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편집 비평과 동시대화
나의 사회학적 비평은 구약성서를 주석할 때 일차적으로 전승사와 신앙고백을 파악한다. 이것은 성서의 내적 역사에 속하며, 근대의 실증주의에 기초한 역사비평이 파악하기 어렵다. 역사 비평에서 유비의 원리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하지만, 그러나 유비는 히브리적 역사적 사유와 야훼 신앙과의 계약적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야훼는 플라톤의 신과 다르다. 선의 이데아가 플라톤의 신이다. 신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선의 의미이며, 신은 완벽한 자기 충족적이며 이외의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이 절대적 자기 충족의 존재라면, 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의 이데아 또는 이념의 현상에 참여한다 (metexis).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은 부동의 동자 (제일 원인)로서 자기충족적이며, 다른 존재의 봉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신의 활동은 순수하게 자기 자신안에 머물고 (actus purus) 오직 사유할 뿐이다. 신은 순수하게 사유하며, 자기의식으로서 홀로 충족한다. 인간은 지고의 선에 의존 하지만 최고의 존재는 인간을 필요료 하지 않고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에피큐로스).
역사비평이 이러한 그리스적 개념의 신을 일반화하고, 역사초월적인 신으로부터 분리하고, 실증주의적으로 파악한다면, 이것은 히브리적 개념의 야훼의 역사적 활동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예언자들의 경험과 활동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계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에 열정 적으로 참여하고 관여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책임성과 증언을 요구한다. 이것은 전승을 통해 그리고 계약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어진다 (Heschel, The Prophets, 14-15). 역사비평의 주요원리는 유비적 상상력이며 모든 역사가 다 비슷한 것으로 시작하고 역사를 현재주의 관점에서 일반화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다른 고대근동의 역사와 종교와는 다름이 존재한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대근동의 문화 교류 가운데서 전개 되지만, 야훼의 구원활동에 대한 이들의 역사적 경험과 계약의 내적역사 그리고 전승과 신앙고백은 역사 비평의 유비론의 영역으로 일반화 되기가 어렵다.
이 지점에서 나는 유비개념을 비슷하지만 다름 가운데 있는 원리로 파악하고, 종교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다르게 나타나는 사회 정치적 구성과 문화와 삶의 윤리적 태도 등을 사회학적 유형으로 고려한다. 에른스트 트릴취는 이전의 역사비평과는 달리, 그의 <교회들의 사회적 가르침, 1912>에서 다양한 교회의 사회적 구성들에 주목하고, 역사적 다른 상황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가르침과 윤리적 태도를 비판-유비-상호 연관성의 원리를 통해 파악했다.
여기서 그의 유비론은 다른 역사적 콘텍스트와 사회적 조건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고 다른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현재 주의적 비판을 통해 일반화 하지 않았다. 모든 역사적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아프리오리는 하나님의 신비 내지 미래를 향한 영적갈망이며, 유대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인격적인 것으로 내재적 원류로서 이후의 역사에서 상대화가 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트뢸취를 종교 다원 주의나 역사 상대주의가 아니라 역사 사회학의 방법을 베버와 더불어 열어놓은 사회학적 신학자로 파악한다. 트뢸취의 방법론은 종교가 발전하는 역사의 다양한 배경과 사회적 조건에서 유사함, 다름 그리고 파열을 통해 사회 계층론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파라다임을 보게 해준다 (정승훈, <공공신학과 신체정치학>, 119).
역사 사회학적 관점은 후설의 생활세계론과 관련될 수 있으며, 언어놀이 (비트겐슈타인)와 사회적 삶의 형식을 통해 문화와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두터운 기술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는 공적으로 사용될 때 의미가 있으며 언어가 사용되는 삶의 자리나 맥락에서 드러나는 문법이나 규칙들은 인간의 상호주관적 태도를 윤리적으로 형성한다.
더 나아가 성서의 다양한 삶의 자리들로부터 형성되는 성서의 언어와 이념들 사이에 유사점과 공동성이 추론되고 의미의 연결망으로 서로 이어진다. 삶의 문화적 실천형식과 생활세계는 성서의 삶의 자리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언어의 공공성을 통해 해석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절차를 통해 성서를 해석할 때 종교이념과 물질 그리고 권력관계의 선택적 친화력이 검토되고, 행위자들의 역할의 중요성과 담론구성을 분석한다.
출애굽 사건에서 시내산 토라계약은 신명기에서 신앙고백의 문서에 통전 (26: 5-9)이 되고, 이후의 역사에서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상기되고 반복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출애굽의 역사성을 신뢰하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믿음을 역사적으로 만들고, 이들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화가 된다. 예를들면 신명기에서 독자는 당대 역사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에서 현실화시켜 나간다. 과거의 세대와 이후의 세대가 구분되지만 여전히 출애굽의 “너희들” 은 가나안 정착민의 “너희들” (수 1:10-18)이며, 또한 반란하는 “너희 들”이며 (신1:26), 또는 신실한 “너희들”이다 (신 4:4). 토라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에 “너희들”로 참여한다. 이들은 바벨론 유배를 경험한 “너희들”일 수가 있고 예루살렘 으로 회복된 “너희들”일 수도 있다 (30:1, 3,9). 비록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새로운 세대에게 말을 하지만, “너희들”은 세대를 거쳐 모세와 더불어있고 (신 5:3), 이러한 내러티브를 자신의 것 으로 만든다 (Fretheim, The Pentateuch, 43).
