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파는 누구였나
출바벨론의 역사적인 경험과 신명기적인 파라다임은 출애굽 사건을 해석하고 토라와 예배와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특징짓는다. 이것은 바리새파의 기원을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 할 때 동행한 그룹으로 보게도 한다 (The Talmud, trans. Bokser, 9). 그러나 마카베오에 의해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가에서 바리새파의 기원을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다 더 정확하다. 이 그룹은 알렉산더 야네우스 통치시절 (기원전 102-76) 헬레니즘 정책에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아내 살로모 알렉산드라 (76-67)가 권력을 계승헸을 때 바리새파를 우대하는 정책을 썼다.
하스모니안 왕가와 바리새파 저항
정치적 발전을 고려할 때 하스모니안 왕가는 요한 히르카누스 (135- 104), 아리스토블루스 1세 (104- 103) 그리고 알렉산더 얀네우스 (103-76)에서 그리스 도시들과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팔레스티나와 트랜스 요르단을 지배했다. 얀네우스 통치기간동안 하스모니안 왕국은 거의 왕년의 다윗의 왕국에 필적하는 영토를 (남부 네게브와 시리아를 제외 하고) 점령하고 셀루시드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와 협약을 맺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에 도전한 그림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이두메이아와 갈릴리를 유대화시켰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증오관계로 들어갔다. 에스라-느헤미아의 반 사마리아 정책이 여기서 반복된다.
하스모니안 왕국은 초기 마카베오의 반헬라주의와는 달리 친헬라주의로 동화되었고, 마카베오 혁명을 지지했던 하시딤 (경건한 자들)들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이후 바리새파의 원조로 볼 수가 있다. 영토확장을 통해 하스모니안 왕국이 부를 축적하기 시작 했지만, 이러한 경제적 혜택은 왕가를 위한 것이었지 백성들의 삶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히르카누스는 대제사장직을 겸하고 성전경제를 장악했고, 신흥 부자와 귀족계급으로 등극한 사두개파들을 등용하자, 하시딤들의 저항은 만만치가 않았다. 얀네우스 통치기간에 이러한 갈등은 내전으로 돌입했고, 대부분 백성은 하시딤-바리새파들과 연대를 했다. 마카베오의 반란 때 와는 달리, 이제 바리새파들과 백성들은 얀네우스를 유대 헬라주의의 부패의 상징으로 공격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심지어 내전을 주도한 바리새파들은 셀루시드 군대와 협약을 맺고 88년도 하스모니안 왕가를 타도했다. 그러나 셀루시드 왕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민족감정을 고취시키면서 얀네우스를 재 등용하자, 그는 바리새파 반란자 800명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고 이들의 가족들을 처참하게 살육했다. 이러한 살해와 보복으로 인해 8천명의 반란자들이 도시를 탈출하고 일부는 쿰란파에 합류했다.
그러나 얀네우스 사후 그의 아내 살로모 알렉산드리아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여왕은 바리새파와 관계를 회복하는 정책을 쓰고, 이들에게 국내의 종교와 정치적인 일에 관여 하는 자격을 부여했다. 심지어 그녀는 바리새파들에게 이전의 왕의 살육행위에 대해 보복을 허락하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 2세는 권력장악을 위해 그의 형 히르카누스와 전쟁을 했지만, 히르카누스는 이두메니아 지도자 안티파스 (해롯 대왕의 아버지)를 지지를 얻고 있었다.
63년도 라이벌 정치분파들은 로마의 폼페이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아리스토블루스 2세를 로마로 압송하고 히르카누스 2세를 왕이 아니라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이후 유다는 로마의 행정통치를 받게되고, 갈릴리와 트랜스 요르단을 제외한 팔레스티나의 모든 영토들은 로마의 지배에 예속되었다. 이후 로마의 허락과 지원으로 헤롯은 유다의 분봉왕의 지위를 차지했다.
마카베오-하스모니안 통치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그리고 에세네파가 중요한 종교적 게층으로 자리잡았지만, 젤롯당은 주전 6세기에 바리새파로부터 갈라지면서 혁명적인 갈릴리인 유다의 주도아래 있게된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의 유대사회는 결정적으로 헬라의 정치와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사회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적 구조에서 율법을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사두개파와 바래새파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역사 사회학적 방법과 사회계층론
사실 마카베오-하스모니안 왕국은 초기 반 헬라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헬라적의 기술과 정치 군사조직, 그리고 문화적 스타일에 대한 순응정책으로 나갔고, 이에 대한 적대감은 하시딤-바리새파들에게서 정점에 달했다.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면서 하스모니아 정치는 종교를 지배 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바빌론 유폐이후 부터 행해진 정치와 종교분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하시딤은 토라에 대한 헌신자들을 조직하고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 조직은 토라 앞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평등을 강조하고, 유대인들의 삶을 침해하는 하스모니안 지배자들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게하르트 렌스키의 사회계층론에서 볼 때, 구 귀족제도는 상층 사제계급에 집중되어 있었고 막대한 성전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후예들은 유대인 헬라주의자들에 의해 몰락해갔다. 그리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지배자가 대제사장직을 탈취했을 때 귀족제도는 거의 와해되었다. 종교적 이념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그물망에서 정치지배로 드러나지만, 여전히 종교적 이념은 새롭게 부상하는 상인 계층에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나타났다. 고대 농업사회에서 권력과 특권의 변증법은 종교에 기초되며, 지배세력과 예속된 계층의 인정투쟁은 사회 시스템 기능과 갈등을 헤겔적인 지양과 종합으로 파악된다. (Lenski, Power and Privilege).
