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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와 예수(28)

by 파레시아 2023. 3. 18.

"인자와 같은 이"
 


다니엘서는 묵시의 지혜자로 간주된다 (단 2:48). 지혜는 신적인 카리스마를 담고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 특히 요셉의 꿈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창 41). 예언문헌이 이스라엘 역사에 직접적인 야훼의 개입과 회개를 촉구 한다면,  묵시문헌은 모든 역사적 과정을 보편적 인 야훼주의 틀에서 객관화시키고 개념화한다. 예언의 메세지가 구원사에 초점이 있다면, 구원사는 더 이상 역사결정론적인 묵시적 세계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종의 인식론적 파열이 일어난다 ( Von Rad, Old Testament History II, 303).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와 같은 이는 히브리어의 벤 아담이나 아람어의 벤 에노쉬(ben-enosch, 시편 8:4)로 이해된다. 벤 아담의 복수형(베니욤 아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류로 표현된다. 여기서 짐승의 모습으로 제국들이 출현하지만 이스라엘 역사가 다루어지지 않는다. 인자는 이스라엘에서 오는 곳이 아니라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온다.

인자같은 이는 헬라어로 인간의 아들 (호 휘오스 투 안쓰로폰)으로 번역되고 예수에게 사용된다. 예수자신이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동일시 했는 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니면 예수의 죽음이후 그의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를 체험하면서 다니엘의 묵시적 인자개념을 칭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인자 표현은 집단적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인자(호 휘오스 투 안쓰로폰)은 구체적인 개인을 지칭한다. 에녹 1서(37- 41)와 에스라 4서(7:28, 12: 32)에서 인자는 메시아 칭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에서 인자는 1세기 전 까지 유대 메시야가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성이나 인류로 사용 되기도 했다. 에스겔에서 39회에 걸쳐 사용되는 인자(벤 아담)는 에스겔 개인을 지칭한다 (2:1, 3:1, 4: 1, 5:1, 6:2, 7:2). 환상을 보는 다니엘도 인자로 칭해진다(8:17).

인자 논쟁

최근 다니엘 연구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유대적 상황에서 1) 천상의 존재(천사장 미카엘), 2) 하나님이 행하신 다윗의 약속을 성취할 메시야적 인물 3) 유대백성들에 대한 집단적 상징 정도로 요약된다.

앞서 본 것 처럼 에녹 1서 (48:10)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메시야적 인물이며, 기름부은 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인자와 같은 이는 하늘의 구름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더불어(임:마소라 본문)온다. 구름은 야훼와 동반하며 천사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야훼의 심판과 회복의 날과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야의 재림과 왕국은 동일시 되지 않고 메시야의 지상왕국이 앞서 온다. 이러한 유대적 묵시이념은 인자를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 할 수 없게 한다     (Movincvkel and Anderson, He that Cometh, 300).

인자와 같은 이(케르 벤 에노쉬) 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들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와 같은 (케르) 비교표현은 벤 에노쉬에 붙어있고 인자와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7장 6절과 7절에서도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이 보였고, 사람처럼 발을 땅을 디디고 섰다. 네째 짐승은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입이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었다.

거룩한 백성들은 왕국을 받고 영원히 소유하는 데 이들은 천상의 존재들이 아니다 (7:18). 이런 점에서 마틴 노트가 인자같은 이가 거룩한 백성, 즉 천사들을 대변하고 마지막 시대에 세계가 천사들의 손에 놓인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Noth, " Die Heiligen des Hochsten," GT. St, 274-90).


공관복음에서 사용되는 인자칭호는 다니엘서와 관련하여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는 아람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자신을 호 휘오스 투 안쓰로폰으로 지칭했는가?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예수가 아람어로 자신을 벤 에노쉬로 지칭하고 3인칭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예수초기 구전과 파피루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인자는 케리그마화가 된다. 왜냐하면 헬라어 용어 호 휘호스 투 안쓰로폰은 일반 어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Casey, The Solution to the 'Son of Man Problem').


공관 복음서: 인자 예수

역사 사회학적 문헌비평에서 볼 때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히브리-아람어적 표현문구)는 공관복음서의 인자 (메시야 칭호)와는 좀 다르다. 다니엘의 인자는 다윗의 전통과 베들레헴에서 오지 않는다 (미가 5: 2). 그러나 묵시적 재림예수는 구름타고(또는 함께) 오는 인자와 결합된다 (마 24: 30, 26:64, 막 13:26, 계 1:7).

