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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공공신학과 마가복음 (8)

by 파레시아 2023. 3. 8.

 

게르트 타이센 (Gerd Theissen)

마가복음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
 
마가복음을 사회학적으로 읽는 것은 마가복음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삶의 자리에 주목한다. 이러한 접근은 80년대 이미 게르트 타이센이 시도 했는데, 그는 초대 팔레스티나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예수 운동을 1) 사회 경제적, 2) 사회 생태학적 3) 사회 정치적 4) 사회 문화적 요인들을 통해 분석했다. 물론 타이센은 나사렛 예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지만, 그의 관심은 예수운동의 사회학에 있고, 이러한 네 가지 사회적 요인들을 순회하는 급진적인 설교자의 유형에서 파악했다 (Theissen, Sociology of
Early Palestinian Christianity
, 33). 
 
도미닉 크로산은 그의 저명한 <역사적 예수>에서 문화 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해 예수가 자라고 활동한 갈릴리 지역을 분석했다. 문화 인류학적인 접근은 산업시대 이전의 사회를 다루는 데 훨씬 더 학제 간의 소통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전문적일 수가 있다. 여기서 고고학적인 연구는 예수 당대 갈릴리의 사회 문화적 구성을 분석하고 타이센의 사회적 요인들의 분석과는 달리, 구조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크로산에 의하면, 나사렛은 로마시대에 유대적 정체성이 강한 마을이었고 농촌경제가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갈릴리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는다.
 
갈릴리 남부에 속한 나사렛은 헬레니즘의 문화와 언어에 상당한 정도로 동화된 지역이었다. 갈릴리 남부지역은 정치적인 독립이 나름대로 보장되어 있었고, 베데사이와 스키토폴리스와 같은 큰 도시와, 세포리스와 디베리야스와 같은 중간 급의 도시가 있었다. 이어 가버나움과 막달라는 규모적으로 읍 정도가 되는 지역이었으며, 나사렛은 시골에 속했다. 그라나 세포리스는 갈릴리 지역의 수도였고, 헤롯대왕이 사후 반란의 중심지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포리스에 성을 쌓고 요새화하면서 갈릴리 지역의 명소로 만들어놓았다. 17 /20년 사이에 그는 게네사레 호수가에  완전히 새로운 헬라적인 도시를 세웠는 데, 이것은 당대 디베리우스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였다.
 
나사렛은 단순한 시골이 아니라 세포리스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역이었다. 지중해에 가까운 프톨레매이스는 세포리스를 거쳐 갈릴리 바다에 위치한 디베리야스로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이러한 연결도로를 통해 국제교역과 군사 정복이 빈번했고, 이러한 지역적인 조건으로 인해 세포리스와 그 주변은 코스모폴리탄 문화의 영향 권에 있었다. 나사렛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악한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간 낙후한 지역이 아니었다. 갈리리 남부지역에는 많은 도시들과 큰 규모의 마을 중심지들이 있었고 도시화된 곳이었다. 나사렛은 헬라문화의 영향에 접해 있었고  인구가 밀집한 주변도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나사렛 예수는 당대 무역과 교류가 매우 빈번하고, 로마의 지방 정부의 행정 중심지에서 자라나고 활동했다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19). 
 
타이센의 연구는 아돌프 폰 하르낙의 디다케의 카리스마적 구조(사도들, 예언자들, 교사들)를 기초로 베버의 사회학에 접합시키면서 예수운동을 견유학파적 금욕주의 차원에서 발전시킨다. 크로산은 타이센보다 폭넓은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역사적 예수를 갈릴리 농부출신의 견유학파의 지혜의 교사로 타이센과 비슷하게 기술한다.

역사적 예수와 초기 자료들

나는 마가복음의 나사렛 예수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배경을 검토하지만, 문헌비평을 통해 크로산과 타이센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보충한다. 종교이념(또는 담론)이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사회계층론에서 권력, 특권, 이데올로기 정당성이 어떤 그룹과 신분 또는 계급에서 구체화되는 지를 검토한다 (렌스키와 푸코).