텍스트의 생활세계
성서의 고백과 동시대적인 차원은 토라의 의미를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에서 찾고 우리 시대를 위해 말하는 것으로 경청한다. 편집의 틀에서 개별적인 본문들은 서로 연관되며 서로 다른 역사와 시대적 상황에서 토라의 스펙트럼을 확대해간다. 이러한 것은 새로운 문헌이나 수사학적 표현에 대한 비판 또는 구조주의적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Gunn and Fewell, Narrative in the Hebrew Bible).
텍스트의 내적세계가 외부의 역사적 배경에 비해 우위권을 가지며, 그것은 유기적으로 통합된 총체로 간주된다. 독자는 성서의 내적세계에 관여하면서 의미를 산출한다. 이것은 역사 적으로 전승되고 편집된 텍스트에 대한 분석 (통사적인 관심) 보다는 텍스트의 현재적인 구성 (공시적 관심)에 주목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텍스트의 생활세계는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접근을 이분화 필요가 없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접합될 수 있고, 하나님은 텍스트의 내적세계와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역사와 사회를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의미화과정이 나타아며 독자주체는 상호 텍스트안에서 형성되어간다.
이것은 교차 내지 상호 텍스트의 차원을 의미하며, 언어계보학(루소)은 야생의 문화에서 예술적인 음성언어(제스처, 시와 음악)의 중요성을 정치 사회적인 영역에서 불평등 기원과 연결 짖는다. 또한 사회계약론에서 야생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도덕적 감정을 시민사회 안에서 밀려나간 예속된 자들의 권리와 인정그리고 경제의 분배정의에서 구체화 시켰다.
루소의 사회구조론적 실천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넘어서서 야생의 문화와 문명의 교차되는 상호텍스트를 생활세계로 제시한다. 이러한 언어의 계보학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는 귀족주의 도덕과는 다르다. 루소의 인식론적 접근은 노예도덕을 위해 텍스트의 생활세계에서 역사와 구조의 단절이 아니라 접합시킨다.
루소의 언어 계보학은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 텍스트 이론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것은 텍스트가 독자주체를 형성해나가는 차원과 사회실천 말한다. 밀려나간 자들의 (여성적)기호계는 가부장 지배의 상징계 (기의)에 대해 비판과 매개와 공생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관여한다.
그러나 나는 루소를 거츠의 두터운 기술 현상학에 연결하고 언어게임과 생활세계론에서 야생적 사고의 풍부함을 성서해석에서 구현한다. 이것은 근원음성의 활동성과 생활세계론을 거절하는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의 기호학과는 다르다.
물론 크리스테바는 전-오이디푸스 단계인 기호계 (어머니의 신체에 관련된 기표)가 남성지배의 상징계(기의)와 교차되는 것을 보고, 이에 저항하는 기호계의 혐오스러운 비천한 자들 (abjection)의 공포의 권력을 말한다. 이것은 바같세계에 속하며 상징계를 교란하는 무질서 (코라)의 원초적 힘이지만, 데리다처럼 해체나 니체처럼 모든 가치들의 전도를 강조하지 않는다(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그러나 두터운 가술의 현상학에서 자연의 텍스트는 루소와 스피노자에게서 비판적 민주주의 인정정치로 연결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수용하지 않는다. 바같세계는 삶의 세계의 신비에 속한다. 후기 자본주의 안에서 성의 정치는 바같세계의 형이상학과는 달리 권력관계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힌두교의 카스트 처럼 파리미드 구조와 계층은 젠더를 넘어서서 교육과 신분의 역할이 중요하다. 후기자본주의 안에서 비인격적인 관료지배가 담론의 정당성과 위기를 심화시킨다.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은 사회계층에 원초적 기호로 기입 되지만, 또한 하위계급(abjected)이나 호모 사케르(아감벤)는 신체정치학에 의해 제어 당한다.
물론 텍스트는 관계론의 그물망에 서 있고, 독자주체는 변형되며 세계안에서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나간다. 하위계급은 이미 성서에서 하나님의 게르, 암 하 아레츠 또는 누가의 가난한 나사로 와 바울에게서 아게네스 (고전 1:28)로 기입되어있다. 화해와 인정의 복음 안에서 무질서나 비인격적인 실세력과의 영적투쟁은 삶의 세계의 신비를 위해 여전 중요하다.
성서를 완결된 텍스트로 접근하는 문학비평은 전승사를 기초로한 편집비평과 분리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적 삶의 자리, 특히 출바벨론의 역사적 경험에서 산출되는 야훼이스트 신학과 관련되어있다. 문학의 구조와 역사적 경험을 결합하는 접근은 경전 비평을 비판적으로 보충한다. 이것은 사회 문헌비평에서 중요하다.
