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 바울에 대한 알랭 바디우나 아감벤의 연구는 도전과 자극을 준다. 물론 이전에 토마스 홉즈나 스피노자 또는 존 로크는 성서를 통해 이들의 근대국가이론을 열어갔다. 우리는 성서가 더 이상 교회가 독점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있다. 성서는 세계와 더불어 읽어져야 한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I. 성서해석과 인식론적 문화
나는 성서해석에서 시스템 (텍스트 관계의 총체)과 구조이론 (사회구성과 계층론)을 통해 본래의 자료층과 의미구성을 고고학적으로 해명한다. 이러한 고고학적 해명은 사회학적으로 접합된다.
이것은 종교적 이념이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 문화적 스펙트럼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에서 갖는 지 검토한다. 이러한 고고학적 태도는 지금까지 텍스트 이해에서 원인-결과와 같은 실증주의적 해석을 거절하고 인식론적 문화를 두텁게 기술한다.
나의 고고학적 접근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과 예술을 고고학적으로 구성하고 도덕 이성과 접합 시키는 인식론에 기초한다. 물론 푸코는 고고학을 과거의 모든 언표와 담론을 해명하고 이러한 담론이 지식과 권력의 그물망에서 움직이는 것을 분석한다. 푸코의 담론의 고고학은 주체의 자리에 죽음을 선언하는 니체적인 방향을 갖지만, 나의 두터운 기술의 현상학과 고고학적인 해명은 주체의 자리를 재설정하며, 이러한 틀에서 푸코의 계보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가 있다.
인간의 주체는 에피스테메에서 죽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영향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조건 안에서 주체는 언어의 계보학(장 자크 루소)과 더불어 재구성된다.
인류학의 두터운 기술
프린스톤 대학의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거츠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를 남겼다. 인도네시아와 모로코의 이슬람에 대한 비교연구는 종교와 혁명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문화는 의미를 부여하는 텍스트와 같다. 종교는 상징체계이며 삶의 사실주의와 아우라에 관련된다. 거츠의 문화 인류학에서 종교의 상징과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행해지는 투계놀이는 로컬의 주민들에게 삶의 의미있는 방식으로 채택된다. 이것은 세익스피어의 고전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문화 시스템으로서 종교는 의미론적 텍스트의 앙상블로 정의된다.
이것은 두터운 기술을 요구하며, 그 의미와 진리는 화란의 식민지 권력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담고있다. 이것은 현상학의 생활세계의 차원을 제시한다. 문화는 텍스트의 앙상블이며 이러한 콘텍스트 안에서 로컬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사회를 만들어간다 (Geertz, Interpretation of Cultures, 452-3).
사회학적 의미론의 순환
언어와 문화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설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놀이)과 삶의 형식을 기초로 전개될 수가 있다. 언어가 사용되는 영역에서 소통은 공적이되며, 더 이상 소쉬르의 기호학처럼 문법체계 (랑그)에서 나타는 차이에 의해 의미가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역사적 언어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통사적인 (고고학적 계보학) 분석보다는 언어의 문법체계(랑그)에 대한 공시적인 구조이론에 관심한다. 문법 체계의 차이와 함께 기호와 기표의 차이가 이항의 대립으로 드러나면서 의미를 판별해낸다.
물론 소쉬르의 구조이론에서 관계안에 있는 음성이나 의미의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여전히 음성언어나 소통은 관계연결망과 구조 (랑그)에 의해 파악되고, 언어는 사회현상으로 이해된다. 언어기호들은 사회현상에 의해 결정되고 자율적이지만,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인간 주체의 반성의 자리는 없다.
왜냐하면 언어현상으로 기호들의 관계나 또는 기표 (지시어)와 기표 (표현이 지적하는 실제)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그러나 소쉬르처럼 언어의 기호들은 언어의 문법 체계안에서 차이를 통해 의미가 선 결정 되어야 하는 가?
만일 이러한 언어의 의미관계가 문법의 차이와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거라면,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자들은 그저 로봇에 불과한가? 로봇은 투계놀이를 통해 화란의 식민지 문화에 저항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이성이나 의식은 역사와 문화나 또는 언어를 통해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삶의 형식은 언어로 남김없이 말해질 수 없는 생활세계의 신비와 지평 가운데 서 있다.
언어는 다양한 영역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사회 등)에서 인간에 의해 사용되고 의미의 복수성을 창출한다. 이것은 더 이상 다양한 공론장들에서 나타나는 언어게임들이 언어 문법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념과 물질적인 이해 그리고 권력관계에서 드러나는 담론의 지배와 사회계층의 신분과 계급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과도한 세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표현은 언어의 문법에 의해 표현되지만, 이것의 의미는 사회 계층과 권력관계 안에서 갈등과 대립 또는 매개 아니면 투쟁을 함축한다. 의미는 변증법적으로 사회의 영역으로 이동된다. 여기서 기표와 기의의 이항의 대립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산출하고 재현하는 기호학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의 맥락에서 문제틀이 된다.
더 이상 이항의 대립을 통해 의미를 산출하는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삶의 형식의 관계는 게임규칙과 더불어 물질적인 이해나 권력관계, 관료지배 그리고 담론의 정당성의 절차를 통해 비판적인 검토를 요구한다.
사회적 맥락에서 결정되는 언어게임은 삶의 형식을 창출하며, 여기에 관여하는 행위자의 역할은 소쉬르의 문법체계나 데리다의 타자의 흔적이나 차연의 놀이를 위해 해체될 이유가 없다. 행위자의 주체는 삶의 형식 안에서 네트워크처럼 매개된다. 이러한 그물망의 주체는 위계질서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계층화가 되며 인정을 위한 투쟁에 관여된다. 다양한 삶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 정치, 사회, 종교, 경제는 언어의 의미나 권력관계 또는 담론의 사회화 그리고 예속된 자들의 인정투쟁은 오히려 언어문법체계를 변형시킬 수 있다.
사회적 에피스테메가 언어문법과 파열로 또는 파라다임 변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은 기존사회의 언어의 문법체계나 소통구조를 변형 시키지 않았는 가?
