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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공공신학과 헤겔의 인정철학

by 파레시아 2023. 4. 4.

공공신학에서 보는 헤겔: 시민사회와 민족주의
 
사회로부터 개인의 삶을 보는 세 가지 비판이론적 전통이 있다. 첫 번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접근에서 볼 수 있고, 두번째는 루소와 몽테스퀴외 또는 알렉시스 토크빌에서 부터 오는 사회학적 입장이 있다. 세 번째는 에밀 뒤르캠의 종교 사회학이 제시한 집단적인 또는 구조적인 방법원리가 있다.

변증법적 비판이론은 인식론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적 접근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만, 사회로부터 인간을 보는 공동의 관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보다는 사회나 역사가 우위에 서 있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과 사유에 영향을 미쳐오는 인식론적 환경이나 문화나 역사적 배경를 피해갈 수가 없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 또는 앙상블은 인식론적 문화의 중요성을 지적 한다.

물론 변증법적 비판이론과는 달리 사회를 합리화 과정과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개인의 의미있는  행동을 분석하는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도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회학적 방법론은 이념내지 담론이 폭넒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스펙트럼 (경제적 구성과 신분화 또는 권력과 지배에 기초한 계층 그리고 문화적 의미) 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이 있는 지에 주목한다.

변증법은 구체적 보편성을 파악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서 부르즈와지의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는 보편적인 인권 개념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권은 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에서 파악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상태에 있고, 민주적인 국가는 시민사회와 대립된다.  마르크스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검토하고, 인간을 시민 (보편국가의 구성원)과 부르즈와지로 분리했다. 당대 유대인들의 인권이 인정받지 못하는 독일에서 보편적 인권개념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유적인간은 시민사회 안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연대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국가부터 분리되어야하고, 더 이상 국가종교는 의미가 없다. 국가는 헤겔의 절대지처럼 종교위에 자리한다. 종교비판의 원리는 여기에 기초된다. 이른바 보편적 구체성은 변증법의 핵심내용이며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증법적 입장은 헤겔 (1770-1831)로부터 온다.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전통에는 당대 프로이센 국가의  정치적 배경이 중요하다.

프리드리히 3세 대왕 (1786-1797)의 시기에 계몽 군주제가 중심에 있었다. 그는 그의 삼촌 프리드리히 대왕( 1772-86)의 종교관용 정책과는 달리 국가종교로서 정통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계몽 군주였고 종교문제나 자유로운 견해들을 검열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을 후원하고 계몽주의를 통해 군주는 국가의 첫번째 봉사자로 천명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수준높은 교육제도와 민법에 의한 지배, 고문폐지 그리고 정의를 증진시켰고, 독단적인 지배를 행사하지  않았다.

 
칸트와 프랑스 혁명
 
헤겔 이전에 비판 이성철학을 집대성한 임마누엘 칸트 (1724-1804)는 프랑스 혁명을 검토하면서 계몽의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1762년 칸트는 형이상학의 토대에 관한 현상논문에서 차석을 차지 했다. 그의 논문 ("자연신학의 원리와 도덕의 원리")은 최고 수상적인 모세스 멘델존의 논문과 함께 1764년에 출간되었다.

칸트는 1762년부터 루소의 <에밀>과 <사회계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칸트의 급진적인 도덕철학은 루소의 사회철학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공공선과 무관한 영국의 개인주의로  혼동할 수가 있다. 그러나  루소와 칸트는 영국의 부르주아 개인주의나 도덕이론에 비판적이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4>에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사용과 의사 소통의 자유를 주장했다. 계몽은 단순히 배움이나 지식의 축적이라기
보다는 후견과 외적 권위 아래 있는미성숙성으로부터 탈출이다.

1786년까지 칸트가 학문적 활동하던 시기 프리드리히 대왕은 계몽군주였고 종교에대한 관용정책과 신학적 자유주의를 표방했다. 계몽군주는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의 자유와 비판적 이성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이후 <영구평화>에서 칸트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루소의 시민국가와 더불어 식민지에 대한 날선 공방을 벌인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후(1786)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즉위하면서 칸트의 종교에 대한 자유롭고 비판적인  입장은 국가간섭의 배제로 인해, 기독교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의심스럽게 여겨졌다.

