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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지평

성서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22)

by 파레시아 2023. 2. 6.

성서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은 역사비평에서 밀려 나버린 것을 회복한다. 성서의 이념과 역사적 자료의 층들의 지반을 추척해서 역사 사회적인 맥락에서 성서의 담론을 분류하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고고학은 권력관계에서 성서의 담론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그것은 성서의 생활세계에서 밀려나간 하위계층과 유효한 역사를 북권 한다.


갈릴리의 사회계층 구조

갈릴리는 지중해의 로마문명의 영향권에 있었고 국제적인 경제교류를 하던 코스모폴리턴 지역이었다.지중해 해안지방인 프토레마이스를 통해 국제 상업교역은 세포리스와 디베리아스 그리고 가버나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헬라문명과 헤롯 안티파스 시대에 갈릴리에 세워진 신 도시들은 갈릴리를 단순히 낙후한 지역으로 볼 수가 없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했지만 식민지 정복을 통해 자본유입과 상품교역 그리고 세금제도와 행정관료제로 지중해국가와 도시들을 장악했다.

로마제국의 농업사회의 계층 구조는 권력과 특권 그리고 명예를 기초로 세워진다. 지배자와 지역 행정관리들이 부를 절반 정도 독점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이 급료로 살아간다. 상인계층은 시장과 세금을 통제하는 관리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나름 상당한 부를 소유하고 정치권력에 줄을 대기도 했다.

예를들어 애굽의 알렉산드라에서 헬라 유대교의 거두인 필로의 형은 은행가였고 클라디우스 황제와 연줄을 대고 있었다.

대부분 하위계층은 농민들이었고 로마에 대한 세금과 특권계층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목수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은 땅이 없는 농민들로 구성되고, 정결하지 못하거나 기층의 사람들(품삯 노동자, 거지, 창녀 등)은 농부나 장인들로부터 구분 되었다.  이런 계층분화는 고정되기 보다는 유동적이고 전쟁이나 기아 또는 질병으로 인해 중간계층의 사람들은 하위계층으로 전락했다(Lenski, Power and Privilege, 281-2).

유대의 민족국가는 하스모니아 왕가에서 시작되며, 다니엘의 인자 메시야는 자신의 고난받는 백성과 관련된다.
예수시대에 이러한 백성은 산헤드린에서 대변 되지만 로마 식민지배에서 이스라엘의 독립국가적인 성격은 상실 되었다.

암 하 아레츠는 민족개념보다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에 가깝고, 이들은 농민계층이며 정치 이론적으로 “인민 대중”이나 또는 파시즘적인 민족 공동체와는 무관하다
.

예수운동과 에세네파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에세네파 세례요한과 관련 짓는다. 베드로의 영향이 보인다.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였다 (마가 1:29-31; 요한 1:35).

에세네파는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이 헬레주의화가 되고 로마와 결탁한 부패한 그룹으로 공격했다. 이들은 성전회복과 메시아의 도래를 관련지었다. 마가는 예수 처형사건에서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무리들을 선동 했다고 말한다 (15:10-11).

에세네파는 당대 4000명으로 추정되며, 엄격한 공동체의 삶을 준수한 금욕주의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하얀 옷을 입고 종종 정결예전에서 몸을 씻었고,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를 했으며, 매일의 공동식사를 행했다. 이들은 군중들에게 거룩한 예언자로 존경받았다. 정치 지배자들도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주전 150년부터 주후 60년 사해 근처 유대광야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7년 발견된 사해사본에 의하면, 쿰란 공동체는 70년 로마전쟁 이전까지 유대의 종교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난다.
에세네파가 쿰란 공동체와 사해사본과 연결된다면, 이 공동체는 "의로움의 선생"이라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에세네파는 제사장 계급에 의해 주도 되었는 데, 헬라주의자들과 로마제국 그리고 사두개파를 증오했다. 그리고 당대 사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지배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을 비판했다.
이들은 성전정화와 수복을 기대했고,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자신들에만 적용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세계의 대재난을 통해 마지막이 오며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다 (Cohn -Sherbok, Judaism, 91).

예수운동과 여성의 자리

예수는 세례요한을 메시아 이전에 올 엘리야로 보고 위대한 예언자로 보았지만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가장 맨 끝으로 말한다.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토라의 일점 일획을 주장하는 입장은 샤마이 학파에 가깝다 (마태 5:18). 그리고 원수사랑은 힐렐의 입장을 넘어선다 (마태 5: 44).

대부분 예수의 활동은 토라를 둘러싼 바리새파와의 논쟁과 함께 예수는 성전정화로 인해 사두개파에 의해 처형되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여성의 역할은 당대 가부장적 문화에 비추어보면 혁명적이었다.

누가복음에서 여성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예수운동의 경제적인 영역을 책임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한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 (누가 8: 3).


헤롯 안티파스의 재산 관리인 구사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요한나는 부유한 사람이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였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하위계층의 여성이 있었지만, 반면에 요한나가 있었다.

천사가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여성들에게 알려준 것을 보면 예수 운동에서 여성 제자들의 역할이 두드려졌음을 보여준다 (누가 24: 10).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마가 15: 40- 41).


예수운동은 구원과 치유를 경험한 자들의 공동체였고 세례 요한의 추종자에서부터 세리출신 마태 (마태 9: 9-13), 젤롯당원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다. 위계질서나 신분의 차별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요한나와 같은 헤롯의 궁중에 거하는 부유한 요한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회에서 밀려나간 상실된 사람들 (massa perditionis)과 공적 죄인과 세리들의 삶에서 예수는 비유와 내러티브를 통해 아람어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예수의 민중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안에서 위로부터 출생을 경험한 새로운 존재들이었다.