1946년 부터 1956년 사이에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이후 역사적 예수연구는 2차 예루살렘 성전시기에 다양한 유대교적인 분파와 묵시문학적인 메시야 기대와 관련하여 새롭게 보게한다.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사이에 엄청난 갭이나 넘어설 수 없는 도랑이 있다는 건 18세기 고트홀드 레싱 (1729ㅡ1781)에 의해 제기되었고, 1906년 알버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가 유대적 삶의 자리와 동 떨어진 채 탁상공론식으로 이루어 졌다고 비판했다.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1953년에 루돌프 불트만 (1884- 1976)은 문제를 재개하고 레싱의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을 재확인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에 의해 불트만은 뒤집어졌다. 케제만의 방법은 후대 공동체에 속하는 그리스 자료층을 히브리/아람어 전승과 분리시켜 문학 양식들을 분석하면서 역사적 자료의 진정성을 찾아냈다. 30-40년대 초기 기적과 치유 그리고 수난의 자료층은 마가복음에, 그리고 예수 어록은 Q자료(마태와 누가)에 들어있다. 그리고 마태나 누가의 특수자료나 요한복음에서도 오랜 전승자료가 담겨져 있다.

예수와 유대적 삶의 배경

1947ㅡ1956년 사이에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이 출간되면서 예수와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당시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켜 주었다. 사본들에서 종래 주장되던 그리스적 이념과 유대적 문화의 분리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크로산의 갈릴리가 주변의 주요도시들과 엮어지고 헬라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연구는 정당하다.

예수 당시 유대교의 분파는 매우 복잡하며, 사본들은 히브리 성서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역사적 예수를 히브리 성서적 지평과 더불어 당대 예루살렘 성전의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파악하게 도움을 준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 유대교의 배경에서 성장했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예수에 대한 후대 자료의 이해를 담는다. 여기에 50년대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마복음이 포함된다. 이제 역사적 예수연구는 이전의 양식사 비평보다는 예수의 역사 사회적 콘텍스트에서 특히 유대교와 묵시적 메시아 사상과 관련하여 보게한다.

고고학적 해명

마틴 디벨리우스는 초기 자료의 전승 층들이 복음서의 장르에 편집해 들어오는 경로를 추적하면서 양식사 비평을 분석과 재구성 그리고 초기 자료들의 의도성을 분석했다. 이러한 자료의 전승사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은 예수전통에 대한 구전자료와 파피루스를 역사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에서 검토하고 초대공동체의 산물인 복음서의 신학을 해명한다.

디벨리우스는 불트만이 1921년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시도한 협소한 아포테그마타 분석을 넘어서서 역사적 자료와 의미지평을 매개했다.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을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다. 나사렛 예수의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마가의 파라다임 네러티브에 속하며 (마가 2: 1ff, 2: 18, 23, 3:1, 20, 30, 10: 13, 12:13, 14 :3 ) 누가와 마태에 원자료를 제공한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 기자의 개인적 신학보다는 전승사의 과정에서 관여한 수 많은 증언자들의 노력과 사실주의적으로 전해준 자료가 신빙성이 있다 (Di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1-2, 7, 43).

디벨리우스는 그리스어로 씌여진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적 외삽법이 아니라, 초기 자료층들의 사회학적 중요성과 편집의 사실성에 착안한다. 예를들어 예수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검토할 때, 텍스트로부터 시작되는 내재적 비판이 중요하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담겨져있다. 이것은 공적 죄인들에 대한 용서, 메타노이아,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의 삶에 초첨을 맞춘다.

파라다임 전승 자료들은 마가복음에서 간결한 문체와 상황에서 다른 네러티브와 더불어 치유와 용서 기적과 마귀축출 등에서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실주의적으로 의미를 구성한다. 예수가 내리는 결론이나 현장에 있는 자들의 놀라운 반응이나 거절로 나타나며 설교를 위해 편집된다 (ibid., 56).

이러한 마가의 파라다임 네러티브는 묵시적이며 메시아 비밀이 악한 영들에 의해 대답된다. 이것은 현재주의에 입각한 민중개념을 텍스트에 첨부하는 일종의 외삽법과는 다르다. 현재주의적 외삽법에서 구약적 지평은 실종되고 텍스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폭력과 파시즘의 왜곡이 발생한다. 


