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 유대교와의 대화: 예수와 바울
창조가 선한 것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의 확인이며 구원사를 말한다. 야훼는 자연에서 아니라 계약에서 인간을 만나신다. 우리는 야훼를 성서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인 삶의 자리가 아니라, 성서 안에서 믿음의 증거들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한다.
더 나아가 구약의 예언과 약속은 신약성서에서 아직 성취되지않는 남겨진 것들이 존재한다. 구약의 약속들은 여전히 오늘날 중요 하며, 이스라엘은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Miskotte, When the Gods are Silent, 148, 154, 170).
랍비 유대교의 신학과의 대화는 중요하다. 유대인 성서신학자 데이비드 플루서는 초대 기독교와 2차 예루살렘 성전 시기의 유대교를 전문으로 연구했다. 그는 <예수, 1998>에서 나사렛 예수를 차딕 (유대교에서 의로운 분으로 호칭하는) 즉 진정한 유대인으로 간주한다. 에수는 바리새파 유대교의 수장인 힐렐과 쿰란 공동체의 에세네파 지도자 “의로움의 선생”과 거의 동시대 에 살았다.
나사렛 예수는 랍비적으로 교육되었으며, 에세네파와 바리새파의 주변부에 속했다. 물론 예수는 이 두 가지 유형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운동의 원수사랑은 러버럴 힐렐 학파나 에세네파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예수의 바리새파 비판은 에세네파의 비판에 비해 위험한 것도 아니며, 당대 5가지 유형의 바리새파들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바리새파들은 예수의 처형에 관여 하지 않았고 오히려 62년 그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하고 사두개파들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 했을 때 항의하기도 했다. 예수의 부활이후 예루살렘 공동체에 바리새파들이 속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운동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긍휼에 있으며,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은 두드러진다. 하나님과 화해(욥키푸르)는 이웃과의 화해를 의미하며,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가 정치적인 차원을 갖지만, 여전히 그를 젤롯당의 사회혁명과 분리한다. 물론 예수의 제자 가운데 젤롯당이 있었다 (행 1:13).
랍비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은 현재에 시작되지만,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계시 될 것이다. 로마의 압제의 멍예는 그때 하나님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묵시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때 우주적 파국이 일어나며 사탄은 분쇄된다고 보았다. 예수의 종말론은 단순히 실존주의적으로 파악될 수가 없다. 예수의 메시아 의식은 요한의 세례에서 하나님의 음성 (사랑하는 아들, 마가 1:11)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퀘다 (묶여짐) 즉 십자가의 길로 이어진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예수의 의식에서 인자개념은 묵시적 메시아의 형태로 드러나며 이것은 랍비 유대교에서도 인정된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당대 상인출신들로 헤롯왕가와 결탁한 사두개파의 막대한 성전수익에 중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은 성전파괴를 예고하며 갈릴리를 떠날 때, 예수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가 13: 35).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붙들려갔을 때 재판과정을 위한 산헤드린 모임은 없었고, 바리새파는 예수의 처형에 관여하지 않았다.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메시아 주장은 사두개파와 로마제국의 정치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하고 젤롯당 바라바를 놓아주도록 선동한 자들은 오클로스라기 보다는 대제사장과 그의 조력자들에 의해 군중의 의견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Marquardt, Das christliche Bekenntnis zu Jesus, dem Juden 1: 124-130).
나사렛 예수에 대한 유대적 해석은 바울의 이스라엘 신학을 검토하게 한다. 시내산의 토라의 계약과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폐기하지 않는다 (롬 11). 바울에게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폐기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다.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는 만물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다 (롬 9: 4-5).
마지막 표현에서 그리스도가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만유를 다스 리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 2판, 1922>에서 사용한 독일어 본문은 “이스라엘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로 표현된다.이러한 관계적 표현은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 (롬 1:25) 이다. 이것은 “영원히 찬양 받으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고후11: 31)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자녀라는 측면에서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사람들도 부르셨다 (롬 9:8, 24; 호 2:23). 구원은 만인구원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온다 (9: 2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표(목적, telos, 10: 4)이며,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가 되어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들이 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방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방인은 돌올리브 나무이며, 참 올리브나무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당한 것이다. 뿌리가 이방인 기독교인을 지탱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접붙일 수가 있다.