대리다의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는 음성언어와 의미 현전성을 해체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러한 지시어는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의 은폐와 탈은폐의 X에 가깝다. 차연은 존재와 무 사이에 있을 수 있고, 삶의 생성과 역동성 그리고 힘에의 의지에서 작동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에서 차연의 놀이 내지 게임은 존재신학을 전복하는 허무주의의 영원회귀이다. 그것은 차연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차연은 언어게임에서 규칙이나 문법을 거절하고 삶의 형식을 해체 하는가? 차연을 통해 축구게임과 농구게임의 차이가 지연되고 게임이 해체 되는가?
생활세계는 차연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구조의 보편적 지평이 된다. 생활세계는 헤겔의 절대지가 아니라, 과학과 학문 이전에 존재하는 의미의 일반구조이며, 변증법적 운동과 진보에 기초한 절대지의 동일성을 상대화한다. 생활세계안에서 차연, 부재, 흔적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사이에서 움직이며, 이미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상대화하고 지양한다. 지양된 주체는 생활세계의 임재에서 자리를 갖는다.
생활세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렇다고해서 각각의 문화에서 생활세계가 의미구조의 선험적 역할을 하는 것을 간과할 수도 없다. 생활세계의 구조가 주체의 절대지를 상대화하고 지양하면서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갱신한다. 여기서 관계화된 주체는 책임적 비판과 해방의 기획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을 나는 사회학적 의미론의 순환으로 부른다. 이러한 의미론적 순환은 성서 텍스트를 자체의 삶의 자리와 더불어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한다. 또한 역사의 과정에서 성서의 이념과 이념으로부터 일탈된 어그러진 영역들을 문제틀하고, 고고학적으로 비판적 해명을 시도한다.
두터운 기술과 구조의 문제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기호학을 토대로 문화의 이항의 대립을 분석한다. 인간존재는 문화적이며 언어개념적인 맥락에 구속된다. 인간주체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 표현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로 다른 문화적 제의나 종교 관습 또는 신화들에서 기본적 유사점을 찾아내고, 이들을 통합하는 보편적인 구조를 드러내려고 한다. 모든 개인들은 이러한 보편적 사회구조안에 참여하며 통섭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원리는 해체된다. "나는 구조안에 존재함으로서 생각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언어와 교육의 산물이며, 인간주체는 구조분석 아래서 사라져야한다. 의미가 언어의 관계의 차이를 통해 주어지고 문법체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문화이해에서 인간주체의 역할에 비중을 둘 필요가 없어진다. 구조 인류학은 인간의 의미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인간을 해소한다 (Levi-Strauss,
The Savage Mind, 247).
그러나 세계의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보편적 사회구조를 발견하는 시도는 계몽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거절될 필요가 없다. 생활세계의 구조안에 서 있는 인간주체는 사회 문화적으로 설정되며, 행위자로서 해체될 이유는 없다. 레비 스트로스의 사회구조이론에서 장 자크 루소의 언어와 불평등의 계보학은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루소는 그에게 멘토이며 형님이다. 루소의 사유를 기초로 레비 스토로스는 그의 인류학을 세우려고 한다.
루소의 언어 계보학
루소는 야만인의 마음을 발견했으며, 유럽의 문명의 타락과 식민주의를 당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이었다. 루소는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반향을 가지며 드뤼캠의 사회학에 영향을 미쳤다.
니체에 앞서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다루면서 사회적 관계와 감정(사랑, 증오, 연민 등)과 더불어 진보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Rousseau, Essay on the Origin of Languages, 164). 감정이 인간을 시적으로 즉 은유적으로 말하게 한다.
이러한 루소의 언어계보학은 구조인류학에서 주체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풍부하게 해준다. 이성이 아니라 상호주관적 감정이 인간을 소통과 연민의 존재로 만든다. 노동을 기초로한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헤겔)에서 루소의 언어계보학이 자리 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서 시회구조는 주어진 문화에서 나타나는 사회관계의 앙상블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두터운 기술과 다르지만, 여전히 생활세계의 존재론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보편구조는 무시간적이거나 무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요소들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구조분석과 변증법적 방법의 친화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안티노미일 수도 있지만, 언어계보학을 통해 헤결될 수가 있다 (Levi-Strauss, Structural Anthropology, 279, 233). 적어도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면서 했던 사용한 경구는 여전히 구조 인류학에 중요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지만, 이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 지 모른다." (ibid., 23)
레비 스트로스에게서 각각의 문화가 집단적인 대변의 시스템의 산물이라면 (뒤르캠과 모스), 뒤르캠의 토템연구는 종교 사회학적으로 구조주의와 연결되며, 동시에 생활세계론에 접근한다. 이러한 구조이론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합리성이나 행위 (막스 베버)는 거절될 이유가 없다.
루소의 언어 계보학에서 주체의 합리성은 삶에 연관된 예술적 차원과 축제의 의미를 통해 사회적으로 설정된다. 이것은 베버적인 의미에서 가치 합리성에 뷴류될 수있다. 인간의 합리성은 의미있는 행동과 관련되며, 이념과 물질적 이해관계의 선택적 친화력에서 설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주체는 종교적 이념이나 집단적인 대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신분/계급과 문화 계층화로 전개되며, 윤리적 태도와 합리화 과정이 나타난다. 미셀 푸코는 여전히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비판철학의 유산과 보들레르를 높게 평가한다. 푸코가 칸트와 루소를 경유로 한 레비 스트로스와의 대화는 간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푸코는 니체의 제자다.
역사 사회학과 인류학은 1789 프랑스 혁명을 동일한 사건과 주제로 연구할 수 있고, 귀족들이 경험한 혁명과 자코뱅, 그런가하면 상퀼로텐의 경험이 서로 다름을 알고있다. 그러나 인류학자는 혁명을 유발한 사회구조나 체제를 선험적인 언어의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지만, 역사 사회학은 이념과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러나 뒤르캠의 전통에서 언어의 무의식적인 구조나 범주의 객관적인 차원은 종교적 이념의 집단적 대변형식을 통해 언제든지 수용될 수 있다.