예를들면 구약의 암 하아레츠 (땅의 백성)는 복음서의 오클로스와 의미론적인 상응을 갖는다. 그리고 성서의 민중개념은 구약안에 담겨져있는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 (요나의 분노와 니느웨)과 유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마가복음의 역사적 예수와 갈릴리 오클로스를 전승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인 삶의 배경에서 정치 경제적 중요성을 통해 검토한다. 이것은 역사 사회학적 접근을 기초로 타이센과 크로산의 연구성과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지만, 당대 팔레스티나 유대교와의
문헌비평적 비교를 통해 마가자신의 담론과 사회비판적 입장을 해명한다.

마가의 사회담론과 안식일 해석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이삭을 자르기 시작했다 (마가 2: 23-28) 이것은 바리새파들에게 미츠보와 장로의 유전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에 속한다. 예수는 다윗의 경우를 인용한다(삼상 21: 1-6). 아비아달 제사장 때 다윗은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제단 빵을 일행에게 주었다. 이제 예수의 제자들도 인자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허락 된다고 말한다.

마태와는 달리 (12:1-8), 마가는 빵의 중요성(2:26)을 강조하고,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들을 먹이신 예수와 연관 짓는다 (6:33-44; 8:1-9; 8:14). 안식일에 음식규정을 어기는 것은 단순히 미츠보를 넘어서서 바리새파들의 곡식에 대한 십일조 규정과 경제적 이득에 관련된다. 갈릴리 농부들은 이러한 경제적 수익을 취하는 바리새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소위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들이다.

마가의 안식일 담론은 바리새파의 종교 착취제도에 관련되고 여기서 마가는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회복하려고 한다. 마가는 당대 유대전통 보다는 이방인 기독교 전통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다윗에 대한 해석은 인자 예수가 안식일에 주인 임을 선포한다 (2: 28)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사건은 이미 당대 잘 알려진 스캔달에 속한다. 로마 (또는 시리아 ) 공동체에서 마가는 이러한 격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다윗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고, 다니엘서의 인자 메시아이다. 예수는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 에 자신이 바로 그라고 대답했다(14:62). 예수는 멸망할 죄인 (massa perditionis)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영접하고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언했다. 암 하아레츠와 이방인 그리고 오클로스는 마가의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 수용되고,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마가의 정치신학에서 의미론적인 원류로 적용한다. 여기서 마가는 베드로보다는 바울의 토라비판에 가깝다.

담론해명과 유효한 역사

인간의 사고나 이론은 단순히 역사적 영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적인 여건과 물질적 이해관계 그리고 권력의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입장은 가다머가 주장한 역사의 영향의 차원(영향사)과 존재론적 보편성과는 다르다.

누가복음의 서설에서 누가는 편집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전승자료들을 역사적으로 배열하고 선교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마가의 안식일에 대한 자료를 편집하면서 누가는 안식일에 행한 예수의 치유사건으로 확대한다. 안식일은 생명을 건지고 치유하는 것이 본래적 의미이다 (누가 6: 9). 이것은 불트만이 억측하는 것 처럼 누가 공동체의 산물이 아니다. 누가는 안식일과 치유의 초기 전승자료를 편집하고 마가에 관련지어 의미지평을 확대했다. 이것이 누가의 편집사 신학이다.

그러나 마가에게서 안식일의 문제는 예수운동의 경제적 빈곤을 드러내고 인자의 관점에서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한다. 역사에는 지배의 역사가 있는 가 하면, 예속된 자의 역사가 있으며, 서로 다른 다양한 담론의 체계들이 녹아있다. 마가는 밀려나간 자들의 예속과 희생의 역사를 끄집어내고 토라를 재해석 하면서 유효한 역사를 회복한다.

성서의 생활세계는 마치 하늘의 별자리처럼 다양한 계기들을 포함한다. 초기 예수의 전승자료들에는 다양한 계기들이 녹아있고 복음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전승자료들을 수집해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묵시적 재림의 틀에서 공동체의 신학을 확립한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에서 안식일 규정은 토라에 규정되어있다. 마태는 토라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며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큰 이로 소개된다 (12:6). 그리고 호세아 6장 6절이 인용된다. 호세아 본문은 2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바리새파들의 전통을 이어간 얍브네 랍비 유대교에 목숨처럼 중요한 말씀이었다.