복음의 관점에서 이들은 이방인 기독교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원수” 가 되었지만 (롬 11: 28),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롬 11: 29)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사야의 예언 (59:20, 21; 27:9)에서 기록된 것 처럼,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실 때 이스라엘 (야곱)에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고 이들의 죄를 없을 때 이루어질 것이다 (롬 11: 27). 이것은 종말론의 가능성을 지적하며 에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기초한 바울의 칭의론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Barth, ibid., 438).
바울의 칭의론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종말론적 지평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부유함과 지식과 지혜의 신비 (롬11: 39)에 근거한다. 바울의 칭의론은 이스라엘을 거절 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며, 일체의 반유대주의적 기독교의 칭의론과는 다르다. 삼위일체는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신약성서의 고백과 종말론적 해석학에 속한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드러나는 시온의 구원자의 빛에서 (롬 11:16)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다.
하나님의 초월은 마지막 때 오시는 하나님의 빛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묵시적 메시야로 이해되고, 종말론적 삼위일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전능하신 (엘 샤다이) 주 (야훼-아도나이) 하나님(엘로힘)과 어린양” (계 21:22)은 하나님의 영광인 성령의 빛 가운데 거하신다.
신명은 주님 (퀴리오스; 히브리어 -아람어: 아도나이)으로 번역되며, 이름만이 하나님 (엘로 힘)이며, 이름을 통해 엘로힘이 규정되지, 그 역이 아니다. 이름(YHWH)은 존재(eimi)가 아니라 일어나시는 분 (hajah)이며 (‘ehjeh ‘ascher ‘ehjeh, 출 3:14), 사건으로 일어나신다 (Veerkamp, Die Welt Anders, 248).
이러한 이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아바 아버지로 계시되지만, 신과 인간의 존재 론적 동일성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화로 남용될 수가 없다. 랍비 유대교의 해석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름을 해명했다. “나는 나의 일에 따라 불려 진다. 내가 피조물의 세계를 심판할 때 엘로힘 (하나님-테오스)으로 불리며, 심판을 멈출 때 나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내가 세상을 향해 은혜를 베풀고 자비로울 때 야훼로 불린다.” 야훼는 그분의 행동을 통해 일어나시는 분 (hajah)이며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출 3:14; 이사야 9:6, 시편 91: 15) (Christianity in Jewish Terms, 55).
랍비 유대적 해석에서 오경은 토라와 네러티브 그리고 성결 제사코드로 특징된다. 오경은 바벨론 유폐와 예루살렘으로 귀환이라는 역사적인 틀에서 에스라와 느혜미아 시대에 사제들에 의해 야훼이스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출애굽과 출바벨론의 경험이 서로 융해되어있고, 네러 티브와 토라의 계약과 제사 그리고 절기는 이스라엘의 삶의 형식을 규정했다. 성전제의와 절기 (장막절, 유월절, 오순절 등)는 기원 후 586년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문법에 속한다. 주전 586년 이전 야훼이스트와 신명기 사가의 기록들은 바벨론의 유배의 경험을 담고 있으며, 민족의 생존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었다.
말씀은 유대인 나사렛 예수안에서 육신를 입으셨고,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 (요 1:14). 아버지 품 속에 계신 외아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오셨고 메시아 공동체를 세우셨다. 마지막 재림에서 이스라엘은 거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통해 구원에 포함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비밀에서 “이방 사람들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된다 (엡3: 6).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 (4:6).