칸트의 <영구평화, 1795>는 프랑스혁명이후  1차 공화정부와 사법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그리고 칸트는 공화제 민주주의를 기초로하는 코스모폴리탄주의를 제시했다. 독일의 계몽 철학에서 칸트의 유산은 엄청나다. 그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시민사회와 코스모폴리탄적인 윤리와 그리고 평화를 추구한다.

칸트 철학의 유산은 피히테 (1762- 1814)를 통해 이어지고, 그는 프랑스 혁명이념에 우호적이있다. 그러나 1806년 예나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독일 남부지역이 나폴레옹 지배령에 들어갔다.

피히테는 ‘독일 민족에게 고함’ 에서 (1807-8) 독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나폴레옹에 대항 저항을 고취하기도했다.
칸트의 비판적 자유주의와 공화제 민주주의 안에서 피히테는 군사적 힘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와 도덕 그리고 교육개혁에 기초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이것은 칸트의 코스 모폴리탄 비전에 기초한 애국주의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히테와 헤겔의 시대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7-1840)는 유약한 왕 이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예나 전투에서 패배를 한 후, 영토의 1/3을 잃었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정치 개혁가들은 농민을 농노로부터 해방했고 개혁 입법들이 도입되었다. 유대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허락하는 법령이 공포되기도 했다. 1807년 융커에게 예속된 농노들에게 자유가 허용되었다. 법률을 왕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 나갔다.
 
알렉센더 훔볼트 (1769-1859)에 의한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고, 김나지움 교육이 1812년 대학 입학에서 필수과정이 되었다.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교육개혁에 못 미쳤지만, 이 시기 설립 된 훔볼트 대학은 유럽의 근대적 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대 피히테와 교류하던 클라우제 비츠는 1810년 군대의 전면개편을 지지하고 전쟁을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적 교섭”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헤겔과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1806년 10월 예나를 점령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를 보고 헤겔이 세계 영혼으로 부른 건 유명하다. 이 시기에 헤겔은 <정신 현상학> (1806)의 초고를 탈고했다. 괴테 (1749-1832)는 초기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지상의 지옥으로 혐오했다. 그러나 괴테는 칸트의 계몽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당대 칸트의 매우 중요한 제자였던 프리드리히 쉴러와 괴테의 친교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괴테는 이후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나폴레옹을 1808년 에푸르트에서 직접 알현 하고 그의 문학에 대한 나폴레옹의 이해와 관심에 흡족해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황제로 부를 정도로 경탄했다. 나폴레옹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애독했고 독일의 문인들과 예술인들을 자신의 문화제국주의 정책에 끌여들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정치에서 헤겔은 독일의 봉건적 군주제 정치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의 진보를 위해 근대적 시민법전이 실현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철학의 예견은 역사의 과정에서 쉽게 빗나간다. 당대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다수의 선제후들과 영주들, 51개의 자유 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략 300개의 조그만 영주국가들로 나뉘어져 농노제가 시행되는 봉건 전제주의가 지배했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그의 저작인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에서 유럽의 농노제를 분석하면서 1788년 독일의 농민들은—라인 주의 농민들의 상대적인 자유와 토지의 소유농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자유 농민들과는 달리 거의 영주에 예속된 노예들로 말한다. 농노해방은 독일의 영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저항을 하고 두려움을 가진 이유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폴레옹의 통치기간 (1806-1814)에 개혁의 시기가 마련되었다. 헤겔은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개인숭배보다는 혁명이념을 추종한 그를 통해 유럽 전반에 드러날 자유의 진보를 보았다.

1818년 베를린으로 옮긴 후, 헤겔은 빌헤름 3세의 비호를 받았고, 나폴레옹 몰락 후 프로이센 왕정복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민족주의 철학자로 등극했다.
빌헤름 3세는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정치의 반동적 재편을 위해 1815년 비엔나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를 추종했다.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루터교회와 소수의 개혁교회를 하나로 묶는 프로이센 개신교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왕은 연합교회를 지배하는 주교로 등극했다. 
 