간략히 말해 역사 사회학과 구조주의 인류학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유산을 서로 나눌 수 있다. 역사 사회학에서 다루어지는 개별적인 사건들이나 인간의 문제는 인류학이 추구하는 무의식적인 보편구조와 다르지만, 레비 스토르스는 이러한 학문은 여전히 야누스의 두 얼굴을 나타내며, 학제간의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것으로 본다 (ibid., 24).
여기서 루소는 구조인류학과 두터운 기술 현상학을 매개하는데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그것은 베버의 인과율적인 역사이해를 교정해줄 수 있다. 이념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지배는 인과율적이 아니라 언어의 계보학과 변증법적 문제틀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리꾀르는 <시간과 네러티브>의 모델을 통해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타나는 인과율적인 협소함을 극복하려고 한다 (Ricoeur, Time and Narrative, 191). 그러나 베버의 문제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즉 세계체제를 통해 두텁게 기술되어야 한다.
문화 텍스트: 사회학과 인류학의 교차
학제적 소통을 위해 클리포드 거츠는 자신의 두터운 기술현상학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을 검토한다. 레비 스트로스의 과학적 설명은 복잡성을 단순성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오히려 관계의 복잡성을 통해 구조를 이해한다. 거츠에게서 문화는 인간에게 문화적 패턴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의미체계를 통해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인간을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다. 문화의 중요한 상징유형들은 인간을 위한 필수조건이며, "인간이 없는 문화가 없으며 문화가 없는 인간도 없다."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49)
콘텍스트로서 문화는 기호론적이며,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의미의 그물망에 걸려있는 동물과 같다 (막스 베버). 문화는 이러한 의미의 그물망에 비교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두터운 기술은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해명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의미작용의 구조를 검토하며 복합적인 개념구조들을 두텁게 기술한다. 문화는 힘이거나 사회적 사건들과 제도들 그리고 과정들을 인과율적으로 소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콘텍스트이다. 이러한 문화적 콘텍스트 안에서 사회적 행동과 사건들과 제도들 그리고 과정들은 이해될 수 있고 두텁게 기술될 수 있다 (ibid., 14).
문화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공적이다. 문화에서 기록되는 것은 말해진 것이며, 이것은 언어사건의 노에마를 말한다. 문화는 사회적으로 설정된 의미구조들로 구성되며, 우리가 전혀 다른 문화의 세계로 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해진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으며, 이들과 함께 걷거나 설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 (ibid., 13).
거츠는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에서 인간은 여전히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인용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을 해소 하지 않는다. 야만인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의식하지 못한 체 만든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구체성의 사고"를 언급하는 데, 이것은 자연과 사회와 자아를 세계의 이미지(imagines mundi)에 따라 생생하게 개별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추상적이며 일반 개념적 사고와는 다르다.
야만인의 논리는 신화와 제의 또는 마술에서부터 온 이미지에 기초하며, 망원경의 구성과 같다. 이것은 모든 사회 문화적 사건들과 작용들을 지배하는 내적법칙을 말한다. 이것은 이항의 대립에 기초한 언어 즉 소통체계와 같다 (ibid., 352, 354).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는 후설의 현상학을 거절한다. 후설의 생활세계와 내적시간의 분석은 오히려 루소의 언어계보학이나 아만인의 문화에 대한 인정에서 연속성을 갖지 않는가? 이성은 시간과 역사에 의해 조건되며,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소통과 도덕 감정이 엮어진다. 시적이며 도덕 감정의 언어가 불평등의 사회적 관계와 역사를 비판하고, 사회계약론을 통해 국민주권과 인정과 경제의 안전망으로 사회 안에서 정치적 자리를 갖는다.
자연의 상태가 시민사회의 부패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근거로 드러난다. 시민사회의 모든 지배 담론(음성과 기록)에 대한 생활세계화가 나타난다. 언어의 계보학은 야만의 진보와 부패한 사회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인정정치 그리고 혁명의 미학을 담는다.
레비 스트로스의 현상학 비판은 경험과 실제의 연속성에 있는 데, 실제에 도달하기위해 레비 스토르스는 경험을 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경험은 이후 객관적 종합을 위해 재통합된다 (ibid., 356). 신화연구에서 이향대립에 기초한 관계들의 분석과 의미는 두터운 기술의 수용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인류학에서 주체의 경험은 언어의 계보학을 통해 매개될 수가 있다.
루소의 새로운 통찰
이제 나는 루소를 통해 레비 스트로스를 보충한다. 무의식적인 구조가 언어의 소통을 결정 한다고 하지만, 야만인들의 은유론적 표현에는 여전히 현대인과 소통 가능한 경험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가? 가족 유사성 내지 선택적 친화력은 야만인의 은유적인 소통에서 경험될 수가 있지 않는가?
루소는 음성언어 이전에 제스처와 몸과 손의 움직임 그리고 춤의 동작에 주목했다. 이것은 야만인의 상형문자에 기록되며 음성언어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음성이 아니라 기호를 통해 그 미학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상형문자 (중국)는 음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며 감정언어에 상응한다 (Rousseau, 6, 17).
중국이나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차연이 프랑스어 처럼 영원히 반복과 차이로 되는가? 오히려 시와 글과 그림에서 삶은 예술적으로 표현되지 않는가? 기호의 미학과 축제적 차원은 시와 음악의 언어에서 루소에게서 시민사회 안에서 열정과 도덕적 연민과 상호인정과 이해를 위해 소통되고 설정될 수 있다 (ibid., 44-45).
음성언어 역시 알파베트 문자처럼 나쁜 계약에서 부패할 수있다ㅡ루소는 음성과 문자의 이항대립을 거절하고 차연과 같은 원초문자(arche-writing)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예술화 또는 축제화를 통해 두터운 기술을 제공한다. 주체의 일반의지는 개인의 자유를 강화해준다. 개인의 자리는 공공선의 거버넌스에서 재설정된다.
