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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4)

by 파레시아 2023. 3. 1.

성서의 내적역사: 예레미아의 새 언약
 
예례미아의 새 언약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과 다니엘의 인자 메시아와 더불어 복음서와 사도바울의 화해의 복음에서 중심의 자리를 갖는다. 마틴 노트가 신명기 학파 이론을 제시한 이후, 예례미아에 대한 연구는 신명기적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신명기 사가들이 포로기에서 현재 예례미아 텍스트를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편집했다면, 그것은 토라 중심적이며 야훼이스트 입장을 갖는다.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는 핵심담론 또는 주제(Sache)의 빛에서 예례미아를 이해하는 방법일 수가 있다. 이것은 예례미아 본문에서 애매함이나 해명을 요구하는 영역에서 본래의 이념으로 등장하고 해석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예례미아 텍스트는 자신의 독특한 생활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예언서들과의 관계 안에 서 있다. 이러한 관계의 텍스트는 독자에게 대화와 비교적 분석을 요구한다. 이러한 대화와 비교분석의 과정에서 의미는 새롭게 등장하고 스펙트럼이 넓혀진다. 예례미아 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적인 체험과 파토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목숨을 거는 파레시아적 태도는 독자에게 깊은 감명과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텍스트의 생활 세계가 언어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해석학적 경험을 제공한다.
 
텍스트는 예례미아의 역사 사회적 콘텍스트를 모르고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콘-텍스트는 동시대적인 텍스트를 의미하며, 더 이상 텍스트-콘텍스트의 양자택일은 무의미하다.  예레미아가 서 있던 사회적 삶의 자리는 하나님을 체험한 구체적인 자리이며, 그는 예언의 말씀 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정치를 위해 왕실정치와 성전주의자들과 투쟁을 벌였다. 예례미아의 삶을 뒤흔든 사건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유다의 북쪽에 위치한 바벨론의 군사력 뿐만 아니라 예례미아는 유다의 남쪽에 위치한 강대국 이집트의 국제정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유다는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 완충국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고,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아왕 (639-609)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것을 말해준다 (왕하 23: 29-30). 그는 당대 발견된 신명기를 기초로 반 앗시리아 운동을 전개했고, 이집트의 느코 2세 (주전610-594)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느코는 친 애굽의 여호와김(609-598)을 유다의 왕으로 세웠다.
 
유다의 왕들은 두 강대국들과의 타협을 통해 현실정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요시아 왕의 아들 여호와김은 이런 위험한 정치게임으로 인해, 느부갓네살의 역린을 건들고 바빌론은 더 이상 이중게임을 묵인하지않고 예루살렘에 첫번 째 침략을 했다 (598). 주전 603년부터 유다는 바벨론에 조공을 받쳤다. 598년의 침략으로 인해 여호와김은 정적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왕하 24: 2.렘 35: 11).
 
그의 아들 여호와긴은 18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석달도 안되어 바빌론으로 유폐되었다. 거기서 오랫동안 타이틀만 가진 유다의 왕으로 머물렀다. 남왕국 유다의 많은 고관들도 그와 함께 유폐되었다. 여호와김의 다른 아들 시드기야 (여호와긴 왕의 삼촌)이 왕위에 오르고 주전 597년부터 586년 사이 예루살렘을 다스렸지만, 그는 바빌론 앞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많은 고관들과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여기에 에스겔이 있었다.
 
이 시기에 시드기아를 지지하는 예루살렘파 여호와긴을 적법한 왕으로 지지하는 바빌론파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냐를 축으로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활동했고, 야훼가 바벨론을 심판하고 2년내 포로를 귀환하게 할 것이라 주장하는 선동그룹이었다 (렘 28:2-3). 예레미아는 바벨론의 포로민들에게 이런 거짓선동에 미혹 당하지 말고 그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을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렘29: 5-7).
 
포로민 가운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예레미아의 새언약을 이어가게 하셨다. 물론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오기 전 593년부터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571년까지 바벨론에서 활동한 예언자였다. 587년 바벨론은 남왕국 유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독립 국가로서의 생명을 끝장냈다.
 