하스모니안 왕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상인계층이 확대되고 무역과 토지 매매에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면서 하스모니안 왕가의 재정을 지원하고 있었다. 신흥 상인 계층이 새로운 부를 기초로 귀족으로 부상했고 정치와 경제 그리고 종교 문화의 영역에서 권력을 쥐기 시작했다. 이것은 새로운 부르즈와 에이전트에 의해 종교적 이념과 정치권력의 연계가 분명하게 드러난 실례가 되기도 한다. 사두개파는 종교와 정치권력 그리고 자본이 결합된 고전적인 '부르주아' 유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학적 반성은 하스모니아 시대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계급형성과 사회 계층구조를 종교적 이념과 변화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선택적 친화력을 통해 부각시킨다. 이러한 권력부상과 투쟁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민족지배의회(산헤드린)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데, 여기서 왕의 정책과 관리들의 임명 그리고 성전경제의 지배가 다루어지고 결정되었다. 이러한 신흥 상인계층의 귀족제가 사두개파를 형성했고, 구체제의 귀족제를 대신 하면서 종교의 사제층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이 종교를 기초로한 권력과 특권의 변증법이다. 고대 로마의 공화제의 빈곤계층이 '프로렐타리'로 분류되고 구약성서의 게르와 상응한다면, 사두개파는 '부르주아'의 이념형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는 종교, 권력, 특권을 둘러싼 신분상승과 계층투쟁의 역사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계급투쟁이나 경제갈등이론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헤롯 가문의 통치시절 구체제의 사제귀족들은 신흥체제의 사두개파들과 통합되면서 이들의 공동의 적인 바리새파와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산헤드린은 백성들의 대변하는 의회조직이었고 입법과 사법 그리고 왕의 정치에 조언하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기구는 이미 페르시아 통치 아래서도 예루살렘 성전정부에서도 존재했고, 이러한 정치기구 (게루시아)를 통해 유대인들은 지방의 자율성을 유지했다. 마케베오 시대 이전 에 게루시아는 하스모니안 왕국에서 산헤드린으로 이어지고, 왕가는 산헤드린을 통해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가 지배하면서 산헤드린은 여전히 “민의의 소리”로 존중되고, 지역의 자율성 또한 그대로 유지 되었다. 산헤드린에서 사두개파는 정책결정에서 하스모니아 왕가의 친 헬라주의를 표방하고, 바리새파들은 사회정치와 문화적 헬라주의화에 극도로 저항했다. 이러한 정치적 대결과 분파는 예수 당시 팔레스타니아의 삶의 자리를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특징짓는다 (Gottwald, The Hebrew Bible, 452).
팔레스티나: 종교와 신분계층
구약성서의 묵시문학적인 배경을 역사 사회학적—문헌비평적 접근에서 볼 때, 예수의 운동에서 드러나는 바리새파들과의 논쟁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가 활동한 갈릴리는 하스모니안 왕가시절 유대화가 되었지만 헬라화된 도시의 문명의 영향 권 안에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헤롯 지배에서 6천명의 바리새파가 있었고, 4천명이 사두개파들이 있었다고 보도 되지만, 당시 2백만명의 인구로 추정될 경우 그다지 대단한 숫자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귀족주의 제사장 사두개파에 대립하는 바리새파ㅡ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살았던ㅡ로 이분화는 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이러한 이항의 대립으론 사회계층의 위계질서와 복잡성을 파악할 수 없다.
앞서 본 것처럼, 사두개파의 권력과 특권은 토지소유 계층과 상인계층을 기초로 성전경제를 장악한 “부르즈와” 평민과 상급 제사장들 그리고 이를 권력으로 비호해준 헤롯 왕가의 결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여기에 종교이념 (토라와 제의)이 물질적 이해관계(특권)와 더불어 권력 구조 사이에 어떤 선택적 친화력이 나타나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광범위한 소외된 농민계층과 하급사제들, 소상점 주인들과 장인들 그리고 일용노동자들로 구성된 세력을 대변했다.