구조 인류학에서 야만인이 자신의 부족이 곰으로부터, 이웃 부족이 독수리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는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은유적인 방식에서 그렇게 소통한다. 그의 부족과 이웃 부족의 관계는 유비론적이며, 곰과 독수리의 구분을 통해 표현된다 (Geertz, 353). 음성언어는 여전히 노래와
제스처와 춤 그리고 시적인 차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존재를 기초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서구인의 백색신화와는 다르다. 은유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전거를 가지며, 곰과 독수리의 차이를 통해 부족의 성격과 의미와 내용을 말한다.
토템적 사유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루소가 그의 언어의 계보학에서 말한 것처럼 시적이며 제의적이다.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시대에 시적이거나 은유적인 또는 축제의 언어가 삶에서 아직 실종된 것은 아니다.
도덕적 필요와 감정에서 출발하는 언어는 은유적이며 노래로 불려진다. 음악의 멜로디로부터 언어는 문법을 통해 기록되고 객관화 된다.
은유나 네러티브는 신화의 세계와 성서의 네러티브(사가)를 매개해줄 수 있다. 이러한 언어형식에서 말해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객관적 전거 즉 생활세계의 지평을 지시하면서 출현한다.
음성과 기록은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상관관계에 있다. 이러한 언어과정에서 알파베트 글쓰기는 상형문자와는 달리 대상을 합리화하고, 도덕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대상을 재현하는 이성문화를 드러낸다.
음악으로 뷸려지고 시적인 언어에서 인간의 감정과 욕구와 연민이 표현된다. 예술이 자연과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보다 합리화된 글쓰기는 음성언어를 이후의 세대에 전해지고 보존된다. 음성과 글쓰기의 차별화는 자연환경과 지역의 다름에 따라 나타나며, 글쓰기가 음성보다 인간언어에 더 가치가 있고, 보다 큰 만족을 가지고 읽혀질 수 있다(Rousseau, 186).
루소에게서 기록이나 문자언어는 처음부터 음성과 같이 있었다. 리듬과 소리는 자음과 함께 시작한다 (ibid., 50). 음성과 문자는 같이있다ㅡ데리다는 이 문장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루소의 언어계보학에 해체의 폭력, 차연의 허무주의를분칠했다. 그러나 기록된 차가운 이성의 문자는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안에서 담론화되고 제도화되며, 이것은 지배와 악의 형식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 절대주의로 진화한다. 루소는 예술의 언어 (음성)와 상형문자의 미학을 통해 삶의 축제적 차원을 간직하지만 알파베트 글쓰기를 통한 합리화와 진보에서 드러나는 담론의 사회적 지배 (문자학)와 불평등을 비판한다.
루소에게서 음성은 감정과 이미지를 표현하며 리듬과 멜로디와 소리를 필요한다. 이것은 근대인에게 결핍되어있고 고대 그리스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ibid., 51). 기록된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연의 해석(스피노자)에서 자연은 성서처럼 읽혀진다. 니체는 가치 체계를 힘에의 의지를 기초로 독해했다. 니체의 언어 계보학은 도덕을 해체하지만, 루소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분석하면서 감정과 연민의 도덕적 차원을 회복시키고, 삶의 예술언어를 사회적 담론지배와 독재에 대립시킨다. 도덕 감정과 음악이 문법체계에 앞서 언어의 파라다임이 된다. 이것은 데리다가 음성언어를 로고스 중심으로 비난하고 현전의 형이상학과는 전혀 정반대의 방향을 지적한다 (Derrida, Of Gramatology, 242).
자연상태에서 언어와 도덕과 정의는 단순히 힘에의 의지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토마스 홉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루소의 분석에 의하면 문자학과 사회적 담론이 권력과 지배관계를 통해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음성에 기초한 예술언어과 도덕감정를 억압했다. 문자가 음성을 보충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고 억압했다. 데리다의 해체전략인 글쓰기, 보충대리 그리고 차연은 사회적 담론의 지배방식과 폭력구조에 대해 보다 더 고고학과 계보학 (미셀 푸코)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언어의 계보학과 삶의 형식
나는 루소의 언어계보학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와 삶의 형식으로 접합 시킨다. 이것은 사회학적 접합이론이며 의미론의 순환을 통해 역사비판과 문화 텍스트를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고려한다. 거츠의 두터운 기술에는 루소의 언어계보학과 후설의 생활세계 구조가 진지하게 숙고되지 않는다.
사실, 문화적 삶의 형식은 텍스트로 읽혀질 수가 있다. 물론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와 문화를 무의식적인 구조를 통해 텍스트의 총체로 독해하지만, 이러한 세계에 대한 경험을 차단했다. 그는 의미가 아니라 기호의 독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는 문화의 상징적인 형식들을 야만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의미와 개념과 도덕적 태도와 더불어 연관짖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단지 내적구조를 통해 삶의 콘텍스와는 무관하게 독해한다.
레비 스트로스와는 달리, 야만인의 문화의 콘텍스트는 단지 언어의 보편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은유적이며 구체적인 언어게임과 삶의 형식에서 감정과 의미 도덕적 태도와 삶의 제의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문화는 생활세계의 존재론 안에서 움직이며 이들의 실천과 창조행위 그리고 언어와 같이 엮어져있기 때문이다.
거츠는 투계의 놀이에서 역사적으로 자바섬의 원주민들의 생활세계가 현전해있고 의미창출을 본다. 이것이 과연 데리다처럼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비난 되어야하는 가? 생활세계의 현전이 오히려 데리다의 차연의 허무주의를 프랑스 중심주의로 폭로하지 않는 가? 인간이 없는 문화는 없으며 문화가 없는 인간도 없다. 이러한 현상학에서 드러나는 두터운 기술 방법은 문화의 콘텍스트에서 언어 계보학적으로 시도된다. 투계놀이에 관여하는 주체는 화란의 식민지 문화와 백색신화에 저항을 표시한다.
