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엘의 1975년 에필로그
융엘은 하이데거가 남김없는 존재론을 통해 형이상학을 폐지해버린 순진한 시도에서 맹목적인 굴복을 한다. 결국 이런 영향으로 인해 융엘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자유와 신비를 형이상학의 잔재로 간주하고, 경륜적 하나님과의 구분을 폐기해버린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에 있다”는 융엘의 명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는 스스로 진리로 드러낸다”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위의 사진에서 융엘은 그의 핵심 테제를 말한다. 하나님은 필연성 이상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한 ㅡ융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다.
융엘을 향한 문제제기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융엘의 하나님의 말씀 사건은 계시의 주권성을 의미하는 가? 하 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ㅡ불트만 처럼 존재론적인 해석학의 가능성(하나님은 필연성 이상의 존재)인가 아니면, 성서의 생활세계로부터 오는가? 하나님은 성서의 생활세계안에서 즉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 성서에서 그리고 세계사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인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이러한 측면은 바르트의 언어행위 (speech act)신학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언어행위의 틀에서 바르트는 모세의 떨기나무를 통해서, 고레스를 통해서, 모짜르트를 통해서 심지어 공산주의와 타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도전하신다. 바르트의 구약적인 다바르 신학은 언어행위로 재해석되고 이스라엘의 계약(모세와 예레미아)과 그리스도의 화해는 생활세계의 지평안으로 들어온다.
하나님은 자유안에서 사랑하시고, 모든 것들을 단지 이해나 해석으로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르게 변혁하신다. 칼 바르트의 전적타자이며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변혁하는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필연성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로 오시는 분이다. 그분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인 활동을 성령과 부활의 빛에서 지금 여기에서 이어가는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다. 바르트는 융엘의 존재 해석학 또는 존재신학으로 담기에 너무 크다.
융엘 에필로그 1975
융엘은 “Epilogue 1975”에서 자신의 책을 둘러싼 논쟁에 답변하면서, 자신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주석적인 관점에서 독해했다고 말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되어가는 하나님 존재의 존재론적 자리매김”
을 구약성서와는 상관없이 헤겔의 역사철학의 카테고리를 통해 해명된 것으로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융엘의 존재론적으로 “되어가는 하나님”은 바르트에게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시는 하나님” (요하킴 크라우스)이나 세계변혁의 “혁명의 하나님” (마르크바르트)과는 전혀 상관없다.
융엘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요하킴 클라우스는 다음처럼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분의 오심의 역사에서 스스로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 (Kraus, Reich Gottes, 102).
그러나 융엘은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존재안에서 되어감은 하나님의 존재의 완전성에서 이해되며 (CD I/1: 427), 이것을 근거로 존재론적인 시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헤겔의 신론이나 기독론 (한스 큉)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Epilogue 1975,” God’s Being Is in Becoming, 129).
물론, 헤겔의 통찰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다. 심지어 마르크바르트도 헤겔이 보편정신을 통해 사유와 현실에 대한 파악을 주객도식의 강요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인간주체는 정신과의 역동적인 관계에 서 있으며,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넘어서서 자유와 인정에 기초한 상호관계로 들어간다.
주체가 일방적으로 객관적인 대상 (객관정신: 문화)을 인식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또한 주체의 인식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상호 주관적인 소통은 정신과의 삼자적 소통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신을 사회의 대립과 예속을 해방시키기위해 비판했다 (Marquardt, Eia, warn wir da, 470).
문제는 헤겔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평가하고, 내재적 비판을 통해 그의 중요성을 수용하는 데 있다. 바르트 역시 헤겔의 위대한 약속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성령의 역할은 융엘처럼 되어감이 존재론이 아니라 내재적 하나님의 삶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융엘은 하나님의 오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보편성의 신비(바르트)를 히브리 성서적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해석학의 틀에서 기독론적으로 해명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유는 본질상 존재에 대한 것이며 도래하는 존재와 관련된다. 사유 자체는 존재의 오심에 관여되며, 존재는 도래함이다. 여기서 세계로 오신다. 하나님의 오심은 존재와 시간 안에서 마지막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 안에서 현존재는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다. 융엘에게서 희망과 종말은 묵시적 차원과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가 아니라 화해의 사건에서 연장된다 (Ju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542).
융엘의 바르트 배신
<세계의 신비로서 하나님, 1977>에서 융엘은 결국 바르트의 내재적 삼위일체(자유)와 경륜적 삼위일체(사랑)의 구분 (상응)을 거절하고 칼 라너의 동일성 원리에 백기투항한다. 예수의 버림받음과 죽음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화가 일어난다. 예수의 수난이 삼위일체론을 해명한다 (ibid., 507).
융엘의 자리에 안셀름의 전적타자는 실종되고 하이데거의 존재의 탈은폐와 은폐의 변증법이 대신한다. 융엘이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에서 부정의 부정, 즉 죽음의 죽음이 일어 났다면, 이러한 루터란-헤겔적인 해명은 삼위일체를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근거지우게 되고, 결국 칼 라너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육신 안에서) 되어감에 있다”는 융엘의 명제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보다는 루터-헤겔의 성육신 반성에 관련되고,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삶의 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성부와 성령의 참여를 말하지, 삼위일체를 십자가 신학의 근거로 구성하지 않는다. 만일 십자가에 칼 라너의 동일화 원리가 확정 된다면, 융엘의 오시는 하나님은 경륜적 하나님인가?
경륜적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되어가고, 세계를 사랑하는 분이지 더 이상 세상을 바르트처럼 자유안에사 심판하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창조하시는 분이 아니다.
바르트에게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은 종말의 삼위일체에서 완성된다. 여기서 바르트의 윤리적 관심은 소명의 정치학으로 드러나는 데 가히 혁명적이며 해방적이다. 천년왕국의 모티브가 (상응과 유비를 통해) 윤리화가 된다. 하나님의 혁명은 오시는 하나님 안에서 소명의 정치와 해방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하이데거-융엘적인 존재와 진리의 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전적타자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중심에 서 있고,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히브리적 유일신론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학을 의미한다. 결국 융엘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자리를 제거하며 자신의 스승 하이데거처럼 반유대주의적 방향으로 끌려들어간다. 융엘이 바르트를 배신하고 칼 라너에게 백기투항 한 태도가 그의 정치적 기회주의에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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