마카오베오 상에서 이미 사두개파들은 하스모니안 왕가에 충견들이었고, 바리새파들은 안티오쿠스에 저항을 한 유다 마카베오를 지지세력으로 말한다. 묵시문학들 (유딧서, 제 1에녹, 92-105, 그리고 솔로몬 시편)은 바리새파 서클에서 기원된 것으로 본다. 민족저항운동에서 종교이념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정치 사회경제적 갈등과 종교적 입장은 토라와 정결법을 둘러싼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사두개파는 정결법을 성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만 적용 했지만, 모세 오경외에 다른 성서본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토라의 배타적 해석을 통해 헬라화된 정치권력과 문화를 지지하고 개인적인 삶의 태도를 규정했다.
반면에 바리새파들은 이중적인 토라 (구전과 기록된 토라)를 지지하고 모세오경에 대한 상황적인 해석을 돌출해냈다. 바리새파 해석은 사두개파적인 해석과는 달리 폭넓은 삶의 영역 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토라를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바리새파들은 예언서들과 다른 성서 본문들을 받아들이고 사제계급과 평민을 구분하는 사두개파적 입장에 도전했다. 이것은 정치적 으로 볼 때 하스모니안 왕가의 지배정치와 문화정책 그리고 사두개파를 비호하는 부유한 계층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두개파를 제사장 계급에, 바리새파를 서기관에 동일시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 상급 제사장들이 사두개파들이지만, 모든 제사장들이 사두개파가 아니다. 많은 사두개파 들은 율법을 공부하고, 대부분 평민들이었고 서기관 직책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미 마케베오-하스모니언 왕가시대에 제사장들의 율법해석의 권위와 독점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건한 평민서클에서 율법해석이 나타났고 이들은 존중을 받았다. 하시딤-바리새파는 율법해석의 학교를 세우고 서기관을 훈련했다. 이들은 제의와 종교법의 분쟁에서 판결을 내리고 시민법과 형법에 관여한 평민출신의 전문 직업가들이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가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모든 바리새파가 전문적으로 훈련된 서기관은 아니었다. 직업으로서 서기관은 사두개파와 바리 새파가 공유하는 또는 이런 분파에 속하지 않지만 전문훈련을 받은 평민이 갖는 3의 직업 이었다.
에세네파는 종교와 정치에 대한 바리새파의 기본입장과 다르지 않지만, 오히려 이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율법 적용은 더 엄격했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국가와 사회로 부터 격리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들은 바리새파가 토라의 의미를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세속화 시키고 팔아 넘기는 배교 행위자로 비난했다. 에세네파는 자신의 공동체를 유일한 진정한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창세기에 기초한 태양력의 제의를 지켰다. 쿰란의 에세네파 문서 (사해 문서)에서 우주적이며 정치적이며, 종교적 대파국과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는 묵시문학이 드러난다. 이것은 마카베오 하시딤 서클에서 보여지는 다니엘서와 <모세의 유훈> (1-5, 8-10)에서도 볼 수 있다. 바리새파는 묵시적 메시아 주의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로마와의 전쟁 (66-70)과 바코바 폭동(132-35)에서 이어진다 (Gottwald, The Hebrew Bible, 453-4).
아포칼립시스와 공관복음
다니엘의 묵시주의는 신명기 사가의 언약의 입장을 넘어서고 고전적인 예언의 장르와도 다르다. 다니엘서를 165년에 편집한 묵시주의자들은 안티오크 4세의 박해의 사건을 알 수도 있고 또는 모를 수도 있다. 이들의 신학은 역사에서 빗어지는 참담한 사건과 재난을 파국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아의 출산의 진통으로 파악한다.
인자같은 이 (케바르 에노쉬)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녹 1서46장과 에스라 4서 13장은 인자를 다윗계열의 메시야로 이해한다. 인자메시야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단 7:27)과 더불어 있고옛적부터 계신 분이 오셔서 성도들의 권리를 되찿아 주신다. 이것은 인자 메시야의 집단적 성격, 즉 역사 사회적 삶의 자리에 연관된다. 하나님은 인자메시야를 통해 고난받는 백성의 권리를 회복하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분의 영원한 나라는 역사에서 진행되는 사건으로 나타날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묵시주의 편집가는 마카베오의 혁명을 조그만 도움 정도로 보는데 있고, 오히려 헬라주의 귀결로 막을 내릴 것을 예감한다. 구원은 파국적인 인자 메시아의 재림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을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로 해석한다. 파루시아는 실제적으로 효율적인 임재를 의미한다 (단 7:13; 스가랴 9:9). 파루시아의 예수는 불법자(아노모스)의 에피파네를 멸하신다 (덷후 2:8). 부활은 첫 번째 파루시아의 형식으로서 묵시적으로 이해된다 (막 9:1). 이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에서 두번째 파루시아 그리고 마지막날 파루시아와 연결되지만 구분된다(Barth, CD IV/3.1: 294). 바르트는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의 삼중적 형식에 삼위일체론적으로 해명했다. 인자 메시야의 부활이 중심에 서 있고 성령의 임재와 마지막 파루시아에서 남겨진 공동체의 믿음의 백성들과 같이하신다.