마가의 안식일 논쟁을 수용하면서 마태와 누가는 각각 다른 자신의 공동체의 상황에서 의미를 확대시킨다. 그러나 마가의 본래적 사유는 침해 되는 것이 아니라 두텁게 기술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는 이미 성서의 생활 세계 안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자신들의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마가는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등장한다. 이러한 해석이 오늘 메시아 공동체의 삶에 이어진다. 안식일 논쟁과 해석에서 공관복음은 하위계층으로 밀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를 토라에 대한 생명의 해석을 통해 재해석한다. 유효한 역사에 대한 사회학적 사유는 고고학적 해명을 요구한다.

마가는 예수의 담론을 갈릴리의 사회경제적 현실에 구체화하고 복음과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통찰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회바판적 접근은 예수의 담론을 구약성서의 인용을 통해 히브리적 사유를 예수의 삶에서 계보학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시대화한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있는 현장에서 예수 담론의 의미를 로마제국의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 정당성을 문제틀한다. 마가는 사회학적 소통이 탁월한 신학자였다.

마가로부터 배우기

마가복음은 성서와 유효한 역사를 담론비판을 통해 드러내는 실례를 보여준다. 그는 불의한 소작인 비유(12:1)에서 이사야 5:1-7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마가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인 지주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하위계층의 사람들을 고려한다. 주님은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이사야 5:7). 희년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땅의 권리를 빼앗긴 농부들의 삶을 회복시키는게서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마가복음을 권력과 특권에 대한 사회경제적 비판으로 발전시킨 헤르만 웨이첸은 마가를 최초로 사회학적으로 사유한 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Waetjen, The Reodering of Power). 마가복음의 사회 정치적 접근에서 시대적으로 다른 에피스테메와 예수와 그의 고난받는 백성이 접합되고, 진리내용이 된다. 이러한 내용은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물질적 이해와 지배방식을 통해 신분과 계급에서 어떤 선택적 친화력으로 나타는 지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가에게서 역사는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의 사회적인 삶과 유리되지 않으며, 예수의 담론과 논쟁의 대화는 갈릴리 상황에서 밀려나간 암 하아레츠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12: 38) 해석된다. 이것을 마가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1세기 지중해의 사회적 담론과 예수의 실천에서 부각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로마의 군사지배와 관료행정 그리고 여기에 부역하는 유대인 귀족들과 성전체제에 대립하며, 예수의 치유기사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문제틀을 통해 마가는 갈릴리 예수를 신학화하고, 이 빛에서 본래적인 진리내용과 이후의 역사과정에서 왜곡되고 변질된 것들을 내재적으로 비판한다. 
마가의 담론해석에서 예수는 사회에서 밀려나간 상실된 사람들인 공적 죄인과 세리들의 삶에서 세속적인 비유와 네러티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이것은 마가복음을 사회 문헌적으로 즉 사실주의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마가의 의미론적 통찰은 역사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이익과 권력관계, 지배방식 그리고 담론적인 정당성에서 "누구에 의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예수와 그의 백성의 관계가 굴절되고 탈구 되었는 지를 검토한다. 
성서 텍스트로부터 내재적 비판은 진리의 이념에 초점을 맞춘다. 마가는 하르낙이나 또는 타이센이 예수운동의 사회학에서 상상하는 <디다케>의 견유학파적 금욕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마가의 세리에 대한 관심은 마태와 누가와는 결이 다르다. 팔레스티나 문화계층에서 하위 세리그룹은 세리장 삭개오 같은 자들에게 고용된 가난한 자들이었고 갈릴리 농부들로부터 경원시 되던 신분/계급이었다. 이들은 창기와 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선포된 자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식탁 공동체의 실천을 말한다.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2:16-17). 예수는 메시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토라의 코셔규정은 더 이상 멍에로 작용할 수가 없다. 인식일은 항상 생명과 치유를 위해 존재한다 (3:4).

마가는 메시아 비밀에 대답한다

나사렛 예수는 고향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라는 당혹감으로 표현된다 (6:3). 이러한 당혹감은 존 마이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의 진정성에 속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마이어가 말한 것처럼 그는 달갑지 않게 여겨졌던 주변부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메시아 비밀에 대한 마가의 대답이기도하다.

