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트의 파시즘적 환상
슈미트는 리버럴 사법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자체가 동지와 적을 구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상사태에서 정치 지도자는 모든 정당과 조직 그리고 사회 제도를 넘어서서 군사력과 관료제를 기초로 모든 국민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모든 정당들은 시민사회의 복지와 안보와 질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지지하고 연합해야 한다.
국가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위기를 사회학적으로 고려하면서 슈미트는 입법체계를 개인 지도자의 무제한 권력에 예속시킨다. 그러나 그는 무제한 권력이 사회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애써 피해 간다.
그러나 슈미트와는 달리 국가적인 재난의 상태에서 사회학은 오히려 시민사회와 더불어 국가권력이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행사되고 위기가 극복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물론 2001년 뉴욕의 이슬람 테러에서 죠시 부시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와의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비상상태가 테러와의 글로벌 전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 부시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사법적 민주주의 틀 안에서 행사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슈미트가 사법적 민주주의에 나타나는 위임적 독재형식인 행정 명령권을 주권독재와 구별하는 것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대통령의 위임적 독재권이 보다 더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감시되지 않을 경우 세계는 전쟁으로 위기를 경험하게 한다. 이것은 "지구지배를 위한 전쟁들" (니체, Ecce Homo)로 언제든지 출현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리고 미중 간의 대립에서도 목격하고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사회학적 결단주의에 속하지만, 그러나 사회의 위기나 재난을 사회학적으로 검토하는 민주적인 절차는 없다. 이러한 정치신학은 칸트의 코스모폴리턴 주의를 유엔을 통해 입법적으로 파악하고 연방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켈젠의 시도에 대립한다 (Political Theology, 19).
결단주의와 전제적 정당성
슈미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상사태에서 독재자의 권한은 정치적 결단주의에 기초되며, 거대한 리비이어던이 출현한다. 국가의 보호와 국민 복종의 결합은 결국 히틀러의 파시즘 정치를 배태한다.
더욱이 슈미트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신앙의 형식이 근대사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는 나치즘의 신학자 고가르텐의 입장을 수용하고, 전적타자인 하나님을 비정치적 하나님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전적인 타자이다. 정치적 리버럴리즘에서 국가와 정치 그리고 교회는 전적타자로 기능한다.
그러나 슈미트에게서 정치지배는 총체적이며, 비정치적인 것이라곤 없다. 심지어 비정치적인 것도 결국 정치적 결단에 속한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총제적으로 지배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이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통제적 지배다.
<국가, 운동, 민족, 1933>에서 슈미트는 일당 중심의 국가를 제도화하고, 시민사회와 사회조직, 교회를 전제 지배로 흡수했다. 그리고 홉즈의 사회 계약론을 슈미트는 정치 결단주의의 고전적인 유형으로 분류했다 (Political Theology, 33).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즐겨 인용하는 토마스 홉즈의 <리비이어던, 1651> 26장에 나오는 라틴어 문장이다. 그러나 존 로크는 법이 권위를 준다고 정반대로 주장했다.
토마스 홉즈(1588-1679)는 슈미트의 정치적 결단주의에 교부 격이 된다. 슈미트는 20세기의 토마스 홉즈로 불린다.
그러나 나는 주저한다. 홉즈와 슈미트의 관계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은 내재적 비판을 요구한다. 홉즈는 오히려 26장에서 국가의 입법자가 주권자임을 명시한다. 국가는 이러한 입법자의 법안과 규정을 명령하고, 시민법을 통해 시민을 지배한다. "입법자만이 주권이다."
여기서 홉즈는 사회계약과 합리적 도덕을 기초로 한 입법주의 틀에서 만, 국가의 권한을 부여한다.
자연상태에서 빗어지는 투쟁과 전쟁 상태를 막기 위해 홉즈는 도덕이론을 사회계약을 통해 주권으로 특징지었다. 그는 계약의 정당성을 통해 국가-리바이어던이라는 유한한 신을 만들어낸다.