마태복음에서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 든” (24: 15) – 묵시는 다니엘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에게서 현재적으로 즉 메시아의 부활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ㅡ너희가 아스라엘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마10: 23). 마가 역시 파루시아의 현재적 차원을 부활에서 표현한다 ㅡ"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막 9: 1).
예수의 파루시아 사건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분의 남겨진 공동체와 함께 펼쳐질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문제와 징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태도로 나타난다. 대재난과 더불어 인자의 재림이 예고된다. 인자가 구름(성령)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이 나타나며 택하신 자들을 이끝에서 저끝에서 모을 것이다 (24: 31). 마태는 진통의 시작(24: 8)을 기초로 다니엘의 묵시 전통을 해석한다. 마태는 마가의 소묵시록 (13)을 수용하지만 마가와는 달리 인자의 재림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강조한다 (24: 10).
누가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포위 당하는 것을 언급한다 (21: 20). 역사적으로 인자의 오심이전에 예수의 성전의 멸망예언을 부각시킨다 (21: 5-6; 20). 그리고 다니엘의 멸망의 가증 한 것을 언급하지 않고 로마군대에 대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대신한다.
공관복음에서 부활의 빛에서 70년 성전파괴의 대재난이 기술되고, 다니엘의 아포칼립시스는 역사화가 된다. 이러한 현재화된 아포칼립시스는 50년 초에 씌여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서신에서 바울은 초대 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을 경고하면서 나타난다.
바울은 주님의 재림 이전에 나타날 믿음의 배교를 언급하고 이들을 배교자로 분류한다. 여전히 바울은 재난의 시작, 즉 메시야 출생의 진통에 기초한다 (마태 24: 6. 8). 이것은 안티오쿠스 4세에 일어났던 믿음의 배신을 반영한다. 불법자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으로 주장할 것이다 (2: 4). 칼리쿨라 황제 (37-41 재위)는 예루살렘 성전에 그의 상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불법자는 억제를 당하고 있고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억제하는 자 (카테콘)가 물러날 때, 불법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미 불법의 이상한 힘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온갖 거짓 표징과 이적을 행할 것이다.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받을 자들을 속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입김과 그의 광채로 그를 죽일 것이다
메시아 예수의 재림은 바울에게 묵시적이며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 다음 살아 남은 자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덷전 4:16-17). 이것은 개인의 종말과 부활에 관련된 바울의 변화의 교리를 말하는 데, 죽은 자들은 잠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 즉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을 말한다 (고전15: 49; 52).
이것은 다니엘이 마지막 때 천사장 미카엘의 출현과 대파국 그리고 잠 자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기독론적-묵시적 응답을 담고있다 (단 12: 2). 그러나 바울에게서 이러한 부활은 지금 여기서 믿음의 사람들의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사건, 즉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담는다.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 지라도 죽을 것은 생명에 삼켜진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고후 4; 16- 10).
바울의 현재화된 아포칼립시스는 은 메시아의 해산의 진통에서 불법자가 나타나고 여전히 억제 하는 자를 말한다. 다니엘이 안티오쿠스 4세 이름을 밝히지 않듯이, 바울 역시 억제자를 언급 하지 않는다. 어쩌면 바리새파 유대교 전통에서 바울은 마카베오 혁명과 같은 세력을 조그만 도움으로 이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의 파루시아에서 구원은 최종적으로 완성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화해의 복음을 남은 자들의 공동체에 남겨 주었고, 부활의 주님은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임재하신다. 임재의 그리스도는 재림의 구원자이며, 믿음과 구원 그리고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서 세계의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영적투쟁을 한다 (엡 6:12).
이들은 카데콘과 더불어 마지막 때 남겨진 자들이며, 바울의 묵시적 프로렙시스 즉 미래화된 경륜에 속한다. 공공신학은 현재화된 아포칼립시스를 공론장에서 화해와 인정정치로 번역하고 선한 시민운동세력 (카테콘)과 더불어 예속된 계층(게르)의 권리를 회복한다.
'[기획연재]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6) (2) | 2023.03.18 |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3) (0) | 2023.03.10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2) (1) | 2023.03.09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4) (0) | 2023.03.01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1) (0) | 2023.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