이러한 현상학은 기록된 텍스트 외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리다의 문자학을 거절한다. 관계의 총체로서 콘텍스트가 문화의 실천과 삶의 형식을 텍스트로 보게한다. 문화자체는 언어놀이와 삶의 형식을 통해 텍스트로서 언어의 두 가지 특징인 랑그(문법체계)와 파롤(소통)을 재형성하고 변형시켜 나간다. 자바섬이 투계놀이는 섹스피어에 버금가는 의미를 원주민들에게 준다. 자바섬의 생활세계는 차연의 영원회귀를 통해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비난되고 재식민지화가 될 수 없다. 문자학 이전에 문화적 실천놀이 (ritual)가 있었고, 이러한 문화적 놀이나 제의가 감정의 언어와 글쓰기를 필요로 하며 인간주체를 형성해나간다.
문화의 영역은 문명의 장기지속 (페르디낭 브로델)에 속하지만 그것은 또한 구조의 역사를 갖는다. 장기지속의 역사에서 사회학적 문화이해와 그리고 구조분석은 인간주체의 언어행위를 고려한다. 생활세계는 장기지속이다. 역사적 이념형 (고전시대,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등)은 <야생의 사고>에서 드러나는 은유적 언어를 통한 인간의 행위에 적합한 이념형을 분류할 수가 있다. 여기서 언어체계에 기초된 개념적 네트워크는 인간행위의 문화적 의미론(베버)과 분리되지 않는다.
감정의 음성언어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되고 놀이화가 되면서 놀이의 규칙을 통해 투계라는 문화적 삶의 형식을 창출한다. 이러한 문화적 삶의 형식은 화란의 식민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더불어 생활세계의 현전화를 드러낸다. 이러한 현전화는 종교 제의와 예술 그리고 문화적 놀이에서 삶의 형식으로 현상하며, 기의와 기표의 이항대립의 불충분함을 드러낸다. 오히려 언어게임과 삶의 예술언어에 기초한 문화적 실천형식에서 백색신화에 저항하는 비판과 해방의 새로운 의미의 텍스트가 현상한다.
II. 관계론적 텍스트: 화해와 생활세계
앞서 논의한 것처럼, 투터운 기술의 인식론적인 태도에서 행위자들은 언어놀이에서 요구되는 규칙이나 문법을 준수하면서 삶의 개별적인 형식을 창출해나간다. 이러한 다양한 삶의 형식들에서 의미는 가족관계의 유사점처럼 또는 유비론적으로 네트워크 안에서 연결된다. 일차적으로 교차 텍스트의 의미는 의미관계와 연결망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문화는 의미의 앙상블로서 텍스트의 의미를 갖는다. 다양한 문화적 영역들이 이제 텍스트의 앙상블로서 기록된 텍스트와 교차된다. 이것은 생활세계의 임재로 드러난다.
이러한 문화와 종교에 대한 두터운 기술에서 나는 하나님(전적타자)과 세계화해에 주목한다. 텍스트는 성서뿐 만 아니라 하나님이 화해된 세계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회 문화적 영역을 포함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며,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살아있는 텍스트가 된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론적인 영역이 교차된다.
이러한 관계론적 텍스트 또는 교차 텍스트(intertextuality)는 화해의 복음을 생활세계와 관련 짖는다. 전적타자로서 하나님은 세계와 문화, 타자의 얼굴을 통해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성서의 화해담론은 생활세계의 임재에 관련된다.
다바르의 보편지평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말하는 행위 (살아있는 담론)와 말해진 것(기록된 텍스트)을 구분하고, 전적타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적인 접근을 열어 놓았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말씀하시며 윤리적 책임을 각성시킨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다바르는 말하는 것, 또는 드러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어 행위는 약속, 희망, 그리고 미래로 나타난다. 유대-기독교적 사유에서 음성 중심주의는 구전과 기록된 토라의 변증법에 기초된다. 구약의 전승사에서 구전단계와 시적표현 그리고 노래와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하나님은 토라와 예언자들, 사도들그리고 세계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의미와 진리 그리고 약속과 계약에서 표현되고 기록된다. 구전토라와 기록된 토라는 유대의 구원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예언자의 음성과 비판문화는 기록된 토라를 억압한 것이 아니라 항상 토라로 복귀했다. 이것은 신명기적 토라와 역사에 기초된다.
이러한 구약적 사고는 칼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에서 결정적이다. 그의 화해론에서 나타나는 빛들의 교리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교회 울타리 밖에서 끊임없이 말씀 하신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의 화해론은 말씀-행위 신학에 기초되며 하나님은 발람이나 고레스 그리고 불타는 가시덤불과 모짜르트의 플루트 연주를 통해 그리고 러시아 공산주의와 심지어 헤겔 좌파들에게 죽은 개로 취급당했던 헤겔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씀하실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행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타자의 세계를 하나님의 소통수단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은유론적 사유는 신화론적이 아니라 전적타자로서 하나님과 백색신화의 존재중심주의를 해체한다.
유대-기독교적 사유에서 은유,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며 토템의 사유와 뷸가공약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미의 번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성서적 은유는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과 구원사를 전거로 갖는다. 모든 은유와 개념이 같은 것이 아니라, 은유는 의미전거와 관련된다. 말씀의 행위 또는 소통신학은 삶과 세계의 텍스트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계시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다바르에 기초된 음성근원의 차원은 성서적 하나님 진술에서 현대의 자연과학의 이성과 기술지배, 인간의 자율성의 이름으로 또는 고난받는 인간의 이름을 통해 제기되는 무신론에 비판적으로 관계된다.
무신론은 전적타자에 대한 인간의 갈망(호르크하이머)에서 도구화된 이상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성은 개인의 인격을 기초한 존재신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존재를 기초로 말해질 수가 없다. 그분은 다신론의 가치체계나 형이상학의 최후의 존재근거 또는 존재의 심연으로 개념화될 수도 없다.