목수의 아들 예수는 마가에게 세상을 넘어서 있는 인자였다 (12: 1). 마가에게 예수는 수난과 부활을 언급할때  1인칭으로 사용된다 (8: 31). 메시아 인자는 이 세상과 관련되고 십자가 신학으로 전개된다 (15:32). 이것은 당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상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아니며, 예루살렘에 천년왕국을 세우지도 않는다. 악한 영들에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졌지만 예수는 스스로 인자로 답변한다. 그리고 미래의 인자는 전능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아있으며 구름을 타고 권능으로 오시며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다스릴 것이다 (14:62; 19 :28). 이것은 인자 예수의 묵시적 차원을 규정한다.

메시아 비밀을 말한 브레데는 마가가 인자로 메시아 비밀에 대답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타이센과는 달리, 순회하는 설교자들 역시 자신들을 인자로 동일시하지 않았다 (Theissen, ibid., 27). 이 지점에서 마가는 주변부의 유대인 예수를 소개하며, 항상 성서의 생활세계와 사회적 삶의 자리와 문화적 에피스테메를 일차적으로 검토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바리새파는 비판된다 (7:6). 이후 자신이 서 있는 콘 -텍스트에서 마가는 로마제국에 대립하여 민중개념의 새로움과 지평 확대를 시도한다.

이것을 나는 마가의 계보학적 태도로 부르며, 그의 사회학적 편집사 신학으로 이해한다. 마가는 현재주의에 입각해 텍스트를 파괴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구약성서와 예수의 사회적 담론과의 만남을 통해 본문이 이해되고 의미가 구성된다 (이사야의 인용과 성전정화). 이러한 의미구성에서 팔레스티나 정치, 사회, 경제의 스펙트럼이 두텁게 기술된다. 심지어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항의하는 베드로에게 너는 사탄이라는 파레시아를 담대하게 말한 최초의 신학자다 (8:33). 이것은 감히 누가도 하지 못한 (누가 9: 21) 급진적인 파레시아의 윤리를 말한다.

마가는 사회학적으로 사유한 급진적인 파레시아의 신학자였다. 마가는 예수와 그의 백성의 관계를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명료하게 부각 시켰다. "하나님 한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10:18) 토라의 계명을 넘어서서 부자청년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때 그에게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것이다 (10: 21).

문제틀(Problematique): 마가와 마태

타이센은 순회하는 설교자의 관점에서 마가의 인자개념을 파악하고 마태와 관련짓는다. 심지어 마태는 인자에 대한 죄는 용서되지만 성령을 거스른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 (12:32). 성령은 순회 설교자들을 대변하며 이들은 스스로를 인자위에 설정한다 (Theissen, ibid., 28). 그리고 인자는 마태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타이센의 동일성의 원리를 문제틀한다. 마가와 마태는 다르다! 마가는 마태처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10:6)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사회로부터 밀려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부자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명망있는 산헤드린의 의원 아리마데 요셉(15: 42)이나 증오의 대상이었던 부자나 심지어 부정한 수단으로 돈을 번자들 (세금 징수원과 창녀)이 있었다. 민중을 인자와 동일시 한 적이 없다 (마가 14: 7). 심지어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후원한 부유층의 여성이나 세리장  삭개오(7: 36; 19:1)를 보면, 타이센이 급진적 설교자들을 인자와 동일시하고 심지어 우위에 놓거나 또는 극빈에 가까운 견유학파적 예수운동의 사회학은 의심스럽다.