야훼 하나님에대한 고백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으로부터 오며 오늘의 삶에서 성화로 이어지며 마지막 때 구원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기이해에 속하며, 레위기와 민수기는 창세기와 출애 굽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에 정점을 찍는데, 이것은 출바벨론의 삶에서 통전된다. 이러한 제사장적인 관점은 주후 70년 2차 예루살렘 멸망 후 여전히 랍비 유대교와 회당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 귀환: 정치적 배경과 개혁운동
이스라엘의 삶에서 성전과 성결은 이들의 삶에 중심에 놓여있고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는 지침이었다. 바벨론은 주전 539년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페르시야 왕 고레스(통치기간 550-530)에게 패망했다. 주전 6세기부터 4세기까지 페르시아의 통치는 종교관용정책을 시행했고 제국 안에 다른 종교의 자율성과 제의들을 허락했다. 고레스는 바벨론의 유폐에 있는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되돌려보내고 예루살렘 재건을 위한 예산을 국고에서 충당해 주었다 (에스라 1:2-3, 6: 3-7).
바벨론의 유폐기간 (587-538)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다리우스 1세 통치 6년 째 성전은 스룹바벨과 대세자장 여호수아의 주도로 515년도에 세워졌다 (스 6: 15).
유대의 왕가에 속하는 세스바살은 538년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고 예루살렘 성전조사와 느부갓네살이 탈취 해갔던 성전의 기명을 돌려보내는 일을 했다. 성전기명을 둘러매고 오는 포로귀환 공동체의 모습 을 이사야는 기술한다 (52: 11-12). 520년 스룹바벨은 유대 총독으로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느혜미아와함께 유대 백성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에스라 2: 2-70). 학개와 스가랴는 다리우스 1세 (522-486) 통치 초기에 활동을 했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성전재건을 독려하고, 여호와킨 왕의 손자 스룹 바벨을 유대의 왕으로 기름 부으고 새로운 기대를 기대 했다 (학개2:23, 스가랴 4: 8-9).
그러나 실패로 막을 내렸다. 다윗의 왕가는 여기서 끝장이 난다. 스룹바벨에게 공개적으로 메시아적 기능 (학개 2:20, 스가랴 3:8, 6:12)의 부여는 그가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위한 반란으로 볼 수도 있게 한다.
458년부터 430년 사이 에스라 (아론-사독계열의 제사장이자 페르시아 정부의 유대인 담당 서기관, 7: 14)와 느혜미아(유다의 총독)의해 사회 개혁이 시작되지만, 바벨론의 유폐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백성들은 협력을 하려고 했지만, 거절 당했다. 남아 있던 백성 (에스라 4:1-5), 암 하 아레츠는 다윗왕가를 지원했던 야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쿠데타를 통해 요시아왕 (왕하 21: 24)와 여호아하스 (왕하 23:30)를 왕으로 옹립했던 그룹이었다. 느부가네살은 예루살렘에 있던 60명의 왕의 친위대 (암 아 아레츠)를 포로로 잡았다. 이들의 지도자 이스마엘 (열하 25:25-6)은 느부가넷살의 군사 지휘관 그달리야를 죽이고, 추종자들은 애굽으로 투항했다. 이들 그룹은 이집트가 아니라 바벨론을 선호한 예레미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저항을 했고, 훗날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룹들과 갈등을 했다.
이들은 바벨론의 시위대장이 예루 살렘에 남아있게해서 포도원을 경작하고 농부가 되게 한 비천한 자들 (열하 25:12)과는 다르다. 이들이 비천한 출신들로 특별히 언급되고 예루살렘의 땅에 남아있었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열하 24:14), 이들은 신분상 비천한 자였지만 왕에 의해 모집되어 친위대로 훈련된 그룹으로 볼 수 있다.
포로기 이전 이스라엘의 하위계층의 사회구조를 볼 때 게르(ger)는 이방인 출신들이지만 법적으로 보호를 받았다. 레위기 25: 35절에서 땅을 소유하지못한 빈곤층들은 게르로 분류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들과 더불어 생활하라고 기록된다. 하위계층은 토라에 의해 개인들이나 정부조직을 통해 생존을 위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 심지어 이들은 노예와는 달리 할례도 강요당하지 않았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었고 (출 12:48), 심지어 노예들도 유월절 음식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Weber, Ancient Judaim, 33-34).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청교도적 야훼이스트들은 야훼의 법을 어겼고, 비천한 계층 의 사람들을 예루살렘 재건에서 배재했다. 이들의 저항은 오경에서 볼 때도 정당한 권리 투쟁에 속했다. 이러한 저항은 이후 유대와 사마리아의 증오감의 기원이되며, 사마리아 백성들은 그림심 산에 성전을 세웠다. 이들은 예루 살렘에서 말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로 남는다.