물론 아람어적 표현에서 묵시적 메시야의 의미가 결여되는 것은 아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너희에게 알려주겠다"(막 2:10). 마가에게서 인자는 3인칭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예수와 인자를 일치 시키지 않는다. 안식일은 사람를 위해 있다 (막2:27). 그러나 인자가 안식의 주인이다.

예수는 유대적으로 말한다. 랍비 유대교에서도 이것을 인정한다. 출애굽기 31:14절에서 "안식일은 너희들에게 거룩한 날이다."ㅡ안식일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들이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안식일을 복으로 주신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휴식과 축제를 위한 날이다
(Marquardt, Eine Eschatologie 3: 93). 그러므로 인자 (호 휘오스 안쓰로폰)는 안식일의 주인(퀴리오스)이다.


그러나 예수당시 인자가 유대인의 메시야로 사용되었는 지 논란이 있다. 아람어적 표현 (벤 에노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으로 복음서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3인칭으로 쓰여지는 인자가 1인칭으로 씌여지는 것을 비교 검토하는 데 있다.

마가의 메시야 비밀에서 인자는 3인칭으로 사용되며, 마가는 의회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 되는 것이 아니라 eogo eimi로 말한다(14:62)ㅡ"내가 바로 그이다" (ego eimi). 그러나 한글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에고 에이미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동일화는 누가에게서 나타난다.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될 것이다"  (22:69)ㅡ"내가 그라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다."(70) 마가와는 순서가 다르다ㅡ부활이후 예수는 인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심판주로 앉게 될 것이다. 부활의 프로렙시스에서 인자의 메시야 비밀이 열린다.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론은 인자에 대한 성서주석을 통해 역사 사회적으로 구체화 될 필요가 있다. 인자예수는 그의 백성들과 항상 더불어 있다ㅡ그는 집단인격을 말한다.

Q 어록에서 여우도 굴이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마 8: 2 0). 이것은 단순히 예수의 극심한 빈곤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집이 있었다 (막 2:2). 인자는 세상에서 머리둘 곳(pou)이 없다 (Huios tou anthropou ouk echei pou ten kephalen kline.)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세계는 미래의 영원한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 이전에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와 일치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묵시는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물론 부활이 구약성서와 낯설은 것은 아니다.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땅이 죽은 자를 다시 내놓을 겁니다" (사 26:19).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유대적 삶의 체험에 근거한다 (Lapide, Auferstehung).

바울: 아담과 그리스도

바울에게서 아담은 다시 오실 분의 모형이다 (롬 5:14). "아담의 비밀은 메시야의 비밀" 이라는 랍비적 해석에 바르트는 수긍한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은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타나는 은혜의 변증법을 말한다         (Barth, Der Romerbrief, 169).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왕노릇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된다 (5:18).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칭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의미하며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덧입는 종말론의 차원을 지적한다 (고후 5: 1- 2).

바울에게서 인자칭호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용된다. 이것은 묵시적 차원으로 연결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고 그 나라를 아버지께 넘겨드린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 아들까지도 하나님에게 굴복하신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신다 (고전 15: 28). 이것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종말의 완성에 이르는 바울의 묵시적 신학에 속한다.


그리스도 (인자와 같은 이)는 하나님(옛부터 계신 분)으로 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신다. 그 권세는 영원한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단 7:14). 다니엘 7장 13절에서 구름과 더불어 오시는 인자와 같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그리스도는 하늘로 부터 내려오며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난다. 이들과 함께 살아있는 자들은 구름 속으로 이끌려간다 (덷전 4:17).

바울은 묵시적 차원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에서 신학화한다. 더 나아가 랍비유대적 차원에서 메시아의 왕국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복종이나 예속보다는 순종이란 차원에서 구분 짓는다. 하나님은 만유를 아들에게 예속시키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은 만유안에 임재한다 (CD III/3: 440).

그러나 바울이 과연 랍비 유대교처럼 지상에서 수립되는 메시야의 왕국을 언급하는 지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 (고전 15: 49)은 멸망할 아담의 형상을 넘어선다.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
는 하늘에서 나신 분이며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다. 죽음에서 우리는 썩어없어질 몸으로 살아나고 변화한다(15: 52).

바울에게 부활은 이사야의 부활예언을 다니엘의 인자와 접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부활을 죽음을 삼키는 승리의 예언(사 25:8; 호 13: 4)으로 확인한다 (15: 54- 55).