YHWH (테트람그람)로 문자화되는 이름은 나를 앞서가는 미래의 존재를 가리키며, 살아있는 음성의 임재로 나타난다. 나사렛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의 궁극적인 말씀이지만, 이러한 음성의 사건은 계약으로 설정되며 공동체의 실천으로 지향된다. 복음과 토라의 계명은 서로 연관되며, 전적타자로서 하나님은 세계와 화해의 관계로 들어오며, 인간과 공동체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온다.
이러한 인격적 언어는 축자적이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 성서의 문자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계시에 기초된다. 음성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형이상학의 경계개념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삶과의 연관에 서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계약의 파트너로 불러내며, 인간에게 창조주와 은혜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Gollwitzer, Krummes Holz-aufrechter Gang, 347-8).
하나님의 근원음성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삶에 관련되며,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를 드러내는 드라마, 무대 또는 소통의 텍스트로 설정한다. 메타포나 네러티브 또는 담론 (희년)과 같은 성서의 언어는 공적으로 소통되면서 사회적인 삶을 구성하는데 관련된다. 성서언어의 계보학은 인정과 공공선의 거버넌스를 위해 시민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산출한다. 화해의 복음은 생활세계 구조와 엮어진다. 메타포나 네러티브는 전적타자인 하나님이나 생활세계의 지평에 관련되지만 전적타자나 생활세계가 이러한 언어형식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고고학적으로 메타포와 네레티브의 계보학에서 출현한다.
사실주의적 성서해석과 담론지평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는 사회에서 밀려나가 상실된 민중 (massa perditionis)인 공적 죄인들과 세리들의 삶에 연대하고 이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세속적인 비유와 네러티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가르쳤다. 바르트에게서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로부터 밀려나간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 분이다 (KD IV/2: 200).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새롭고 다르게 변혁하는 하나님의 혁명—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시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트는 로마서를 주석하면서, 역사비평은 연구자의 한계와 해석에 대해 보다 더 비판적이라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이것은 텍스트의 배후로 되돌아가 문학적인 장르나 양식을 역사적인 기원과 삶의 자리 그리고 전승과정을 통해 검토하는 연구방식을 거절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슈툴마허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약의 전통과 언어와 사고와 독립된 채로 이해될 수 없 (Stuhlmacher,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44).
복음서의 구약성서의 인용과 재해석을 통해 담론의 지평을 성서의 사회적인 배경과 더불어 동시대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인식론적 태도는 불트만과는 달리 모든 문학적인 카테고리를 공동체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는다.
III. 새로운 편집사 연구
“역사적 예수”는 불트만에게 거의 알 수가 없다. 불트만은 양식사 비판을 발전시키고, 복음서의 문학적인 장르를 예수전통에서 부터 초대 교회 공동체에 이르는 자료의 전승사를 분석했다. 이것은 성서를 이해하는 역사비평의 모델이 된다. 마가복음의 예수의 어록자료들은 초대교회의 신학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마가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Bultmann, History of Synoptic Tradition, 5.40).
역사적 예수와 마가의 신학적 입장은 구분되어야하고, 예수의 역사적 삶이나 전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원자료 비평을 통해, 마가와 Q 자료는 마태와 누가의 기본자료가 되며, 이런 자료들은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이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에 따르면 비록 마가복음이 가장 빨리 기록되었다고해도,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기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 역사적 예수연구를 보면 불트만의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복음서의 자료층을 분석하고 초기 예수 전통의 자료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예수전승들은 독립적인 짤막한 어록이나 스토리들또는 비유로 구성되며 묵시 문학적 장르로 나타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초기 전승자료들은 30년대에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티나 예수 서클에서 구전으로 전해졌다. 마틴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구전은 기독교적 할라카로 볼 수 있다. 유대교의 할라카처럼 예수의 말씀과 활동은 예수 당시 72인 제자들의 파송에서 구전으로 전해졌다 (누가 10:1). 이것은 Q 어록 자료에 속한다. 바울의 회심 (33/4) 전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구전은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선교를 위해 기록되기 시작했다 (Di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28).
이런 점에서 누가는 누가복음 1장 도입부에서 편집사 연구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해 스토리를 엮어내기 위해 손을 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전승은 처음부터 예수를 따르던 목격자들이나 전파자들이 전해 준 것이다. 누가 역시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활동에 대해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순서대로 썼다고 말한다 (누가 1:1-3).
예수의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언어의 활동과 사회적 삶의 형식이 복음서 편집이전에 존재했다. 누가는 최초로 사실주의적 입장에서 복음서를 편집했다. 누가 자신의 신학적 구성보다는 객관적 자료의 전승의 신빙성이 언급된다. 누가의 보도를 기초로 전승된 자료나 장르들을 구성적인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짤막하고 단순한 형식들은 초기 전승자료의 파라다임으로 분류될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마가와 Q 자료가 어떻게 공관복음에서 다른 스타일로 편집이 되고 텍스트의 다른 구성에서 해석이 되는지 비교 할 수 있다(자료비평). 또한 비교연구를 위해 50년대에 기록된 도마복음이나 외경등을 문헌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텍스트 비평은 공동체의 삶의 자리와 편집을 넘어서서 초기 안디옥 공동체에 예수의 가르침을 증언해준 언어활동에 더 많은 주목을 한다. 증언언어에 기초한 전승사가 편집사에 앞서있다.
복음적 할라카와 소명
새로운 편집사 연구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활동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을 취하며, 예수문서들에 담겨져있는 이스라엘의 이디엄과 구약의 인용과 해석에 주목한다. 디벨리우스의 기독교적 할라카는 여기서 복음적 할라카로 재구성되며, 예수문서에 담겨진 기독교적 실천을 부각시킨다. 율법은 복음의 필요한 형식이며(칼 바르트), 아브라함의 믿음은 복음적인 믿음과 실천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복음적 할라카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viva vox evangelii)에 의존되며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말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치며 예수의 삶과 운동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부르심과 소명신학의 차원을 성서해석에서 고려한다. 복음적 할라카는 토라를 길과 진리와 생명을 위한 지침으로 (산상수훈과 계명) 또한 복음의 필요한 형식으로 해석하고 토라를 실천하는 제자직의 소명으로 종결된다. 성서해석은 프락시스 이론이다(Marquardt, Vom Elend und Heimsuchung der Theologie, 209).
