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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헤겔과 화해의 하나님

by 파레시아 2023. 6. 18.

 

 

헤겔: 본회퍼와 바르트 사이에서
 
헤겔의 하나님은 역사와 사회, 문화 그리고 교회 안에서 스스로 소통하시는 분이다. 빛은 스스로를 비춘다. 하나님의 진리는 종교 안에 담겨있지만, 교회 공동체에 국한되어있다.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본회퍼는 <1933년 헤겔 세미나>에서 그의 종교철학을 다루고, 특히 종교와 철학이 공동으로 갖는 내용과 관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와 하나님의 자기해명에 있음에 주목했다. 철학은 실제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학문이다. 종교와 철학은 이 지점에서 일치한다. 하나님이 철학의 유일한 대상이 될 때 철학은 신학이 되며, 철학의 탐구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한다 (Bonhoeffers Hegel-Seminar 1933, ed. Tȍdt, 47).
 
이러한 본회퍼의 평가는 헤겔이 어떻게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규명하는 지 도움을 준다. 헤겔에게서 철학은 종교의 합리적인 내용을 역사와 사회 안에서 드러낸다. 여기서 종교와 이성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화해가된다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Religion,” Hegel, Theogian of the Spirit, 259).
 
바르트는 안셀름의 신존재 증명을 해명하면서 신앙이 이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안셀름을 기초로 하나님이 신학 (믿음)과 철학 (지식)의 근거가 되며, 신학과 철학은 둘 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학문으로 말한다. 헤겔에게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는 영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분화한다. 이러한 절대진리를 가진 종교가 참된종교이다. 헤겔은 삼위일체교리에서 계시종교인 기독교를 참된 종교로 보았다. 바르트 역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있어서 참된종교가 되지 절대종교로 말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헤겔은 바르트와 만날 수가 있다. 성령의 신학자로서 헤겔은 안셀름의 신존재로 부터 시작하며, 그의 영원성과 시간의 근원개념을 통해 바르트의 신학과 새로운 지평에서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헤겔의 도전: 삼위일체와 인격의 문제
 
특별히 헤겔이 제기하는 하나님의 인격의 개념은 바르트에게 도전적이다. 바르트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성부/성자/성령에 인격개념을 사용하지만, 내재적인 삼위일체의 존재에 대해서 인격보다는 존재방식(위격)을 사용했다. 존재방식은 역사적으로 드러나는 성부/성자/성령을 “인격화하는 인격”을 의미한다. 그래서 계시는 인격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Dei loquentis persona—칼빈)이 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사랑으로서 하나님은 인격이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친교의 관계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세분의 인격안에서 존재한다—이러한 터툴리안의 명제에서 헤겔은 인격 또는 인격성이 된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최고의 표현으로 본다. 한분 하나님은 사랑과 친교 안에서 인격이 되시며, 신적인 주체성 (또는 정체성-성부/ 성자/성령)이 확립된다. 헤겔에 의하면 인격성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면 삼신론으로 추락한다.
 
만일 인격성을 한 분 하나님의 주체로 파악하지 않고, 개별 인격화 시켜버리면, 삼위일체론은 세상 (그리스도의 계시)과 구분되지 않고, 악을 자체안에 가져야한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절대이념안에서 인격이 신적주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세계와 구분되지 않으며, 악이 더불어 존재한다. 헤겔에게서 범신론이 거절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너무 지나치게 세계와 동일시하는데서 온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몰트만의 만유재신론 역시 내재적 삼위일체의 자리를 제거하고 경륜적 삼위일체와 세계의 영원한 유출로 파악하는 경향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러나 헤겔은 몰트만의 만유재신론보다는 삼위일체론적인 유일신론에 가깝게 서 있다. 하나님의 일치성 안에서 개별 인격성(아버지/아들/성령)은 하나님의 주체로 통합하며, 여전히 이것은 은유적인 종교의 언어로 말한다. 헤겔은 이제 사랑의 영인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교회 공동체로 파악하려고 한다. 세분 인격의 하나님은 영이시다.
 