바울의 칭의론은 예언적-종말론적 틀에서 움직이며 반율법적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전통(순종과 죄사함)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서 있다. 부활은 삶의 체험에 기인하며 공동체의 증언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부활신앙은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려진다. 바울에게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갈 2:20)라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이고 영적이 아니라 집단인격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와의 연합이며 새로운 생명을 말한다 (롬 6:5).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란 범신론적인 동일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엔 크리스토"는 집단인격인 그리스도와의 관계적 존재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남겨진 자의 공동체의 머리와 주인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 이런 점에서 인자를 메시아 칭호로 사용한 복음서를 비난 할 이유는 없다.

이미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분 이다. 그리고 바울에게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를 하고, 구원의 완성은 종말론적으로 확대된다.

당대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은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천년왕국에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기대가 다니엘의 묵시 메시야와 반드시 일치 한다고 볼 수 도 없다. 물론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와 같은 이는 그의 거룩한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영원한 나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에녹서에서 다윗 후손의 메시야를 언급한다. 에녹서는 유대 신비주의와 관련되며 랍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카발라에서 이어지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인자 메시아는 정치화된 바리새파나 젤롯당과는 다르다. 이런 점에서 랍비 유대교에서 메시야주의는 세계의 대  파국을 가져오며 지상에서 이스라엘 민족해방과 구원을 이야기 한다. 이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마지막 파루시아의 예수에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중요하다(슥 12; 10). 어쩌면 바울과 요한계시록에서 이들을 위한 역사적 시간이 허락될 수도 있다.

인자개념의 유대적 배경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 초엽에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단 1-7), 마카베오 상하에서 나타나듯이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라는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갖는다 (단 7- 12). 이것은  에녹 1서나 에스라 4서에서 천상의 삶에서 나타는 우주적 차원과는 좀 다르다.  

"인자와 같은 이"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 보다는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에서 메시야 대망사상과 역사 사회적으로 관련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리고 에녹1서 때 까지는 인자 칭호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벤 시라는 다니엘서를 알고 있었고(주전 195) 이후 헬라어로 번역 되었다(주전 135). 다니엘서는 바벨론 포로기에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Miller, Daniel, 25-6).

에녹 1서는 신약성서의 유다서에서 타락한 천사들과 악인들의 심판과 종말론에서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선한 천사와 미혹하는 천사, 또는 회개가 불가능한 악한천사, 단 10:13). 천사의 사역은 초대 기독교 전통에서 특히 예배의 기능에서 중요하며 (히 12:22; 계 4-5), 구원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다 (히 1: 14).

바르트에게서 다니엘의 인자같은 이는 요한 계시록에서 용에게 쫒기는 아기의 출생(계 12: 1)에서 하늘의 큰 표징으로 언급된다. 히브리서 10: 12절은 다니엘 7:14절과 병행된다 (CD III/3: 436, 440).

인자와 같은 이는 구름을 타고 (더불어) 온다. 물론 묵시(아포칼립시스)는 네러티브의 형식을 갖는 문학장르에 속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천상의 존재를 통해 매개되며 현재에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구원을 담는다. 그러나 단순히 현재화가 되지는 않고, 미래로 열린 프로렙시스적인 차원을 갖는다. 그리고 묵시가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시간과 역사속에서 숨기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Rowley, Apocalyptic, 36).

복음서에서 죄인으로 단죄된 게르/사마리아/오클로스는 프토코스로 대변되며 이들은 인자 예수의 삶에서 묵시적 구원을 보았다. 다니엘의 인자와 같은 이에서 구체적인 개인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복음의 영원성이 세계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현재화되고 미래로 열린 메시야적 시간구조가 부각되는 데 이것은 누가ㅡ바울에게 케리그마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어린 양과 인자

요한복음은 주로 예수의 활동무대를 예루살렘에서 보도하고 4장 전체는 사마리아 지역에 할당한다. 갈릴리의 예수사역이 조금 언급되지만 (2:1-12, 4: 43-54) 비유의 가르침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가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여기에 관련되고 대부분 요한의 전승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공동체들에서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Beasley-Murray, World Biblical Commentary John, xIv).

공관복음의 전승자료와는 독립적인 요한 공동체의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현재화된 실현된 종말론 (요 5: 24; 마태 11:5, 11 :12, 12:28)은 여전히 미래적 종말론(요12:18)과 연관되어있다. 보혜사 성령의 오심(16:7)은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관련된다.

공관복음 이후에도 구전은 요한의 시대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사료된다. 4복음서 배후에는 독립적인 복음들의 오랜전통이 존재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있다 (요 21:25).

수난전승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니라) 그의 사위 안나스의 심문에서 예수처형은 빌라도의 책임으로 언급된다 (19: 16). 부활현현에서 요한은 공관복음을 알고 있지만 독립자료의 전승ㅡ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으라ㅡ을 포함한다 (20:22). 요한복음을 헬라문화나 영지주의와 관련지었던 이전의 주장 (불트만 학파)은 오늘날  유대기독교 공동체가 요한의 삶의 자리라는 주장에 의해 반박된다.