불트만과 양식비평
불트만의 분석 방법은 텍스트의 문학 장르를 검토하고 최소단위의 개별적인 아포테그마타를 토대로 한다. 마가복음과 Q 자료를 기초로 공관복음에서 어떻게 아포테그마타의 스타일이 손질이 되고 새롭게 첨부되는지 문학장르의 발전과 역사에 관심한다.
불트만에게 아포테그마타는 짤막한 콘텍스트에서 행해진 예수의 어록을 말한다. 이것은 디벨히우스의 파라다임처럼 역사적 예수에 의해 본래적으로 말해진 것이다. 불트만은 이것을 그리스 문학 형식인 아포테그마타로부터 차용한다. 예수의 본래적 어록은 랍비 유대교와 헬레니즘 자료들과 비교되고, 아포테그마타들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논쟁대화, 가르침의 대화, 예수 개인의 삶에 관계되는 자서전적 형식 (마태 8:19-20). 문학적인 양식에서 볼 때 "내가 말한다"와 비유는 동일시된다 (Bultmann, ibid., 39, 54-55, 69, 150–51, 166–67).
예를들면 마가복음 2장 23-29절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안식일 논쟁에서 굶주림은 다윗과 그의 일행의 경우를 근거로 옹호된다. 27절--"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은 마가의 본래 텍스트에 속하지만, 그러나 불트만에 의하면, 28절--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을 27절의 연속 보다는 마가의 첨부로 볼 수도 있다 (ibid., 16-17).
크로산의 의미론적 순환
그러나 크로산은 불트만 처럼 안식일 논쟁에서 본래적 양식과 마가 저자의 첨부를 구분하지 않는다. 크로산은 마태복음 (12:8)과 누가복음 (6:5)을 비교하는 의미론적인 순환관점을 취한다. 여기서 28절의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인자는 예수에 대한 칭호에 속하며, 27절의 인자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르킨다. 이것은 불트만 처럼 불연속이나 마가의 첨부가 아니다.
오히려 크로산은 28절을 통해 27절의 의미를 재확인한다. 마가에게서 예수는 다니엘 7장 13절을 기초로 묵시적인 인자칭호를 가지며, 이러한 측면에서 묵시적 인자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은 일반적인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257).
크로산은 텍스트 분석에서 의미론적인 지평을 확장하고 불트만의 최소단위 분석의 한계를 넘어선다. 예수어록에 대한 교회의 삶의 자리를 넘어서서 마가의 안식일 논쟁 담론은 예수 당시 실제로 있었던 바리새파들과의 논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인자에 대한 의미론적 지평은 마가 이전 50년대 기록된 Q 자료 (누가 9:57-58, 마태 8:19-20)나 도마복음 86에서도 나타난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Q 자료가 인자를 묵시적인 예수 칭호로 사용한다면, 도마복음은 묵시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 만일 도마복음이 대화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불트만처럼 아포테그마타의 단순 어록으로 본다면, 그것은 Q 자료 보다 앞선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에는 묵시적 심판의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트만은 데카르트적인 분석과 의심의 태도를 갖고 텍스트의 의미해체를 교회로부터 시도한다. 여기서 Q와 마태와 누가의 특수자료들 그리고 요한복음 안에 담겨져있는 초기 예수전통의 자료들은 마가복음에 앞서지만 후대 교회의 산물로 밀려난다. 불트만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최소화된 아포테그마타의 문학양식이고, 이것이 초대 공동체 교회신학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근거가 된다. 불트만의 해체적 분석에서 묵시론적인 의미 연관성은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가르침과 상관없다.
오히려 비신화되고 실존주의화가 된다.
그러나 텍스트의 생활세계는 이해와 해석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며 전승 자료들은 순환론적 연관에 있다. 예를들면 불트만과는 달리 마가복음의 소묵시록에서 예수는 성전을 지나가고 있었다. 성전파괴 이전의 자료 전승임을 알 수가 있다. "황폐하게하는 가증스런 물건"(13 : 14)이 39/40년 칼리쿨라 시대로 소급된다면, 마가는 도마복음 보다 이전의 묵시 전승자료를 가지고 있다.
아포테그마타나 파라다임 이전에 전승의 내용 (진리내용)이 자료비판의 근거가 되며 내재적 비판의 원류가 된다.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
(13: 26)은 다니엘 7장 13절과 관련된다. 그리고 마태 24:10-12과 30절은 마가의 소묵시록과는 독립적인 마태의 특수자료에 속한다. 불트만처럼 마가복음에 대한 마태의 후대 첨부나 스타일의 확대로 볼 수가 없다.
부분(아포테그마타)이 아니라 관계의 총체가 의미의 지평을 산출한다.불트만의 양식비평의 문제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가복음의 담론은 교회와 더불어 당대 사회 정치 문화적인 배경에 관련된다. 다른 초대 전승자료들과 더불어 의미론이 확장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서 이러한 사회적 담론의 성격, 의미론적 확장 그리고 고고학적 해명은 최소 단위 아포테그마타에 대한 과몰입으로 인해 봉쇄되고 만다.
이와는 달리 크로산은 의미론적 순환을 통해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관계의 네트워크로 들어오게하며 각자의 다른 삶의 자리에서 언어게임들을 두텁게 기술한다.
IV. 복음서와 사회적 담론
성서의 담론 안에는 이미 교회의 자리 이전에 광범위한 사회 정치 문화적 콘텍스가 존재한다. 종교적 담론과 교회의 관계는 개별 아포테그마타 분석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복음서의 담론은 팔레스티나의 물질적 이해관계, 권력관계와 관료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통해 검토 되어야한다. 성서의 담론은 세상과 열려있는 지평을 갖는다.