예례미아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삶의 배경에서 왕실의 현실정치와 거짓 예언자들의 선동과는 다른 대안, 즉 이스라엘의 신앙의 계약을 부각시켰다. 야훼의  계약에 대한 신실한 태도와 함께 예례미아의 체험과 그의 신학은 국제정치를 판단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신명기 사가의 계약의 주제는 예례미아의 신학과 융합되면서, 이제 야훼의 새언약 (렘 31: 31-34) 이라는 전혀 다른 파라다임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벨론 침략은 신학적으로 시내산 계약을 어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역사 사회학적 분석과 문헌비평을 통해 필자는 서구학계에서 행해지는 스테레오 타입한 논쟁, 즉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오리지널” 예레미아인가 아니면 “신명기 사가에 의해 편집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예레미아를 만나고 어떤 소명을 주었으며, 이러한 예언자적 소명에서 예례미아는 어떻게 당대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 했는가? 이러한 텍스트의 생활세계에 대한 사회적 문헌비평을 통해 우리는 예례미아 당대 다른 예언자들의 입장을 비교검토하고, 신명기 사가의 주제인 계약신학이 어떻게 새로운 파라다임인 새계약으로 열리는지 주목한다. 그리고 예례미아가 서 있던 정치 사회적 자리는 사회과학적으로 또는 문화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두텁게 기술될 필요가 있다.  
 
사회학적 분석은 구조와 시스템으로부터 예례미아의 예언자적 소명과 투쟁을 접근한다. 텍스트의 사회적 구성에 영향을 준 국제정치와 예루살렘 왕가의 현실정치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지지한 예언자들과 사제계급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지지하는 백성들의 여론 과 태도를 검토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왜 예례미아가 그토록 급진적으로 왕실정치와 거짓 예언자들을 공격했는 지 알게된다 (Wilson, Sociological Approaches to the Old Testament).
 
신앙과 도덕과 물질의 이해관계와 정치권력은 서로 엮어지며, 종교적 담론이 물질적 이익과 권력관계 그리고 정치적 정당성에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지 분석 되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자의 의미있는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언약을 통해 어떤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미래를 향해 의미론적인 지평을 열어준다.
 
의미론적 순환과 지평확대
 
브루거만은 <예례미아 주석>에서 신학적 의미와 사회적인 연관성을 무게있게 취급 하면서 예례미아의 새언약을 분석한다. 여기서 논쟁거리는 죄로 인한 삼대째 저주 메시지가(출 34: 7)가 어떻게 예례미아의 새언약에서 극복되는 지에 있다.
이미 베버는 그의 저명한 <고대 유대교>에서 이것을 유대-기독교 신정론의 토대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욥의 문제는 예례미아에게서 새언약으로 “지양”되고, 바울은 새언약의 복음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보았다. 더 이상 바울에게서 욥의 신정론의 문제는 찾아 보기가 어렵다 !
 
텍스트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의미지평의 확대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동시대화가 되고 시내산의 토라계약은 오히려 신명기 사가의 율법주의적 경향을 넘어선다. 모세가 야훼의 자기 계시를 드러나는 출애굽 34장 6-7절은 주님의 13개의 미토트 (성품)을 담고있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에 속한다. 이제 야훼 자신이  죄로 인해 본인과 삼사대까지 내리는 저주를 철회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양'에 속한다.
 
부르거만은 새언약의 본문 (31: 31 -34)을 분석하면서 기독교적 대체로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시내산의 토라는 낡고 폐기된 것이며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새언약이 교회에 의해 실현되었다. 다시 말해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시내산의 낡은 계약을 대체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체주의에 반대하면서 부르거만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헌신한 폴 반 뷰렌의 입장에 수긍하고 구약과 신약의 구분 자체가 오류라고 반박한다 (Brueggemann, A Commentary on Jeremiah, 292).

하나님은 예례미아의 새언약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유다의 회복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렘 31: 29-30). 야훼는 시내산 계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이들의 가슴 속에 넣어주며 마음판에 새겨 기록할 것이다. 야훼가 이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이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31: 33-34).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새언약을 에스겔 (11:19)에게 재확인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에스겔의 중요한 신학적 이념이 나타난다. 야훼는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과 같이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이들의 성소가 되어 주신다 (11:16). 하나님의 유배신학은 예례미아의 새언약에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확대된다.
 
출바벨론의 신학은 신명기 사가의 언약을 넘어서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하나님의 유배 신학으로 심화된다. 누가는 이러한 차원을 오순절의 성령강림에서 파악했다. 이제 새언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순절 강림에서 요엘의 예언에서 성취된다 (행 2:17).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신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의 토대가 된다. 부활의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2:33).
 