과격주의 운동과 예수

40년도에 드다는 예언자로 선언하고 군중들에게 요단강을 건너 그를 따를 것을 촉구했다. 드다는 파두스 총독시절 추종자들에게 마른 발로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의 기적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공언했다. 로마병사들은 드다의 추종자들을 살해하고, 드다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인구조사를 할 때도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선동하다가 처형 당하고 추종자들이 흩어졌다 (행전 5:36).

요세푸스는 유다의 최후를 언급하지 않고 그로부터 열심당 운동이 번져 나갔다고 말한다. 이후 애굽의 거짓 예언자로 불리는 사람은 올리브 산으로 그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폭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사천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다 (행전 21:38).

요셉푸스는 이 사람에 대해 시카리 당원이라고 말하는 데, 시카리 들은 백성들을 광야로 나오라고 설득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의 표징을 보여줄 것으로 말했다. 펠릭스 재임기간 동안( 52년부터) 과격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는 데, 이들은 단도를 품고 군중들 속에서 적수를 찔러 죽였다. 애굽의 거짓 예언자는 삼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광야로부터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서 폭력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펠릭스 총독에 의해 진압 당했다 (E. 헨헨, <사도행전 (II)>, 313).

예수운동의 성격은 이러한 당대 저항 운동들 안에서 팔레스티나 유대교를 갱신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파악된다.이들의 성격은 목자없는 양같이 흩어져 고생하는 군중들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염려에서 잘 드러난다.

마태는 “유대인” 민중을 향한 예수의 관심을 마가의 불충분한 입장을 넘어서서 잘 표현한다 (마 9:36; 10: 6; 막 6:34). 이 지점에서 오클로스는 공적죄인과 세리를 넘어서서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것은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집단적 개념과 다원성, 하나님 나라의 경제적 정의 (일용 품삯 노동자, 마 20:1-16) 또는 지극히 적은 소자 (미 25: 45)에 연결된다.

심지어 마태의 예수는 마가와 누가와는 달리 오클로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의 가르침을 행하고 지키라고 한다 (마 23:1; 5:18). 누가는 여기에 사마리아인들과 회개한 자들과 오순절 성령임재를 통해 이방인들를 포함한다 (누가10: 25-37; 15:1-7; 행 1:8).


급진적 순회 설교자들

1946년부터 1956년 사이에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이후 역사적 예수연구는 2차 예루살렘 성전시기에 다양한 유대교적인 분파와 묵시문학적인 메시야 기대와 관련하여 보게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가 전개하는 고고학적 성서해석은 타이센과 같은 사회학적 성서해석과는 결이 좀 다르다. 타이센은 40년-65년 사이에 기록된 마태와 누가의 예수 로기온 (Q)을 기초로 순회하는 제자들의 예수운동에서 초대 기독교의 기원을 찾는다 (마 8: 20; 눅9:58).

순회 설교자들의 전통은 마태와 디다케에도 보존된다. 마가복음은 Q자료의 급진성에의해 밀려난다. 도마복음 역시 수난기사나 기적을 포함하지 못한 예수 로기아에 속하는 데, 50년대와 60년대에 구성되고, 야고보와 도마의 전통에 서 있다. 시리아의 순회 설교자의 사회적 배경이 된다 (Theissen, The New Testament, 40).

타이센의 접근은 예수 로기온을 그의 추종자들의 운동상황에서 찾는 사회사적인 방법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다. 사회사적 방법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처형이외에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역사적인 예수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제자들의 예수운동이 근거가 된다.

가장 오래된 예수전승에 속하는 예수의 어록들은 Q자료와 더불어 복음서가 편집되면서 초대교회의 산물이다. 십자가 처형을 로마시대의 정치적 사건으로 파악하고, 이 지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이후 초대 교회 공동체의 문서를 통해 가난한 자들의 희망으로 파악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축복과 가르침이 가장 오래된 예수전통의 어록으로 설정된다. 마태와 누가가 가난한 자들의 해방의 복음으로 부각되고 마가복음은 밀려난다 (Schottroff/Stegemann, Jesus von Nazareth Hoffnung der Armen, 10).

나는 Q문서를 중심으로 예수운동의 의미를 전개하는 사회사적 방법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성서접근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 그리고 묵시적 메시아를 증거하는 "예수문서들"과 비유에 주목한다. 이런 문학의 장르들은  헬라적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포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스라엘 이디엄들과 히브리적 성서인용과 재해석은 복음서의 순환론적인 구조에서 나타난다. 나사렛 예수가 없는 예수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적 성서해석에는 비유가 중요하다

고고학적 성서읽기는 사실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역사적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원류와 근거를 통해 사회 비판적인 방법을 계보학적으로 전개한다.

예수의 언어의 생활세계는 갈릴리 아람어였다. 갈릴리는 인종이 뒤썩여있는 지역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율법을 준수 했지만, 여전히 그리스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나사렛 예수는 유대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토라와 예언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었다.


복음서의 비유는 나사렛 예수의 본래적 자리를 해명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며, 초대 공동체의 헬라어 번역을 아람어로 재번역함으로써, 예수 자신의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복원 한다. 이것은 비유와 더불어 복음서의 구약인용안에 담겨져있는 아람어 성서의 차원을 부각 시킨다.

예를들면, 마가 4장 11절 이하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외인 들에게는 비유로 주어진다. 그 이유를 마가는 이사야 6장 10절에 대한 아람어 성서번역 “딜마” (“만일 하지 않으면”)와 용서 (히브리 성서의 치유가 아니라)에서 본다. 외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이해될 수 없지만,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 1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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