바르트와 헤겔의 공유

바르트가 하나님은 존재방식안에서 사랑과 친교를 갖고, 그의 신론에서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 하시는 분”으로 주장한다면, 헤겔은 하나님은 관계안에서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분으로 말한다 (ibid., 225-6). 이런 점에서 존재방식 (위격-히포스타시스)은 인격적 방식이며, 관계적 인격에 공명한다.
 
더욱이 헤겔에게서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인간에게 죄와 악의 문제가 발생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인간의 인식에 있지 그 외부에 급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인간은 칸트처럼 의무를 행해야하는 당위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함으로써 악은 인간을 하나님과 분열 또는 파열시키면서 발생한다. 악은 선함의 부재라는 어거스틴의 이해에 가깝다.
 
헤겔의 안셀름 해석과 악의 이해에서 보면, 자유의지가 실행되는 곳에서 인간은 자의식이 되며, 악이 발생하며 처벌과 질병과 노동의 고역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화해는 악을 해결하는 근원이 된다 (ibid., 233).

하나님은 육체 안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갈 4:4). 화해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의 삶과 수난과 죽음이다. 그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부정이 나타나고 한 개인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돌아가셨다. 사랑자체인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신다.
 
이러한 죽음 즉 절대적인 사랑안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가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나며 하나님 자신과 화해한다. 그리고 세상과 화해한다.

부정(죽음)은 부활을 통해 극복되고 부정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성령은 보혜사로 교회 공동체로 오신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교회의 활동에서 화해는 함축적으로 실현된다. 헤겔에 의하면 영이신 하나님은 죽음의 부정(죽음의 죽음)을 자신안에 본질적으로 가지고 계시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아들을 희생을 요구하는 그런 독재자가 아니다 (ibid., 242)
 
헤겔의 화해론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융엘은 헤겔이 신죽음에 대한 기독론적 진실을 파악하고 무신론과 합리주의 철학에 매개한다고 말한다.

<신앙과 지식> 에서 헤겔은 루터란의 찬송의 가사인 “하나님은 죽었다”를 인용하고, 1821년부터 1831년 베를린 대학 <종교철학 강연>에서 신죽음의 명제를 반복했다. 신앙과 지식의 대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헤겔이 종교에 대한 계몽주의 승리를 비판하는 것은 1793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성의 제의가 도입된 것을 상기시킨다. 이성은 종교에 대해 비판할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야 한다. 이성이 자기비판적일 때, 또한 신앙에 봉사할 수 있다 (Gott als Geheimnis der Welt, 84-92).
 
헤겔처럼 하나님의 영원성안에 시간적인 죽음의 계기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바르트의 예정론과 보다 심층적인 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인간예수 즉 인간성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일치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삶에 참여하지 못한다. 헤겔에 의지하여 융엘이 견지하는 기독론적인 신죽음의 해명에서 케노시스적인 입장은 바르트에게 수용되기가 어렵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안에서 은혜의 급진성과 화해론의 새로움을 부각시켰고, 헤겔에게서 이러한 측면이 상대화 되는 것을 비판했다.

헤겔은 은혜와 용서를 칸트와 비판적인 논의에서 도덕철학의 차원에서 언급 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존재안에 담겨져있는 자유와 사랑 그리고 은혜를 통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자유와 세계 변혁안에서 우리를 계약의 파트너로 즉 관계적인 존재로 부르시고 사랑하신다”—이것은 삼위일체론의 유신론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지만, 헤겔에게 여전히 공명될 수가 있다. 바르트가 헤겔을 거절하는 것은 그가 급진적이서가 아니라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서 그렇다(Barth, “Hegel,” 401).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 (안셀름)은 세계를 전적으로 다르게 변혁시키는 새로움으로 오신다. 은혜의 변증법에 대한 헤겔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헤겔을 여전히 높게 평가했고 신학자들이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르트는 어느 정도로 헤겔적으로 사유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헤겔과 더불어 역사화된 하나님의 존재를 전개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삶과 행동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나누는 역사로 말한다 (CD IV/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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