E문서가 J문서로 통합되고 편집되는 과정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722), 남왕국의 야훼이스트들이 E문서를 보충했다 (722- 60 9). J 문서의 야훼주의 정치적 성격은 E문서의 종교 적이며 윤리적인 측면과 융합되었다. 사제문서들(P)은 후기 포로기나 초기 예루살렘 귀환시기 (550-450)에 기록 되었다. 사제문서의 기자는 JE문서를 야훼주의 관점에서 통합했다 (Gottwald, The Hebrew
Bible, 22-24, 140).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며 전승의 과정과 편집을 통해 신앙고백화가 되며, 신학적인 의미 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의미는 텍스트의 관계 안에서 지평을 확대하고, 역사적 고백과 동시대성은 텍스트의 시스템과 사회구조 안에서 전개된다. 사회학적 해석은 편집비평을 기초로 관계의 총체로서 텍스트의 생활세계를 고려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순환적으로 관련되는 성서의 담론과 신앙고백의 의미지평 은 동시대화를 위해 검토한다.
이것은 밀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에 관심하는 사실주의적 해석일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해석에서 이데올로기 외삽법이나 현재주의에 기초한 비판에서 거리감을 취한다. 이것은 성서를 둘러싼 외부적 사회 경제사나 다양한 정치 종교 문화적 삶의 배경을 인류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두터운 기술을 시도한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고대근동에서 산출되는 성서외적 자료들이나 비문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앗시리아 왕들의 기록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조공을 받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정확히 하며 성서의 진술에 부합한다. 바벨론의 연대기록에서 느부가넷살의 통치기간(604-561)의 유배자 명단 중에 유다의 여호와긴 왕이 언급된다. 성서의 역사는 토라의 관점에서 기록된 신학적 성격을 갖지만, 비역사적으로 보이는 자료들의 언어(사가, 설화, 시적인 구전 등)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증거한다. 사가나 백성들의 민담은 비신화화나 비역사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언어의 다양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 즉 진리내용을 증거하는 수단이 된다.
역사사회학적 문헌비평은 비신화화가 아니라 (불트만), 살아계신 야훼의 구원활동과 말씀에 대한 개인과 믿음의 공동체의 증언을 사회 비판적인 자리에서 검토하고, 지금 여기서 시대 적인 문제와의 유기적 연관성에서 사실적으로 동시대화가 된다. “역사비평은 보다 더 비판적 이라야한다” (칼 바르트).
창조기사는 저항과 해방을 담는다
앞서본 것 처럼 야훼이스트 신앙고백은 사제의 문서와 더불어 히브리 성서의 기본틀을 형성하며 야훼는 종교제의와 윤리적인 실천의 스펙트럼에 서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치적 사회적 경험에 관련되어있다. 성서가 증언하는 야훼 (새로운 이름, 출 3:13)는 스스로의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내가 장차 있을 곳에 있을 것이다—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이름으로 계시하신다. 야훼의 이름은 앞서가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다 (출 3:19). 모든 술어들을 넘어서 있는 주체로서 야훼는 인간의 창조주 (창 2: 7)가 되시며, 이스라엘에게 말씀 하시고 계약을 맺으신 분이다. 계약이 창조를 해석한다.
창조의 사제문서(창 1:1-2.4)는 야훼이스트 기사 (2:4-25)와 결합 되어있고, 창조는 야훼의 구원의 행동의 시작 또는 전역사를 가르키지만 사제 문서에서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담고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땅은 완전한 무질서 (혼돈과 공허—Tohuva-vohu)와 어둠이 심연의 표면에 뒤덮여 있었다 (창 1:1-2:4 a).
혼돈과 공허 그리고 깊은(테훔)은 바벨론의 마르둑과 티아마트 신의 세력이며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바벨론에서 경험한 정신적 혼란과 충격 그리고 무질서를 반영한다 (사 42:16). 아것은 크르스테바 말하는 기호계의 무질서의 세력 (코라)와는 다르다. 오하려 이러한 공포의 권력은 바벨론의 정치지배를대변하는 신화론적 표출일 수가 있다.
히브리적 창조와 계약의 사유는 그리스적 무질서의 사유(코라)와는 다르다. 야훼의 창조 (사 40:26-28, 45:18)는 새 창조 (65:17)와 관련되며, 제2이사야는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였다. 창세기에서 말씀에 의한 창조는 바벨론으로부터 그리고 바벨론 안에서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의 빛을 비추어 준다 (Marquardt, Eia, warn wir da, 308, 316-7). 창조는 야훼의 구원과 해방을 증거하며, 계약은 살아계신 야훼의 말씀을 창조의 세계로 펼쳐나간다. 생명의 충만함이 해방의 말씀을 통해 창조와 계약을 화해의 복음으로 이어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근원음성(원초기호)이 바벨론의 지배체제(상징계)를 해체하는 구원행위를 말한다. 태초에 해방의 말씀행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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