요엘은 360년에서 350년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보이며, 느혜미아가 완성한 도시축성 (주전445)을 언급한다 (욜 2:7, 9). 요엘은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 정치를 알고있다. 그의 성령신학은 느헤미아-에스겔 (36: 26)에 관련된 새언약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요엘은 에스겔 39: 29절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고국으로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쏟는다. 
 
출바벨론 전통의 새언약과 성령의 부어주심은 누가-바울의 신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초대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동시대화가 된다. 누가의 오순절 신학은 바울의 새 언약의 복음에서 현실화가된다. 우리는 새언약의 일꾼들이며,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영으로 우리의 가슴판에 쓰셨다. 이제 우리는 토라의 계약의 너울을 벗게 되고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른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고후 3:17). 이러한 새언약은 화해의 복음이며 화해는 토라의 계약을 완성한다. 성만찬은 새언약을 의미한다.
 
칭의론과 하나님의 유배의 신학
 
예레미아의 새언약을 둘러싼 일대 논쟁은 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서 시작되었다. 불트만이 복음을 율법의 마침표로서 새언약을 시내산 토라의 계약을 헤체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불트만의 해체주의에 바르트는 가장 강력한 비판가로 등장했다. 그리스도의 회해의 복음 안에서 시내산의 토라계약을 새 언약으로 완성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보편적인 예언의 역사에 연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에 유보함이 없이 가장 가깝게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정확한 선례나 또는 진정한 유형을 이스라엘의 역사 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CD IV.3.1: 52).
 
바울은 70인역 신명기에서 인용한다.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신27:26; 갈 3:3). 그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해석하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마지막 시간에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 에서 차별없는 복음으로 실천된다 (갈:28). 그러나 바울의 미드라쉬에서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 나타나지 않는다. 시내산의 토라계약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 안에서  심찬토라, 즉 기쁨과 은혜와 복으로 누려져야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수천 대에 이르는 복 (출 34:7)이 그리스도를 통해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로 왔으며, 유대인들과 더불어 공동의 상속자가 된다 (엡.3:6). 여러분은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엡2:8).
 
이러한 바울의 칭의론 안에는 하나님의 유배 신학적 모티브, 즉 십자가 신학이 담겨져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아들의 십자가에서 예수와 연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픔과 파토스가 바울에게 이어진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남겨진 칠천명을 기억할 것이다. 로마의 유배의 어둔 밤에서 하나님은 쉐키나를 통해 이들의 성소가 되어주신다. 메시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를 걷어내고 영원한 생명을 열어 놓았다. 이제 칭의론은 하나님의 유배의 신학을 남은 자들의 공동체 신학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바울의 칭의론은 예례미아의 새언약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로 전개되며, 삼 사대에 이르는 죄의 저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바울에게서 메시아의 화해의 복음안에서 재해석이 되고 차별없는 공동체를 향한 인정투쟁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예례미아의 새언악은 예수 당시 에세네파에서 “의로움의 선생”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리새파 출신 바울은 자신의 랍비적 전통에서 메시아 예수 안에서 새언약이 완성된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새언약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한 것임을 말한다 (롬11).  바울의 칭의론은 구약의 묵시적 지평에 서 있다.
 
헬라주의화와 정치적 상황
 
주전 398년 까지 유대의 종교권위는 아론과 사독 집안 출신의 대제사장에 의해 다스려지고, 페르시아의 지배아래 전통적인 토라의 법전을 확립했다. 330년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연합군에 의해 패배당했다. 그러나 토라의 원리와 사제적인 패라다임은 알렉산더 대왕의 고대근동을 정복한 이후, 헬레니즘의 세계화는 수 만명의 그리스인들과 마케도니안들을 정복지역에 대한 이주정책으로 이어졌다. 헬라어는 팔레스티나에서 아람어를 대신하고 국제적인 관계에서 상업과 외교의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갑작스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인해 뒤를 이은 프톨레미우스가  이집트와 팔레스타를 통치하였고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정하였다. 셀루시드는 북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을 지배했다. 프톨레미우스가 이집트와 유대를 통치했을 때 (320-198), 관용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프톨레미우스 2세 (285-246)의 정책에 힘입어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이집트에 거주하는 헬라어 사용권의 유대인을 위하여 히브리 성서를 250년 경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 했지만, 예언서들과 다른 성서본문들은 75년경 완결 되었다. 헬라어 번역 성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에 따라 70인역으로 불린다. 아훼의 신명은 70인역에서 사라지고 주님 (퀴리오스)으로 번역되고, 신약성서는 70인역을 인용했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후 랍비 공동체는 70인역이 지나치게 헬라 문화에 순응적이고 초대 기독교인이 사용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의 번역이며 사해사본과 더불어 본문비평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신약성서의 70역 인용은 히브리 성서와 비교 검토하면서 새로운 의미지평으로 확대된다.
 