홉즈의 탁월한 점은 아리스토텔스와는 달리 개인의 가치를 권력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안전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홉즈는 연방 국가의 절대적 권력의 필요성을 국민 승인을 통해 창출했다.
슈미트의 정치권력은 토마스 홉즈의 <리비이어던>에 의존하고, 기독교의 창조의 모델을 통해 파악한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유산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거절하고, 홉즈의 <리비이어던>의 41장을 동지와 적의 이분법으로 급진화시켰다. 투쟁과 죽음의 가능성이 정치적인 중요성을 얻는다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35).
이러한 입장은 홉즈보다는 오히려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이론에 가깝다. 전쟁은 정치의 단순한 수단이다.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가장 명백해진다.
그러나 홉즈는 4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종말과 심판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홉즈는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구와 적의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편적 지배에 서 있는 걸로 보았다.
홉즈는 자연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사회계약론으로 발전시켰지, 슈미트처럼 동지와 적의 이분법을 통해 죽음을 각오한 정치적 실존 투쟁으로 말하지 않았다.
홉즈에게서 정치영역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동지와 적으로 진영논리화 해서 권력 투쟁을 실존적으로 강조하는 걸 보기가 어렵다. 헤겔처럼 생사를 건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이 홉즈에게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 가?
물론 슈미트는 예속자들로부터 오는 헤겔의 인정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정치 윤리는 적을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실존론적 생존투쟁에 의해 삼켜져 버린다. 오히려 헤겔을 스탈린 독재로 왜곡시킨 알렉산더 코제브가 슈미트에 관심 할 것이다.
그러나 홉즈는 창조가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 기초해 하나님의 주권지배로 파악하고 국가 권력을 설정했다. 홉즈가 신성 로마제국에 저항하고 중세의 왕권신수설에 저항한 반 가톨릭적이라면, 슈미트는 반 계몽적이며 반 근대적이며 반 유대주의적 파시즘 정치를 구현한다.
슈미트는 홉즈를 짝퉁으로 해석했다
슈미트는 <토마스 홉즈의 국가론 리비이어던>에서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보호해야 하는 신체 정치학적 차원에 주목했지만, 그 대가로 개인의 무조건 복종을 강조했다.
총제적인 전제 지배를 위해 슈미트는 홉즈가 사적인 영역에서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을 비판했다. 리버럴 헌법 체계 안에서 홉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했고, 슈미트와는 다른 신학적 반성을 보인다.
홉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성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고려했고, 이성과 신앙은 하나님의 보편적 지배 아래 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국민의 공동승인에 기초되며, 자연법은 하나님의 율법아래 있고, 도덕적 덕목들을 강화한다 <리비이어던> 31장.
국가 리비이어던은 하나님의 정의와 도덕법에 봉사하는 한, 선한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율법의 제1기능에 속한다.
홉즈의 국가론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립하는 오이코노미아 신학을 지적한다. 그것은 이성에 기초한 사회계약과 국민주권 그리고 공동 승인을 통해 어떻게 사회를 다스리는 가에 있다. 이것은 근대이전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군주제--"짐이 곧 국가다"--와는 전혀 다르다.
홉즈는 <리비이어던>에서 심지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때 불복종 권리와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선이 아니라 국가의 연방법을 통해 제도적인 사회 안전망이 제공되어야 한다 (21장, 30장). 국가는 윤리적 기능을 가져야 하고 시민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정승훈, <공공신학과 학제적 소통이론>, 209-232).
유럽국가들의 근대체제는 30년 전쟁(1568-1648) 이후 베스트팔리아 조약에서 표현되었다. 이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원칙 (1555) --지배자의 지역이 지배자의 종교다--을 재확인했다. 더 이상 가톨릭은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지역국가나 주권영역을 침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종교의 관용의 시대가 열리고 서구의 근대국가는 가톨릭의 전제국가이론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홉즈의 <리비이어던>은 개별 연방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한다. 홉즈의 리비이어던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설령 슈미트가 홉즈의 정치이론을 루이 14세로 착각하는 것이 그의 자유 일런지 모르지만 짝퉁에 불과하다 (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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