나사렛 예수가 팔레스티나에서 아람어로 비유를 민중들에게 말한 사실적인 배경은 불트만의 양식비평에서 실종되고 만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예수의 비유를 아람어로 재번역 할 때, 불트만의 헬라주의적 문학양식은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어록 그리고 활동으로부터 돌출되어야 한다. 아포테그마타를 분석하고 교회의 삶의 자리로 환원할 경우 나사렛 예수가 실종되는 가현론이 출몰한다. 사실, 갈릴리 복음인 Q 자료는 순회하는 설교자들에게 예수의 급진적 윤리를 구체화하며 마가나 도마복음보다 더 역사적 구체성을 갖는다. "여우도 굴이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누가 9: 58) (Theissen, The New Testament, 37)
성서는 세계와 더불어 읽어야한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회심이전에 존재 했지만, 마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의 고린도 전서 15장의 부활 전승은 단순히 안디옥 교회가 만든 작품이 아니다. 아람어로 된 초기 부활의 목격자들의 구전이나 파피루스 전승에 기초해 안디옥 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교와 교리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가 공유하는 초기 부활전승의 보존에 속하고, 기독교의 할라카처럼 설교와 가르침과 선교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여전히 생존하는 상황에 교회의 잘못된 번역이나 편집이나 임의적인 변형을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원자료 비평은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부활이전과 부활이후의 증언이 관련없다는 주장을 거절한다. 복음서의 부활이전의 나사렛 예수는 교회의 부활선포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는 묵시적 인자 메시아였고 이후 초대기독교 신학의 모체가된다 (케제만).
누가는 세계사적 신학자
누가의 부활전승은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속하며, 40일 현현사건에서 갈릴리 모티브를 포함한다 (행전 13: 31). 부활의 예수는 자기와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다. 빈 무덤 보도 (마가 16: 1-8)는 예루살렘 전승에 속하지만 누가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부활의 예수가 갈릴리에 현현한 것을 보도한다 (21).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의 현현은 가장 오랜된 전승에 속하며 목격자들에 의한 증언에 속한다. 글로바는 요셉의 형제이며 시므온의 아버지다 (요 19:25). 글로바는 주의 형제 야고보의 지도력을 추종한 사람이었다 (Wiefel, Das Evangelium nach Lukas, 408).
누가는 부활보도와는 달리 마가는 변모산의 체험을 부활의 예견 즉 프로렙시스로 파악한다 (9:9). 이러한 관점은 마가복음 2장 14절( 레위의 부르심)과 3장 14절(열두사도 부르심과 권능부여)을 부활의 미래에서 읽게한다 (Barth, CD I/2: 487).
예수는 메시아로서 구약의 묵시적 예언을 성취한 화해자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안에서 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하신다. 누가는 부활 ㅡ40일 현현 ㅡ승천ㅡ재림을 통해 화해의 세계사적 중요성을 열어 놓았다.
성서는 세계와 더불어 읽는다
예수자료의 구전이 30-50년도 사이에 기록되기 시작했다면, 수난전승이나 Q 자료, 부활전승, 묵시적 재림기사 등은 교회가 일방적으로 만든 산물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증언자료에 속한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구약의 인용이나 회당에서의 활동 또는 당대 바리새파의 논쟁은 단순히 아포테그마타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을 그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증언하는 예수문서에 속한다. 구약의 지평과 당대 바리새파 유대교와 연관된 예수문서는 논쟁 아포테그마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배경을 갖는 특수자료층에 속하며 나사렛 예수의 본래성에 접근하는 열쇠가 된다.
예수문서와 초기 전승자료들을 기초로 나는 누가복음 1장에서 언급되는 편집사 연구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문헌비평적으로 해명한다. 복음서의 담론은 교회의 상황과 더불어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인 배경과 유리될 수가 없다. 텍스트는 관계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문화적인 두터운 기술을 요구한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내가 말한다" 의 1인칭 화법이나 비유는 초대교회의 산물이 아니다. 예수의 1인칭 화법은 산상수훈에서 나타난다. 요세푸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수의 비유는 가장 오래된 유대인 문헌에서 도 볼 수 있다 (Theissen, The New Testament, 19). 예수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은 당대 민중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고, 예수는 실제로 말을 했다. 이러한 측면은 복음서의 사회적 담론의 성격을 교회를 둘러싼 보다 넓은 문화적 세계와 연결된다.
예를 들면, 포도원의 소작인 비유 (마가 12: 1- 11, 마태 21: 33- 46, 누가 20: 9 -19)에서 당대 갈릴리 농부들이 소작인으로 살았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들은 외국인 주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젤롯의 본거지는 갈릴리에 있었다. 갈릴리의 관료지배에서 만일 소작인들이 주인의 후계자인 아들을 제거 한다면, 주인없는 토지는 법적으로 쉽게 차지 할 수 있다. 물론 비유에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대변한다. 알레고리는 단순히 상징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의 예수의 사회전기와 사회로부터 밀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 그리고 로마시대의 세계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수의 민중은 묵시적 차원에서 암 하 아레츠와 게르 그리고 사마리안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 나라로 일차적으로 초대된다. 마가의 오클로스에서 이러한 게르의 차원은 실종된다.
프리델 마르크바르트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묵시적 메시야 인자와 관련되며 (단 7:23) 가장 거룩하신 분의 백성과 일치된다(7: 27). 이사야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53)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묵시적 차원에서 집단인격을 의미한다. 부활의 인자 메시야는 그의 백성 암 하 아레츠와 같이 있다 (Marquardt, ibid., 152).
마가의 메시야 비밀에서 예수는 비유에서 자신의 메시야의 정체성을 밝힌다. 예수는 아람어로 소작인의 비유를 당시 갈릴리 사회경제에 근거하여 도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말을 했다. 비유에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예수의 담론은 그의 사회적 삶 안에서 구체적인 배경을 갖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성서 텍스트와 콘- 텍스트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예수의 삶과 활동을 통해 말씀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의 주제와 콘- 텍스트 그리고 세계지평에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유기적 관련성은 두텁게 고고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기술 되어야 한다. 성서는 세계와 더불어 읽어야한다. 교회는 공론장에 관여하면서 화해의 복음과 인정투쟁을 통해 항상 새로운 삶의 실천형식으로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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