프톨레미우스 왕조에 반감을 품은 셀루시드 왕 안티오쿠스 3세 (223- 187)는 프톨레미우스 5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유대지역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175년 왕위를 계승하고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 야손을 대제사장직에 임명하고 친 헬라정책을 시행했다. 오니아스 3세는 당대 기름부음을 입은 메시아적인 인물로 존경되었지만 170년도 친헬라주의자 멜라니우스의 음모에 의해 살해 당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유대인뿐 만 아니라 헬라인들까지 슬퍼했다 (마카베오 2서 4: 34-45).
 
예루살렘에 헬라의 제도들과 김나지움 그리고 경기장이 설립이 되고, 여기서 시민들은 헬라 문화적으로 교육 되었다. 171년과 169년 사이에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와 점령하고 로마를 격퇴시켰다. 그는 멜라니우스를 대제사장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야손은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 원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장대를 조직해서 저항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안티오쿠스는 유대 지방에서 유대교의 법을 철폐하고 이방군대의 주둔 요새지를 만들고 제우스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안에 세워 놓았다. 167년 12월 이방제의에 따라 희생제사가 시행되고 유대인 헬라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먹고, 할례금지와 안식일을 폐지하고 토라의 두루마리를 파괴하라고 강요했다. 헬라적 삶의 방식에 순응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헬라적 도시 스타일로 변형시키려고 했다 (마카베오 2서 4: 9).
 
다니엘의 묵시와 마카베오 반란
 
성전 모독의 해는 주전 167년에 시작이되고 (마카베오 1서 1: 54), 이에대한 저항운동은 제사장 마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마티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에 의해 지속되고 마침내 164년 성전산을 점령했다. 그해 12월 14일 성전은 정화되고 성별되어 8일 간의 축제 (하누카)가 행해졌다. 유다가문에서 하스모니안 왕조가 시작 되었지만 이후 로마의 후원을 입은 헤롯에 의해 점령 당했다 (주전 37).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건은 다니엘의 묵시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다니엘의 묵시에서 성전정화는 167년 12월 부터 164년 사이에 이천삼백주야가 지나야 가능해진다 (단8:14). 안티오쿠스  4세의 성전 훼손으로 인해 1150일의 저녁과 1150일의 아침마다 드려지는 제사가 폐해진다. 1150일은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서 성도들이 괴롭함을 당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 (3년반=1260일, 단 7: 25)에 비교된다. 그러나 그는 심판으로 인해서 멸망할 것이다 (164년 11/12월).
 
흉칙한 것이 세워져 천이백 구십이 지날 것이며, 천삼백삼십오일까지 이르는 사람은 복이 있다 (단 12: 11-12). 167년 성전 훼손과 가증한 것의 세워짐, 그리고 안티오쿠스의 패망이 예언된다 (단 11:40 -45). 1150일 동안 성전은 훼손되는 데 167년 12월 부터 164년 12월 간의 3년을 의미한다 (단 8:14). 흉측한 것이 세워지고 제사는 없어지며 1290일이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1335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리면서 참는 사람은 복이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은 박해의 시간을 3년으로 줄어주셨다. 
 
바벨론에서 70년 유배기간이 지나고 예루살렘 성전회복이 되지만 (렘 25: 11-12; 29:10),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장차 나타날 미래의 사건을 가르친다. 이스라엘의 부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경륜의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이래 (70x7=490년)로 기한이 정해진다. 예레미아의 70년 복역기간은 이제 천사에 의해 490년의 어려운 시간으로 펼쳐진다. 이 기간에 가장 거룩한 곳 (예루살렘)에 기름을 부으며 성별된다 (9: 24).
 