마태가 치유사건을 보면서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 인용(사 53:4;마8: 17; 42:4; 마 12: 8-21)은 다니엘의 묵시적 인자와 관련되며,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이어진다 (1:51; 12:38).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일이 없다 (3:13). 그러나 요한은 1인칭으로 아들의 권세를 인자로 표현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심판의 권세는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5:27). 에고 에이미는 인자의 십자가 사건에서 구체화되고(8:28), 에고 에이미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다(8: 58). 이사야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고 (12:41), 요한에게서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동일시 된다(10: 36).


더 나아가 요한은 인자의 의미지평을 묵시적 차원에서 어린 양으로 확대시킨다. 죄사함은 사제 문서의 표현인 하나님의 어린양과 관련된다. 이것은 사자와 같은 어린 양이며 (Testament of Joseph, 19 :8), 어린 양은 모든 짐승들을 지배한다. 이것은 묵시적 차원의 어린양 (계5)과 관련되며 유다지파에서 나온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한 것을 말한다.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았다 (5:7). 예루살렘 도성의 성전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2 1:22).

다니엘의 묵시적 인자는 요한에게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어린 양 즉 다윗의 뿌리의 승리를 말한다. 이것은 또한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요한학파의 응답이기도 하다. 어린 양 예수의 죽음은 죄사함의 은혜를 "다 이루었다"로 표현되며, 스가랴 12장 10절의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회개의 지평에서  파악된다 (19: 37).

이러한 묵시적 지평은 마태 에게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잠자던 많은 이스라엘의 성도의 몸이 살아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마 27: 52).

요한 계시록 1장 7절에서  다니엘 7:13절이 인용된다.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더불어) 오신다." 이어 스가랴 12: 10절이 마지막때 재림을 위해 인용된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계 1:7)

어린양의 십자가 죽음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 (슥 12:10)ㅡ"다 이루었다"ㅡ이 이제 마지막때 재림에서 오시는 분의 종말론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스가랴의 인용은 요한의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야훼가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에게 은총과 탄원의 영 (루아흐, 겔 39:29, 요엘 2:28-29)을 부어
주심으로 시작한다. 아쉐르 다카루(그들이 찌른 자, 습 12:10)는 야훼이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처럼 대속의 고난울 당한 자일 수도 있다. 이것은 예례미아의 새언약의 전통을 지적한다 (31:33-34).

베드로는 행전(2:16)에서 새언약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오셨다고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리고 요한복음(14: 16)에 근거하여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약속한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셨다고 말한다(행 2 :33).

바르트와 불트만

Barth and Bultmann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 4/1권에서 화해론을 다루면서 불트만과 비판적 대화를 연다. 바르트는 요한복음 3: 16절을 바울의 화해의 사역(고후 5:19)에 접합시키고, 계약의 성취로 재해석했다 (CD IV.1: 78).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마(몸)로 존재하며, 부활의 능력 안에서 하나가 되며 생명을주는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 첫번째 재림에서 그리스도는 40일간 지상에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새로운 사역을 하시며, 교회의 신비는 여기에 근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의 역사적 형식이며, 그의 부활은 우리의 미래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존재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이다 (CD IV/1: 666).


파루시아의 지연은 교회의 시간이며, 예수 안에서 일어난 바울의 칭의론은 종말론적이다.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되며 교회는 없다 (CD IV/1: 739).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을 넘어간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은 불트만 처럼 생명의 가능성이거나, 기독교 신앙의 실존적 현실화로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과 화해에서 재해석된다 (CD IV/1: 285, 287).


불트만이 하나님의 사건을 생명의 가능성으로 보고, 신앙을 통해 실존적으로 현실화 시킨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신앙을 등치시킨 루터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믿음을 넘어서있다. 하나님의 사건이 생명의 사건이라면, 이것은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실존적으로 협소화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세계와 화해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세계와 화해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에 주목하며, 화해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통해 정치 사회적 해방의 소명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은혜에 의해 선택된다면 묵시의 차원에서 남은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 남은 자들의 구원은 화해의 복음에 대한 신앙의 실존적 결단과 헌신을 간과하지 않는다. 화해의 복음 안에서 새언약의 약속과 죄사함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단지 보편적으로만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칭의와 신앙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변화와 종말론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인자 예수를 묵시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증언한다. 각각의 삶의 자리에서 의미는 새롭게 구성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임재, 다시오심은 신약성서의 케리그마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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