아도르노의 헤겔비판

헤겔에대한 비판은 그가 발헬름 3세의 비호를 받은 국가 어용철학자하는데 있다. 헤겔의 시스템적 사고는 아도르노에게 프러시아 국가에서 완성되고 지배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비난되었다. 이것은 부르주아 자본주의 운동에 상응한다. 헤겔은 객관적인 대상을 이미 자신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것에서 추론하고, 자족하면서 그렇게 굴러간다. 헤겔은 실제적인 대상이나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출현하는 인식론에 거부한다. 헤겔의 철학은 주체의 자유라는 개념안에 갇혀있지만, 그러나 그의 시스템 사고는 부정의 개념안에서 살아간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부정의 힘을 통해 그의 모나드적 철학을 전개하고 헤겔의 형이상학을 세속화한다 (Adorno, Negative Dialectics, 27).

이러한 아도르노의 헤겔비판은 문제거리에 속한다. 헤겔의 시스템적 변증법은 절대지에서 완성되기 보다는 그의 <대논리학>에서 타자에게 생명과 창조성을 부여하는 무해의 원리에서 정점에 달한다. 구체적인 영역에서 타자와의 화해와 인정이 없는 보편성은 타자를 억압하는 파시즘으로 가며, 보편성이 없는 구체성은 추상적이며 부르주아적이다.

루카치가 설득력있게 분석하는 것처럼, 헤겔은 이미 예나시절 산업혁명과 영국의 정치경제학 연구를 통해 원자화된 개인의 이기주의와 노동착취와 소외를 알고 있었다.

<정신현상학>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드러난 공포정치를 절대자유로 비판되고, 시민사회의 위기와 파시즘 공포지배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헤겔은 인륜적 국가에서 보았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민주주의 안에서 실현된 것이며, 이것이 헤겔의 후기 반동적인 입장에 대해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작용한다.
더우기 헤겔이 이상국가로 생각한 입헌 군주제를 반동적인 왕정복고의 군주제와 일치 시키기 어렵다. 여전히 그의 후기 철학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히려 시민사회의 삶은 비판적인 이성의 척도와 보편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인륜국가에서 보호되고 실현 되어야 한다.국가는 윤리적 삶의 실현을 위해서 필수적인데,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과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적 인륜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할 때, 그것은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 자기실현을 통해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말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이고,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존재이다.

이런 전통에 헤겔은 서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리적 실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이성의 척도와 보편적인 법에 의한 지배로 보았다. 국가의 보편이념은 이성과 합리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구체성으로 구현 되어야한다. 여기서 비판적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접합된다. 여전히 헤겔에게서 구체-보편성이 작동한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을 기존질서에 대한 문제틀적 사고로 특징지우며, 역사진행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매개와 지양을 통해 부정의 부정으로 나가는 운동과 생성의 사유를 말한다.

이것은 구체와 보편, 개인과 공공선이 서로 인정되는 시스템적 사고를 말하지 모든 차이와 다름을  총체화하고 주체로 흡입하는 폭력적 이성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겔은 이러한 전제지배의 형식이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지배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고. 이것을 타자와 다름을 총체화하는 절대자유로 비판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사르트르는 헤겔의 변증법을 교조적으로 비판했다. 사르트르의 총체화 개념은 자연의 상태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관련되고, 타자는 공포와 구토의 존재로 파악된다. 이것은 가히 사회 진화론을 방불케한다.

루카치에게서 총체성의 관점은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에서 관계의 총체를 드러내는 시스템 사고를 지적하지만,  사르트르가 비판하는 것 처럼 변증법의 교조적 전제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Sartre, Critique of Dialectical Reason I: xxi, 22).

사르트르의 총체화 개념은 정적인 구조나 조직화된 실천내지 활동에 가깝고 분석적 사고를 지적한다. 이것은 역사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운동과 인정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총체화된 실천을 기초로 타자를 배격하고,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을 자유를 향한 실천의 자리로 고양시킨다. 이러한 실존주의 실천철학은 인간과 사물의 매개를 언급하지만, 노동과 투쟁 그리고 자유를 기초로 한 헤겔의 인정 변증법과는 다르다. 심지어 마르크스 조차도 세계를 문명화하는 자본주의 긍정적 역할과 더불어 파괴적 기능을 변증법으로 말했다.

그러나 사르트의 실천 일원론에서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과학적 검토가 별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교조적 독재는 절대자유를 구가한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부나 파시즘에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물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반 파시스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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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철학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가 않았다. 마르쿠제와 루카치를 통한 헤겔의 비판적 정신이 만회된다. 라캉과 지젝을 통해 해겔은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파농에게서 헤겔은 포스트콜로니얼의 아버지로 수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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