. 항상 인종과 민중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이것은 파시즘으로 가는 길목이다. 생활세계는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적 부를 장악한 소수의 그룹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상업성의 지배로 파시즘화가 되고, 사물화로 변질된다. 집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사회는 병든다.
슈미트와 클라우제비츠
공공신학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거절하고 일상의 파시즘화에 저항한다.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슈미트처럼 적과 원수의 이분법을 기초로 생사를 건 파시즘적인 생존이나 권력투쟁과는 상관이 없다.
물론 헤겔은 매개와 인정이 사라지는 점을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에서 보았고, 이것을 절대자유의 문제로 파악했다. 타자의 배제를 향하는 절대자유는 공포정치를 낳으며 결국 비오폴리틱은 기요틴에서 네크로폴리틱 (살해정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살해정치를 우리는 이미 서구 식민지 역사에서 특히 노예무역과 19세기 아프리카 분할정책에서 본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자행한 콩고 자유국가 (1885-1908)에서 천만명 정도의 제노사이드는 식민지배가 변증법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벨기에의 식민지 정치를 지원해준 것은 비스마크스가 주도한 베를린 컨퍼런스 (1884 -1885)였다. 결국 슈미트가 정치적 결단주의로 주장하는 독재자의 무제한 권력은 역사에서 제노사이드로 막을 내린다.
물론 슈미트에게 두 가지 정부형태가 존재한다ㅡ파시즘 이전 힌덴베르크 대통령 권한을 초법화하고 관료제와 병력사용을 통해 독재구축을 정당화는 것이다. 파시즘의 첫 단계이며,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이 부각된다.
그런가하면 1933년 힌덴베르크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을 때 슈미트는 그해 3월 제국의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제국가를 위해 여전히 이전 정부의 중요한 내용을 흡수하고 이용한다.
통제국가는 지도자의 무제한적 카리스마 권력과 일당의 관료지배 그리고 국가보안을 강화하는 비밀정보조직과 경찰력 강화로 나타난다. 언론통제와 군대 절대통수권을 통해 일체의 시민사회 영역은 국가정치화 되고,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은 통제국가 모델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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