515년부터 444년 까지 알려진 이스라엘의 상황은 별로 없지만 말라기에서 성전제사에 대한 비판과 제사장들의 태만과 사회적 부정의와 백성들의 삶에서 마술이 횡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느헤미아가 아닥사스다 1세 (464-423) 기간에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고 (445) 예루 살렘 에서 목격한 사태에서 보기도 한다. 그는 성벽 보수공사를 52일 만에 마치고 (6:15),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계급/신분 갈등은 페르시아의 지지를 통해 특혜를 누리는 귀환한 유대인 들과 가난한 농민들 간의 채무관계와 경제적 차이로 나타난다 (느헤미아 5:1-13).
이러한 경제개혁은 아테네에서 59 4-3년에 시행된 솔론의 경제개혁과 비교될 수 있다. 솔론은 부채를 면제해주는 개혁을 통해 토지귀족들과 농민들 사이의 갈등과 임박한 위기를 해결하려고 했다. 모든 부채가 면제되고, 부채로 인해 노예가된 농부들은 사면되고 사람을 담보 를 돈을 빌리는 일은 금지되었다. 솔론의 개혁은 느헤미아의 개혁과 여러가지 점에서 유사점을 갖는다.
에스라-느혜미아 역사기술
역사적으로 느혜미아와 에스라 시대의 겹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느혜미아가 역사적으로 에스라에 앞선다. 스룹바벨이 대제사장 여소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떄 느헤미아가 포함되어있다 (에스라 2:2).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 7년에 귀향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면 (7:7-8), 458년이 된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2세로 본다면 398년이 될 것이다. 느헤미아는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귀국했고 445년부터 총독으로 12년 간 활동하다가 433년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느 5: 14).
이런한 역사적 불일치에서 느혜미아에 앞서 에스라를 놓는 성서의 역사적 순서를 오류로 볼 필요는 없다. 문헌 비평적 관점에서 에스라 -느혜미아의 개혁운동이 야훼이스트-사제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백성의 삶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서 편집자의 관심은 실증적인 역사편찬 보다는 토라를 근거로 한 사회개혁 운동이 어떻게 야훼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에 일치하는 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에스라의 모세의 율법책을 수문 앞 광장에서 회중 앞에서 읽어주고 통역을 하고 백성들이 내용을 잘 알아듣고 울었다.
모세의 토라로 예루살렘 재건을 시작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느 8장). 여기서 에스라와 느혜미야 총독 (445-432)은 동시대의 인물로 기술된다.
페르시아 지배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아람어 성서문서는 히브리어 문서를 대신했다. 에스라는 성전중심의 아론의 율법을 페르시아 민법에 일치 시키고, 성전기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모든 제사장들과 성전에 일하는 사람들은 세금혜택을 받도록 했다 (R.Coote and M. Coote, Power, Politics, and the Making of the Bible, 77).
에스라-느헤미아의 개혁운동의 틀에서 토라와 계약을 유대백성들의 삶에서 바로 세우고 성전 제사와 민족절기(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새해-로스 하사냐 그리고 욥키푸르)들이 회복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에서 랍비들은 종교와 법적 문제를 둘러싼 소송을 둘러싸고 판결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 사제계급은 페르시아 통치 아래서 성전 정부를 세우고 공공정책을 수행했다. 그것은 “오직 히브리 성서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Neudner, An Introduction to Judaism, 145). 이것은 이스라엘의 토라의 원리를 말한다.
'[기획연재]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7) (0) | 2023.03.18 |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3) (0) | 2023.03.10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2) (1) | 2023.03.09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5) (0) | 2023.03.01 |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4) (0) | 2023.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