안디옥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을 위해 순회설교자로 보냄을 받았다(행 13: 1). 안디옥 교회의 예언자들이 과연 하르낙이나 타이센이 생각하는 것처럼 <디다케>의 금욕주의자들과 동일시 될수 있을 지는 의심스럽다. 심지어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순회 설교자 베드로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고전 9:5). 이들은 노동도 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과연 <디다케>에서 말하는 견유학파적 금욕주의자들이었나?! 바울과 바나바 또한 극빈자들이 아니었다. 순회설교자 베드로와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코셔문제로 위선을 떨다가 바울과 충돌을 했다. 이것은 교회권력에 관계된 사건이었고 종교적 이념이 권력과 특권에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마태가 지극히 적은 소자와 인자와 동일시 한 것은 묵시적 지평을 가지고 있고, 인자가 지극히 작은 자신의 형제들을 대변한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방식인데 하나님이 예언자들의 말에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영이다(마태 10 :20). 마태는 이런 히브리적 이디엄을 박해와 보상의 상황에서 표현했지, 당대 애굽문화나 헬라문화의 인간의 신격화나 또는 실존주의 동일성 원리로 말한 적이 없다. 너희를 맞이하는 자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요, 나를 맞이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0-42). 너희들은 항상 가난한 자들을 갖지만 항상 나(예수)를 갖지 않을 것이다(마가 14:7). 이런 점에서 나는 타이센이 크로산처럼 예수나 예수운동을 떠돌이 견유학파의 철학자들로 부각시키는 것에 수긍하지 않는다.

설령 초기 공동체의 떠돌이 순회 설교자 페레그리누스(95-165)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고향에서 견유학파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Theissen, ibid., 15). 그는  초대 공동체에서 쫒겨난 자였고, 165년 올림픽 게임 마지막 날 밤에 자신의 화형식을 했다.

타이센의 사회학적 방법론은 <디다케>에 기초한 하르낙의 초대교회 유형(사도들, 예언자들, 교사들)과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디다케에 적용하면서 예수운동의 사회학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일상화가 되며, 사도들이나 바울처럼 특출한 카리스마적 개념이 <디다케>에서 이어지는 지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한다. 오히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은 일상의 삶 특히 정치가의 소명에서
책임과 심정윤리로 결합된다.  <디다케>를 통해 나사렛 예수와 운동을 견유학파적으로 파악할 때, 디다케의 범신론적 동일성 (금욕적 영적 결혼)은 나사렛 예수의 자리를 실종 시켜버릴 수가 있다 (Draper, Didache in Modern Research, 2-42). 마가복음에 대한 역사사회학-문헌비평은 <디다케>의 예수와 금욕적 영적결혼이라는 범신론적 동일성 보다는, 성서 텍스트의 사회적 자리와 구약성서와의 연관에서 나사렛 예수의 모습을 묵시적 인자에 관심한다.  이것은 현상학적 두터운 기술이며 실존주의 범신론과는 다르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마가 15:34)
 
예수의 절규는 마가의 십자가 신학의 진수를 표현한다. 성전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15: 38).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15: 39)--이러한 신학구성은 마가의 편집사 신학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자료비평을 통해서 볼 때, 이러한 신학구성은 50년대 기록된 <베드로 복음>에서 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람어로 십자가의 절규가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강도 한 사람은 예수를 향해 회심을 한다. 그러나 마가에게서 회심하는 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의 백부장이다. 여기서 나는 마가가 로마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본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체체는 이제 끝났다. 마가에게서 바울의 간접적인 영향이 나타난다. 화목재물 예수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은혜가 열렸다. 그리고 이방인 로마의 백부장의 입에서 메시야 비밀이 해결된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프레임과는 달리 마가는 역사적 예수의 삶의 경로와 수난전승에 기초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개한다. 그러나 마가와 부활에게 예수는 묵시적인 유대인 메시야이다 (Ehrman, Jesus). 
 
메시야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에 의한 버려짐을 처절하게 표현했는 가? 누가의 특수자료가 오히려 유대인 메시야 예수의 모습에 더 가깝다(23:46). 그럼에도불구하고 마가의 예수는 그레코 로만 문화의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이방제의화를 방어한다.

  마가는 묵시적 종말론과 부활을 접합한다

마가는 예수를 견유학파의 지혜의 사람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고 치유하는 활동을  인자의 빛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쉐마 이스라엘은 예수의 삶의 중심이었고 율법학자의 슬기로운 대답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있지 않다고 했다(12 :32). 마가복음에대한 나의 역사 사회적 문헌비평은 타이센이나 크로산과는 달리 당대 유대교와 관련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삶의 자리에 주목하고 인자예수의 활동을 문헌비평을 통해 묵시적인 비폭력의 빛 즉 십자가 신학에서 파악한다.