다니엘의 묵시적 시간과 경륜의 빛에서 볼 때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고레스 칙령이후 (539) 기름부은 왕이 오기까지 일곱 이래 (49년)가 지나야 한다. 그리고 예순 두이래 (62x7 =434년)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 되지만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의 유폐기간 (587-538)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스룹바벨과 대세자장 여호수아의 주도로 515년도에 세워졌다. 49년이 지나서 기름부은 왕 (나기드: 지도자)이 세워진다. 예루살럼 성전정부는 페르시아 지배 아래 유다를 다스렸다. 에스라-느혜미아 개혁의 시기 (458- 430)가 있었다.
 
요셉푸스는 450-330년 사이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자신의 형제 요하난에의해 성전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말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느혜미아 시절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엘리아십의 손자였다. 엘리아십은 이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손자였지만 도비야에게 레위에게 허락된 방을 사용하고 성전재물을  남용한 일로 면책을 당했다  (느 13: 4-7).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 당하기 까지 예루살렘의 귀환자들의 시간은 개혁과 인종정책 그리고 성전권력투쟁으로 부패한 정치로 얼룩진 시간이었다.

묵시적 시간의 관점에서 가브라엘이 말하는 490년 (70이래)은 세 개의 시간 단위로 분류될 수 있다: 587-539년 (7이래), 539-170년 (62이래), 170-164년 (1이레—성전훼손의 시간). 바벨론 70복역의 해는 586년(성전파괴)에서 515년 (성전재건)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70이래의 묵시적 시간 안에서 가장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에 기름이 부어지고 성별되며 (9: 24), 예순두이래 (434년)가 지난 후 기름부운 왕은 부당하게 살해된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 예루살렘 성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기름부은 왕은 앞서 언급한 170년도 살해 당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말할 수 있다 (마카베오하 3:1). 그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메시아적 인물로 간주 되었지만 토비드 가문의 제사장 출신 메넬라우스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했다.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7년간 계약을 맺지만, 3년 반이 지날 때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이다 (167년) (단 9:27; 11:31; 12: 11). 그리고 마지막 해에 예루살렘을 황폐하게하는 왕이 출현한다. 이러한 대환란에서 순교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날 것이다 (12:2-3). 다니엘 7-11장은 묵시적 장르에 속하며 안티오쿠스의 몰락 후 마지막 다섯번째 제국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국을 말한다.
 
묵시의 시간개념은 카이로스 (지금시간)나  자기멋대로 하나님의 파국적 사건을 점치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묵시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은 자이며 현재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여기에 순응하거나 만족하지 않는다. 묵시 예언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통찰하는 자들이고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보는 사람이다. 이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말하는 프로렙시스 개념이다.
이것은 판넨베르크가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프로렙시스(예기)로 왔다는 해석이나 몰트만이 다가오는 아드벤트와 달리 미래화된 경륜구조 즉 현재화된 아폴칼립시스를 담는다.

예언서와 묵시주의

예언서가 정치적 상황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가라고 경고 하지만, 묵시문학은 미래화된 경륜(프로렙시스)에서 역사를 종결된 것으로 본다. 고전적인 예언의 종말론적 약속은 먼 미래에 일어날 마지막 날에 관련 되지만, 묵시문학은 이방의 지배라는 임박한 미래와 이스라엘의 구원을 지상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통해서 말한다. 예언자들은 국권이 있을 때 가능한 비판적인 사회정의와 계약의 말씀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묵시가는 포로기에 아무런 국권이 없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어가는 신비한 미래의 세계와 경륜를 깊은 통찰로 파악한다.
 
묵시주의자의 특징은 하늘의 세계를 방문하고 하나님을 둘러싼 천사들의 이름들과 하늘의 궁전과 제단의 방들을 언급한다 (에스겔은 예언자이자 묵시주의자의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예언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 분류된다. “지혜있는 자는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다.” (단 12:3)
 
다니엘은 하늘의 궁전을 여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티오크스 4세의 이름을 그의 묵시에서 언급하지도 않는다. 대재난은 이후 복음서에서 다니엘의 묵시와 관련하여 다시 읽혀진다. 다니엘은 평화주의자로 나타나며 마카베오의 저항은 작은 도
움 정도로 말한다 (11: 34). 안티오쿠스 4세의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조금 도움을 받겠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술책을 쓰면서 적군과 한 패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묵시주의의 태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혁명을 말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견고한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기있게 버틴다 (단 11:32). 예언서와 달리 죽은 자들의 부활이 다니엘의 지혜의 묵시에서 언급된다 (12:2-3). 욥과 같은 신정론의 문제는 다니엘의 묵시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해결된다 (Seltzer, Jewish People, Jewish Thought,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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