빌리 막센과는 달리  마가는 갈릴리의 지역에 대해 낯설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7:31)  두로는 시돈의 남쪽에 위치하며, 예수가 두로에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오는 여행이 북부에 위치한 시돈을 올라가서 갈릴리 바다 한참 밑에 있는 데가볼리를 통해 올라오는 것은 혼란스럽다 (Miller. ed. The Complete Gospels, 30).

이 지점에서 막센이 마가복음 연구에서 갈릴리 예수와 오클로스를 과대하게 강조한 것은 오류이다. 마가는 예수가 비유의 뜻을 오클로스에게 숨기고 제자들에게만 알리고(4장), 때론 제자들과 오클로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8:34). 심지어 오클로스는 대제사장에게 선동당해 예수를 처형하라고 한 자들로 언급된다(15:11). 더우기 오클로스 개념은 Q자료에서 보다 명료하게 억압당하고 가난한 무리들로 부각되며, 특히 누가복음에서 사회사적인 차원에서 구체화된다.

 마가는 갈릴리 민중이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향해 첫 장부터 예수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한다. 마가는 매우 절제있게 하나님의 아들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1:1), 변모산 경험 (9: 7), 십자가 앞에서 백부장의 고백 (15: 39).  
 
이러한 틀에서 마가는 다니엘의 인자개념을 통해 예수와 그의 거룩한 백성 (암 하 아레츠/오클로스)의 같이있음을 부각시킨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오클로스가 아니라 암 하 아레츠가 예수의 민중연대를 표현하며 이것은 히브리 성서의 게르와 관련된 하위계층이며 사마리아 비유에서 구체화된다 (누가 10:25). 이러한 사실주의적 독해는 막센의 테제 ㅡ갈릴리 예수와 오클로스ㅡ와는 달리 인자 예수와 묵시적 차원에 주목한다. 마가의 오클로스는 게르의 문제를 언급하지 못한다.
 
나의 해석의 렌즈는 묵시적 해석학에 있으며, 예수와 바알세불의 묵시적 투쟁에 주목한다 (3: 20- 30). 힘센 사람을 묶어놓는 것처럼,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끝장이 난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안에 있는 메시아 예수의 우주적 투쟁이며, 성령을 모독한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에 매인다 (3: 29)   (Shively, Apocalyptic Imagination in the Gospel of Mark, 5). 예수의 비유는 묵시적 내용을 담고있고 삶의 전 영역에 연관된다.

마가는 지속적으로 급진적인 제자직의 윤리를 묵시적 종말의 빛에서 숙고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대재난이 있겠지만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13: 10). 인자는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부활의 예수가 갈릴리로 오신 것처럼 그렇게 오실 것이다. 메시아의 물음에 대해 예수는 대제사장 앞에서 묵시적으로 대답했다 (14: 62).

체드 마이어스, 강한 자 결박하기

마가의 신학적 틀에서 다니엘은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하나님의 나라(단 2:44; 7:14), 인자 (단 7:13), 우주적 재난 (단 10), 그리고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 (단 2:28)는 메시아 예수 안에서 시작 되었다 (마가 4: 11). 갈릴리 예수는 유대적 묵시문학의 지평에 서있다. 성전안의 가증한 것과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단 9:27, 11: 21 -12 :13)은 마가의 소묵시록의 내용을 규정하고, 마가가 서 있는 역사적인 삶의 자리인 로마와의 전쟁과 성전파괴와 관련된다(66ㅡ70).

 
그러나 인자(아담의 아들)의 부활은 이러한 세력에 대한 혁명으로 나타난다ㅡ부활은 마가에게 하나님의 세계혁명이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파루시아로 나타날 것이다. 마가의 묵시적 인자 메시아에서 부활과 재림이 접합되며, 재림은 지연이 아니라 부활의 예수안에서 동시대화가 된다.
 
체드 마이어즈가 말한 것 처럼 마가는 갈릴리 예수와 자신이 처한 공동체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배를 향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의 의미를 정치 사회적으로 동시대화한 신학자였다(Meyers, Binding The Strong Man:   A  Political Reading of Mark's Story of Jesus). 마가는 예수 전통의 전승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고 히브리 예언자적 지평에서 사유하면서 권력지배와 성전체제에 대항하여 내재적 비판을 최초로 묵시적으로 전개한 사회학적 신학자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하나님님의 아들이고 세계의 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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